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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화 ― 청수진의 검은 배
청수진은 크지 않은 수향이었으나 장강으로 이어지는 세 갈래 물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강북에서 내려온 약재와 피혁은 이곳에서 배에 실렸고, 강남에서 올라온 비단과 차는 다시 육로를 따라 중원으로 흘러갔다. 물길을 장악한 자라면 사람과 물자의 움직임뿐 아니라 강호의 소문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요지였다.
진무혁과 남궁소연, 백리운, 당소혜가 청수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강변에는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돛을 접은 상선과 작은 어선, 지붕을 얹은 유람선 사이로 선체 전체를 검게 칠한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검은 배에는 선주의 이름도, 표국의 깃발도 없었다.
강물은 계속 흐르는데 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닻을 하나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배 밑의 여러 방향으로 쇠사슬을 연결해 강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듯했다.
무혁이 걸음을 멈췄다.
등에 멘 귀검이 검집 안에서 낮게 떨렸다.
우웅—
남궁소연이 즉시 알아차렸다.
“귀검이 반응하는군요.”
“배 안에 귀검과 관련된 물건이 있는 것 같소.”
당소혜는 검은 배가 아니라 부두를 먼저 살폈다.
“저 배로 이어지는 작은 배가 여섯 척이에요. 그런데 노에 물이 묻은 배는 두 척뿐이야.”
백리운이 물었다.
“나머지는 눈속임이라는 뜻인가?”
“네 척은 같은 자리에 오래 묶여 있었어요. 배 밑에 물때가 끼어 있잖아요. 실제로 검은 배를 드나드는 길은 따로 있을 거예요.”
백리운은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물비린내와 젖은 나무 냄새 사이에 희미한 약향이 섞여 있었다.
“검은 배에서 독을 달이고 있네.”
소혜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독이에요?”
“당문의 청람초와 적설근 냄새가 섞여 있어. 두 약재 모두 함부로 거래할 수 없는 독초일 텐데?”
“당문 외당의 허락 없이는 사천 밖으로 한 근도 나갈 수 없어요.”
“그렇다면 누군가 허락했거나 훔쳐 냈겠군.”
소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허문 멸문 사건에 당문의 독이 사용되었다는 단서는 이미 여러 번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문 내부의 누가 관련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무혁이 말했다.
“여기서 계속 보고 있으면 우리 쪽이 먼저 의심받을 것이오. 객잔으로 갑시다.”
네 사람이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무혁이 가장 앞에 섰고 백리운이 조금 뒤를 따랐다. 당소혜는 부두와 골목 사이에 숨은 장치를 살폈으며 남궁소연은 마지막에서 미행하는 자를 경계했다.
잠시 뒤 소연이 조용히 말했다.
“뒤에 세 명이 붙었습니다.”
무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강변의 생선 가게에 한 명, 빈 수레 옆에 한 명, 버드나무 뒤에 한 명이오.”
소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청수진에 들어올 때부터 따라왔소.”
당소혜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백리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모른 척하게.”
“얼굴이라도 봐 둬야 하잖아요.”
“저쪽도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소혜가 입을 삐죽였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무혁은 세 사람의 기척을 의식하면서도 걸음을 바꾸지 않았다.
두 해 동안 천애곡에서 익힌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앞을 걷는 사람은 길을 살피고, 뒤를 걷는 사람은 추적자를 경계했다. 한 사람이 기관을 살피면 다른 사람은 독을 찾았다.
누구도 지시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빈틈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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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객잔 이 층에서는 검은 배와 세 갈래 수로가 한눈에 보였다.
네 사람은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탁자를 골랐다. 배를 볼 수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백리운이 음식을 주문했다.
“국수 네 그릇과 만두 세 접시. 차는 가장 싼 것으로 주시오.”
당소혜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째서 만두가 세 접시예요?”
“청수진에 들어온 뒤 자네가 군것질 가게를 세 번이나 돌아봤기 때문일세.”
“그것을 봤어요?”
“독을 살피는 의원은 사람의 눈도 살펴야 하네.”
“그럼 백 의원이 사는 거죠?”
