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문장작법의 새 의의
1. 문장작법이란?
문장(文章)이란 언어의 기록이다. 언어를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 즉 말을 빼놓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문자가 그림으로 바뀌지 않는 한, 발음할 수 있는 문자인 한, 문장은 언어의 기록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장근 보름 만에 햇발다운 햇발을 보게 된 것은 겨우 어제 오늘 이틀뿐이다. 그러나 더위는 한층 더 뭉싯뭉싯 찌는 듯하다.
-염상섭의 소설 「사랑과 죄」에서
풍우(風雨) 한설(寒雪)에 대하여 우리가 이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안전지대를 가진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 안전지대인 우리들의 집 창문에 우리가 서로 기대어 거리와 거리의 모든 생활이 임림(霖霖)히 내리는 세우(細雨)에 가벼이 덮이어 거대한 몸을 침면(沈湎)시키고 있는 정경을 볼 때 누가 과연 그 마음이 기쁘지 않다 할 수 있으랴.
-김진섭의 수필 「우찬(雨讚)」에서
시가(詩歌)의 발생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물론하고 아득한 옛적 일이다. 이를 극단으로 말하면 인간이 발생하는 동시에 시가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에서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 듯이
올빼미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정지용의 시 「촉불과 손」에서
하나는 소설, 하나는 수필, 하나는 논문, 하나는 시이되, 모두 말을 문자로 적은 것들이다. 한자어가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할 뿐, 울림이 고운 말을 모으기도 하고 안 모으기도 했을 뿐, 결국 말 이상의 것이나 말 이하의 것을 적은 것은 하나도 없다. 문장은 어떤 것이든 언어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말하듯 쓰면 된다.’
‘글이란 문자로 하는 말이다.’
하는 것이다. 글은 곧 말이다.
“벌써 진달래가 피었구나!”를 소리 내면 말이요 써놓으면 글이다.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듯이,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문자로 쓰면 곧 글이다. 아직 봄이 멀었거니 하다가 뜻밖에 진달래꽃을 보고, “벌써 진달래가 피었구나!”란 말쯤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 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은, 또 문자만 알면 누구나 써놓을 수도 있다. 그럼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듯이 글도 문자만 알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누구나 문자만 알면 쓸 수 있는 것이 글이다.
그러면 왜 일반적으로 말은 쉽게 하는 사람이 많지만, 글은 쉽게 써내는 사람이 적은가?
거기에 말과 글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과 글이 같으면서 다른 점은 여러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말은 청각에 이해시키는 점, 글은 시각에 이해시키는 점이 다르다. 말은 그 자리, 그 시간에서 사라지지만, 글은 공간적으로 널리, 시간적으로 얼마든지 오래 남을 수 있는 것도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지적으로는,
먼저, 글은 말처럼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배워야 글자도 알고, 글 쓰는 법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말은 외국어가 아닌 이상엔 커가면서 거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 배워지고, 의식적으로 연습하지 않아도 날마다 말하는 것이 절로 연습이 된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생활만큼은 별걱정 없이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글은 배워야 알고, 연습해야 잘 쓸 수 있다.
또 말은 머리도 꼬리도 없이 불쑥 나오는 대로, 한 마디 혹은 한두 마디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한두 마디만 불쑥 나오더라도 제3자가 이해할 수 있는 환경과 표정과 함께 지껄여지기 때문이다. 연설이나 무슨 행사에서 쓰는 말 외에는 앞에 할 말, 뒤에 할 말을 꼭 꾸며가지고 할 필요가 없다.
“요즘 한 이틀짼 꽤 따뜻해, 아지랑이가 다 끼구..……벌써 봄이야.”
이렇게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말로는 완전히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글로야 누가 전후에 보충되는 다른 아무 말없이
“요즘 한 이틀짼 꽤 따뜻해, 아지랑이가 다 끼구..……벌써 봄이야.”
