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입원에 대한 단상은 거기까지다. 나는 통증을 기억하지 못했고
수사반장의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손엔 여전히 도라지가 들려있었으며
그렇게 일주일이 의미없이 흘러갔고
세상이 나를 삼류라 부르던날 TV에서 파이란을 틀어줬다.
아침신문에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집에 일찍 들어와 봐야지 했다.
아침공기는 상쾌했지만 머리는 복잡하고 근육은 경직되었다.
대학원 면접에 대한 걱정때문이었다.
오후의 햇살을 따가웠지만 면접은 최악이었다. 떨어지면 가을에 또 넣지 뭐.
학교앞 야구연습장에서 열판을 때렸다. 팔이 후들거리고 물집이 잡혔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우리집 대문에 돌을 던지는 큰소리가 났다.
도둑인줄 알고 숟가락을 들고 뛰어나가보니 세놈이 도망가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쫓아가 중1짜리 세놈을 붙잡았다. 아파트 일층만 골라 장난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꼴밤을 한대씩 먹이고 돌려보낼까 하다가 충격받으신 부모님께 잘못했다 말씀드리고 가라고
집에 데려왔다. 집앞에 경비원 다섯명이 와있었다.
경비아저씨들이 따끔하게 혼을내줘야 된다면서 경찰이랑 애들 엄마들을 불렀다.
온동네사람들이 나와 애들과 엄마가 우는것을 지켜봤다. 세상인심이 애들 장난에도
너그럽지 못하게 변했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고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늘은 훤했지만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셨다.
술을마시려 마음먹은것이 실수였다. 떡볶이 먹고 배부를때 집에 갈껄.
여기서부터 나는 서서히 강재가 되어갔다. 그날따라 용식이는 술을 뺐다.
다른날보다 술이 잘 받았다. 홀짝거리며 마셔도 여간해서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멤버가 좋았다. 명문고등학교 출신의 세친구가 합류한것은
용식과 내가 얼추 한병을 나눠마셨을 때였다.
상큼한 바닷바람에 취한 무소속, 삼겹, 섬세와의 우정은 우연과 필연, 아이큐와 이큐, 월드컵과 여자가 얽혀
복잡하면서도 끈끈한, 설명하기 힘든 에테르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섬세를 봐서인지 술에서 22도의 참이슬이 아닌 37.2도의 베티블루의 맛이났다.
무소속과 섬세는 운전을 해야하는 삼겹에게 술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사실 우리는 삼겹의 차를 타고 밤낚시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속의 검은잎을 떼내 미끼를 만들어 물속에서 갑갑해하는 붕어들을 꺼내주고 배스와 블루길로부터 쏘가리를 구해주고 싶었다.
아무튼 출발전부터 조금 들뜬 상태가 되버린 우리는 웃통을 벗어 어깨에 새긴 훈장을 보여주기도 했고 약혼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테이블에 가 약혼녀의 연락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우리의 유쾌한 술자리는 주인아줌마의 제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용식과 나는 밤낚시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세친구들은 양수리로 떠나가고
우리는 오비맥주 두캔과 짱구를 사서 근처 놀이터에 자리를 잡았다.
선선한 바람이 잠시의 열기를 빠르게 식혀줘 우리는 다시 차분해질 수 있었다.
얼마전 내가 사랑한다고 고백한 장백지보다 조금 못생긴 여자얘기를 했다. 그녀와 우리는 대학동창이다.
나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수줍게 '사랑하기 때문에'를 부르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후 그녀는 나의 학점과 술버릇,
심지어는 군입대와 휴가까지 인생 전반에 절절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둘만의 관계를 흐르는 특이한 에테르로 인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어정쩡한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예전의 애틋한 감정과 장미빛 인생에 대한 동경으로 약간의 용기를 내서 고백했지만 괜히 우정만 상해져 낙담하고 있던
차였다.
용식이는 내가 콩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만큼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에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나는 어깨를 약간 틀어 갈갈이 찢겨진 마지막 자존심과 가슴속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용식이가 웃옷을 들어 뭔가를 보여줬다. 놀이터의 수은등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 자세히 보이지 않아 뭐냐고 물어보자
가슴에 싹이 잘려 그자리가 검게 변했다고 했다. 이번주 로또가 안터졌다면서 누구나 마음에 황무지를 가지고 살아가니
건배나 하자고 했다.
자리를 옮겨 단골술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만원이어서 다른곳으로 가려다 맞은편 계산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졸업 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중학교 동창놈이 서있었다.
나와 용식이가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맞은편 문으로 나가버렸다.
이런.
몇초동안 뇌가 과부하가 걸려 아무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퍼뜩 파이란이 생각난건 그때였다.
해변가에 앉아 백란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하염없이 울던 강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의 사랑 얘기는 애틋한 편지 한장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도 어설프게 끝을 맺는구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어설픈 스토리의 끝을 내야했다.
감자탕집으로 달려가 술을 퍼마셨다. 다시는 깨어나기 싫었다.
내 7년간의 가슴앓이가 어떤식으로든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것은 너무 초라했다.
그래, 하던대로 중앙선에 가서 누워야지. 트럭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다 혀를 물어볼까?
어떻게던 이 영화의 크래딧을 올려야 한다. C안의 초고가 잡힐 무렵
놀랍게도
그 둘이 다정하게 감자탕집으로 들어왔다.
중학교 졸업 후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그놈과 눈물을 삼키며 안부를 열심히 물어대며 몇분이 흘렀다.
한번 마주앉은 그녀의 눈을 보고 싶었다.
흘끗봤다. 내눈을 피하고 있었다.
다시봤다. 고개를 돌렸다.
그 다음부터는 쭉 내가 쳐다보지 못했다. 혹시라도 눈에서 불같은것이 나올까봐.
첫댓글 도라지, 감자탕, 용식, 콩떡, 찰떡, 훈장, 수은등, 그리고 그녀!! 아 좋습니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