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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을 열었던 용감한 사람들 – 탐험과 항해의 역사 – (2부)
'지리상 발견의 시대'가 열린 후 몇 세기 동안 북쪽 길을 통해 동양으로 가는 편한 길을 찾겠다는 꿈은 깨지고, 익명의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대신 오스트랄라시아의 남극 대륙을 발견했으며, 대륙 내부의 지형적 주요특징들을 확인했다. 그 전의 몇 세기 동안 그렇듯이 이 시대에도 상인과 선교사들은 대담한 탐험가이기도 했지만, 이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에는 지식 자체를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북쪽 바닷길
1725~29, 1734~43년에 덴마크계 러시아의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주도한 일련의 탐험이 이루어졌다. 이 탐험대는 통로의 동쪽 끝에서 서쪽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1878~79년 비로소 핀란드계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 남작이 통로를 끝까지 돌파하여 북동쪽 바닷길을 여는 데 성공했다.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Adolf Erik Nordenskiöld) 남작.
한편 1576년 영국의 군인이자 항해가인 험프리 길버트는 오늘날의 남중국해와 항저우[杭州] 및 몰루카 해협으로 가는 데는 북동쪽 바닷길보다 북서쪽 바닷길이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1534년에 프랑스의 항해가 자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를 탐험했다. 1576년에 영국의 탐험가 마틴 프로비셔 경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프로비셔 만이라고 명명한 만을 발견했다. 1585~87년 영국의 항해가 존 데이비스는 컴벌랜드 해협을 탐험했고, 그린란드 서해안을 북위 73˚까지 탐험했다.
1610년에 헨리 허드슨은 허드슨 해협을 지나 허드슨 만까지 항해했다. 1612~15년 영국의 항해가들은 이 만을 철저히 탐험한 다음, 이 만에서 서쪽으로 통하는 해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북동쪽 바닷길을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재물이 넘쳐흐르는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현지의 자원을 개발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헨리 허드슨(Henry Hudson,1570 – 1611),
허드슨 만에서 강 어귀로 선원들과 함께 들어가고 있다.
1670년 모피를 교역하기 위해 세워진 허드슨베이사(社)의 영국인들은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와 허드슨 만의 넓은 배후지역을 탐험했다. 19세기에 윌리엄 패리 경이 이끄는 탐험대(1819~25)와 존 프랭클린 경이 이끄는 탐험대(1819~45), 실종된 프랭클린 경과 그 일행을 찾기 위해 파견된 탐험대들도 통로를 찾는 데 실패했다. 처음으로 통로를 찾아 북서쪽 바닷길을 연 사람은 1903~45년에 북극해를 북쪽에서 서쪽으로 돌파한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었다.
태평양으로 가는 동쪽 바닷길
16세기말 동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는 인도의 고아와 디우 항 및 중국의 마카오밖에 남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인도의 무역을 지배했고, 네덜란드인들은 동인도제도의 무역을 지배했다.
교역을 하기위해 항해하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들.
탐험가는 이미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에서 교역에 종사하고 있는 네덜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희망봉에서 배에 식량을 실으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기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면 몰루카 제도 쪽으로 뱃길을 잡는 데 유리한 순풍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곧 미지의 해안에 상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후 오스트레일리아 서해안의 해도가 만들어졌다.
164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총독인 안토니 반 디만은 네덜란드의 항해가 아벨 타스만이 이끄는 탐험대를 파견했다. 이 탐험대의 목표는 탐험항해였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교역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타스만은 모리셔스에서 우선 남쪽으로 내려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태즈메이니아 섬 해안에 상륙했다. 이어서 그는 뉴질랜드의 사우스섬을 발견했다.
네델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
그는 다시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통가 제도와 피지 제도를 발견했다. 1644년에 2번째 항해에 나선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을 따라 케이프요크 반도(그는 이 반도가 뉴기니의 일부라고 생각했음)에서 노스웨스트 곶까지 항해했다.
태평양으로 가는 서쪽 바닷길
태평양 탐험에 있어서 초기의 유럽 탐험가들은 주로 교역이나 약탈에, 후기의 탐험가들은 주로 정보를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다수의 스페인 상인들은 카리브 해 연안의 항구에서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항구까지 육상 수송로를 건설했다. 이어서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 항구와 서쪽의 필리핀 제도를 잇는 바닷길을 확립했다. 태평양 항해의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일부 항해는 남쪽 대륙을 찾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스페인 상인들의 태평양 항로개척.
