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권력의 토대]
명제 6 — 권력은 계획과 신뢰로 구축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까마귀는 자신을 해친 인간의 얼굴을 수년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인간을 만나면 다른 까마귀들을 불러 함께 경계한다. 반대로 자신을 도운 인간에게는 먹이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보인다. 신뢰와 배신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에 따라 위임을 조절한다. 신뢰는 기억에서 온다. 과거의 행동이 현재의 위임을 결정한다. 까마귀에게도 신뢰 없는 권력은 없다.
범고래 무리는 나이 든 암컷 마트리아크가 이끈다. 어느 계절에 어느 해역에 연어가 많은가. 어떤 기후 패턴이 나타나면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가. 이 계획이 무리의 생존을 보장한다. 마트리아크가 제시한 계획대로 무리가 이동하면 먹이를 찾는다.
그 성공의 반복이 신뢰를 쌓는다. 쌓인 신뢰가 마트리아크의 권력을 만든다. 계획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권력을 구축한다.
1. 뜻풀이
권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획과 신뢰.
계획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구성원이 따를 수 있는 구체적인 경로를 만드는 것이다.
신뢰는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말한 대로 할 것이라는 믿음.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 구성원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계획 없는 신뢰는 맹목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따르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의존이다. 신뢰 없는 계획은 공허하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그것을 실행할 자를 믿지 못하면 위임이 따르지 않는다. 계획과 신뢰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권력이 구축된다.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성과의 반복이다. 계획한 것을 실행하고 그것이 성공하는 것이 반복될 때 신뢰가 쌓인다.
둘째는 일관성이다. 좋은 때나 나쁜 때나 같은 원칙으로 행동하는 것.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지 않는 것.
셋째는 투명성이다. 계획을 숨기지 않는 것.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구성원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
2. 관중과 마키아벨리의 생각, 그리고 다른 주요 인사들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뢰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관자》에서 그는 말했다. 신뢰가 없으면 명령이 서지 않고 명령이 서지 않으면 국가가 없다.
관중이 설계한 제나라의 신뢰 구조는 구체적이었다. 법을 만들고 그것을 일관되게 적용했다. 상을 반드시 주고 벌을 반드시 내렸다. 말한 것을 반드시 지켰다. 이 일관성이 신뢰를 만들었다. 신뢰가 위임을 모았다. 위임이 환공의 권력을 키웠다.
관중은 또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0년을 계획하는 자는 나무를 심고 100년을 계획하는 자는 사람을 키운다. 권력의 구축은 장기 계획의 산물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로마 공화정의 힘이 시민의 신뢰에서 나왔다고 분석했다. 로마의 집정관들이 법을 일관되게 지켰기 때문에 시민들이 위임했다. 마키아벨리는 또 말했다. 인민의 신뢰를 잃은 군주는 아무리 성을 높게 쌓아도 안전하지 않다.
공자는 신(信)을 인지의신예(仁知義信禮) 다섯 덕목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논어》 안연편에서 자공이 정치의 요체를 물었을 때 공자는 세 가지를 들었다. 식량, 군사력, 신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신뢰라고 했다. 식량도 군사력도 없어도 신뢰가 있으면 나라가 선다. 신뢰가 없으면 식량과 군사력이 있어도 나라가 서지 못한다.
14세기 아랍의 역사철학자 이븐 할둔은 《무깟디마》에서 아사비야(Asabiyya), 즉 집단 연대감을 권력의 핵심으로 봤다. 아사비야는 계획과 신뢰가 만드는 것이다. 함께 살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쌓이는 연대감. 아사비야가 강한 집단이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집단은 점차 사치와 안락에 빠져 아사비야를 잃는다. 계획이 사라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권력도 무너진다. 이 순환이 역사라는 것.
▷ 이븐 할둔 Ibn Khaldun, 1332~1406. 아랍의 역사철학자. 역사의 순환 이론과 집단 연대감 개념인 아사비야(Asabiyya)를 제창했다. 계획과 신뢰가 집단 연대를 만들고, 그 연대가 약해지면 권력이 무너진다는 통찰을 남겼다. 저서 《무깟디마》(Muqaddimah, 1377).
현대 진화생물학은 신뢰가 왜 그토록 강력한가를 더 깊이 설명한다. 니컬러스 라이하니는 《소셜 인스팅크트》에서 평판이 협력을 유지하는 핵심 메커니즘임을 밝혔다. 협력자라는 평판이 쌓이면 더 많은 협력 기회를 얻는다. 배신자라는 평판이 붙으면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것이 진화적으로 내장된 신뢰의 메커니즘이다.
