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한 바와 같이... 본래 동이족의 문명의 문화였던 대학과 중용은 공자 이후로 중화족을 거치면서 변질된 것으로 보여진다.
@ 대학의 변질. '대학지도는 재 명명덕 하며 재 친민 하며 재 지어지선 이니라.' 대학장구에 서술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친민(在親民)은 재신민(在新民)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한학계의 오래된 주장이다. 이는 재교민(在敎民)으로 하자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즉.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가르치고 교화하여 새롭게 만들어야 할 대상인 것이지 그들과 함께 친하고 어울린다 해서야 선비의 체통이 서겠느냐는 식의 교만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본다.
이는 지난날 기독교 계통의 사제들 에게서도 나타났던 오류이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교화 하여 문명인으로 거듭나게 할 대상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들 원주민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보존하고 계승되도록 보호해야 한다. 하는 추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주공을 높이 받드는 이나라의 한학자들은 아직도 재신민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교만심과 자격지심은 한뿌리에서 자라난 두개의 싹대와도 같은 것이다. 지난날의 선비들에 교만심과 자격지심 은 엘리트 주의와 사대주의에 폐단을 낳았다. 때문에 소수민족의 전통문화를 깔보고 업수히 여기며 큰나라의 화려한 문화를 동경하고 현혹되어 스스로의 근본과 뿌리를 망각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저 2만년 신석기 문명의 맥을잇는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 아니다. 대학. 큰배움의 뜻은 뭇 백성들과 친하고저 하는데 있는 것이지 결코 그들을 이끌어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어 가는것은 아니라고 본다.
요즈음 세계에 어필하고 있는 케이팝 방탄소년단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예악을 전파하고 있다. '밝은 덕을 밝히는' '재 명명덕' 이다. 그들의 팬인 아미와 친하니 '재 친민' 인 것이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계승된 크나큰 배움의 본질인 것이고 동이족 문화인 것이며 그때문에 세계의 많은 청소년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칼군무는 절도가 있다. 춤에는 희노애락의 감성이 담겨있고 모두가 절도에 맞는다.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이다. 그로서 화(和)에 이르니 조화롭고 즐겁다. 락(樂)인 것이다.
이렇듯이 밝은 덕이라 함은 예악이며 조화이며 그로인한 화락(和樂)이다. 또 그것을 통하여 만인과 친하게 되니 저 대학장구에 서술된 내용과 부합한다.
'대학지도는 재명명덕 하며 재 친민 하고 재 지어지선 이니라.'
큰 배움의 도리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과 친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름에 있는 것이니라.
재신민이 아닌 재친민임은 각골 명심할 일이다. 추후라도 만약에 방탄이 아미를 이끌거나 가르치려 든다면? 그걸로 끝장인 것이다. 다만. 친할뿐인져!
@ 중용의 변질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에도 두가지 변질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 있다.
그 하나는... 성(性)을 이(理)라고 한점이다. 그리고 이(理)에 '인.의.예.지'를 넣었다. 이는 맹자의 사단칠정론이 시초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한학에서 희노애락은 '희노애비애오욕' 칠정이라 하여 기(氣)로 분류한다.
그런데 중용장구를 보면 분명히 '희노애락'이 언급되어 있다. "희노애락 미지발이 중이요 발이 개 중절이 화이다."
그러니 원문에 충실 한다면? 중용은 성리학이 아니라 성기학이 되어야 맞는다. 이걸 뒤틀어 버린게 맹자의 사단칠정 론이다.
사단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의미한다. 각각 인의예지 의 단초가 되므로 성즉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이 여기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사단은 이성이라기 보다는 감성에 가까운 것이다.
예를들어.... 죄를짓고 벌을 받는것을 당연히 여기는 마음은 이성이다. 그러나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할수 없어 측은히 여겨지는 마음은 감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맹자는 측은지심의 근원에 이성인 어질음(仁)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에따라 후대 선비들은 희노애락은 금기시 하고 인의예지만 강조 하였다. 이는 중용장구의 서술을 무시한것이다.
근세에 발견된 자료에서도... '성즉 희노애비지기'라는 대목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성즉기(性卽氣)라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 하려면 그동안 떠받들던 맹자가 비판받고 구설에 오를수 밖에 없으니 한학자들은 경원시 하는듯 하다.
