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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계묘년 추향 축관 행공기玉山書院 祝官 行公記
계묘(2023년) 추향축관 이동구
축관행공祝官行公 가능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다
9월 15일은 음력으로 8월 초하루이다. 병산서원운영위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병산서원은 음력으로 9월 초정일初丁日이 가을 향례날인데, 올해 추향 헌관과 축관․집례와 다음 원장과 재유사를 선임하는 자리였다.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옥산서원 유사를 지낸 서영조徐永祚씨의 전화가 왔다.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가을향사에 축관이나 집례로 선임選任하고자 하는데 다른 약속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그런 소임所任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사양辭讓을 하니 이번 옥산서원 추향에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장을 맡았던 이배용李培鎔 이사장을 초헌관으로 모시기로 하여 세계유산 추진에 참여했던 전문교수와 그때의 서원 관계자들을 헌관과 축집으로 선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곧 병산서원 별유사 류한욱씨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옥산서원은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가운데 세 번째 창건(1572년. 선조 5)된 서원으로 회재晦齋(李彦迪. 1491~1553)선생을 모신 유서 깊은 서원이다. 이런 서원에 5집사執事의 한 사람으로 선임됨이 영광스럽고 설레기도하지만 혹시나 무슨 실수나 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였다.
병산서원서 회의를 마치고 귀가 길에 또 전화를 받았다. 헌관으로 약속을 했던 전문위원이었던 교수 한 분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올 수 없다고 하여 류한욱柳漢郁씨를 헌관으로 하고 나를 축관으로 선임했다고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또 옥산서원 재무財務 이지한李志漢씨가 주소를 묻는 전화도 했다.
사축寫祝과 독축讀祝 연습
옥산서원 유사 이영환李泳煥씨에게 전화를 하여 축식과 축지규격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곧 축식과 축지규격을 휴대전화에 사진으로 보내왔다. 축식에 ‘維’ 다음에 작은 글씨로 ‘大年號’과 초헌관 성명 앞에 ‘後學某官’이라고 쓰여져 있어 다시 전화하여 물으니 ‘大年號’는 옛날 중국 연호를 썼는데 지금은 쓰지 않으며, 초헌관 성명 앞에는 ‘後學’이라고 만 쓰고 관직은 쓰지 않는 다고 하였다. 내일부터 쓰는 연습을 하고 시간되는 대로 읽는 연습을 하기로 하였다.
축문은
維歲次癸卯八月丙子朔十二日後學李培鎔
敢昭告于
先師文元公晦齋先生伏以學問淵深道德高厚東國攸
宗歲享悠久屬玆仲秋謹以淸酌牲幣用伸常薦尙
饗
이다.
이를 축지(26.5×34cm)에 5줄로 가득하게 써야 한단다. 쉽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글자를 익히지 못해 쓸 때 마다 한두 자를 빠뜨리거나 틀리게 쓰기도 하고, 각 줄마다 글자의 수가 달라 정해진 규격에 맞추기가 무척 어려웠다. 몇 번 써보니 축문도 저절로 외어지고 축지 규격에 어느 정도 맞추어 쓸 수 있었다.
축관 망기望記를 받들다.
9월 19일(음력 8월 5일)에 망기가 등기우편으로 송달되었다. 예전에 선고先考(아버지)께서는 망기하인(서원 도사령)이 집 대문 앞에서 “망기 아뢰오”라고 외치면 복장을 갖추시고 사랑채 대청에 초석草席을 깔고 서원을 향하여 안상案床을 놓으시면 도사령은 왼편에서 보에 싸인 망기를 봉치奉置하였다. 선고께서 망기에 대하여 재배를 하시고 꿇어 앉아 보를 풀어 망기를 확인 후 고이 접어 안상 서랍에 넣고 도사령으로부터 인사를 받고 주안상으로 대접하고 얼마인지 모르나 회자回資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지금은 망기하인 가져오지 않았지만 내 나름의 최대한 예를 갖추었다.
복장(도포, 갓)을 갖추고 거실 한 켠에 돗자리를 펴고 작은 탁자를 경주쪽(남향)으로 놓고 그 위에 망기 봉투를 봉치한 후 재배를 하고 봉투를 열어 망기를 확인하였다. 등기우편으로 왔으니 주안상 대접이나 회자는 줄 수 없었다.
