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던 날 꽃가마에 어머니를 싣고 집 앞 담배창고를 지나 소여 큰 내를 건너 고 진다래 산길을 따라 산골짜기 깊은 치락골에 들어서니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 다. 잔치가 끝나고 집안을 둘러보니 과연 집 곳곳마다 엄청난 양의 약재료와 뒤주 마다 쌀이 하나 가득하고 사람 키만 한 장독에는 수년 동안 묵은 고추장・된장 등 이 가득 넘쳤다.
매일 동네 사람들이 15명 정도 들어와 양꿀 몇 통을 가져오면 여러 부대의 약자 루를 쏟아 넣고 약재를 버무리고 나면 빙 둘러앉아 기응환, 포룡환, 안심환, 청심 환 등 7~8가지 한약을 만들어 은박지를 두르고 셀로판지에 싸서 저장해 놓으면 이튿날 아침, 도부장사(보따리 약장사)들이 대문 앞까지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서 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태화약국에서나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산약국 두 곳은 돈 벌기 바쁘고 아버지는 자전거에 약을 싣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장(보은, 화령. 청산, 관기, 원남)을 다니며 열심히 돈을 벌었다.
할아버지는 청산 돈이 통째로 굴러 들어와 주체를 못하고 쌀, 곡식이 곳간마다 넘쳐났다. 아버지는 이렇게 번 돈을 이웃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셨는데 대학이 형 부친 사촌이 보은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자 돼지 몇 마리를 사주고 어머니의 친정 에는 인근 광청리에 논을 많이 사주어 농사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외삼촌의 소에 쌀을 실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학자풍인 시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때 만주로 유학을 가 글도 많이 배운 분으로 이 집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은 유달랐다. 어머님 이름 김홍연(金洪淵)이 40세도 살지 못하는 액이 있다며 이름 잘 짓는 이를 불러 손금을 보게 하고 벼락 맞은 대 추나무를 달여 부적을 속옷에 달고 다니게 하는가 하면, 1천 개의 부적을 만들어 관기 미루나무에 붙여 오가는 사람 1천 명이 부르도록 해야만 수명이 연장된다며 온갖 정성을 들이기도 하셨다. 당시 작명가에게 쌀 10가마(지금 돈 1,000만 원 상 당)을 주고 새 이름을 받았다. 그래서 개명한 이름이 김희선(金熙善)이다. 시아버 지는 며느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란 것을 알고 늘 볼 때마다 “아가, 아가 밥 많이 먹어라” 하며 토닥여주었다.
이후 청산으로 이사와 첫아들 대식이를 낳고는 천성의 착한 할머니를 수양 어머니로 모셔 100일 기도를 시도 때도 없이 드리게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시루떡을 해 용왕제를 드리려 새벽닭 울기 전 청성 깊은 보 앞에서 손자가 악의 손길에서 벗어나 건강히 잘 자라도록 신명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할머니가 불교를 믿어서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