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객잔》
제8화 ― 검은 달의 사자
보름을 하루 앞둔 밤.
하늘에는 거의 둥근 달이 떠 있었다.
그러나 달빛은 이상할 만큼 흐렸다.
먹구름 한 점 없는데도 달 주변에 검은 안개가 둘러져 있었다.
객잔 처마에 매달린 푸른 등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딸랑.
딸랑.
창가에 앉아 있던 묘묘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검은 털이 곤두섰다.
"야옹."
낮고 날카로운 울음이었다.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백노인의 눈빛도 달라졌다.
늘 흐릿하던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빛났다.
풍백은 손가락으로 점을 치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 기운은..."
설화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검은 장포를 입은 자들이 안개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은 흰 가면에 가려져 있었다.
가면 한가운데에는 검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었다.
풍백의 입술이 떨렸다.
"검은 달의 사자."
그 순간.
객잔 문이 저절로 열렸다.
끼이익.
차가운 바람과 함께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 일곱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사내는 다른 자들보다 키가 컸다.
흰 가면에는 붉은 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그가 객잔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천하제일 객잔."
"마침내 찾았군."
주방에서 그릇을 닦던 연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손님이십니까?"
가면인이 대답했다.
"물건을 찾으러 왔다."
연우는 밝게 웃었다.
"분실물이라면 특징을 말씀해 주세요."
"작은 나무패다."
연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가면인은 말을 이었다.
"앞면에 하늘 천 자가 새겨진 나무패."
객잔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설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물건을 왜 찾지?"
가면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마교의 성녀까지 이곳에 있었군."
설화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그 나무패를 왜 찾는 거지?"
가면인은 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문을 여는 열쇠다."
"무슨 문?"
"너희가 알아서는 안 될 문."
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문을 열려면 열쇠를 쓰셔야지."
"왜 나무패를 쓰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풍백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백노인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피식 웃었다.
"저래야 연우지."
가면인이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나무패를 넘겨라."
연우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유는?"
"죽은 손님이 맡기고 갔습니다."
연우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군가 맡긴 물건을 함부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가면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스르릉.
뒤에 서 있던 여섯 명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
연우가 놀라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요!"
가면인들이 멈췄다.
연우는 벽에 붙은 나무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객잔 규칙이 적혀 있었다.
객잔 안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연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칼은 밖에서 뽑아 주세요."
가면인은 비웃었다.
"우리가 네 규칙을 따를 것 같으냐?"
그 순간.
설화가 연우 앞으로 나섰다.
스르릉.
그녀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차가운 검광이 객잔 안을 가로질렀다.
연우의 눈이 커졌다.
"설화 손님도 안에서 뽑으시면 안 되는데..."
"조용히 해요."
설화는 가면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신은 뒤에 있어요."
"하지만..."
"이들은 당신이 상대할 자들이 아닙니다."
가면인이 비웃었다.
"마교의 성녀가 이름 없는 객잔 주인을 지키겠다는 건가?"
설화의 검끝이 흔들림 없이 그를 향했다.
"이 객잔의 국수값이 아직 남아 있다."
연우가 얼른 말했다.
"국수값은 받았습니다."
설화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럼 다음에 먹을 국수값입니다."
풍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핑계군."
여섯 명의 가면인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의 신형이 검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설화가 검을 휘둘렀다.
채앵!
첫 번째 검을 막아 낸 뒤 몸을 돌려 두 번째 가면인의 어깨를 검등으로 쳤다.
퍽!
그러나 나머지 넷이 그녀의 사방을 에워쌌다.
'빠르다.'
설화의 표정이 굳었다.
이들은 평범한 살수가 아니었다.
각자의 움직임은 달랐지만 호흡은 하나처럼 이어졌다.
검은 달의 합격진.
한 명을 막으면 두 명이 공격하고,
두 명을 피하면 나머지가 퇴로를 끊었다.
가면인의 검이 설화의 옆구리를 향했다.
그때.
탁.
낡은 술병 하나가 검날을 막았다.
설화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백노인이 어느새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하품했다.
"젊은것들이."
"술맛 떨어지게 시끄럽구먼."
가면인의 검이 술병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산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가면인의 눈이 흔들렸다.
"누구냐?"
백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술병을 살짝 기울였다.
툭.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가면인의 몸은 객잔 밖으로 튕겨 나갔다.
쾅!
설화는 말을 잃었다.
'역시...'
'이 노인은 평범한 주정뱅이가 아니야.'
백노인은 남은 술을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방울도 안 흘렸군."
붉은 금이 그어진 가면인이 손을 들었다.
싸움이 멈췄다.
그는 백노인을 한참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
"은퇴한 검왕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백노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 이름을 아는 놈이 아직도 있었나?"
"우리 주인께서는 천 년 전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
풍백이 벌떡 일어났다.
"천 년 전부터?"
가면인은 천천히 풍백을 바라보았다.
풍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미래를 조금 볼 수 있었다.
늘 흐릿하고 엉뚱한 장면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선명했다.
검은 달.
갈라지는 봉인석.
붉은 불길에 휩싸인 무림.
그리고 시체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검은 가면의 남자.
풍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흑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객잔 안의 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훅.
완전한 어둠.
그 순간, 가면인들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퍼져 나왔다.
안개는 뱀처럼 바닥을 기어 연우에게 향했다.
설화가 외쳤다.
"연우, 피해요!"
하지만 연우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품속에 있던 나무패가 갑자기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우우웅.
나무패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검은 안개와 푸른빛이 부딪쳤다.
콰앙!
객잔 전체가 흔들렸다.
벽에 걸린 그릇들이 떨어지고 탁자들이 밀려났다.
연우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기억하라.
순간 그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천 년 전의 전장.
부서진 검들.
피로 물든 하늘.
그리고 검은 가면을 쓴 한 남자.
남자는 연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연우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숨이 막혔다.
그의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은빛 검기가 피어올랐다.
검기는 바닥으로 떨어진 나무젓가락 하나를 감쌌다.
나무젓가락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모두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설화의 눈동자가 커졌다.
백노인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풍백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가면인은 기쁨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검성군..."
바로 그때.
묘묘가 연우의 발앞으로 뛰어들었다.
"야옹!"
황금빛 눈동자가 번쩍였다.
환영이 깨졌다.
은빛 검기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연우는 힘이 풀린 듯 무릎을 꿇었다.
"방금..."
"뭐였지?"
붉은 금의 가면인은 더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연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확인할 것은 확인했다."
설화가 검을 겨누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가면인이 손을 펼쳤다.
검은 안개가 객잔을 뒤덮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흑월께서 직접 오실 것이다."
"그때 나무패와 함께..."
그의 가면 뒤로 붉은 눈빛이 번뜩였다.
"천검성군의 목숨도 가져가겠다."
검은 안개가 걷혔을 때,
가면인들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객잔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연우는 부서진 그릇과 넘어진 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수리비는 누가 내죠?"
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노인은 다시 술병을 들었다.
풍백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묘묘만이 연우의 발치에서 닫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기까지,
이제 단 하루가 남아 있었다.
다음 화 예고
제9화 ― 보름달 아래의 손님
검은 달의 사자들이 떠난 뒤,
연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노인과 묘묘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름달이 뜬 밤.
천하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홀로 객잔을 찾아온다.
마교의 교주, 천마.
그는 연우 앞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국수 한 그릇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