포르투갈의 항해가 페드루 페르나데스 데 키로스는 1595년에 목적지를 발견했다. 1606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루이스 데 토레스는 뉴기니까지 항해한 다음, 다시 필리핀 제도의 마닐라로 향했다. 그는 토러스 해협을 지나 뉴기니의 남해안을 항해했지만, 그 바닷길 왼쪽에 또 하나의 대륙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태평양의 미지의 땅에 있는 재물을 찾기 위해 스페인인들과 경쟁했다. 영국의 항해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1577~80년, 토머스 캐번디시는 1586~88년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세계를 일주했다. 드레이크의 목표는 '테라 아우스트랄리스'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남쪽 끝에 있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자마자 강풍이 불어, 그는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후 그는 페루 해안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북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을 북위 48˚까지 탐험했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돌아와 뉴알비온(캘리포니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그는 스페인 항로를 따라 마닐라까지 항해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왔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의 배,
‘Golden Hind’
18세기말 프랑스의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태평양을 탐험했고 영국에서도 여러 탐험가들이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 선장은 3차례에 걸친 대규모 항해 끝에 마침내 태평양의 지형에 대한 미신을 타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노스섬과 사우스섬을 모두 일주했으며, 서쪽으로 항해하여 1770년 4월 19일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는 세계 최대의 산호초인 그레이트베리어리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신중하게 해도를 만들며 전진했다. 케이프요크 반도에 도착한 쿡은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모두 차지하고, 그곳에 뉴사우스웨일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1770년 4월 19일,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
Botany Bay에 도착한 쿡 선장.
그는 토러스 해협을 지나면서 뉴기니가 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쿡이 비타비아와 희망봉을 지나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5번째의 해안선이 완전히 밝혀졌다. 아직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곳은 이 대륙의 남해안뿐이었다.
1798~99년 영국의 항해가 조지 배스와 매슈 플린더스(5번째 대륙의 이름을 오스트레일리아로 제안했음)는 태즈메이니아 섬을 일주했다. 1801~03년에 플린더스는 그레이트오스트레일리아 만 해안선과 대륙을 일주했다. 그리하여 그레이트오스트레일리아 만과 카펀테리아 만을 잇는 해협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772~75년에 이루어진 2번째 항해에서 쿡은 그 미지의 대륙을 체계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첫해 여름에 그는 희망봉에서 인도양 남쪽에 이르는 지역을 탐사했다. 2번째 여름에는 뉴질랜드에서 남아메리카 남쪽 끝의 혼 곶에 이르는 바다를 탐사했다. 그리고 3번째 여름에는 혼 곶에서 희망봉의 바다를 탐사했다.
쿡 선장은 하와이 Kealakekua Bay의
원주민들과의 분쟁에서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는 지도 제작자들이 그려놓은 거대한 남태평양 대륙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태평양 탐험이 끝나자, 북서쪽 바닷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1778년에 쿡은 북위 65˚까지 올라갔지만,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음 장벽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하와이까지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분쟁이 벌어져 목숨을 잃었다.
대륙의 내부를 탐험하고 이해를 넓혔다.
19세기 초에 유럽과 아시아 및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서는 대충 알려져 있었으나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남극 대륙은 지도에 실리지도 않았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지리학의 핵심은 수계(水系)의 분포였다. 그리스인들은 서아프리카 내륙 지방에 큰 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강이 어느 쪽으로 흐르며 어느 강으로 흘러드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었다.
아프리카 해안과 내륙의 탐사는
수많은 항해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1796년에 스코틀랜드의 젊은 외과의사인 멍고 파크가 감비아 강을 따라 내륙 지방으로 들어가다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웅장한 나이저 강이 유유히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
1830년에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랜더는 서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베냉 만에서 부사까지 들어간 다음, 강을 따라 어귀까지 내려왔다. 아프리카 중남부에 있는 잠베지 강은 19세기 중엽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에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잠베지 강의 중류까지 거슬러올라갔다. 1852~56년에 계속된 장기간의 탐험은 노예무역을 폭로하는 데 주요목적이 있었다. 그는 우선 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올라가 잠베지 강 상류의 지류와 콩고 강 하류의 지류가 갈라지는 경계를 가로지른 다음,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앙골라의 루안다에 도착했다.
리빙스턴(Dr. Livingstone)의
아프리카 잠베지강 탐사.
여기서 리빙스턴은 다시 1년 동안 행군한 뒤, 빅토리아 폭포(리빙스턴이 붙인 이름임) 근처의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그는 잠베지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아프리카 동해안에 있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모잠비크)의 켈리마네에 도착했다.
영국 정부는 잠베지 강 하류의 항해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그를 파견했다. 이 2번째 여행에서 그는 시레 강과 루부마 강을 탐험했고, 니아사 호에 도착했다. 마지막 여행에서 리빙스턴은 니아사 호와 탕가니카 호 사이의 복잡한 수계를 조사했으며, 콩고 강 상류를 탐험했다.
나일 강의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는 파라오 시대부터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제임스 브루스는 1770년에 에티오피아를 여행하다가 청나일 강의 원천인 타나 호에 있는 2개의 샘을 발견했다.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버턴과 존 해닝 스피크는 1857년에 탕가니카 호를 발견했다. 스피크는 혼자서 북쪽으로 올라가 한 호수의 남쪽 어귀에 도착했는데, 그는 이 호수에 빅토리아니안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호수가 나일 강의 원천이라고 확신했다. 1862년에 스피크는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제임스 그랜트와 함께 우간다에서 라이펀 폭포를 발견했다.
스탠리 경(Sir. Stanley).