한지 전지를 넷 끝을 말끔히 다듬어 진한 먹으로 숙달된 해서체로 잘 쓴 글씨였다. 서식은 도산서원과 비슷하나 고목告目 대신에 ‘望’자 아래에 “本院 享禮今月十二日丁亥當日午前賁臨仰望(우리 서원 향사례가 이번 달 십이일 정해 봉행되오니 당일 오전에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쓴 작은 띠지가 붙여 있고 마지막 일日자 앞에 붉은 색 원인院印이 반듯하게 날인되었고 아래에 세 사람의 착함着銜이 있었다.
이른 아침 빗속을 가는 길
망기에 붙은 띠지에 향례 당일오전 비림賁臨(오시라)하라고 하였다. 향사는 2일전 입재하여 재계와 준비를 하는데 당일 오전에 입재하라고 하니 의문이 있어 유사에게 전화를 하여 알아보았다. 초헌관에 여성이 선임되어 잠자리가 마땅하지 않고, 또한 정부의 중요한 직책[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일정이 바빠 당일 행공을 하기로 하였으니 당일 10시 까지 입재하라고 하였다. 초헌관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하 헌관집사는 분정과 감생 등 재계와 준비를 위하여 최소한 하루 전에 입재하여 모든 의례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는데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어떤 차질이 생기면 대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하는 유사들의 요청이니 도리가 없다.
인터넷에 옥산서원 가는 길을 검색하니 가장 거리가 짧고 시간이 작게 소요되는 길이 중앙고속도로와 군위영천간 고속도로 이용이었다. 헌관으로 천망된 류한욱씨[안동 하회거주.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협의회장]와 당일 아침 6시에 서안동 나들목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다. 최대한 일찍 도착하여 재계시간을 갖기 위해서 빨리 가자고 하였다. 당일 새벽 4시에 일어나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길 운전이 걱정되었다. 선현을 뵙게 되니 목욕부터 하고 간단하게 먹고 복장을 갖추어 5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칠흑같이 어두워 차선이 보이지 않아 서안동 나들목까지 20분도 안 걸릴 거리인데 40분이 걸렸다. 어둡고 억수같은 비 때문에 주위를 분간할 수 없어 나들목 주차장 입구를 못 찾아 헤매다가 류한욱씨와 통화를 하여 겨우 택배업체 담벼락에 붙여 주차하고 한욱씨 차에 올랐다. 고속도로 역시 앞이 훤히 보이지 않아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군위영천간 고속도로에 가서야 날이 밝아 오고가는 차량도 구분되고 차선도 보였다. 동영천 나들목을 나오니 빗발이 조금 자자들기 시작하였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빗속을 150여km를 2시간 동안 달리면서 무사하였음에 감사하였다.
8시에 옥산서원 유물관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억수는 아니지만 비는 그치지지 않았다. 걸어서 역락문亦樂門에 도착하여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들어가니 유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유사 이지국李志國씨의 안내로 한욱씨는 강당[求仁堂] 동협실[兩進齋]에, 나는 서협실[偕立齋]에 들어가 앉았다. 9시가 가까워서 참례할 유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 지난봄에 서악서원西岳書院에서 만났던 박규태朴圭泰씨와 최병한崔炳漢씨도 있어 무척 반갑게 만났다. 초헌관과 아헌관으로 출망된 이배용 이사장과 이상해李相海 교수는 KTX로 경주에 와서 시간이 임박하여 서원으로 들어왔다. 이배용 이사장을 수행한 서원관리센터 경영지원본부장 신시섭씨와 사진작가 이동춘씨를 여기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모두 40여명은 되는 듯하였다. 명절도 임박하고 우중雨中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입재하였다. 이곳은 도산서원과 달리 유생은 따로 통문을 보내거나 회문을 돌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각자 스스로 참례가 이 정도이니 지역의 유풍儒風(선현존숭과 의례에 관심)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집사분정執事分定과 감생瞰牲 그리고 사축寫祝
10시가 되어도 초헌관이 복장 갖춤이 늦어지고 있어 유사들이 안절부절 하나 어쩔 수 없었다. 11시가 가까워 분정개좌를 하였다. 강당 동편에서 서향하여 좌로부터 삼헌관이 차례로 앉고 북쪽에서 남향으로 축관, 집례 순으로 앉고는 유생들이 둘러서 앉고도 자리가 부족하여 일부는 뒤에서 서 있기도 하였다. 남쪽에서 북향으로 맨 끝에 재유사와 원장이 앉았다. 이는 스스로 서원의 말석末席임을 자임하기 때문이다. 헌관 앞에 초석을 펴고 안상과 지필묵을 배치하였다.
