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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생
양 승 본
1956년 3월에 우리 반에서 유달국민학교를 졸업한 해방둥이는 딱 11명이었다. 1학년부터 함께 입학한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다가 다른 반이 되었다가 하여 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더구나 해방둥이가 아닌 한 두 명은 나이가 많아 장가를 간 친구도 있었을 정도로 동급생들의 나이 차이가 둘쑥날쑥이었기 때문에 동료 의식이 있는 친구도 있었지만, 전혀 엉뚱한 친구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졸업식이 끝나고 담임을 맡은 김창석 은사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몰려갔는데 은사님이 입을 열었다.
“오늘 졸업한 어린이 중에 1945년생은 11명인데 해방을 해마다 기념할 겸 해방둥이 같은 모임이 가치가 있을 것 같구나!”
내가 이미 교문 쪽으로 간 친구들까지 불러 즉석에서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이 1945년생으로만 이루어진 해방둥이 회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 흩어져 살면서도 중1 때부터 모임을 하기 시작한 것이 11명 그대로였다.
동창회보다 더 돈독한 이 모임은 해마다 8월 15일에 모임을 가져왔다. 동창회에 가면 “지난번에 누가 죽었데, 누가 죽었데!” 하는 말들이 늘 있었는데 우리 모임은 모두 77세로 건강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담임이셨던 은사님을 모셨는데 벌써 10여 년 동안 뵙지 못해서 이번에는 특별하게 모시기로 하였다. 해방둥이 회는 11명이 모두 해마다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초대를 하는 형식으로 모임을 했다.
일체의 회비는 없고 초대를 한 친구가 모든 경비를 알아서 처리하는 형식이었다. 경제적으로 모두가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 재미가 있는 것은 11명이 모두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한때 대학 총장직에 있기도 했으나 교육행정직이 싫어, 주로 K대학 교수로 재직을 하다가 퇴임을 했고, 수원에서 이만종은 현재 중소기업 사장으로, 서울에서 정진석은 검사를 거쳐 국회의원을 한 후에 현재는 변호사로, 서울에서 윤대수는 지방경찰청장으로 퇴직을 하고, 부산에서 경인석은 현재 큰 식당을 운영하며, 목포에서 나진우는 현재 건축설계 사무소를 경영하며, 인천에서 천우열은 현재 세무사로, 강릉에서 방효철은 농장경영을 하며, 청주에서 송태섭은 해운업을 하며, 제주에서 김원대는 해산물 도매업을 하며, 목포에서 고광남은 종합병원 원장으로 각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형제처럼 지내며 살고 있고, 주로 11명이 모이지만 격년제로 종종 부부 모임도 하고 있다. 그런데 부부 모임에는 22명이 모두 모이는데 항상 목포항구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는 경인석이초대 하는 형식으로 모이게 되었다.
경비 관계 등 주관은 인석이가 하지만 같은 목포에 사는 김원대가 해산물을 푸짐하게 선물을 하고, 고광남은 의료기구나 건강식품을 역시 푸짐하게 선물을 했다.
명색이 내가 회장인데 친구들은 모임 때마다 일단 나에게 협의를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특히 2022년 8월 15일의 모임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했다. 오랜만에 담임인 김창석 은사님을 모셨기 때문이었다. 워낙 건강관리를 잘해서 힘이 넘쳤다.
유달초등학교는 1989년 일본인 목포거류민단 목포심상학교로 개교를 했는데 몇 번의 변천 과정을 거쳐 1945년 12월 1일 한국인이 다니는 목포 유달국민학교로 개교를 했고, 다시 1996년 목포유달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당시 김창석 은사님은 18세의 나이로 부임을 해서 담임을 했기 때문에 제자들과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였다.