“내가 주문했으니 소연 소저가 계산하겠지.”
남궁소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내겠습니다.”
소혜가 감탄했다.
“백 의원은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네요.”
무혁의 입가에도 작은 웃음이 스쳤다.
점소이가 음식을 내려놓고 물러가려 하자 무혁이 불렀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점소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멈춰 섰다.
무혁이 창밖의 검은 배를 가리켰다.
“저 배는 누구의 것이오?”
점소이의 얼굴이 굳었다.
“모릅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도 모르오?”
“저 배는 사흘 전에 들어왔습니다. 나루에도 대지 않고 강 가운데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백리운이 물었다.
“약재를 싣는 배인가?”
점소이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더는 묻지 마십시오. 손님들께서 강호인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저 배와 엮이면 청수진에서는 아무도 도와드리지 못합니다.”
“관아도 움직이지 않소?”
“현령은 배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점소이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 약재상의 아들이 사라졌습니다. 실종되기 전에 검은 배 근처에서 검은 궤짝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궤짝에 무엇이 들어 있었소?”
“사람 손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당소혜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궤짝에 가두었다는 말이에요?”
“저도 들은 이야기뿐입니다.”
점소이는 더 말하지 않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무혁은 검은 배를 바라보았다.
소혜가 물었다.
“오늘 밤 들어가겠지?”
“조금 더 살펴야 하오.”
“사람이 갇혀 있다는데 기다리자고?”
무혁의 시선이 소혜에게 향했다.
소혜는 약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무혁이 당장 뛰어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갇혀 있다는 말만 믿고 움직이면 상대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싸우게 되오.”
백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해 전이라면 이미 창문으로 나갔을 텐데 제법 참을성이 생겼군.”
“사부님께서 적이 준비한 길을 걷지 말라고 하셨소.”
남궁소연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상대가 우리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리겠소. 귀검을 노린다면 반드시 움직일 것이오.”
무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잔 아래에서 나무패 하나가 날아왔다.
열린 창을 통과한 나무패가 탁자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탁.
소연이 즉시 창가로 움직였지만 아래에는 지나가는 행인들뿐이었다.
당소혜가 나무패를 뒤집었다.
앞면에는 검은 파도 세 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자정, 서쪽 폐나루.
백리운이 말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군.”
소혜가 무혁에게 물었다.
“이제는 가도 되지?”
“함정이오.”
“알아요.”
“가면 싸움이 벌어질 것이오.”
“그것도 알아.”
“배 아래에는 기관이 있을 것이고 독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소혜가 웃었다.
“그래서 나와 백 의원이 있는 거잖아.”
남궁소연도 말했다.
“수로와 창해십팔채의 합격진은 제가 압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무혁에게 모였다.
무혁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갑시다.”
당소혜가 만두 하나를 그의 그릇에 놓았다.
“결정을 잘했으니 상이에요.”
백리운이 말했다.
“그 만두는 내가 산 것일세.”
“아직 소연 언니가 계산하지 않았으니 아무도 산 게 아니에요.”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소연은 조용히 만두를 먹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검은 파도 문양은 창해십팔채의 비밀 표식이었다.
태허문이 멸문한 것은 이 년 전.
당시 무혁은 열여덟 살이었고, 소연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 무렵 소연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창해십팔채의 수채주 명단과 수로 지도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지도에는 태허문 근처로 이어지는 세 개의 나루가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태허문이 멸문한 뒤 그 나루들에서 살아남은 제자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궁세가가 퇴로를 막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소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혁, 말할 것이 있습니다.”
무혁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백리운과 소혜도 장난을 멈췄다.
“말씀하시오.”
“태허문이 멸문하기 사흘 전, 아버지의 서재에서 창해십팔채의 수로 지도를 보았습니다.”
“어떤 지도였소?”
“태허문에서 장강으로 이어지는 나루 세 곳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도 옆에는 수채주의 이름과 은자의 액수가 적힌 장부도 있었습니다.”
소혜가 물었다.
