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창 묘소 뒤로 조성된 김사형 묘소>>
밤새도록 비가 온 뒤에 쾌청한 날씨를 보인 2003년 7월 13일이다. 답사차량은 어느덧 시내를 빠져 나와 상큼한 공기를 가르며, 회색아파트가 연결되는 강변로를 달린다.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를 지나고, 암사동을 막 지나자, 한강변의 조정경기장의 경정(競艇)이 시야를 점하고, 도로 우측으론 미사리(渼沙里) 카페 촌의 열정을 담은 간판들이 주마등(走馬燈)으로 연결된다. 예전에는 고깃집과 횟집들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96년 후반부터 카페와 레스토랑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라이브공연과 함께, 욕망이 분출되는 이색지대란 닉네임이 생겨났다. 심야 데이트코스로 더 각광을 받는 이곳은 건물형태들이 모두 이국적 표정을 담아내고있어, 처음 와본 사람들은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답사차량에 함께 동행하는 김명식 고문 왈 "커피와 음식값이 보통 이 아니어" 라고 거든다.
그림처럼 펼쳐지는 팔당호를 지나고, 시원스럽게 달리던 답사버스는 옛 정취를 간직한 양수리 다리를 지나, 아직도 번잡함이 느껴지는 양수리 시내로 들어선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젖줄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어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란 지명을 얻은 이곳은, 한 물길은 강원도 금강산(1,638m)에서 시작하여 휴전선을 넘어 북한강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줄기는 태백산 금대봉(1,418m)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이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합류하여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는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합쳐지는 물줄기 중, 물이 차갑고, 거세면서, 물빛이 푸른 북한강의 물을‘숫물’이라 하고, 따뜻하고 순하면서, 붉은 색을 띠는 남한강의 물을‘암물’이라 한다. 이곳에는 가슴 찐한 전설을 간직한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400년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남한강과 북한강을 따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던 이정표가 되어준 고목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도당할아버지’라 부르며, 매년 가을, 젯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堂祭)를 지냈다. 또한, 이곳에는 도당 할아버지의 배필인‘도당 할머니’도 함께 있었는데, 1974년 팔당호에 물이 채워지면서 수장(水葬)되었다고 한다. 이곳 양수리의 행정구역은 양평군 양서면으로, 인구는 대략 약 9,5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최근에 아파트 등이 건립되면서 인구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북쪽은 양평군 서종면(西宗面)이 자리를 잡았고, 동쪽은 옥천면(玉泉面)이 접한다. 또한 서쪽 북한강 건너편은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에 닿고, 북부는 청계산(淸溪山: 658m)과 형제봉(兄弟峰)이 팔을 벌려 이곳 양서면을 포옹한다. 또한 남부는 부용산(芙蓉山: 366m)이 띠를 두르듯 나열한다.
