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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식으로든 이 책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너무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생각하지 않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공식이나 쉬운 해결책을 찾으려는 충동을 버리고 각자의 경험 속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인과관계들에 당황하지 않고 다면적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의 신비로움과 역설을 찬미하며 인생이란 복잡다단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빠르게 변화사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단,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신성을 가르치려고 계획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약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약해지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살아가는 데 꼭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려고 계획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승리가 보장된다.
# 심리요법을 잘 수행하는 사람들, 성장 가능한 신비로운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바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축복은 그 안에 저주를 감추고 있으며, 부작용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강한 의지에서 나타나는 최악의 부작용은 강한 기질, 즉 분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의지에 마구를 채울 것인가?
# 이런 사람들을 치료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들의 부모들을 심판대 위에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상당히 복잡하다. 기소와 변론이 필요하고 최종적으로 판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소와 재항소를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값싼 용서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유죄 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요. 내 부모님들은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더 잘 하실 수도 있었어요. 제게 잘못을 저지르신 거예요.”
# 반면에 용서란 악과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이다. 의붓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 만할 이유가 있더라도 아버지가 하신 일은 잘못이에요. 아버지는 제게 죄를 저지른 겁니다. 전 그걸 알고 있지만, 아버지를 용서할게요.” 아무리 지혜를 발휘해도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정말로 힘든 과정이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 이것이 그들의 뼈라면, 그들이 그 뼈를 계속 물어 뜯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 진심으로 자신들의 부모님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너무너무 어렵다......... 우리가 용서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왜냐하면 치료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죽음에 대한 관점은 심리적,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커다른 자극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리석고 늙은 내 자신에 집착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사심 없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이라는 촉수는 민감하고 날카로워서 항상 늘 시시때때로 잘라내야만 한다. 나 자신도 나르시시즘을 처음으로 인지한 후 40년 동안 지금도 여전히 잘라내고 있다.
# 죽는 방법을 배워라. 종교는 우리에게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나오는 길이야말로 의미있는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은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아라는 관념은 환영에 불과하다. 예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누구든지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즉, 누구든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고집하는 자) 생명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니라.”
#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주로 자신들의 내부가 신비로움의 대상이 된다. 만일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자신의 초기 유년기의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운다면, 그래서 그 환자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나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경험이나 사건의 중요성 그리고 자기의 유전자나 기질, 천성이나 교양, 자신의 꿈, 그 꿈이 의미하는 것을 탐사하기 시작한다면, 치료는 더욱 진전할 것이다. 반대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자신의 천성과 유전자, 유년기나 자신이 소망하는 꿈의 신비로움에 대한 기호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탐사의 여정이 더 진전할 도리가 없게 된다.
# 그러면 나는 “아시겠지만, 예수가 설교를 하실 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답니다.”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이란 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가장 좋은 번역은 ‘혼란스럽다’이다.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혼란이야말로 해명을 필요로 하고 혼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첫 번째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들도 40분 이상이나 시간이 걸렸고, 사람들이 대부분 과제를 제출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1시간 이상 시간을 끈 사람도 많았다.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 사실은 리스트의 두 번째 세 번째 항목을 도표상에 분류해 보니까, 12사람 모두 2번 문항에 대해서 정확하게 똑같은 답을 써냈다는 것이었다. ‘사랑’, ‘신’, ‘나의 가족’이 아니라 ‘내 자신’ 오직 ‘내 자신’이었다.
#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매우 힘들게 통합된다. 이러한 과정은 신화 속에서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치러야 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힘든 통합의 과정을 겪어내고, 같은 문제에 대해서 우뇌와 좌뇌,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동시에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세상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영웅이 나와서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뒤를 돌아보면 왜 안 된단 말인가? 결국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뒤만 돌아보며, 후회하고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마치 살아 있는 소금기둥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은유적으로 해석하면서, 나는 롯의 아내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깊은 뜻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심오한 진리를 알게 되었다.