유사가 먼저 헌관 앞에서 한지 전지에 조사曹司 2명 쓰고 조사가 당중에 나와 남북으로 마주 읍을 하니 유사가 조사를 쓴 명지名紙를 접어서 선임先任조사의 도포자락에 넣어 주었고, 또 조사가 공사원公事員 2명 쓰고 공사원 앞에 가서 읍을 하니 한 발 나와 마주 읍하였다. 공사원 명지도 접어서 공사원 도포자락 넣어 주었다. 공사원이 사전에 준비한 집사분정(안)을 초헌관 앞에 제시하여 살핀 후 허락을 받아 분정기를 썼다. 분정기 첫 머리에 ‘祭 享分定’라고 쓰고, 39명의 분정 내역(초헌관 1. 아헌관 1. 종헌관 1. 대축 1. 찬자 1. 알자 1. 찬인 2. 판진설 4. 봉향 2. 봉로 2. 봉작 2. 전작 2. 사준 1. 장찬 2. 장생 2. 학생 1. 관세위 1. 직일 1. 원. 계묘 팔월 십이일. 공사원 2. 사준 2. 참제원 5)을 써서 강당 북벽에 게시하니 20m가 넘는 길이였다. 그리고 파좌를 했는데 유사가 “파좌 아뢰오”하면서 읍을 하였다.
분정을 마치고 아헌관과 종헌관, 축관, 집사는 서원에서 제공하는 흑단령黑團領과 갓으로 복장을 갖추고 감생瞰牲(희생을 검사하는 절차) 개좌를 하였다. 역락문 앞 마당 오른편에 따로 천막을 쳐서 비를 맞지 않도록 마련한 자리이다. 비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초석을 펴고 감생 가마[駕]를 봉치하였다. 가마는 돼지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가 움직일 수 없도록 나무와 철사로 제작되었다. 가마에는 살아 있는 돼지가 들어 있었다. 감생을 향하여 남쪽에서 동쪽으로 헌관과 축집 순으로 서고 그 외 집사들은 네 방향에서 섰다. 초헌관은 어떤 영문인지 감생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서원운영위원장이 초헌관을 대리하여 주관하였다.
재유사가 먼저 멍석의 네 모퉁이 마다 발로 바닥을 꿀리며 세 번 돌고, 손을 씻고 돼지의 등을 쓰다듬고 운영위원장 앞에 나아가 읍을 하며 ‘충充(살이 쪘습니까?)’하니 운영위원장이 읍을 하며 ‘돌腯(살이 쪘네)’하고 감생례를 마치는 파좌를 하였다. 바닥을 꿀리는 것은 희생犧牲을 천지신명께 아뢰는 것이고, 돼지 등[背]을 쓰다듬는 것은 살이 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감생할 희생犧牲을 향사 6개월 전에 반드시 수컷으로 준비하여 매일 우리를 청소해 가며 깨끗하게 사육하여 무변루와 서재[敏求齋] 사이 좁은 문 밖 감생단에서 감생의례를 하고 제수祭需로 장만하였다고 한다.
이번 향사는 당일행사를 하게 됨에 따라 전일에 제수는 장만하였고, 지금의 돼지는 감생의례를 위해 가져 왔다고 하였다. 옥산서원에는 전통적으로 살아있는 돼지를 감생하고 제수를 장만했다. 몇 년 전에 어느 누가 도축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 사례가 있어서 개선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도축법에는 정해진 도축장 외에서는 도축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제수로 장만한 시생豕牲은 강당 중앙을 지나 북벽 중문을 통과하여 체인문體仁門[사당 神門] 중문, 묘우 중문을 거쳐 제상祭床에 진설하였다. 강당 중문과 체인문 중문사이에 나무로 붙여서 임시교량을 설치하였다. 지름이 20cm도 안될 듯한 통나무 둘을 붙인 것으로 한 사람이 겨우 딛고 건널 수 있는 폭이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사용이 오래된 것으로 두 사람이 시생을 담은 가마를 들고 건너기에는 위험이 염려되었다. 그럼에도 장생掌牲으로 분정된 유생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옮겨 진설하였다. 시생이 지나는 강당에서는 헌관 이하 모든 제관이 시생을 향하여 읍을 하였다.