김사형 선생의 묘소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우측 계곡에는 잔뜩 멋을 부린 반월형의 구름다리가 간간이 계곡 위를 가로질러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각 문중마다 묘의 진입이 용이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 참을 지나서야 선생의 묘소를 품안에 품은 목양리에 도착한다. 차창을 통해 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니 산뜻하게 단장된 솟을대문이 있는 제실(祭室)앞으로, 수 개의 신도비와 비석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차량에서 내리자, 스팀처럼 무더운 7월의 열기가 온몸을 파고 들면서, 금방 땀으로 멱을 감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찬바람을 품어대는 버스 에어컨 덕에 찜통날씨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차량 안이 천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계곡 위로 난 다리를 건너, 선생의 사위인 신효창을 기리는 평산 신씨의 제실과 신도비를 둘러보고, 제실 담장을 끼고 난 오르막길을 통해 묘소로 오르는데, 묘역에서 한참 아래인 길 우측으로 진응수(眞應水)처럼 보이는 웅덩이하나가 보인다. 혈(穴)이란? 태조산(太祖山)에서 출맥(出脈)한 용이 먼 거리를 행룡(行龍)하는 동안 개장천심(開帳穿心)과 기복(起伏), 박환(剝換), 과협(過峽), 위이(위이)등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중조산, 소조산, 현무봉을 거쳐 혈장까지 들어오는데, 그것은 강이나 하천, 계류(溪流) 등을 만나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용맥이 한곳에 머물면 용을 따라온 생기가 모아져 혈을 결지하는데, 이를 취기(聚氣)라 한다. 즉, 용을 따라 함께 진행한 생기(生氣)가 수기(水氣)와 함께 혈처(穴處)까지 들어와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혈장에 융취(融聚)되고, 남은 여기(餘氣)등이 지상으로 용출(湧出)되는데, 이 물을 진응수라 한다. 조금을 더 오르니 동네 끝집이 되는 좌측으로, 아랫쪽 신씨네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은 선생을 기리는 안동김씨 제실이 나타난다. 아마도 선생의 후손보다는 신효창의 자손들이 더 번창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씨네 후손들이 더 공을 들여 조상을 기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참을 오르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남의 밭 가운데서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밭에서 김을 메던 아낙이 우리 일행을 향해서 한 말씀 던지신다. "옆에 길을 놔두고, 왜 남의 밭을 밟고 다니세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도망치듯 걸어 나와 밭 위로 난 숲길을 타고 부지런히 오른다. 묘소 뒷길을 타고 묘역으로 오르니 전망이 시원하고, 좌우의 산등성이와 앞쪽의 육중한 산자락들이 모두 내 발치 아래에 놓이게 된다. 꽤 높다고 느껴지는 묘소는 둘레석을 두른 두 기의 묘가 앞뒤로 조성되었는데, 앞쪽의 묘소가 사위인 신효창의 묘고, 뒤쪽이 선생의 묘가 된다. 나이 67살에 선생이 운명하자, 세종조 때 풍수학인 최양선과 함께 지리학에 상당한 수준 급의 반열에 섰던, 사위 신효창이 점혈(占穴)한 것으로 알려진다.
백두대간룡(白頭大幹龍)이 금강산(金剛山)을 지나 한참을 더 남진(南進)하여 설악산(雪嶽山)을 지나고, 오대산(五臺山, 1.563m)어름에서 그 힘을 충전시켜, 서쪽으로 맥을 뻗는 소위 한강기맥(漢江岐脈)을 분지한다. 한참을 서남진(西南進)하던 기맥은 이곳 혈장의 증조산(曾祖山)이 되는 용문산(龍門山, 1.157m)을 솟구친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진행을 계속하다 커다란 몸뚱이를 기복굴곡(起伏屈曲)으로 행룡하여 설악면의 유명산(有明山: 861m)을 일으키고, 다시 조산(祖山)에 해당하는 중미산(中美山, 834m)을 일으킨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작봉(作峰)하면서 굽이치듯 달리다가 주산(主山)인 청계산(淸溪山)이 청제봉(靑帝峰)을 우뚝 세웠다.
<<이곳 혈장을 작국한 주산 청제봉>>
주봉(主峰)에서 봉황(鳳凰)이 날개를 쭉 펴고 개장천심(開帳穿心)으로 내려와 좌우로 분맥(分脈)된 겹겹의 청룡과 백호능선을 만들고, 주룡으로 나온 중출룡(中出龍)이 아래로 곤두박질 치다가 무곡성(武曲星)인 소원봉(小圓峰) 하나를 솟구친다. 여기서 급하게 달음질치듯 내려온 주룡(主龍)은 산 중턱쯤에서 급정거(急停車)하듯 몸을 곧추세워 혈장(穴場)을 일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등잔대에 호롱불을 올려놓는 것과 같은 괘등혈(掛燈穴)이다.