# “인간의 본성이란 팬티를 입은 채 볼일을 보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와 엄마 사이의 관계가 좋고, 그 엄마가 참을성이 있어서 지나치게 닦달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면ㅡ불행히도 이런 상황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그래서 정신의학자들이 그토록 용변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ㅡ그래서 이러한 상황들이 만족되면 아이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에, 엄마에 대한 선물이었던 행위가 아이의 본성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 나는 이런 경험을 훨씬 이후에 또 한 번 겪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심리치료를 담당하면서 이상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교를 믿는 사람들이 고통이나 골칫거리 혹은 여러 어려움에 빠져서 나를 찾아와 정말로 치료에 집중하고 나면, 심심치 않게 이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의심을 품고 질문을 남발하는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 심지어는 무신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혹은 회의론자였던 사람들이 고통이나 문제점, 어려움에 봉착해서 나를 찾아와 열심히 치료를 받고 나면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신실하고 영적으로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 된다.
# 그 남자는 물었다. “그러면 제게 희망이 없단 말인가요? 아무런 처방도 해주실 수 없으신가요?” 융은 이렇게 말했다. “딱 한 가지 있기는 한데요, 종교에 귀의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고 나서 술을 끊게 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게는 그럴 듯하게 들렸어요.”
# 첫 번째 이유는 AA가 실행하는 12단계야말로 종교를 갖도록 유도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AA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영적’인 귀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AA가 조직적인 종교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12단계의 핵심은 영적인 힘이라는 개념이고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사막을 통과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즉 우리가 왜 신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 AA에 속한 알코올 중독자들은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고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축복이란 알코올 중독이라는 축복을 말한다. 알코올 중독이 축복인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주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코올 중독이라는 엄청난 축복이야말로 이 병의 본질이다. 알코올 중독은 사람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므로 그 결과 알코올 중독자들은 공동체ㅡAA 모임ㅡ에 들어가게 된다.
# AA에 있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자질이란 자신들을 회복되어 가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회복된 알코올 중독자라든지 전-알코올 중독자라고 하지 않고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라고 일컫는다. ‘회복되고 있는’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들은 회복되고 있는 과정이 진행 중이며, 위기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리고 위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이 남자가 거의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람의 좌절은 실제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에 띈다......... 또한 나는 이 사람이 늘 슬픔에 빠져 있고 늘 우울하고 근심에 빠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존경할 만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비록 상처를 감싸는 사랑으로 편견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지만, 한 때 오해를 받았고 철저하게 고독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혼자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해서 어느 누구도 이분의 자리를 메울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 말은 기독교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혹은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전해 준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 뒤에 숨어 있는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과 영혼 그리고 능력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자기 자신을 내준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게 내주는 행위는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며 나는 기독교인이 된 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하느님은 내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이, 스캇. 요금을 내야지 내가 운전해 줬잖아.” ...........하느님이 “이후로 내가 운전을 해주지.” 라고 말할 정도로 특별히 대단한 계시를 나는 바라지 않았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계시에 따라 살아가면서 아직도 청소년기에 있는 내 인생의 운전석에 그분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종을 배움으로써 내 자신을 하느님에게 내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 수년 동안, 이런 환자들과 치료를 진행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세상을 아주 위험한 곳으로 간주한다. 둘째는 약삭빠르게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위험한 세상에서 자신들 혼자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해서 이 세상을 자신들이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어 안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좁히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럴 때 공포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 그러나 어쨌든 프란시스 톰슨의 유명한 시, 『하늘의 사냥꾼 The Hound of Heaven』에 나타난 것처럼, 신은 힘차게 우리를 쫓아오며, 우리는 그만큼 힘차게 달려야만 그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잡혔을 때,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신에게로 귀의하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 ‘기쁨에 찬 사건’은 아니며, 때로는 ‘빌어먹을 사건’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궁지에 몰려 있으며,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붙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 스캇 펙 박사의 두번 째 저서 <끝나지 않은 여행> 중에서, 제 마음에 들어온 문장을 옮긴 것입니다. 조금씩 심리학과 종교가 만나는 지점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김신웅 마음성장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