1주차
동서양 시의 전통과 흐름
3. 시와 시인
지금까지 동양의 시학과 서양의 시학을 살폈습니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시대에 따라 입장에 따라 시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 지식인들은 자신의 수양과 출세, 교유를 위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읽고 시를 지었습니다. 시 창작은 당시 지식인을 규정하는 중요한 능력과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시문을 읽고 외우고 썼습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를 등용해 왔기 때문이지요.
과거시험 준비 중에 꼭 봤던 책 가운데 하나가 『고문진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송나라 말기의 황견이 전국시대 말기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시문들을 엮은 것입니다. 주로 추운 겨울에는 『논어』 『맹자』 등 경서들을 읽고,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고 청량한 마음을 위해 『고문진보』를 읽었다고 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기본 교과서인 『고문진보』는 유교적 색채와 문장의 뿌리를 가르쳐 주는 교과서였습니다. 그 책의 첫 시는 송나라 황제 진종(재위 기간, 서기 998~1022)이 지었다는 「권학문」입니다.
집을 부유하게 하려고 좋은 밭을 사려 하지 말라
책 속에 본래부터 천석의 곡식이 있다.
편히 기거하려고 높은 집을 지으려 하지 말라
책 속에 본래부터 황금으로 된 집이 있다.
문 밖에 나설 때 따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 수레와 말이 딸기처럼 많다.
장가가려고 하는데 좋은 중매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는 얼굴이 옥같이 예쁜 여인이 있다.
남아가 평소의 뜻을 펴고자 한다면
육경을 부지런히 창 앞에서 읽어야 한다
입신출세를 하려고 뜻을 품었다면 『시경』등 경서를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합격하면 신분상승은 물론 저절로 부유해지며 호화로운 저택을 갖고 아름다운 여인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분상승을 위해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서 읽기에 매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인격의 수양보다 관료가 되기 위한 과거공부에 치중하다 보니 과거시험에 대한 비판도 많았습니다. 정약용은 이러한 공부를 ‘이단공부’라고 하였습니다.⁹⁾ 인격수양이 공부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당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재위 627~649)은 과거실시로 인해 인재들이 모두 백발이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지만, 이러한 전통으로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 속에는 문장, 즉 시에 대한 권위가 상당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장을 잘해야 벼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법률 중심의 각종 고시제도로 바뀌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슬람 등 세계 다른 민족들도 시의 전통과 권위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9.11 테러범으로 지목했던 빈라덴의 경우도 시를 외우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버지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써서 발표를 하거나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발표하는 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시는 감정의 표현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거나, 사물이나 사건을 경험할 때 마음이 흔들려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의 마음에서 일어난 서정적 충동을 표현하는 것이 시입니다. 『시경』 「대서」에 시가는 성정을 읊조리는 것(吟詠性情)이라고 하였고,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시는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다.”(詩者 心之發)라고 하였으며, 남공철은 『금능집』에서 “시는 정에 감응하여 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詩者 感於情而刑於聲者也)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강렬한 감정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하여 시각, 청각, 색채감각 등 여러 감각에 호소하는 표현전략을 구사합니다. 정약용은 아름다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바탕을 바르게 하고, 실천과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인생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고, 견문을 넓히고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들어둘 만한 말입니다.
시인의 책무는 대상과 상황, 사건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비유와 상징 등의 언어를 풍부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셀리는 시가 만물을 사랑스럽게 변용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아름다운 것의 아름다움을 드높이고, 가장 추한 것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김현은 문장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이끈다고 하였고, 김병익은 문장의 아름다움이 내용과 주제를 풍요롭게 만들어 시를 다시 보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시는 운율의 창조이다.
정서에 영향을 주는 율동(리듬 · 운율적 규칙성)은 시의 미적 조건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의 아름다움은 운율에 의해서 살아납니다. 운율은 음악적 효과를 내어 정서적 환기를 실현합니다. 이러한 시는 암송이나 낭송에도 좋습니다. 아래 시 구절들을 소리 내어 읽거나 속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살어리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 부분)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부분)
위 시를 읽었을 때 어떤 율동이 살아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시에서는 언어의 율동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운율이 있어야 좋은 시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율동은 서술형 어미나 어휘의 반복, 정형적인 자수율에서 생성됩니다.
언어의 음성적 효과는 심리적 충동을 강하게 유도하여 마음을 움직입니다. 율동으로 음악성이 살아나는 좋은 시는 낭송이나 암송을 하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생체의 리듬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공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산문시라고 해서 율동이 없는 것이 아니며, 운율이 있다고 반드시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의 주문이나 기도문 같은 것은 운율이 있지만,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시는 표현의 응축이다.