탐사도중 Ujiji에서 리빙스턴 경을 만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웨일스의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 경은 1875년에 빅토리아니안자를 일주하고 루알라바 강으로 건너간 다음, 그 강을 따라 콩고 강으로 가서 콩고 강을 따라 어귀까지 내려갔다. 아프리카의 수계 분포가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1813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그레고리 블랙슬랜드는 골짜기 대신 산등성이를 따라 블루 산맥을 가로지르는 데 성공했다. 산맥 너머에서는 강들도 발견되었다. 1829~30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찰스 스터트는 머럼비지 강에서 배를 타고 '거대하고 당당한 강'(머리 강)으로 들어갔다. 1주일 뒤, 그는 북쪽에서 머리 강으로 흘러들어오는 또 하나의 큰 강을 만났다.
스터트는 이 강이 달링 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1년 전에 달링 강의 중류를 탐험한 적이 있었다. 머리 강이 오스트레일리아 남해안에 있는 인카운터 만으로 흘러드는 것을 발견하면서 항해는 끝났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중심부는 내해가 아니라 거대한 사막이었다. 2차례의 탐험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 밝혀져 대륙의 주요특징을 지도로 나타내려면 아직도 많은 탐험이 필요했다.
호주 탐험가, 찰스 스터트(Captain Charles Sturt)가
탐사를 위해 아들레이드(Adelaide) 시를 떠나는 모습.
1840~41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에드워드 존 에어는 오스트레일리아 남해안을 따라 애들레이드에서 올버니까지 2,100km가 넘는 거리를 여행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버트 버크와 윌리엄 존 윌스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에 있는 멜버른에서 북쪽에 있는 카펀테리아 만까지 여행했다.
극 지방에 대한 탐험으로 과학시대의 막이 올랐다.
북극과 남극의 탐험
북극 지방에서는 영국의 과학자인 윌리엄 스코즈비의 항해로 과학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는 1806년에 북위 81°21′ 지점에 도착했다.
1828년에는 영국의 탐험가 윌리엄 패리 경이 스발바르에서 유빙을 타고 북위 82°지점에 도착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은 1893년에 북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동시베리아 해까지 배를 타고 가서, 타고 온 배 '프림호'를 얼음 속에 가두었다. 그러면 배가 해류에 밀려 북극점을 지나 그린란드 동부로 가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en)이
북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동시베리아의 얼음바다에 갇히게 한 탐험선 ‘프림(Fram)호’
난센과 그의 동료는 북위 84°, 동경 102° 지점에서 배를 버리고 북위 86° 13′ 지점까지 썰매로 여행했다. 배는 결국 스발바르 북쪽까지 밀려와 얼어붙은 총빙(叢氷) 틈에서 나타났다.
1909년에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50명의 에스키모인과 함께 그린란드 북서쪽에 있는 엘즈미어 섬에서 썰매를 타고 북극점에 도달했다. 북극점 반경 8km 이내에는 2,700m 깊이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북극에는 어떤 대륙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58년에 미국 잠수함 '스케이트호'와 '노틸러스호'가 북극 지방을 뒤덮고 있는 만년설 밑으로 들어가 북극해를 가로질렀다.
남태평양에는 대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쿡 선장이 증명한 뒤, 거대한 남쪽 대륙은 5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839~43년 영국의 해군 소장인 제임스 로스는 남극대륙의 빅토리아랜드 해안을 탐험했다.
영국의 해군 소장인 제임스 로스(James Ross)는
남극대륙의 빅토리아랜드 해안을 탐험했다.
영국 탐험가, 존 로스경(Jhon Ross), 북서해로를 개척했다.
1830년 얼음에 갇혀 위기에 처한 탐험대를 구조해준
원주민 에스키모 이누이트(Inuit)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존 로스경은 후에 남극을 탐험한 제임스 로스(James Ross)의 삼촌이기도 하다.
1894년 노르웨이 포경선 선장인 레오나르 크리스텐센은 아다레 곶에 상륙했다. 인간이 남극대륙에 발을 디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20세기초에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남극지방에 대륙만한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08~09년에 영국의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경은 남극 탐험에서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 그는 탐험대를 이끌고 그레이트배리어 산맥을 조사한 뒤 3,400m 높이까지 올라가 남위 88° 23′ 지점에 도달했다. 영국의 로버트 폴컨 스콧이 이끄는 탐험대는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 1911년 12월 14일 이미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콧 탐험대는 돌아오는 길에 심한 눈보라를 만나 모두 죽었다.
아문센(Ronald Amundsen).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1928년에 영국의 탐험가이자 비행사인 휴버트 윌킨스 경은 그레이엄랜드 상공을 비행했다. 영국의 탐험가 비비언 푸크스와 뉴질랜드의 등산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1957, 1958년에 각각 남극 대륙을 횡단했다.
한편 역사적·지리적 여건으로 오랫동안 탐험이 발달하지 못했던 한국에서는 1985년 남극에 상설 과학연구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남극관측탐사대를 파견함으로써 탐험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88년 2월 남극에 세종과학기지를 건설하여 각종 탐사를 진행하고 있다.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94329
[출처] 바닷길을 열었던 용감한 사람들 – 탐험과 항해의 역사 – (2부)|작성자 햇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