시생을 제상에 진설한 다음 사축寫祝을 하였다. 사축은 향사에 읽을 축문을 작성하는 절차이다. 세 헌관과 축관이 묘우 중문 앞 축대에 헌관은 서향西向으로 차례로 앉아서 사축과정을 살피고, 축관은 그 앞에 동향東向으로 꿇어앉아 축지를 준비하여 축문을 쓰게 된다.
모두가 자리에 앉으면 축관이 동문으로 묘우에 들어가서 향상 왼편에 비치된 축판을 가지고 중문으로 나와 꿇어앉아 축지를 준비하여 엎드려서 써야한다. 오늘은 당일행사로 시간이 부족하여 축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축관인 내가 꿇어앉아 엎드려서 글씨를 쓰기가 매우 불편하여 헌관께 양해를 구하여 작은 탁자를 사용하여 그냥 앉아서 작성하였다. 재유사가 한자씩 불러주고 짚어 주어 손은 약간 떨렸으나 틀리지 않게 쓸 수 있었다. 작성이 완료된 축문을 초헌관께 확인토록 하고 묘우 중문으로 들어가서 향상 왼편 축문과 폐백을 놓는 탁자[祝坫]에 반듯하게 봉치하고 동문으로 나와 사축 파좌를 하였다.
향사례享祀禮와 축관의 역할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았다. 모든 제관이 강당에서 개좌하여 향사례를 진행하였다. 먼저 집사들이 신문神門[體仁門] 앞에 나아가고 초헌관이 집례의 인도로 묘우廟宇(體仁廟)에 들어가서 진설을 살피고, 축관은 위패位牌함을 열었다. 위패에는 ‘문원공회재선생文元公晦齋先生’라고 써져있고 폭은 넓지 않으나 높이가 1m정도 되는 듯하여 혼자 위패함을 열기에 힘이 들어 도움을 받았다. 진설은 1보簠 1궤簋 4변籩 4두豆이고, 시생 통마리가 서두동미西頭東尾로 안치되고, 촛대는 동서 양쪽 끝이고 그 사이에 삼헌관 작爵이 진설되었다. 폐백과 향로․항합 진설자리가 부족하였다. 제물은 보궤는 이때까지 뚜껑을 열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변에 건조乾棗는 말린대추, 녹포鹿脯는 쇠고기육포 5조각. 황율黃栗은 깍지 않은 밤, 어포魚脯는 대구포 5마리이고, 두에 어해魚醢는 상어 돔베기, 녹해鹿醢는 쇠고기 육회肉膾, 청저靑菹는 무, 근저芹菹는 미나리로 진설하였다.
다시 신문 밖에 나왔다가 다른 집사들과 함께 묘정의 절하는 자리에 나아가 재배를 하고 손을 씻고 각자 정하여진 자리에 배치되었다. 축관 자리는 묘우 안 향상 서편이었다. 각 헌관이 절하는 자리에 들어서 재배를 하고 알자가 초헌관 앞에 나아가 “청행사請行事”를 아뢰었다.
영신례迎神禮인 전폐례奠幣禮가 진행되었다. 초헌관이 손을 씻고 묘우 향상 앞에 나아가 세 번 분향焚香을 하여 봉향奉香이 향로香爐를 아헌관 작과 종헌관 작 사이에 올리고 축관이 향상 옆 축상祝床에 있던 폐백幣帛(명주)소쿠리(대나무 제품)를 초헌관에게 건네고 초헌관은 폐백을 드린 다음 다시 축관에 건네어 축관이 폐백을 올렸는데 초헌 작과 아헌 작 사이에 진설하니 초헌관이 엎드렸다가 일어서서 동쪽 문으로 나와 제자리에 돌아왔다.