응축의 다른 말은 함축입니다. 함축 역시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징이지요. 그래서 시는 짧은 형식에 많은 힘을 축적시키는 문학 양식입니다. 시는 짧을 때 사상과 표현의 응축성이 두드러집니다. 물론 모든 시가 짧은 것만은 아닙니다. 길이가 긴 장시나 서사시 등도 있습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좋은 시들은 짧아서 한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짧아야 암송도 가능할 것입니다. 서사시나 장시라는 예외가 있지만, 대체로 대중들이 암송하기에 알맞은 짧은 길이의 문예 형식이 시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김소월의 「금잔디」 9행, 김소월 「진달래꽃」 12행,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10행,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13행, 김춘수 「꽃」은 15행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14행, 박목월의 「청노루」는 15 행,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16 행, 김수영의 「풀」은 18행입니다. 물론 정지용의 「향수」는 반복구를 제외하고 21행,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32행이나 됩니다.
조선의 홍만종은 시란 뜻이 말 밖에 있고 함축을 시적 예술의 생명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춘수는 시가 관념, 정서, 욕망 등을 함축성 있게, 음영이 짙게, 미묘하게 실감을 가지도록 전달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넷째, 시는 의도의 전달이다.
언어를 떠나서는 시가 안 됩니다. 언어는 전달을 목적으로 합니다. 시는 함축된 시어와 문장 속에 깊은 뜻과 내용을 담아 전달하는 문예양식입니다. 이미 『서경』에서 시는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는 단순한 내용이 아닌 의도를 말한다는 것이지요.
고려의 이제현은 시는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는 지향의 발현이라 하였고, 정약용은 사상의 표현이라고 하였으며, 시드니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라고 하였습니다. 네루다는 1929년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는 “인생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예언적”으로 만들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¹⁰⁾
한유는 문학은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시는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정서의 전달입니다. 감정 언어를 통해 인간의 경험을 정서화하여 전달하는 양식이라는 것이지요. 신경림 시인은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시라는 것이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대화이므로 △표현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하며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아야 하며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절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¹¹⁾
의도 전달을 함에 있어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경우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어를 시어로 채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상적인 내용은 구체적인 사물과 사건을 통해 시로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구성도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야 합니다. 시의 궁극적 목적은 기교의 표현이 아니라 의도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시는 개성의 발현이다.
시는 창작자인 시인이 자기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정서와 개성이 없는 시는 재미가 없습니다.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폭넓은 체험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음악을 들었을 때 새로운 멜로디에 혹하듯이 시인의 발성이 새로워야 하거나 그 사람만의 특징적 발성이 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승원은 시적 성취가 흥미롭게 느껴지려면 소재로 삼은 대상이 색다르거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새롭거나,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 신선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¹²⁾ 고려의 이규보는 자신의 시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시 짓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답기 힘들다
뜻이 함축되어 깊고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순전해진다
뜻만 드러나고 말이 원활하지 못하면
깔깔해서 뜻이 잡히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끝으로 돌릴 것은
다듬고 아름답게 꾸밈이다
아름다움을 어찌 나쁘다고 말할까
이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꽃을 따고 알맹이를 버림은
시의 참뜻을 잃음이다
지금껏 많은 시인들이
시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부질없이 울긋불긋 꾸미며
한때의 취미만 찾고 있구나
시의 내용은 진리에서 나오거늘
덤빈다고 해서 찾지 못하리
찾기 어렵다고 지레짐작하고
저마다 화려함만 일삼는다
이렇게 사람들을 눈속임하여
빈곤한 내용을 가리려고 하니
이런 버릇이 이미 자리를 잡아
시 정신은 땅에 떨어졌다
걸출한 시인이 다시 나지 않으니
뉘와 더불어 진위를 가려내랴
내 무너진 터를 쌓으려고 하나
흙 한 삼태기도 돕는 이 없다
시경 삼백 편을 외운다 한들
세상을 깨우치는 데 무슨 보탬이 있으랴
제 길을 걸어감이 천만번 옳다
혼자 부르는 노래를 사람들은 아마 웃으리라
- 이규보, 「시에 대하여」전문
이규보 자신의 시론입니다. 시는 개성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제 길을 걸어감이 천만번 옳다”고 한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시인은 “각자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자신의 재능을 연마”(『문심조룡』)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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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려 의종 때 사람으로 가전체 소설 『국순전』 『공방전』의 작가 임춘은 황보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들어 선비들을 선발하는 방법이 음조와 운율에 치우치기 때문에 가끔 하찮은 자들이 일이 등에 뽑히고 박학한 선비들은 대부분 배척당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며 원통히 여긴다. 나는 이런 폐단이 이미 오래되어 하루아침에 고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최행귀 외,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보리, 2006, 24쪽)
10) 애덤 펜스타인, 김형균 외 공역, 『빠블로 네루다』, 생각의 나무, 2005.
11) 신경림,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시선》, 2007 겨울호, 189~203쪽 참조
12) 이승원, 「황홀하고 서늘한 삶의 춤」, 《불교문예》, 2007 봄호, 75쪽 참조.
2024. 2. 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