하지만.... 맹자가 제공한 성즉리 때문에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논란이 많았다.
하여.... 이발설. 기발설. 기승이발설. 이승기발설. 이기일원론등이 등장한 것이라 본다.
어쨋거나.... 이는 인간의 선택과 판단과 행동이 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냐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냐 혹은 이성과 감성이 합치되어 비롯된 것이냐의 문제다.
맹자는 인간의 행위가 감성적이기 보다는 이성적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중용장구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사단칠정론을 창작하여 억지로 성에 인의예지를 집어넣은 것이라 여겨지며 이는 동이족 문화에 깊은 경지를 이해 하지 못한 소치에서 비롯된 오류라 생각한다.
중용에 변질은 또 하나가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것은 중용의 설명 모델이다.
한학자들은 유가의 중용과 불가의 중도를 모두 '현악기의 조율'에 빗대어 설명해 왔다.
즉. 거문고나 가야금의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면 제소리가 나지 않으니 적당히 조율해야 하듯이.... 중용이든 중도든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것이 요지라는 설명이다.
이의 영향을 받은 불가의 스님들도 중도를 설명하며 현악기의 조율을 예로들어... 고행도 안되고 방일도 아니되니 그 중간을 취하여 수행하라고 한다. 석가부처가 고행을 중단하고 보리수 나무아래 그늘에서 깨우쳤으니 그와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 본다. 그것은 '양 극단의 배제'이기 때문이다.
중용장구에는 분명히 '양극단을 잡고 중용을 베푼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논어에도 중용의 도의를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경에..... [물고기는 못에서 뛰어오르고 솔개는 구름속에서 나타난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중용의 위와 아래로 들어남이 아니겠느냐?" 이 설명 어디에도 양극단의 배제는 찾아볼수 없다. 만약 양극단의 배제가 중용의 도의 였다면 날짐승과 물고기를 배제한 길짐승만이 중용에 적당할 것이다.
그만큼 '양극단을 잡고 중용을베푼다' 하는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때문에.... 육예의 세번째에 활쏘기를 둔것이라 여겨진다. 활쏘기야 말로 중용의 비유 모델로 적합하게 느껴진다.
활채를 잡은 줌손이 한쪽 극단이며 활줄을 잡은 각지손이 반대 극단이다. 이 양극단을 잡고 힘껏 벌린후에 그렇게 생성된 공간에 화살을 넣어 쏘아 보낸다. 말 그대로... '양 극단을 잡고 중용을 베푸다' 하는 것이다.
그때문에 예로부터 활꾼들 사이에는 '활쏘기에는 중용의 도가 담겨있다.' 하였으며...예기나 논어에도 활쏘기가 여러번 언급되어 있고 심신수련의 방법으로 임금으로부터 하층민까지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떠나 누구나가 활쏘기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활쏘기의 도리를 인간사에 적용해 본다면? 줌손은 사회생활에 비견되니 목표를 지향함에 굳건하여 동요치말며 각지손은 가정생활에 비견되니 물화를 모음에 집요하여 그침이 없어야 그렇게 생성된 가정속에 자녀를 양육 하여 사회로 진출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양극단을 잡고 중용을 베푸는 이치인 것이다.
부모는 활에 자녀는 화살에 비유한 바레인의 시인이자 사상가의 글귀도 있으니 그역시 이러한 도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진다.
불가에서도 이러한 도리에서 멀어져 양극단을 배제한 중용을 중도라 여겨 이판사판의 분란이 야기된 것이겠다.
교리를 담당한 스님이 이판승 이고 절 살림을 담당한 스님이 사판승 인데 역시 양극단이고 이성과 감성의 마찰 과 유사한 분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판사판 싸움에 스승들인 아사리 까지 더해지면? '이판사판 아사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의 가르침이든 선사들의 모습이든 어디에도 양극단을 배제하라는 뜻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행과 방일을 배제한 수행은 대개 좌선이 적합한 것인데... 선불교에서 이를 비판한 예화는 부지기수로 많다.
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선아닌것은 없다.' 라고한다. 가거나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다물거나 움직이거나 머무름에 선 아닌것이 없다.
공기좋고 물맑고 그늘좋고 정갈한 장소를 찾아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히 양극단의 배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행과 방일의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행하고 때로는 방일함에 잠시도 떠나지 않는것 그것이 선의 인 것이다.