“남궁세가가 수적에게 돈을 주었다는 뜻이에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연은 무혁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는 수적을 토벌하기 위한 기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태허문이 멸문한 뒤에도 아버지께 묻지 못했습니다.”
“왜 묻지 않았소?”
“두려웠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이?”
“가문이 정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소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볼지도 두렵습니다.”
무혁은 아무 말 없이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물한 살의 남궁세가 후계자였다.
냉철하고 자존심이 강한 검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문의 명예와 자신이 마음에 품기 시작한 사람 사이에서 맨손으로 서 있었다.
무혁이 물었다.
“소연이 그 명령을 내렸소?”
“아닙니다.”
“수적에게 은자를 주었소?”
“아닙니다.”
“그렇다면 소연에게 책임을 물을 이유는 없소.”
“하지만 남궁세가는 제 가문입니다.”
“가문의 죄를 밝히려 이곳까지 온 사람도 소연이오.”
소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혁은 말을 이었다.
“관련된 자가 있다면 책임을 묻겠소. 그러나 진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남궁세가 전체를 원수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오.”
“가주이신 제 아버지가 명령했다면요?”
무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태허문의 무너진 전각과 쓰러진 사형제들이 떠올랐다.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분노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분노가 답을 대신하게 두지 않았다.
“그분에게 직접 이유를 묻겠소.”
“사정이 있다면 용서하겠다는 뜻입니까?”
“사정이 죄를 없애 주지는 않소.”
무혁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하지만 청허진인께서 칠성의 일곱 번째 검객이 되신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스승님을 믿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죄를 외면할 생각도 없고,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은혜를 잊을 생각도 없소.”
그는 소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일도 같소. 먼저 진실을 확인하겠소.”
소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 깊이 품어 온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혁은 그녀를 남궁세가의 이름으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
당소혜가 만두 접시를 가운데로 밀었다.
“이제 우리 넷 모두 숨기지 않기로 해요.”
백리운이 말했다.
“당 소저도 숨긴 일이 있나?”
“있어도 지금은 생각이 안 나요.”
“그것은 숨긴 것이 아니라 잊은 것이겠군.”
소혜가 그를 노려보았다.
남궁소연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네 사람은 거창한 맹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청수객잔에서 서로의 진실을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겠다는 약속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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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가까워지자 네 사람은 서쪽 폐나루로 향했다.
낡은 말뚝 사이에 작은 배 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삿갓을 눌러쓴 뱃사공이 노를 세운 채 말했다.
“넷이 모두 왔군.”
무혁이 배에 오르며 물었다.
“검은 배에서 보낸 사람이오?”
“가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배가 물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청수진의 등불이 멀어질수록 주위는 고요해졌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만 이어졌다.
당소혜는 발끝으로 배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속이 빈 소리가 났다.
그녀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기관 두 개.
백리운도 안개 속에 섞인 향을 알아차렸다.
그는 해독환 세 알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뱃사공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보통 의원이 아니군.”
백리운이 웃었다.
“보통 뱃사공도 노를 쥔 손에 검객의 굳은살이 생기지는 않지.”
뱃사공은 즉시 노를 버렸다.
그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배 밑의 기관이 움직였다.
콰직!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강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소혜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기관 상자에서 쏘아진 두 가닥 쇠줄이 검은 배의 난간에 걸렸다.
“올라가요!”
남궁소연이 쇠줄을 밟고 가장 먼저 날아올랐다.
백리운은 당소혜의 허리를 받쳐 올렸고, 무혁은 마지막까지 작은 배가 완전히 뒤집히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다.
세 사람이 검은 배에 닿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도 뱃머리를 밟고 솟구쳤다.
네 사람은 검은 배의 갑판에 차례로 내려섰다.
탁.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등불이 동시에 켜졌다.
검은 복면을 쓴 수적 스물넷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짧은 수중도와 쇠갈고리, 삼지창이 등불 아래 번뜩였다.
높은 누각 위에서는 은빛 안대를 한 중년 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무혁.”
무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이름을 알고 있군.”
“귀검의 주인을 모르는 자가 강호에 얼마나 되겠느냐?”
“당신은 누구요?”
“귀수채주 한조다.”