헌작례獻爵禮는 먼저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준소罇所에 나아가니 사준司罇이 술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봉작奉爵이 제상에 진설된 작을 내려 사준에게 제주를 받아 초헌관이 이를 확인하고 묘우에 들어와서 향상 앞에 꿇어 앉아 봉작으로부터 작을 받아 헌작獻爵을 하고 전작奠爵에게 건네 제상에 진설하고 초헌관이 약간 물러나 다시 꿇어앉으니 축관이 보궤의 뚜껑을 열었다. 보에는 멥쌀밥, 궤에는 기장밥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초헌관 왼편에 꿇어 앉아 축문을 읽었다. 초헌관은 다시 엎드렸다 일어서서 동문으로 제자리에 나가고 축관은 다시 그 자리(향상 서편)에 있었다. 이어서 아헌례와 종헌례가 봉행되었는데 보궤의 뚜껑을 여는 것과 축문을 읽는 절차 없이 초헌례과 같았으나 종헌례가 끝나고 절하는 자리에서 헌관만 재배를 하였다. 여기의 재배는 기제사忌祭祀에서 헌작 후 재배와 같은 의절이다. 즉 술잔을 드렸으니 잘 잡수시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다음은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를 봉행했다. 음복수조하는 자리는 중문 앞 축대築臺이다. 초헌관이 서향으로 앉고, 축관은 사전에 묘우 안에 준비해 둔 음복상飮福床을 받들어 초헌관 앞에 두고 잔대를 들고 준소에서 복주福酒를 받아 음복수조상 왼편으로 비켜 앉아 초헌관에게 잔대를 건네고 초헌관은 복주를 마시고 빈잔을 축관에게 주어 축관은 받아 상에 놓고 조육쟁반을 들고 제상의 육포 1장을 담아 음복상에 나와 초헌관에게 건네고 초헌관은 받아 뒤집어 놓고 빈 젓가락을 축관에게 주고 축관은 받아 상에 놓으면 헌관은 일어서서 제자리에 돌아와서 헌관 모두가 재배를 한다. 축관은 묘우의 본래 자리에 돌아간다.
축관이 철변두를 한다. 축관이 진설된 변과 두를 약간씩 움직여 돌려놓으면 모든 헌관과 학생(서원의 원로)이 재배를 한다. 이 재배는 가정의 기제사에서 사신배례辭神拜禮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그리고 망료례를 하였다. 초헌관이 묘우 밖 서편의 망료하는 자리에 북향으로 서야하나 이 날은 비가 와서 묘우 서편축대에 서고 축관은 묘우에 들어가서 폐백을 한 조각 잘라 축판과 함께 가지고 묘우 서문으로 나와 서계西階로 내려와서 망료자리에 와서 축문을 초헌관이 확인토록 하고 축판에서 뜯어 태우는 자리(기왓장으로 설치)에 넣어 태웠다. 초헌관이 제자리에 돌아오면 알자가 ‘예필禮畢’을 아뢰니 묘정에 있던 초헌관 이하 모두가 강당으로 나갔다. 제집사들이 절하는 자리에 돌아와서 재배를 하고 나가고 축관을 다시 묘우에 동문으로 들어가서 위패함을 닫고 동문으로 나와 재배를 하고 강당으로 나왔다.
음복례와 제공사祭公事
강당에 모두 모이니 곧 음복개좌를 하였다. 헌관들은 동쪽에서 서향으로 남쪽을 윗자리로 차례로 앉고 북벽에서 남향으로 학생[운영위원장], 축관, 집례 다음으로 유생들이 빙 둘러 앉거나 섰다. 남쪽에서 북향으로 맨 끝에 원장과 재유사가 앉았다. 원장과 재유사는 서원의 주인으로 겸손과 배려로 맨 나중에 자리를 한 것으로 여겨졌다.
음복상이 나왔는데 헌관과 학생, 축관, 집례, 원장, 재유사는 독상이고 그 외에는 3~4인 상이었고, 상에는 잔대와 육포 한 조각과 대추와 피밤 각 한 개를 담은 접시가 개인별로 차려졌다. 잔대에 유사가 초헌관부터 차례로 복주를 따르고, 초헌관에게 소감과 덕담을 부탁하여 초헌관이 유서 깊은 서원의 향사례에 초헌관으로 참례하게 되어 영광이었고 감사하다고 하고 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를 회고하며 앞으로도 세계유산 등재 서원의 가치증진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아헌관 이하 축관 집례까지 소감을 부탁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복주를 음복하라고 하였다. 복주 한 잔으로 음복례를 마쳤다.