그날 경인석은 3층에 자리를 마련하고 자신이 앞장을 서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7∼8명이 와 있을 때 담임을 하셨던 은사님이 들어오자 인석은 앞으로 나가며
“야! 너 반갑다.”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맞잡았는데 그게 실수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서울의 이만종으로 착각을 한 것이었다. 우리가 은사님을 10여 년 만에 모처럼 모셨기 때문에 그 원인도 있었지만,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은사님이었고 더구나 만종이와 얼굴이 비슷한 데가 있었던 것도 촌극을 빚어낸 원인이기도 했다. 순간 모두 황망했고 내가 재빨리
“야! 만종이로 착각했구나, 우리 은사님이야.”
내 말에 인석은 무릎을 꿇고
“은사님! 잘못했습니다.”
말했다. 그러자 은사님은
“참으로 행복하네. 나의 건강이 젊음으로 증명된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가?”
모두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도 저희가 자주 모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일어난 일입니다. 앞으로는 해마다 모시겠습니다.”
모두 ‘좋아! 아주 좋아!’라고 박수를 쳤다.
우리는 목포항구가 보이는 바닷가 인석의 식당에서 모임을 시작하였다.
식사를 하고 술도 곁들이는 모임의 자리는 웃음꽃이 피었다. 제자들은 모두 은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약주를 따라 올렸다. 은사님은 조금씩 술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유달초등학교 현관에 있는 호랑이의 기세처럼 이 세상을 잘 살아온 제자들이 자랑스럽네. 그래서 나는 행복하네. 흔히 유행하는 말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니까, 우리 앞으로 더욱 건강하게 살아가세나. ”
그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대학 총장이 되었을 때 나는 일선 초등학교 교장이었는데, 그때 교장연수 때 특강을 하러 와서 자네가 내 앞에 와서 허리를 90゚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옆의 동료 교장들이 무척 부러워했다네. 좋은 제자를 두었다고.”
“은사님이 계셨기에 제가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 모두 은사님 덕입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네가 총장 때 했던 취임사가 전국에서 한때 회자되었던 것을 말하려는 것이네.”
‘총장 배민수 인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취임사였는데 그래서 유명했다네. 그런데 나중에 퇴임사도 다시 회자되었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주변에서 자네는 전국대학 총장 모임에서 대표를 맡는 등 지도력이 있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두 정치를 할 것이라는 말들이 있었는데, 자네는 총장직에서 퇴임 후 바로 대학으로 돌아가 교수로 강의를 했었지.”
“총장은 교육행정이기에 맡았지만, 정치는 힘든 곳이라 피한 것입니다. 정치적 능력은 부족하거든요.”
“자, 우리 전국적으로 한 잔씩! 은사님과 우리의 모임을 위하여!”
내 건배사에 모두 한 잔씩 마시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가 일어섰을 때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가 은은하게 들렸다.
일행은 식당의 미니버스에 올라 유달산 노적봉 주차장으로 향했다. 운전을 한 사람은 식당의 전무였는데 50대의 여자였다. 인석이가 유달초등학교 후배 중에서 채용을 했다고 했다. 친절하고 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고운 여자였다. 그녀는 가면서 목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마치 목포의 문화해설가처럼 느껴졌다.
수십 번을 오르내리던 유달산이지만 1945년생들인 친구들과 은사님을 모시고 오르니 모든 것이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주차 후에 노적봉을 보았다. 거석(巨石)으로 웅장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에 볏짚을 덮어 산더미같이 쌓인 군량미로 위장하여 왜놈들의 간장(肝腸)을 오그라들게 했다는 역사가 우리에게 자긍심을 주었다.
조금 움직여 이순신 동상을 바라보았다.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진영을 옮긴 후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고하도를 바라보았던 자리에 동상을 세운 것인데 신기한 것은 동상이 옆으로 약 0.5도 기울어져 있었다.
김원대가 입을 열었다.
“은사님! 동상이 옆으로 약 0.5도로 기울어져 있는데 목포에 살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아, 그 이유가 있다네. 장군은 사후에도 일본을 살피고 그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물론, 일본의 기운을 약하게 하도록 하는 한국 사람들의 기원의 상징적인 뜻이라네.”
“동상에도 깊은 뜻이 있었네요.”
“그렇다네.”