남궁소연이 앞으로 나섰다.
“이 년 전 태허문이 멸문하던 날, 귀수채는 남궁세가의 명령을 받았습니까?”
한조의 하나뿐인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남궁세가의 외동딸이로군.”
“대답하십시오.”
“가문의 치부를 굳이 남들 앞에서 듣겠다는 것이냐?”
소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숨기는 순간부터 치부가 되는 것입니다.”
한조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좋다. 나를 이기면 알려 주마.”
그가 손을 내렸다.
수적 스물넷이 일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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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쇠갈고리가 가장 먼저 날아왔다.
무혁은 등에 멘 귀검이 아니라 허리의 녹슨 철검을 뽑았다.
검을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손목만 반 치 돌렸다.
챙! 채챙!
철검 끝이 갈고리와 쇠줄이 연결된 고리를 정확히 쳤다.
갈고리 셋이 갑판 위로 떨어졌다.
남은 셋은 무혁의 소매와 검집에 걸렸다.
수적들이 동시에 줄을 잡아당겼다.
무혁의 발은 흔들리는 갑판 위에 놓여 있었다.
천애곡의 단단한 땅도, 검무덤의 바위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혁은 배의 흔들림을 억지로 거스르지 않았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 때 한 걸음 양보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오는 순간 허리와 어깨를 이었다.
철검이 천천히 내려갔다.
낙산일검.
쿵!
검에 실린 중경이 쇠줄을 타고 거꾸로 전해졌다.
줄을 당기던 수적 여섯 명의 손아귀가 동시에 풀렸다.
그 틈으로 남궁소연의 검이 들어갔다.
창궁무애검의 푸른 검광은 예전처럼 넓지 않았다. 한무외에게 수련받으며 불필요한 변화를 덜어 낸 검은 가장 짧은 길로 상대의 병기를 쳤다.
챙! 챙!
수중도 두 자루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소연은 몸을 돌려 무혁의 등을 노리던 삼지창까지 쳐 냈다.
“왼쪽!”
당소혜의 외침에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낮췄다.
은빛 암기 다섯 개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쳤다.
암기는 수적들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다. 소매와 허리띠를 갑판과 돛대에 고정했다.
소혜가 바닥의 기관줄 하나를 발끝으로 당겼다.
원래 무혁 일행을 덮칠 쇠그물이 방향을 바꾸어 수적들을 덮었다.
“기관은 많이 만든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제대로 쓰는 사람이 주인이야.”
그러나 그녀의 발밑 갑판이 갑자기 열렸다.
소혜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리운의 소매에서 흰 천이 날아가 그녀의 손목을 감았다.
그는 한 손으로 소혜를 끌어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은침 세 개를 던졌다.
소혜에게 달려들던 수적들의 어깨와 무릎에 침이 꽂혔다.
세 사람은 기혈이 막혀 주저앉았다.
“다치지 않았나?”
백리운이 물었다.
“괜찮아요.”
소혜는 올라오자마자 백리운의 등 뒤로 암기 하나를 던졌다.
그에게 접근하던 수적의 손등에 암기가 박혔다.
“이제 빚은 없어요.”
“사람을 한 번 구한 값이 암기 하나뿐인가?”
“친구에게 돈을 받으려 한 벌이에요.”
네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진형을 잃지 않았다.
무혁이 정면의 힘을 받아 냈고 소연이 열린 틈을 끊었다.
소혜는 갑판의 기관을 역으로 이용했으며 백리운은 동료들의 사각과 독을 막았다.
천애곡에서 수없이 맞춰 본 호흡이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가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수적의 갈고리 하나가 소연의 검을 휘감았다.
다른 수적이 그녀의 옆구리를 향해 수중도를 찔렀다.
무혁은 한조에게 올라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철검을 던졌다.
철검의 검집이 수중도의 옆면을 때렸다.
병기가 궤도를 벗어났다.
동시에 소혜의 암기가 갈고리의 쇠줄을 끊었다.
백리운의 은침은 마지막 수적의 손목을 멈췄다.
소연은 자유로워진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세 수적의 병기가 동시에 갑판 위로 떨어졌다.
