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위진 시조집, 『아자창과 半香』, 시문학사, 1998.
□ 정위진(鄭渭鎭)
경북 상주 우산(愚山) 출생, 경북여고 졸업, 《시조문학》 천료
시조집: 《하늘 門》 《소호里 小景 》 《手話하는 가을바람》 《후박잎에 듣는 비》
제5시조집 『아자창과 半香』의 「시인의 말」에서
지난 가을 영웅도 효웅(梟雄)도 다 저버린 중국 장강을 중경에서 무한까지 찬 나흘간을 흘러내려가며 삼국 시대의 유적을 더듬었다. 산은 수려하고 물은 넘쳤다. 긴 역사 다 마시고도 자연은 이토록 유구하거늘 인세의 덧없음에 새삼 숨이 막혀 와서 노을진 하늘 아래 합장하고 서서 잠시 눈을 감고 내 가슴에 새기듯이 반야심경을 세 번 외고 돌아었다.
오늘 다섯 번째 시조집 원고를 정리하면서 늘 나의 꿈이던, 눈 속을 헤치고 피어나는 매화 향기같은 작품은 또 한 편도 못 건지데 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이번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른데….
다리미질
다려도 그대로인
日常을 또 다립니다
오늘도 다리미 열도
한 눈금을 올렸더니
속살은
펴지지 않고
천만 눌어 처집니다.
저승까지 이어졌을
개나리 노란 뚝방
서툰 다리미질로
올이 상한 인연 하나
그 길을
다리며 누비며
세월 속에 스밉니다.
半香
갓 끓인 녹차향을
두 손에 받쳐들다
파리도 낙상을 할
각장장판 오동장롱
집제비
그림자 떨구던
아자창의 밝은 어룽.
半香이 무늬 놓으며
빈 방에 번져가면
어머님 혹지환같은
하늘빛이 시려온다
가슴의
박동소리도
들릴 듯한 어느 下午.
엣동산 비둘기 날던
학교 별관 예법실에
차 끓여 대접하고
손님 되어 마셔도 봤다.
선생님
손끝에 일던
그 정숙의 썰밀물.
봄비 散調
발 고운 명주솔로
겨울을 닦아낸다
개나리 휘인 가지에
눈을 또록 틔우면서
종일을
물가마 타고
은실같은 비 내린다.
어느 호텔 샨데리아 닮은
흰등 밝힌 목련 가지
봄비가 지나면서
엮어놓은 주렴인 듯
햇살이
황모필 등고
오색 무늬 치고 있다.
참선 그리고 나무
뙈약볕을 견디다 못해
검푸르게 멍들고도
나무는 大乘을 배워
짙은 그늘 드리우고
그 가지
입풀무 불어
남의 땀을 씻어준다.
매매는 짧은 생애를
한탄으로 지새우며
째지는 울음소리가
더위 한결 보태주고
無爲로 마감하는 날
小乘 小乘 흐느낀다.
불새의 노래
꼬리에 불이 붙은
세월 타고 흐르다가
혼절했던 불새 한 마리
눈고 귀도 다 멀었나
홍건히
땀에 젖어서
벼랑 끝에 나앉았다.
날과 달 구비쳐 가고
한 덩이 돌로 굳어
구성진 대피리소리
폭포처럼 쏟으면서
피 토해
강을 물들이는
죽지 상한 새 한 마리.
九泉 갈 때엔
배낭 하나 어깨에 메고
이골 저골 여행하듯
이생으로 건너와서
후생까지 가는 일도
그렇게 훌쩍 뛰어넘어
손흔들 듯 가고 싶다.
마음의 배낭에다
강은 접어 아래에 싣고
새소리 송뢰소리
설악 지리산도 얹어
높낮은
파고의 이랑
노을 깔며 가고 싶다.
고은 詩는 갈피갈피
책 속에 담아 넣고
情일랑은 항아리에
뚜껑 닫아 간직한 채
내 생애
못다한 詩句
九泉에 가 읊고 싶다.
가을을 관으로 쓰고
비 내린 뒤끝이라
생기 도는 나뭇잎들
준마의 갈퀴같은
머릿결을 출렁이며
중양절
햇빛을 받아
구슬치기 하고 있다.
봄 여름 푸르름을
무던히도
자아올려
속잎에 속잎 튀우며
하늘 덮던 검은 숲이
가을을
관으로 쓰고
詩吟소리 투명하다.