모두가 그 뜻을 알고 동상을 세운 이들의 나라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동상에서 본 큰 바위 얼굴은 마치 이순신 장군의 얼굴처럼 위용이 있었고 일본을 향하여 ‘조선을 함부로 대하면 큰 코를 닥칠 것이다.’라는 경고의 모습이 느껴졌다.
서로가 세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이난영의 노래비로 갔다. 이난영의 목소리로 ‘목포는 항구다’가 흐르고 있었다.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에서 없어진 삼학도에 대한 낭만의 기억이 눈 앞을 가리는 듯했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란 노랫말 앞에서는 내가 유달초등학교 시절 1945년생들과 잔디밭에서 뒹굴던 생각이 떠올랐다.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에서는 겨울에는 유달초등학교 뒷산 쪽으로 올라가 동백꽃 숲에서 돌아다니던 개구쟁이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의 노랫말에서는 목포 시내 초등학교 축구대회와 고등학교 밴드부 학생의 시가행진, 목포역에서 멀리서 오는 친척들을 기다리다가 함께 집으로 오던 일, 부둣가에서 팥죽을 팔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의 노랫말이 나오자 내가 수원에서 늘 고향이 있는 남쪽 하늘 목포 쪽을 바라보면서 옛 가요를 들으면서 이난영과 목포 항구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어 시간을 보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오르며 추억 속에서는 즐겁고 행복했던 일도, 반대로 지긋지긋한 고생이나 배고픔도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면서 대학루(待鶴樓)로 올랐다. 대학루에서 목포 시내를 바라보니 항구를 중심으로 많은 선박과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목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야!’라고 한마디씩 했다. 오포대를 지나 은사님과 1945년 해방둥이 친구들은 연리지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리지 앞에는 설명문을 넣은 입갑판이 있었다. 연리지 사진과 함께 위쪽에는 약간 작은 초록과 흰색이 섞인 필체로 ‘이곳에서 사랑의 소원을 빌어보세요’라는 글 아래 ‘사랑의 연리지’란 노란색의 글씨가 주제어(主題語)로 쓰여 있었으며, 그 아래 파랑 글씨로 ‘연리지(連理枝)란?’글씨에 이어 그 아래쪽으로 흰색 글씨로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짙은 부부애를 비유하는 말’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제일 밑에는 하얀 색깔의 글씨로 ‘목포시’라고 쓰여 있었다.
젊은 시절처럼 애정에 대한 마음들이 약해졌는지 모두 한참을 바라보다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젊은 날에는 연인이나 부부 등과 관련된 모습이나 단어에서 사랑이니, 낭만이니 떠들던 친구들이 벌써 몸은 물론 마음마저 노쇠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연리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왠지 서글퍼졌다. 걸으면서 만종이가 한마디 했다.
“젊었을 때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낭만을 찾고 친구나 이성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며 목로주점에 앉아 소월이나 윤동주를 이야기하거나 이광수, 한용운, 톨스토이, 헤밍웨이를 이야기했고 감자, 배따라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부활, 삼국지를 주제로 갑론을박을 했지. 밤새워 철학을 논하고 전선야곡, 3.8선의 봄,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렀는데, 이제는 유달산에서 유명한 연리지를 보아도 감각이 무디어져 느낌이 둔해졌으니 참 인생이란 모두 부질없는 일인지?”
“지금은 건강이 최고란다. 건강해야 죽기 전에는 오늘처럼 이렇게 만나고 은사님도 모실 수 있지.”
진석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도 우리 1945년생은 행복한 것이야. 다행스럽게도 모두 사모님들이 살아계시고 아직 까지는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건강하잖아?”
대수도 한마디를 했다.
“그래 우리 모두 건강 하자. 은사님도 건강하세요.”
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 건강 하자. 지금 우리가 유달산을 오르는 것도 일종의 건강이다.”
“그럼.”
우열이가 말했다.