소연은 무혁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확인한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소연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무혁은 한조를 잡을 기회보다 그녀의 안전을 먼저 택했다.
소연 역시 그가 위험해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한조가 누각 위에서 외쳤다.
“귀수진을 펼쳐라!”
남은 수적들이 여섯 명씩 네 조로 나뉘었다.
쇠갈고리와 삼지창이 서로 이어지며 네 사람의 퇴로를 끊었다.
남궁소연이 진법의 중심을 살폈다.
“귀수진은 여섯 명 가운데 가장 뒤에 선 사람이 방향을 정합니다.”
당소혜가 즉시 암기 세 개를 꺼냈다.
“그 사람들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되겠네요.”
백리운이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오른쪽 두 조의 병기에는 독이 더 짙게 묻어 있네. 내가 맡지.”
무혁이 말했다.
“정면을 열겠소. 세 사람이 뒤를 부탁하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 사람의 움직임이 답을 대신했다.
무혁은 철검을 다시 쥐고 앞으로 나갔다.
귀수진의 갈고리 열두 개가 한꺼번에 그를 향했다.
그는 모든 병기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갈고리 하나만 보았다.
철검의 검등이 갈고리의 옆면에 닿았다.
그 순간 상대가 당기는 힘과 배가 기우는 힘을 함께 받아 한 점으로 모았다.
무혁의 검이 내려갔다.
쾅!
첫 갈고리가 갑판에 박혔다.
서로 연결된 나머지 쇠줄들도 한꺼번에 아래로 끌려갔다.
수적들의 진형이 무너졌다.
남궁소연의 검이 열린 길을 가르며 들어갔다.
당소혜의 암기가 뒤쪽 지휘자들의 소매를 돛대에 고정했다.
백리운의 은침이 독 묻은 병기를 든 자들의 기혈을 끊었다.
귀수진이 무너졌다.
무혁은 멈추지 않았다.
누각의 기둥을 밟고 한조에게 뛰어올랐다.
한조가 물결처럼 휘어진 장검을 뽑았다.
“고검노에게 고작 무거운 검 하나만 배웠느냐?”
그의 검이 여섯 갈래로 나뉘었다.
창해육절검.
파도가 겹치듯 이어지는 검법이었다.
첫 번째 검을 막으면 두 번째가 검신을 타고 들어왔고, 피하면 나머지 네 검이 퇴로를 막았다.
무혁의 철검과 한조의 장검이 맞부딪쳤다.
쾅!
무혁의 어깨가 흔들렸다.
한조는 물 위의 싸움에 익숙했다. 배가 기우는 순간마다 그 힘을 검세에 더했다.
두 번째 검이 무혁의 가슴을 스쳤다.
그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세 번째 검은 허리.
네 번째는 어깨.
무혁은 연이어 두 걸음 물러났다.
한조가 비웃었다.
“땅을 딛지 못한 무형중검은 무겁기만 한 둔검이다.”
무혁은 반박하지 않았다.
한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한무외의 수련은 대부분 단단한 땅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발밑에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가 있었다.
산의 무게만 고집하면 물결을 이길 수 없었다.
무혁은 호흡을 가라앉혔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발밑의 널빤지가 밀렸다.
한조의 다섯 번째 검이 물결의 힘을 실어 날아왔다.
무혁은 그 힘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철검을 비스듬히 눕혀 한조의 검을 흘려보냈다.
그와 동시에 몸도 배의 기울기만큼 따라 움직였다.
한조의 검이 빈 곳을 갈랐다.
무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산이 물을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산은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기에 산이었다.
한조의 마지막 검이 쇄도했다.
무혁은 한 걸음 내디뎠다.
강물의 흐름.
배의 흔들림.
적이 밀어붙인 검세.
자신의 발과 허리, 어깨를 잇는 진기.
서로 다른 힘이 한 점에서 만났다.
철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낙산일검.
이번 검은 검무덤의 바위를 벨 때와 달랐다.
무겁지만 굳어 있지 않았다.
움직이면서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챙!
요란한 폭음은 없었다.
