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만나다
♧ 내 인생의 멘토
물건 둔 곳을 자주 잊고 냄비도 태우기 일쑤라고 걱정했더니 후배도 그런 적이 많아 치매센터에서 검사를 받았다며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망설이다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아직은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제일 염려되는 게 치매가 아닐까 싶다. 후배는 「기적의 숫자 퍼즐 로직」을 소개해 주었다. 가장 낮은 단계였지만 복잡하고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해서인지, IQ가 딸린 것인지 30분, 1시간 가까이 매달리다 보면 눈은 침침해지고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미 최상위 단계를 하고 있는 그녀는 하나하나 해결해낼 때마다 맛보는 성취감을 얘기하며 격려했지만 나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쳤고 「기적의 숫자 퍼즐 로직」은 책꽂이 한편으로 밀려 한동안 잊어버렸다.
「기적의 숫자 퍼즐 로직」에 대한 반응이 시원찮은 걸 눈치 챈 후배는 내게 낱말 퍼즐이 더 잘 맞겠다며 「두뇌 UP 레시피 퍼즐북」 3권을 직접 주문까지 해서 가져왔다. 남편은 후배 덕분에 치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넉살부리며 놀리기까지 한다.
최근에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겪으며 스트레스로 질병까지 추가된 상황이었다. 마음과 몸은 하나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 계기가 되었다. 주변에서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물으면 많아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후배는 몇 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지만 삶을 긍정적으로 즐기며 생활한다. 넉넉한 마음을 지닌 후배는 이미 오래 전 장기기증 서약까지 해 두었고 사전의료 전향서도 이미 작성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진국에는 환자의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는 법이 있다하는데 흔히 말하는 존엄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후배에게 독한 약을 그렇게 먹는데도 장기기증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십 년 전쯤 했는데 그때는 건강했거든요. 생각해 보니 정말 내 몸 장기 중에 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후배는 흔연스럽게 웃었다. 장기기증이라…. 전혀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선뜻 용기를 낼만큼 이타적인 사람이 못되어 실천하지 못했는데 후배, 참 대단하다.
“갈 때가 되면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자력으로 먹거나 마실 수 없다면 연명치료는 절대하지 마라.”
어느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가까운 날 ‘사전의료 전향서’만이라도 해야겠다.
또 한 사람, 젊은 시절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 그녀도 연하의 후배다. 내가 모임을 탈퇴한 이후에도 가끔 나를 위해 연락을 해 온다. 집안에 박혀 꿈쩍 않는 나를 봄바람처럼 유혹하며 드라이브나 하자며 꼬드겨 불러낸다. 차도 마시고 맛집을 찾아 식사도 하고 한적하고 예쁜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마음을 나눈다. 그녀가 시간이 남아돌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없이 고맙다.
햇살 따스하던 오후, 산책로 벤치에 앉아 그동안 힘들고 아픈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넉넉하고 따스한 마음을 지녔기에 가능하다. 힘들 때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걸 모르지 않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해 보여도 나름대로 아픔과 걱정을 지니고 산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가끔은 세상 모든 고통을 혼자 껴안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마치 언니처럼 나를 다독여 주고 위로해 준다. 다음 주에 시간이 어떤지, 미리 연락하여 나의 일정에 맞춰 자신의 하루를 비우는 그녀가 더없이 고맙다.
♧ 너를 만나다.
길을 가다 단아한 얼굴의 여스님을 보았다.
“엄마, 나 어때? 스님이 됐으면 잘 어울렸겠지?”
박박 민머리를 드러내며 활짝 웃던 네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 네 마음도 웃었을까?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 일부러 넉살떤다는 걸 알기에 “그래, 예쁘네.”라고 말했을 것이다. 침대며 거실과 욕실까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떨어져 네 남편이나 딸이 불편해할까 봐 항암제를 바꾸고 머리카락 빠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미리부터 머리를 박박 밀었지. 네 번이나 머리를 밀면서도 엄마 마음 아플까 봐 네가 먼저 “예쁘다, 괜찮아 보이네, 잘 어울리네!” 하며 밝은 얼굴로 웃기까지 하던 네가 떠올랐다.
엄마 앞에서만 민둥 머리를 드러냈을 뿐 남편이나 네 딸 앞에서는 두건으로 꼭꼭 감췄지. 두건을 벗고 있다가도 네 딸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부리나케 두건을 쓰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조심을 했지만 네 민둥 머리를 네 딸에게 두 번 들켰다 했지. 처음은 제주 해변 식당 앞에서 세차게 바람이 불어 네 가발이 날아갔다고 했지. 그때 네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또 한 번은 떠나기 이틀 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네 딸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두건을 벗고 있던 네가 어쩔 줄 몰라 했지.
“엄마, 머리 왜 다 깎았어?”
일곱 살 네 딸이 그렇게 물었을 때 너도 나도 많이 당황했었지.
네가 떠난 후, 엄마는 욕실이나 거실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에 참 예민해졌다. 아프지 않아도 이렇게 많이 빠지는데, 독한 항암제를 4년 넘게 맞았으니 머리카락인들 온전했을까? 머리카락을 주우며 문득 문득 네가 힘들었을, 마음으로 삼켰을 피울음을 생각한다.
“엄마, 음료수병을 이렇게 버리면 안 돼.”
대충 씻어서 분리수거함에 버린 플라스틱 용기를 다시 꺼내며 말했지. 일회용기는 깨끗이 씻어 말려 분리해야 재활용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너희 집에서 설거지하다 음료수 병이나 플라스틱 용기를 대충 씻으면 단호하게 지적했지. 분리수거만큼은 철저했던 네 생각이 나서 대충 씻어 버리려던 우유곽이며 플라스틱 용기를 다시 깨끗이 씻어 싱크대 옆에 엎어 물기가 마르면 그때 분리수거함에 넣는단다.
더구나 요즘엔 코로나 19로 가정마다 배달음식이 많아지면서 플라스틱 등 일회용품이 넘쳐나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구나. 오늘만 해도 네 조카 온라인 수업으로 모처럼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음식 담은 플라스틱 용기가 엄청나서 싱크대에서 제대로 씻으려니 무척 힘들더라. 그런데 우리 어른들보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더 분리수거를 잘 한다는구나.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를 삼켜서 많은 생물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니 환경문제도 코로나 못지않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엄마는 지금처럼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야.
너는 영원히 떠난 게 아니구나, 엄마 곁에서 이렇듯 깨우쳐 주고 있으니 말이다.
첫댓글 2021년 전남여류문학 연간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