옥산서원 항사의례가 도산서원과 다른 부분들
5집사에게 보내는 망기望記(望紙라고도 함)의 마지막에 세 사람의 착함이 특이 하였다. 이는 ‘비삼성 삼참備三姓 三參’이라고 하는데 망기를 받을 사람의 친가親家, 외가外家, 처가妻家에서 성姓이 다른 한 사람씩 망기 받을 자격을 확인하였다는 증거이나 지금은 성이 다른 문중에서 참여한 대표가 착함을 한다. 일종의 신원보증인 셈이다. 도산서원의 경우 예전에 그 자리에 재유사의 성명이 적힌 옛 망기를 본적은 있었다. 이는 작성자를 기록한 것이다. 또 도산서원은 망기를 보낼 때 고목告目(향례일정과 입재시각을 알림)을 동봉했는데 옥산서원은 별도의 띠지를 붙여 보냈다. 유생들에게도 도산에서는 따로 회문을 돌리거나 통문을 보내는데 옥산을 그렇지 않았다.
5집사와 학생(운영위원장), 재유사의 예복禮服도 흑단령이었다. 이를 옥산서원에는 재복齋服[‘中庸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근거]이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예전부터 흑단령이 서원 예복이었던 것 같다. 1733년 12월 도산서원 사제賜祭에 예관인 사신使臣의 예복이 흑단령이었고, 1747(영조 23)년 11월 25일 당시 입직승지였던 권상일權相一(1679 ~1759. 호 靑臺)에게 영조英祖가 “제향 때 원장은 어떤 관복을 입고 유생은 어떤 관복을 입는가?” 라고 물으니 권상일이 “도산서원은 복두幞頭와 단령을 착용하고, 도남서원道南書院(경북 상주 소재)은 갓을 쓰고 단령을 입으며 유생은 두 서원 모두 유건을 쓰고 청금靑衿을 입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정재일알묘整齋日謁廟가 없었다. 입재 이튼 날 아침 일찍 입재한 모두가 사당에 나아가 알묘하는 의례이다. 이 의례는 선현께 먼저 인사도 드리고 참여한 모두가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가다듬어 향사에 결례가 없도록 봉행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치재致齋의 시작이다. 치재는 출입을 삼가고 서원에서 경건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제수를 장만하고 주변을 깨끗이 하여 결례 없이 선현을 뵙는 준비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향사를 모실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복습하며 스스로 수양을 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당일행사를 하게 됨에 따라 시간 절약을 위하여 생략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감생瞰牲은 옥산서원에서는 바닥을 돌면서 꿀리는 것은 천지신天地神에게 아뢰는 의식이라고 한다. 돼지 등을 쓰다듬는 것은 살이 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원 옆 공터에서 도축하여 내장內臟과 체모體毛를 제거한 통돼지로 제수로 장만하여 강당[求仁堂] 중앙을 통과하여 체인문으로 연결하는 임시다리를 건너 묘우 중앙문으로 들어가서 진설한다. 도산서원에서는 생간례牲看禮라고 하는데 2009년 이전에는 살아있는 돼지를 메고 와서 전교당 뜰에서 의식儀式(제수로 충분한지 여부확인)을 하고 고직사 옆 공터에서 도축을 했으나 실정법(도축법)에 위반되어 도축장에서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가져와 의식을 하고 있다.
진설에 시생을 통돼지를 쓰니 향로와 폐백을 진설할 자리가 부족하였고, 변두의 제물은 상어 돔베기와 대구포가 별다르게 보이고, 보궤에 쌀밥과 기장밥을 담은 것이 특이하였다. 진설도에 보도簠稻와 궤서簋黍이나 일반적으로 멥쌀과 기장쌀을 담는데 여기서는 밥을 담았기 때문이다. 도산은 돼지의 상체上體는 원위에, 하체下體는 종향위에 진설하며, 보궤簠簋에는 멥쌀과 기장쌀을 찐 고두밥을 담고, 변籩에는 육포, 문어포, 마른대추, 피잣을, 두豆에는 육회, 전어젓, 무, 미나리를 사용하고 있다.
축관이 있어야 할 자리가 도산에서는 묘우 밖 축대 동쪽이 인데 이곳은 묘우내 향상 서편, 즉 독축할 자리였다. 이는 초헌관의 전폐례를 돕고 보궤를 열어야 하는 등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함으로 여겨졌다.
축문을 읽을 때 대체로 모든 제관이 부복俯伏(꿇어 앉음)하는데, 이곳은 축관이 꿇어 앉아 축문을 읽고 초헌관만 부복을 하고 다른 모든 제관들은 부복을 하지 않아 옥산서원만의 특이한 의절을 발견하였다.