우리는 달선각(達仙閣)으로 올라갔다. 달선각에서 보이는 목포 시내는 크고 작은 주변의 섬들과 바다가 어울리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는 그 모습이 현대적 감각으로 잘 정돈되어 보였다. 나는 그 현대적 건물들의 모습에서 옛 초등학교 시절의 시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년은 부둣가를 걸어가며 가난한 시절의 음식점들을 보았고, 목포역 부근의 개천가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빈민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풍요로움을 가져오게 한 선배들과 1945년생 해방둥이들이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던 일, 무더운 중동으로 가서 외화벌이를 한 일, 서독의 광부가 되어 외화를 벌어들인 것은 물론 국토건설의 현장에서 피땀을 흘렸던 역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시절은 얼마나 저축 저축을 부르짖었던가? 이제는 저축이란 용어 자체조차 사라진 현실 앞에서 경제적인 감개무량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 생각을 현실로 돌린 것은 은사님의 말이었다.
“유선각(儒仙閣)으로 올라가자.”
“네 은사님!”
은사님과 내가 앞장을 서자 친구들이 뒤를 따랐다. 유선각은 달선각처럼 전망대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목포시를 전망하기에 좋았다. 유선각 가까이에는 ‘1932년 10월 1일에 처음 건립했고, 여러 차례 보수와 중축을 했고 김재식 지사의 지원으로 개축과 주위 정비를 했다는 대강의 내용이 1973년 8월 1일 목포시장 김동석의 이름으로 쓰여 있었다.
유선각에서 관운각으로 자리를 옮긴 후 목포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남해안 다도해의 모습과 함께 보이는 목포의 아름다운 모습은 산을 오르며 봐도 또 봐도 정겹기만 했다. 바로 옆에 애기바위가 신기했다. 정말 이름 그대로 아기처럼 보였다.
10여 분 정도를 쉬면서 웃고 떠들다가 마당바위로 갔다. 눈앞에는 고하도, 화원반도, 달리도, 용머리, 시하바다, 외달도, 안좌도, 장좌도, 율도가 미적(美的)으로 목포 시내와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목포대교가 직선으로 놓여 있는 모습이 주변과 잘 어울려 새로운 미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위를 걷다 보니 어느새 부동명왕상이 나타났다.
안내표지판에는 ‘대일여래가 모든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이라는 것, 오대명왕의 하나라는 것과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일본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일등봉 아래에 조각했다는 것, 홍법 대사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올 때 배로 모시고 왔다는 것, 그 대사가 있는 곳에는 꼭 부동명왕이 함께 있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다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불교 부흥을 위해 조각을 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달산의 바위에 조각되어 있기에 관광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일등봉(정상)이 나타났다. 예쁜 돌로 된 표지석(228m)을 쓰다듬으면서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역시 목포 시내를 비롯하여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유달산의 정상답게 주변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유달산의 특징은 일단 오르면 목포 시내와 바다의 섬들이 잘 보이는 위치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볼 것도 많고 역사적 가치가 있어 우리나라 명산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내 곁에서 걷던 광남이가 내 마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유달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라는 생각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삼삼오오로 걸으면서 소요정에 도착했다. 소요정에서 보니 케이블카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목포 앞바다가 더욱 평화스럽게 느껴졌다. 이등봉과 삼등봉을 거쳐 조각공원으로 갔다. 공원은 산의 공간을 이용한 예술의 광장이었다. 일일이 모든 조각을 함께 돌아보았다. 유달산에는 일행이 돌아보지 않는 바위가 많은 곳이었다. 장수바위, 으뜸바위, 마당바위, 비행접시바위, 공룡알바위, 수도(修道)바위 등등. 나는 조각공원을 둘러보면서 조각공원과 주변의 도로 등에서 어린 시절의 유달산을 떠올렸다.
그 시절 유달산 산비탈에는 판자촌이 많았다. 나도 그 판자촌의 아이였다. 휴전이 이루어진 이후였지만 어디서나 전쟁의 상처는 아프게 살아있었다. 특히 상이군인들이 장터나 거리에서 구걸하거나 연필, 필통, 비누 같은 작은 소모품을 들고 강매하는 장면이 많았다.