이렇게만 써놓을 것인가. 물론 이렇게만 써놓아도 문장은 문장이다. 그러나 한 구절, 혹은 몇 구절의 문장이지 실제로 발표할 수 있는 제목이 있는 한 편의 글은 아니다. 혼자 보는 일기나 비망록이나, ‘금일 상경’ 식의 전보 약문(略文)이나, ‘관계자외 출입금지’류의 표지이기 전에는, 글은 사람들에 내놓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개인간에 주고받는 편지 한 장이라도, 작든 크든 한 편의 글로서 체재를 갖추어야 한다.
“요즘 한 이틀짼 꽤 따뜻해, 아지랑이가 다 끼구..……벌써 봄이야.”
이것은 말이요 몇 토막의 문장일 뿐이다. 아직 한 편의 글은 아니다.
“요즘 한 이틀짼 꽤 따뜻해, 아지랑이가 다 끼구..……벌써 봄이야.”
이런 재료가 한 편의 글이 되려면 적어도 얼마만한 계획과 선택과 조직이 필요한가는 다음의 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춘(早春)
아침 햇빛이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붉은 벽돌담 앞에 어리었다. 그 위로는 쪽빛 같은 푸른 하늘이 어슴프레 얹히었다. 아래로 보이는 스리가라스에는 벽돌담이 일광(光)에 반사하여 분홍색으로 빛나고 다시 그 위로는 벽공(碧空)이 마주 이어 보이는 색채의 고운 대조는 무어라고 형용키 어려운 안타까운 정서를 자아낸다.
동안 뜬 담 위로는 아지랑이가 껴서 양염(陽炎)에 아물거린다. 그 위에 앉은 참새 두세 마리, 이따금 짹, 짹, 울어 주위의 적막을 깨뜨릴 뿐, 고요한 빈 방 안에 홀로 부처같이 정좌(正坐)하여 전경(前景)을 바라볼 때, 아! 그때의 심경! 그것은 청정, 동경, 기도, 정열 등 복잡한 감정이 바닷속의 조류같이 흘렀다.
초춘(初春)! 작금(昨今)의 기후는 어느덧 지난 시절의 그때를 문득 추억케 한다.
-이기영의 소품
소품(小品)이나 이만한 조직체를 이룬 뒤에야 비로소 한 편의 글로 떳떳한 것이다. 르나르(J. Renard)는 ‘뱀’이란 제목의 글에 “너무 길었다”라고 두 마디밖에 쓰지 않았지만, 그것은 『박물지(博物誌)』라는 큰 작품의 일부로서였다.
그러면 글이 되려면 먼저 길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을 아무리 몇 십 년치를 기록해놓는다고 해도 글이 되기엔 너무 쓸데없는 말이 많고, 너무 연결이 없고 산만한 어록(語錄)의 나열일 것이다.
그러니까 글은 아무리 소품이든 대작이든, 마치 개미면 개미, 호랑이면 호랑이처럼, 머리가 있고 몸이 있고 꼬리가 있는, 일종의 생명체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한 구절,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생명체적인 글에서는, 전체적이요 생명체적인 것이 되기 위해 말에서보다 더 설계하고 더 선택하고 더 조직·개발·통제하는 공부와 기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필요한 공부와 기술을 곧 '문장작법(文章作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글 쓰는 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나? 그저 수굿하게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무엇을 어떻게 쓸지 많이 생각하면[多商量]’그만이라고 하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도 타고난 천재라면 이 삼다(三多)의 방법조차 필요치 않다. 그러나 배워야 아는 일반인에게는, 더욱이 심리나 행동이나 모든 표현이 기술화하는 현대인에게는, 어느 정도의 과학적인 견해와 이론, 즉 작법(作法)이 천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도가 아닐 수 없다.
명필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난초를 그리는 데 법이 있어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안 된다(寫蘭有法不可無法亦不可)"고 했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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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將近) : 거의
임림(장마) : 비가 그치지 않는 모양.
세우(細雨) : 가랑비.
침면(沈湎) : 술에 절어서 아주 헤어나지 못함.
스리가라스 : (すりガラス磨硝子) 젖빛 유리. 간유리
벽공(碧空) : 푸른 하늘.
동안 뜬 : 거리가 먼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9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