혈장(穴場)까지 들어오는 음룡(陰龍)은 산고곡심(山高谷深)으로 협소하고, 약간 길다랗게 결응(結應)하여 두 기의 묘소를 연주혈(連珠穴)처럼 작국(作局)한다. 중출룡(中出龍)을 따라붙어 호종(護從)하던 용호(龍虎)는 병풍을 치고, 등불 혈장을 보호하여, 불꽃이 바람에 타지 않도록 조밀하게 감싸주니, 그 불빛이 만인(萬人)을 향해 빛을 발하게 된다. 불빛은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걸쳐 영화(榮華)와 명예를 기약하는데, 그 영험을 받은 후손들은 대대(代代)에 걸쳐 귀인(貴人)과 현자(賢者)를 배출한다.
두 기의 묘소를 오가며, 간심(看審)한다. 내룡(來龍)은 우선룡(右旋龍)으로 내려와 입수일절(入首一節) 진방(辰方)에 머리를 파묻는 관대룡(冠帶龍)이다. 을좌신향(乙坐辛向)의 묘소는 좌수도우(左水到右)로 출수(出水)하는 건파(乾破)가 되어 팔십팔향법의 정묘향(正墓向)으로, 자손이 흥왕하고, 대부대귀(大富大貴)하여 수복(壽福)이 겸전(兼全)하다는 향법(向法)이다. 그리고, 사대국법(四大局法)에 의한 병득수(丙得水)는 벼슬이 최고위에 오르고, 재산은 거부(巨富)가 된다. 또한 건파(乾破)는 12포태법의 절방(絶方)과 태방(胎方)인 녹존방(祿存方)을 치고 나가, 금어(金魚, 4품 이상의 관리가 관복에 부착하던 붕어처럼 생긴 황금빛 주머니)를 찬다는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漁)가 되어, 자손들이 큰 벼슬길에 오르는 길(吉)한 수법이다. 앞쪽의 후덕하리만큼 잘 생긴 안대(案臺)와 연분사(緣分砂)는 후손들에게 풍요로움을 기약하고, 멀리 조산(朝山)으로 옹호(擁護)하는 태방(兌方)의 예봉산(禮峰山)은 정자관(程子冠)을 머리에 쓴 것처럼 청수하고 아름다우니 후손 중에 정승벼슬을 기약하기도 한다. 예봉산 좌측의 배알미산(拜謁尾山)과 우측의 운길산(雲吉山)도 다정하게 팔을 벌리고 감싸주고 있으니, 주변의 도움으로, 많은 인물의 배출을 예고한다.
선생이 운명한 1407(태종 7)년 7월 30일, 태종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이 졸(卒)하다. 김사형의 자(字)는 평보(平甫)인데, 안동부(安東府)사람이다. 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高祖) 김방경(金方慶)은 첨의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祖父) 김영후(金永煦)는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중략)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였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묘당(廟堂)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依重)하였다. 주상이 즉위하자, 신사년 3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임오년 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조회를 3일간 정지하고, 좌부대언(左副代言)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金陞)과 김육(金陸)이다.
간산평(看山評)이다. 장인이 되는 김사형이 운명하자 풍수에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던 사위 신효창이 이 터를 점지했었다. 그리고 아들 김승은 선생이 하사 받은 식읍(食邑, 조세를 거두던 고을) 1천 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를 상속받아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어떤 연유로 사위인 신효창이 장인의 묘 앞을 가로막고 묘소를 정했는지 석연치가 않다. 협소한 터의 괘등혈은 불빛이 더 멀리 비추는 것이고, 또한 뒤쪽(선생의 묘)의 불빛을 간접 차단시키게 되어, 묘소의 발응(發應)은 선생보다 사위인 신효창의 자손들에게 유입된다고 보아진다. 답사를 끝내고 약간 심한 경사를 이루는 언덕바지를 내려오면서 숲에 가려진 괘등혈의 혈장을 뒤돌아보며 가슴 한구석에 간직한 여운을 쉽사리 털어 내지 못한다. 물론 선생보다는 사위인 신효창의 묘소가 정혈처(定穴處)에 더 가깝게 터를 정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속설(俗說)에 의하면 괘등혈일 경우, 묘소와 가깝게 사는 후손들은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이른바 등하불명(燈下不明)으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위의 속셈을 유추하게 된다. -碩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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