한쪽 눈을 잃은 사람, 목발을 짚고 다시는 사람, 두 다리를 모두 잃어 군용침대를 이용하여 들것을 두 사람이 들고 그 위에 태워서 다니는 사람, 잃은 팔을 윗옷 소매로 펄럭거리며 다니는 사람 등 거리는 비참한 현상이 많았다.
어머니는 팥죽을 쑤어 머리에 이고 선창으로 나가는 것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팥죽장사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볼까 해서였다. 판자촌의 아이라는 것, 어머니가 목포 선창가에서 팥죽장사를 한다는 것, 불도 제대로 때지 못하여 덜덜 떨면서 판자촌에서 생활한다는 것 등 나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그래서 6학년에 올라온 후부터 1945년 해방둥이 11명이 가끔 어울릴 때도 그 그룹을 피하려 했지만, 늘 광남이가 나를 붙들고 함께 다니는 덕분에 졸업 이후 70대의 오늘까지 모임 속의 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조각공원에서 미니버스에 올랐다. 그때 은사님이 입을 열었다
“이제 배도 출출하니 우리 선창가로 가세. 내가 자네들에게 술 한 잔씩을 돌리겠네.”
우리는 은사님이 제자들에게 술을 사겠다는 말에 대하여 모두 ‘은사님 최고!’라고 박수를 쳤다. 살던 시골이 그 일부가 목포시에 편입된 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본의 아니게 졸부가 되어서 제자들에게도 가끔 돈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선창가로 가서 인석이 친구가 하는 식당으로 갔다. 선창가 식당 3층 중에서 선창가의 거리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남자들의 세계는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술이 있어야 했다. 은사님이 말했다.
“여기 든든한 물주가 있으니 종류 가릴 것 없이 골라서 마음껏 드시도록 하게나.”
“네, 은사님!”
먼저 1945년생들이 은사님께 무릎을 꿇고 약주 한 잔씩을 올렸다. 그다음부터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은사님과도 술로 신나게 어울렸다.
모두 술기운이 적당하게 올랐을 때 은사님이 말했다.
“앞으로 점점 나이가 있어 이런 자리가 자주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걸세. 그러니 오늘은 각자 1945년생들의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게나. 추억이란 역경이었든, 고난의 시절이었던 굶주림의 시기였던 행복했던 일이든 모두 그립고 아름다워지는 법이니까 말일세.”
“은사님! 좋아요.”
내 말에 친구들이 ‘오케이’라고 외쳤다. 그렇게 모두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의 꽃이 피어올랐다. 내가 먼저 추억을 말했다.
“6학년 겨울이었지. 중학생인 4촌 형이란 밤에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러 다녔어. 물론 친구들 몰래 다녔지. 팥죽 장사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어머니가 용돈을 잘 주지 않았거든, 더구나 아버지는 목포역에서 지게꾼 노릇을 하셨거든.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짐을 지게에 짊어지고 주인의 집까지 가져다주는 일인에 그것도 지게꾼끼리 경쟁이 심해서 손님들의 짐을 서로 먼저 지게에 싣기 위하여 다툼이 있었지. 어떻든 나는 열심히 팔아서 용돈을 벌었는데 하루는 고등학교 서너 명이 불렀어. ‘너희들이 가진 메밀묵과 찹쌀떡을 몽땅 사겠다. 여기 보자기에 모두 싸거라.’ 형과 나는 기분이 좋아 싱글싱글 웃으며 메밀묵과 찹쌀떡을 모두 싸서 주었는데 그들이 찹쌀떡을 받는 그 순간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변하더니 ‘꺼져!’라고 때릴 듯이 주먹을 쳐드는 것이야. 형과 나는 할 수 없이 돌아서서 집으로 갔는데 너무 억울해서 펑펑 울었어. 어린 시절의 슬픈 추억이었지. 깡패들에게 걸린 것이지.”
내 말을 이어 만종이가 입을 열었다.
