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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10)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약2:1-13
언젠가 한 스포츠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선수 차별’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현상에 대해 선수에 따라
해설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① 스타 플레이어가 공을 오래 가지고 있을 때 :
“네, 저렇게 혼자 오래 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니
참으로 뛰어난 개인기입니다.”
· 후보선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
“저렇게 혼자 오래 공을 가지고 있으면 위험합니다.
빨리 다른 선수에게 패스해야지요.”
② 스타 플레이어가 지연작전을 쓰면 :
“네, 시간을 조절하며 경기를 운영하는 감각, 탁월합니다.”
· 후보 선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 “저러면 안 되지요.
경기는 스포츠맨쉽을 발휘해서 끝까지 정정당당해야지요.”
③ 스타 플레이어가 판정에 불복하며 심판에게 심
한 제스쳐를 하면 : “네, 저 선수는 경기력도 뛰어나지만
인기 관리를 위한 쇼맨쉽도 대단하군요.”
· 후보 선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
“저거 안 됩니다. 선수는 일단 심판의 판정에 승복해야지요.”
세상의 특징은 차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가도 차별이 있습니다.
특별우대 고객의 편의를 위해 일반 창구를
줄이기도 합니다(금리 차별).
호텔에 가도 차의 크기나 종류에 따라 대접이 달라집니다.
학교에서도 부모의 차의 종류에 따라 또는
아파트의 평수 크기에 따라 노는 아이들의 그룹이 달라진답니다.
외모에 따라서도 차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성형수술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회사에 취직을 하려해도 부모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묻는 답니다(금수저 논란 – 흙수저).
얼마 전에는 한 백화점의 보석매장에서
젊은 여성고객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종업원 둘을
무릎 꿇리고 한참을 야단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갑질 논란).
이런 차별이 심해지는 사회현상을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있었던
서구 문화의 유입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여러 영역에서의 변화를 초래하게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현저한 영향이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소위 <목표 중심의 인생관>을 갖게 하고,
‘목표 중심적 사람됨’(‘task-oriented person’)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고 단기간의 한국의 문화,
산업의 발전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러나 그 결과 우리 문화 그리고 동양 문화가 오랜 세월 강조해온
‘관계 중심적 사람됨’(‘people-oriented person’)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오염된 교회>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공동체요 은혜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이런 세상적인 가치와 차별이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주류 사회의 중심 종교가 되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인정받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차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4절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초대 교회 안에서도 신분에 따라 또는
빈부에 따라 차별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일이라고 시작하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차별하지 말라는 제목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회당에, 즉 교회에 어떤 사람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명품으로 갖춰 입고 각종 비싼 보석들로
치장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한 마디로 있어 보이고 귀티가 흐르는 사람이 들어옵니다.
이런 사람은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합니다.
사실 이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인지 인격이 어떤지
또 그 사람이 정말 물질이 많은 사람인지 허영덩어리인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아름다운 옷을 입었고
금가락지를 끼었다는 이유로 외모가 화려하다는 이유로
교회가 그런 사람을 환대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당에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은 아첨하고 비루하게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변변한 옷이 없어 늘 같은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 무더위에 열심히 일하다가
예배 시간이 되자 그래도 예배는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왔기 때문에 땀 냄새도 나고 옷도 지저분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관심도 갖지 않고 저기
구석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앉으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차별을 넘어
가난한 성도를 업신여기는 행동이라고 책망합니다.
6절 상반절을 읽어 보십시오. 6절 a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 자신부터 걸리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받아 들여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심각하게 읽고
저와 여러분의 자세와 태도를 교정 받아야 할 것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할 4가지 이유>
본문은 우리가 외모로 성도를 차별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말하는데 대략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는 누구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도 육체를 따라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절대로 교회 안에서는
육체에 따른 자랑이 있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종류의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신분에 따른 차이를 극복 - 바울과 오네시모(몬)
민족(인종)의 차이 극복 - 바울과 디모데
외모 극복 - 사무엘과 다윗(삼상 16장)
예수님(사53장 :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바울(고후10:10 :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성의 차별 극복- 갈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빈부의 차이 극복 - 오늘 본문
둘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5절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세상은 가난한 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믿음 안에서
부요해지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마5:3).
가난한 사람들은 의지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깨닫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믿음에 부요하게 되는 데 보다 좋은 여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믿음에 부요한 반면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6b-7절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부자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약한 자를 압제하고 채무자를 법정으로 끌고가
노예로 삼아 버리는 등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예-보아스, 고넬료 등)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랬습니다.
부자들은 마음이 가난해지기가 힘이 듭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통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배경을 자랑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명예를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미련하고,
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신의 가진 것을
믿고 까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교만이지요.
천지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그 앞에서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것은 “오뚜기 앞에서 중심 잡는 것이요
,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요, 똥차 앞에서 방귀 끼는 것”입니다.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초라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목에 힘주고
다른 형제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천국의 주인으로
소중히 여기고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형제 차별을 금하고
이웃 사랑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9절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차별 없는 이웃사랑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법(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입니다.
현대의 법 개념으로 따지면 ‘헌법’에 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법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서의 헌법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으실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떤 외적 조건으로
인한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분명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9)이라고
선언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죄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또한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9)고 하십니다.
그것을 논증하기 위해 십계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6계명과 7계명).
10-11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다 할지라도,
율법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죄 없다’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형제를 차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유의 율법’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고 차별한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냉혹한 심판이 있지만, 긍휼을 행하여
가나한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존중히 대한
사람에게는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을 것”(마5:7)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심판의 날이 두려운 날이 될지,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지는 오직 우리 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합시다.
<맺는 말씀>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려면 먼저 교회 안의 차별부터 없애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충실한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벗어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가치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빈부, 신분, 인종, 문화, 남녀 등의 모든 차별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