▷ 니컬러스 라이하니 Nichola Raihani, 1980~. 영국 UCL 진화행동학 교수. 칼라하리 사막의 새와 산호초 청소부 물고기를 연구하며 협력의 진화 메커니즘을 밝혔다. 평판이 협력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라는 논지가 이 책에서 신뢰 구축의 진화론적 근거로 활용된다. 저서 《소셜 인스팅크트》(The Social Instinct, 2021).
관중이 상벌의 일관성으로 신뢰를 쌓은 것은 바로 이 평판 메커니즘을 설계한 것이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상을 받는다. 명령을 어긴 자는 귀족이라도 반드시 벌을 받는다. 이 일관성이 "관중 아래에서는 신뢰가 작동한다"는 평판을 만들었다. 평판이 위임을 모았다.
3. 역사적 사례
관중과 환공 — 상벌의 일관성이 신뢰를 만들다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상벌의 일관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상을 받았다. 명령을 어긴 자는 귀족이라도 반드시 벌을 받았다. 이 일관성이 신뢰를 만들었다. 제나라에서는 규칙이 지켜진다. 규칙이 지켜지는 곳에서만 사람들은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장기 계획이 가능한 곳에 자원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고 권력이 구축된다.
이순신 — 계획과 신뢰로 기적을 만들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두 가지로 위임을 모았다. 하나는 계획이었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지형을 분석하고 물때를 계산하고 병사들에게 명확한 역할을 부여했다. 다른 하나는 신뢰였다. 이순신은 병사들과 함께 굶었다. 공을 세운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다. 자신의 목숨을 먼저 내걸었다. 13척의 배가 133척의 일본 함대를 이긴 것은 계획의 치밀함과 신뢰의 깊이가 만든 기적이었다. 이순신의 위임이 선조의 위임을 능가한 것은 계획과 신뢰 때문이었다.
22대 국회 — 신뢰가 사라진 권력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을 지금 대의제가 몸소 증명하고 있다.
한국은 국회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있다.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국회가 반드시 심의해야 하는 제도다. 21대 국회에서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성립된 청원이 194건이었다. 실제 처리율은 17%에 불과했다. 83%의 민의가 상임위 캐비닛 속에서 잠자다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22대 국회는 더 심각하다. 60건이 넘는 청원이 5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처리율은 0%였다. 단 한 건도 처리되지 않았다.
이것이 계획과 신뢰 없는 권력의 현주소다. 위임의 철회가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국회는 새로이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조지 워싱턴 — 신뢰를 제도로 만들다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워싱턴의 자발적 퇴임은 권력의 계획과 신뢰를 제도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었다. 한 사람의 신뢰가 제도가 됐다. 그 제도가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다.
▷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 미국 초대 대통령. 독립전쟁을 이끌고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두 번의 임기 후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아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신뢰를 제도로 만든 권력의 대표 사례로 등장한다.
4. 종합정리
권력은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구축하는 것이다. 구축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계획과 신뢰.
관중은 상벌의 일관성으로 신뢰를 쌓았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신뢰가 성벽보다 강하다고 했다. 공자는 신뢰가 국가의 최후 토대라고 했다. 이븐 할둔은 아사비야가 사라지면 권력도 사라진다고 했다. 라이하니는 평판이 협력을 유지하는 진화적 메커니즘이라고 했다. 이순신은 계획과 신뢰로 기적을 만들었다. 워싱턴은 신뢰를 제도로 만들었다.
그런데 신뢰는 한 번의 배신으로 무너진다.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이다. 22대 국회의 처리율 0%가 그것을 보여준다.
관중의 뜻을 음미해보면, 단기의 추진계획도 장기의 백년대계가 있을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추진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축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계획으로 방향을 제시하라. 신뢰로 그 방향을 실현하라. 그리고 그 신뢰를 제도로 만들어라. 이것이 명제 6의 결론이다.
명제 6 — 권력은 계획과 신뢰로 구축된다. 이순신은 13척으로 133척을 이겼다. 계획의 치밀함과 신뢰의 깊이가 만든 기적이었다. 반대로 22대 국회는 5만 명 서명 청원을 단 한 건도 처리하지 않았다. 계획과 신뢰 없는 권력이 위임을 소모시키는 현장이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leewysu@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