“깡패 말이 나왔는데 나도 광주에서 K고등학교 2학년 때 깡패를 만난 적이 있어. 광주 충장로에 있었던 동방극장 앞을 지나는데 내 또래의 고등학교 학생이 극장 옆 골목에서 날 부르는 거야. 내가 주춤하자 ‘야! 뭐 좀 물어볼 일이 있어.’ 하기에 가까이 갔더니, 세 학생이 모두 험상궂은 얼굴이었는데 그중의 한 명이 내게 주먹을 날리는 것이었어. 순간 내가 옆으로 피하자 그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틈을 이용하여 나도 주먹을 강하게 날렸는데 그가 넘어진 것이야. 나는 다른 두 놈이 날 공격하기 전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었는데 엄청 빠른 속도였어.”
그러자 진석이가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이 만난 사람들은 깡패도 아니야. 난 고2 때 누나랑 집으로 가기 위해 목포역 앞을 지나가는데 깡패 10여 명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슬쩍 쳐다보았는데, ‘왜 쳐다봐?’라고 쳐다본 것을 핑계로 일제히 내게 달려드는 것이야. 토요일 오후였지. 누나는 겁을 먹고 움직이지도 못했어. ‘누나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난 골목 옆에 세워진 전봇대에 내 등을 대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향하여 ‘그냥 가는 게 좋아! 날 건드리면 너희들 다친다.”라고 호통을 쳤지. 그러자 제일 앞에서 능글거리며 걸어오는 놈이 “야! 너희들은 구경만 해. 내가 죽지 않을 만큼 맛을 보여줄게.” 나보다 덩치가 큰 놈인데 난 그자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 순간 전봇대 옆에 빈 정종병들이 나 뒹굴고 있더라고. 그 술병을 집어 내 이마에 대고 쳤지. 순간 내 이마에서 피가 흘렀고 나는 깨진 정종병을 들고 “가까이 와! 죽고 싶으면 오라고….” “그러자 놈은 주춤하다가 몇 발자국을 뒷걸음치더니 도망가는 것이었어. 나머지 놈들도 모두 도망을 가더라고.”
“엄청 강하게 나오니까 놈들이 떨었던 것이지. 너 깡다구 세다.”
내 말에 태섭이가 말했다.
“그 깡다구로 검사를 했고 국회의원을 했으니 넌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이야. 언젠가 제주에 왔을 때 들었는데 이 친구 이마 좀 봐봐. 아직도 술병으로 친 이마가 파랗게 멍이 남아있어.”
“그건 그렇고 요즘 국회가 돌아가는 걸 보면 왜 그렇게 서로 공격만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의원이었을 때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느 정도 협의체가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변호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국회의원 중에는 갑질을 하는 사람도 많아. 변호사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국회의원의 특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야. 연간 세비도 그렇고 보좌관 등 국회의원 한 사람당 딸린 공무원도 너무 많은데다가 국가의 세금을 너무 많이 쓴다는 생각이야. 내 생각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를 100명 정도로 하고 명예직으로 했으면 하는 생각인데 꿈같은 이야기지.”
대수가 입을 열었다.
“나도 국회의원에 대하여는 진석이의 말과 같은 생각이야. 그러나저러나 잘 돌아가지도 않는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고 내가 생각나는 추억의 이야기를 하지. 인석이, 진우랑 셋이 고1 때 무등산에 간 적이 있었지. 목여고 여학생들과 펜팔을 했는데 여학생 셋과 우리 셋이 놀러 간 거야. 집안의 형에게 귀한 카메라를 빌려서 내가 폼을 잡고 가서 많은 사진을 찍고 등산보다는 무등산을 조금 오르다 시내 쪽으로 내려왔는데, 카메라가 욕심이 났는지 우리 또래의 사오 명의 남자들이 내 손에서 카메라를 뺏으려는 거였어. 그때 버스가 왔는데 내가 앞서가던 인석이와 진우에게 ‘빨리 버스를 타!’라고 소리를 질렀지.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창문이 열린 버스로 카메라를 던졌는데 다행히 진우가 받았어. 카메라가 내게 없자 놈들이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나도 버스 앞문으로 뛰어올랐지. 버스가 떠나자 우리를 쫓던 놈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된 것이지. 지금 생각해도 진우가 카메라를 받은 그 순발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야.”