이를 선문촬요 에서는 세가지 요점 으로 가르쳤으니... '조신. 조식. 조심' 이 그것이다. 몸을 고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른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다도가 또한 이와 다를바 없으니.....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 바르게 앉은 자리에 차마시기가 반쯤 무르익으면 문득 다향이 새롭게 느껴 지리니 이를 묘하게 운용하면 비로소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리...'
정좌는 조신이요. 향초는 조식이니 묘용은 조심인 것이다.
하여... 다선일여라 하였다.
활쏘기가 또한 이와 같으니 전추태산 후악호미 비정비팔은 몸을 고르게 하는 것이며... 흉허복실로 호흡을 고르며 발이부중 반구저기로 마음을 고르는 것이다.
하여.... 정심정기(正心正己)라 비석에 새겨 세워둔다. 우리 옛말에 고루다와 바루다는 같은 의미다. 그것이 고르다 와 바르다 로 표준화 되었다. 본래는 고루다 바루다 벼루다 베리다 맹글다 망길다 등이였던 우리말이 표준화 되면서 변해진 것이겠다.
어쨋거나... 고르면 바르게 된다.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으면서도 대충 적당히 하는것은 아니다. 활쏘기에서 적당주의는 발붙힐 자리가 없다.
적당주의를 대표하는 말로서 '과유불급'이 있으며 계영배는 그 비유모델로 많이 알려졌다.
계영배는 지나치게 많이 채우면 스스로 싹 비워진다.
그러한 도리로 전해지노라니 결국은 대충 설렁설렁 이라는 의미로 와전된 것이다. 술잔 채우기는 그렇게 인식 될수밖에 없다. 누가? 술잔에 눈금을 그어놓고 정확히 일치 시켜 따를까? 그저 부족한듯 싶을때 멈추는 것이니 양극단의 배제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육예의 세번째인 활쏘기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활시위를 대충 설렁설렁 당긴데서야 말이 되지를 않는다.
기운(氣運)을 써서 힘껏 밀고 당김에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몸을 골라서 궁체를 잡고 호흡을 골라서 기운을 쓰며 마음을 골라서 목적에 이르는 것이 활쏘기이다.
그러기에 예악에 이어 세번째로 중요시 되었던 것인데.... 공자 마저도 그 연관성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단지. '활쏘기는 군자에 풍모가 있으니 서로 양보하여 읍하고 사대에 올라 9시 9중이면 겸양하여 한발은 쏘지 않았다.' 라는 정도만 기술되었다. 예악과 중화의 도리가 활쏘기에 담겨 있음을 밝혀놓지 못한것이다.
하물며..... 고분고분 따르고 복종하는 것이 예절인 것으로 치부하는 작금의 풍토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며 이를 바로 잡아야만 세계인 앞에 신석기 문명의 정통 계승자로서 떳떳이 나설수 있을 것이다.
예(禮)는 절(節)이다. 서양 오선보의 마디와도 같다. 박자이고 장단이다. 희노애락 감성이 발현되지 않은 중(中)인 것이다.
악(樂)은 화(和)이다. 서양 오선보의 음표와도 같다. 가락이고 멜로디이다. 희노애락 감성이 발현하되 모두 절도(중)에 맞는 것이다. 즐거움 락(樂)인 것이다.
궁시를 정제하고 사대에 정렬함이 조신이며 중(中)이다. 호흡을 고르고 운기하여 밀고 당김에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음이 화(和)이다. 그렇게 쏘아보낸 화살이 목적을 이루니 그것으로 마음이 즐겁다. 조심이며 락(樂)인 것이다.
이런것인데 도대체 고분고분 따르고 복종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중절의 도리를 지키는 까닭은 조화를 이루고 친하고저 하는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활터 예절에 '동진동퇴'가 명시된 것이다.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섬으로서 조화를 이루고 친함을 추구한다.
방탄 소년단의 칼군무.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서며 조화와 친함을 밝혀준다.
그러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의 팬들 아미와 친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청소년들이 열광한다.
결코 가르치거나 이끌거나 교화시켜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것이 저 이만년 신석기 문명의 유산이며 그를 계승해온 동이족 문화라 확신한다.
첫댓글 칼릴 자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