큰불이 났네
설악에 불이 났다기
동이 들고 뛰다 보니
小白에 옮겨붙어
하늘로 치솟는다
지리산
마고할멈도
불에 데어 뛰어오르고…
앙상하니 뼈만 남게
나무들을 털어내며
싸다니던 바람도 그만
다리에 쥐가 올라
먼 서녘
하늘 물들이고
깊은 잠에 빠진다.
풀잎 기도
-上海 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숨소리 생생하신
김구 선생 좌상 앞에
동강난 허리 싸잡고
부스럼도 않은 풀꽃
죄스런
머리 조아려
무릎끓고 비옵니다.
나라를 찾으려다
꽃잎처럼 지신 임들
천정, 벽에 떨고 있는
피어룽을 재우소서
망둥이
꾀춤 추는 조국도
이제 눈을 뜨오리다.
四海에 메아리 친
尹義士 던진 그 분노
어둠 깔린 홍구공원
불꽃으로 타오르고
先烈
만세소리가
별로 돋는 異國 하늘.
歷史를 마신 長江
長江은 유비의 것도
조조의 것도 아니었다.
물비늘이 회를 치며
가슴에 와 안겨들고
귀비성
귀곡소리로
물레 잣는 해와 달.
英雄인지 梟雄인지
仁義가
신조였던
끝내는 權道를 써서
漢中王位에 오른 유비
白帝城
지붕 위 하늘
멍이 들어 짙푸르다.
八陣圖 치던 공명도
거기 갇혀 헤맨 육손도
한올씩 깃털만 남아
구담혐에 걸려 있고,
긴 역사
다 마시고도
말이 없는 삼협 장강.
그윽하던 그 난향
-故 김헤배 여사 영전에
아픔이 아픔을 불러 산악보다 무거워라
만나면 서로 껴안고 불 부비던 우리 우정
구만리 장천을 홀로 학이 되어 가시었다.
서화에 초대작가 詩作 으뜸이시던
사임당 높은 기품 온몸으로 풍기시며
붓끝에 살아 숨쉬던 난초 향기 그윽하다.
어릴 땐 공주처럼 음악시간 지휘자로
성년 후엔 정경부인 겸양으로 내조하신
당신의 생애 위에 핀 백장미꽃 향기롭다.
情으로 이뤄놓으신 素心會를 가꾸시며
한복으로 단장하고 둘러앉아 갈던 詩田
이조의 은장도처럼 날이 서던 부도였다.
안으로 현모양처 士大夫家 범절이요
고아원 양로원에 불우이웃 돕던 사랑
복록에 공덕을 얹어 저승길을 밝히소서.
원앙의 궁전
-손부 맞던 날
볕바르고 살진 뜰에
너를 옮겨 심는 날은
百合보다 장미보다
향그러운 아침 햇살
그 햇살
올올이 뜯는
이 환희의 교향곡.
원앙의 궁전처럼
두 손 모아 엮어나갈
너희들의 보금자리
푸른 瑞雲 감아 돌고
추녀끝
정을 물어나르며
조잘대는 제비 한쌍.
밝고 맑은 파란 슬기
사대부집 향기 맵고
사철 푸른 생애 위에
필로 펼칠 고운 아미
오월의
태양을 안은
사포 속에 孫婦여.
파랑새
-손녀 정혜에게
동해에 떠오르는
해돋이만큼이나
홰를 치며 날아드는
비취빛 풋솜 깃털
번뇌도
눈빛에 녹는
너는 나의 파랑새.
물면을 뛰어오르는
은비늘 같은 예지
네 손으로 심지 돋워
밝아올 내일날이
합장한
손톱 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재현이 이 꺽다리야
-서울공대 수석 합격한 손자에게
음섣달 초승인데 진달래 활짝 피고
동천하는 용비늘이 무지개로 서는 하늘
폭폰 양 귀를 울리며 박수리 튀는 비말.
재현아 이 꺽다리야 너를 위한 등용문이
잘 닦인 길을 튀으며 눈앞에 와 열렸구나
신들매 고쳐 매고서 앞만 보고 달리거라.
돈짝만한 해가 떠서 하늘 땅을 다스리듯
네 작은 머리에 두른 후광 하도 눈이 부셔
굶어도 시장끼 모를 할미 꿈도 영근다.
누나는 法을 배우거 아우 너는 첨단과학
나란히 책을 끼고 들어서는 교문 너머
관악산 먼 봉우리가 잔설 이고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