향사례 절차에서 보궤의 뚜껑을 초헌관이 헌작한 다음에 축관이 열었다. 이는 기제사에 초헌관이 헌작 후 밥뚜껑을 벗기고[啓飯盖] 독축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도산서원의 경우에는 진설점시 때 위패와 보궤를 열었다. 또 헌관이 준소 앞에서 봉작이 작에 제주를 받는 것을 확인하고 묘우에 들어와 꿇어앉는 것이 특이하였다. 도산서원은 헌관이 준소를 확인만 한다.
음복수조 후 배석(拜席)에서 옥산서원에서는 헌관들만 재배를 하는 데, 도산서원에서는 헌관 뿐 아니라 묘정에 있는 모두가 재배를 한다. 이 재배를 퇴계 선생께서 백운동서원 향사례 의절 개정에서 “수희배受禧拜”라는 의미를 부여하셨다. 묘우출입[東門入 東門出]도 도산서원[中門入 東門出]과 다르다.
제공사祭公事 없이 음복례를 개좌하여 복주 한 잔으로 음복례를 마쳤다. 제공사는 제사공사라고도 하는데 향사봉행이 끝나면 의례봉행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를 물어 잘못이 있으면 다음에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을 하는 의식이다. 도산서원은 제공사를 하고 음복례 개좌를 하여 음복상이 들어오기 전에 향약을 읽고[讀約 : 白鹿洞規, 鄕立約條, 藍田呂氏鄕約] 음복상을 받아 헌관[분헌관 제외] 순배巡杯[3회]를 하는데, 옥산서원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복주부터 따르고 초헌관의 덕담을 듣고 헌관 순배巡杯 없이 한 잔으로 음복례를 마쳤다. 새벽에 향사를 봉행할 때에도 향사를 마치고 강당에 음복례 개좌를 하여 복주 한 잔으로 음복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 식사 전에 다시 개좌하여 시생음복을(익힌 시생과 대추, 밤, 포, 제주)하였다. 이때 5집사에게는 따로 시생의 일정부분을 잘라서 상에 받쳐 가져가도록 주었다. 이를 치번례致膰禮라고 하였다. 이 의례는『논어論語』「서설序說」에 “교제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大夫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에 유래한다고 하였다. 본래는 치번례致膰禮까지 마쳐야 향사례가 모두 끝이 난다고 한다. 이번에는 낮 행사로 점심식사 전에 치번례를 하고자 했으나 초헌관과 아헌관이 시간이 바빠 일찍 떠나는 바람에 의례는 못하고, 종헌관 이하 집사들은 치번[시생]만 받았다. 이는 다른 서원에서 경험하지 못할 의례인데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정의례가 집집마다 같지 않듯이 서원에서 의례도 서원마다 똑 같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옥산서원 향사례의 의절儀節은 특이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기회가 되면 연유緣由와 의미意味를 알아 봐야할 사항이다.
도산서원에는 1916(병진)년에 저술한『도산서원의절초陶山書院儀節草』라는 문서에 모든 의절을 규정하고 있어 이를 참고하여 시행하고 있다. 옥산서원도 향례享禮뿐 아니라 모든 의절儀節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문서가 있다고 하나 자세히 아는 분이 없었다. 기왕에 각 서원마다 의절을 규정하는 문서를 모아 비교할 수 있다면 서원문화 연구에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
의례를 포함한 풍속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 이번 옥산서원 향사는 전례前例에 없었던 당일행사로 치러졌다. 헌관들의 일정이 촉박促迫하여 당일행사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계를 하면서 전통적 의절을 배우고 익히며 그 의미를 되새기며 참례자 상호간의 우정을 쌓고 정보를 교류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필자의 경우는 경주지역 유림문화를 경험하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렇지 못했음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번 옥산서원 향사는 이틀 전에 입재하여 진행하던 재계와 행사준비를 당일 입재하여 진행하였고, 비까지 내려서 경건하며 질서정연하게 치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소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재유사의 주도로 유사들과 협력하여 모든 행례行禮를 아무 탈 없이 마쳤다. 이는 준비와 진행을 맡은 재유사와 유사들의 전심전력한 준비와 진행에 지역 유림들의 합심협력이 더해진 결과로 여겨지고 존경과 부러움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