인석이가 말했다.
“난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서 민수랑 유달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앞에 부꾸미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어. 집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지나면 그 부꾸미가 먹고 싶어 환장할 정도야. 아침에 민수는 팥죽을 먹고 학교에 오고 난 꽁보리밥을 먹고 오는데, 민수나 나나 대부분 너희들처럼 가난 때문에 점심을 먹기가 힘들었잖아?”
“…….”
모두들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는 책을 사야 한다는 등 각종 거짓말을 동원하여 돈 몇 푼을 가져오고, 나 역시 온갖 거짓말을 동원하여 엄마에게 돈을 타내서 둘은 할머니가 만드는 부꾸미를 프라이팬에서 익혀 나오는 대로 번갈아 먹었지.”
“우린 어떤 때에는 가진 돈을 오버하여 먹다가 그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다음에 갚겠다고 사정을 한 후 떠날 수 있었지.”
“그런 날은 민수랑 걸어가면서 ‘난 이다음에 커서 식당을 할 것이야. 모든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야.”
“그래서 친구는 지금 목포에서 큰 식당을 하고 있잖아. 인석이 자네는 꿈을 이룬 것이지.”
“그렇다고 봐야지.”
모두가 긍정했다. 뒤를 이어 진우가 한마디 했다.
“난 민수 아버지처럼 우리 아버지도 지게꾼을 했지. 목포 파출소에서 선창가 쪽으로 좀 가면 바다로 흘러가는 꽤 넓은 개천이 있어. 우리 집은 그 개천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어. 도로변으로 집이 나오면 안 되니까 집은 도로를 약 10cm 정도 걸치고 나머지는 나무 기둥을 개천 쪽으로 새워서 판잣집이 세워져 있었지만, 그것도 도로를 침범했다고 담당 공무원들이 자주 와서 판잣집을 철거하라고 독촉을 했는데 우린 울면서 사정을 하곤 했지. 그러던 어느 날 밤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우리 집을 비롯한 주변의 판잣집 10여 채가 무너지면서 개천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어. 아버지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머니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는데, 나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은 멀쩡했어. 더구나 밀물 때라 바닷물이 들어와 우린 물속에서 겨우 나와 근처의 다리 밑으로 갔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와. 그날 이후 아까 말이 나온 깡패집단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며 지냈지. 그때가 이유 없는 반항아 생활이었어. 그런데 여기 계신 은사님께서 우연히 역전에서 싸우는 나를 불러 세우셔서 ‘깡패는 결국 교도소를 드나들 뿐이란다. 넌 판자촌의 집안이었지. 그 판자촌의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커서 건축가가 되어서 멋진 집을 짓고 사는 것일 거야. 난 그날 은사님에게 기대어 울면서 결심을 했지. 은사님의 말씀대로 멋진 집을 짓고 살아가는 건축사가 될 것이라고.”
우열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진우의 손을 잡았다. 술자리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조용히 깬 것은 처연한 표정을 짓던 우열이었다. 그는 학생 때는 우리 모임에 와서도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꽁생원이었는데 성격이 차분한 편이었다.
“난 그렇게 가난으로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어선을 가지고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라 호 태풍 때 어선이 전파(全破)되면서 세금마저 내지 못하여 집안의 모든 동산에 빨간딱지인 압류장이 붙었었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세무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고 대학을 강릉으로 가면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지.”
이번에는 효철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모임은 졸업식 때 이루어졌지만 5학년 때 민수가 ‘해방둥이들 모여라’ 해서 유달산으로 꿩을 잡으러 갔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어. 모두들 땀나게 뛰어다녔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유달초 뒷산 쪽에서 장끼 한 마리가 눈 속에 파묻혀서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어. 그래서 잡았는데 결국 난 눈이 먼 꿩을 잡은 격이었지. 그때부터 난 꿩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대학 때는 농과를 택했지. 계속 꿩에 대한 연구를 하여 지금까지 꿩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동물을 기르면서 대농장을 경영하게 된 것이지.”
이번에는 태섭이가 말했다.
“난 유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중학교를 갔지. 아버지가 삼촌이 경영하는 제주 해운 주식회사에 취직을 해서였지. 아까 우열이가 사라호 태풍을 이야기했는데 내가 1959년 고 1학년 추석 때였는데 제주 부두에 갔더니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이 거의 다 부서져 있더라고. 그런 난리는 난생처음 봤어. 물론 아버지도 어선 한 척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지가 된 것이야. 그래도 삼촌이 도와줘서 다시 재기했지만, 사라호 태풍 때 추석도 지내지 못했어. 전국적으로는 사망과 실종이 849명이었고 부상자는 2,533명이나 되었어. 이재민이 무려 37만 3,459여 명이었고 우리 집을 비롯하여 선박 피해는 9,329여 척이었지. 정말 무서운 태풍이었어.”
원대가 말했다.
“참 추억의 이야기가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구나!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서 친척들에게 주려고 속초에서 20여 마리의 오징어를 들고 오다가 선창가에서 본 오징어 가격을 보고 친척들에게 주려던 오징어 20여 개를 그 가게에 팔았지. 내가 사 온 가격보다 더 비싼 것이었어. 돈 욕심에…….”
“…….”
“그 이윤을 남긴 일이 나를 지금의 해산물 도매업자로 만든 것이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장사를 시작했으니까…….”
“됐네.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니까.”
광남이의 말이었다. 그는 원대의 뒤를 이어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알고 있듯이 난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공부는 주로 꼴찌였지. 은사님이 여기 계시지만 6학년 때는 내가 전교 1등이었는데 말이네.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날 끔찍하게 사랑을 해주었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네. 난 그때부터 세상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회의에 빠지기 시작하였네. 그러다 보니 철학서를 많이 읽게 되었고, 학교 공부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였지. 또 석가모니에 대한 공부를 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서적을 통하여 종교 문제를 탐구하였네.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나 자신이 나에게 결론을 내렸지. ‘인간은 모두 죽는다. 여러 가지 재난이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지만, 나의 외할머니처럼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기까지 나는 인생의 사춘기를 다 보낸 것이지. 그리고 결심한 것은 공부였다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의사가 되기로 했지.”
은사님이 말했다.
“결국 외할머니의 죽음에서 오늘의 병원장이 되었네그려.”
“네, 그렇습니다. 은사님!”
“자,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여기서 마무리를 짓지.”
은사님의 말에 우리는 다 같이 ‘좋아요.’로 답을 했다. 뒤를 이어 내가 일어서서 말했다.
“이번 목포 모임은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는 은사님을 우리 모임 때마다 꼭 모시기로 했으니 그렇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모두가 박수로 찬성을 하였다.
“또 우리 모임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당연히 해마다 모이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으니 단 두 사람만 살아있다면 우리 모임은 그 두 사람만이라도 만남을 계속하도록 합시다.”
“좋아요!”
이번에도 모두가 박수로 찬성을 하였다.
“자, 그럼 우리 모두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를 제창하면서 마무리를 합시다.”
우리는 둥글게 서서 손에 손을 잡고 ‘목포는 항구다’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은사님이
“오늘 우리 모두 ‘1945년생 만세’로 정리하세나.”
라고 말하여 모두 ‘1945년생 만세’를 일곱 번이나 외치면서 모임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목포의 모임이었다.
* 경기대 교육대학원 졸, 전 용인 서원고등학교 교장, 장편소설 햇살 만들기(전 3권)로 경기도 문학상 수상, 중편소설 다리로 호국문예 국방부장관상 수상, 단편소설 웃음으로 경기문학인상 대상 수상, 수필 고향을 위하여로 농촌문학상 대상(농림식품부장관상) 수상, 제3회 홍재문학상 수상, 한국농촌문학상 심사위원장, 경기문학인협회 회장, 수원문인협회 회장 역임, 경기일보, 국방일보, 문학 21, 한국영농신문에 장편소설 연재, 저서 : 시집, 동화집, 수필집, 장편소설『햇살 만들기』등 20여 권, 현재 <투데이 농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