맑은 쇳소리 하나가 강 위로 퍼졌다.
한조의 장검이 크게 휘어졌다.
검신에 가느다란 금이 번지더니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무혁의 철검은 한조의 목 앞에서 멈췄다.
한조의 하나뿐인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싸우는 도중에 검이 달라졌군.”
무혁의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실전은 같은 검을 두 번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소.”
“죽여라.”
“당신에게 들을 말이 남았소.”
한조가 어금니 사이의 독환을 깨물려는 순간 은침 하나가 날아왔다.
턱 아래 혈도에 침이 꽂혔다.
한조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에서 백리운이 말했다.
“입 안에 독을 숨기는 수법은 이미 여러 번 보았네.”
당소혜가 외쳤다.
“무혁, 배가 기울고 있어!”
갑판 아래에서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조가 패할 경우 배를 침몰시키도록 기관이 작동한 것이다.
소혜는 즉시 선창으로 달려갔다.
남궁소연이 뒤따랐다.
백리운은 갇힌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반대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무혁도 움직이려 했지만 소연이 돌아보며 말했다.
“한조를 지키십시오. 이번에는 우리를 믿으세요.”
무혁은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오.”
그 한마디와 함께 세 사람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무혁은 한조의 혈도를 막고 갑판 위의 남은 수적들을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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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혜와 남궁소연이 내려간 기관실에는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소혜는 물속에 손을 넣어 침몰 장치의 중심축을 찾았다.
“오른쪽 수차를 멈춰야 해요!”
소연은 검집을 벽에 박아 몸을 고정했다.
한 손으로 소혜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밀려오는 나무 상자를 쳐 냈다.
“찾았습니까?”
“조금만 더!”
배가 크게 기울었다.
소연의 발이 미끄러졌지만 소혜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다시 중심을 잡았다.
“언니가 놓치면 나도 빠져요.”
“당신부터 중심축을 잡으십시오.”
“함께 잡아요.”
소혜는 중심축의 홈에 쇠못을 끼웠다.
소연이 검 끝으로 쇠못을 밀어 넣었다.
철컥!
수차가 멈추며 열린 물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쇠사슬 하나가 끊어졌다.
굵은 쇠사슬이 소혜를 향해 튀었다.
소연이 몸을 돌려 그녀를 감싸고 검을 가로세웠다.
쾅!
쇠사슬이 검신에 부딪쳤다.
소연의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검을 놓지 않았다.
당소혜가 즉시 두 번째 쇠못을 중심축에 박았다.
마침내 물문이 완전히 닫혔다.
배의 기울기가 멈췄다.
소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다쳤어요?”
“손목이 조금 저릴 뿐입니다.”
“백 의원에게 꼭 보여 줘야 해요.”
“치료비를 받겠지요.”
“내가 대신 내 줄게요.”
“돈이 있습니까?”
소혜가 잠시 생각했다.
“무혁에게 빌리면 돼요.”
소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웃었다.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붙잡고 기관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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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운은 선창 깊은 곳에서 쇠창살에 갇힌 열한 명을 발견했다.
모두 약초꾼과 짐꾼들이었다.
검은 배의 수적들은 그들에게 강바닥에 가라앉은 궤짝을 찾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몽혼향에 중독되어 제대로 걷지 못했다.
백리운은 해독환을 물에 풀어 한 사람씩 먹였다.
“먼저 아이와 노인을 데려가시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옆 사람을 부축하고.”
수적 하나가 뒤에서 수중도를 들고 다가왔다.
백리운은 돌아보지 않은 채 은침을 던졌다.
침이 수적의 손목 혈도에 박혔다.
수중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환자를 치료할 때 방해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네.”
두 번째 수적이 독분을 뿌렸다.
백리운은 소매를 휘둘러 독분의 방향을 바꾼 뒤 상대의 가슴에 침 세 개를 꽂았다.
수적의 몸이 굳었다.
백리운은 그를 죽이지 않고 쓰러뜨렸다.
“독을 만들 줄 안다고 독을 아는 것은 아니지.”
그는 갇힌 사람들을 이끌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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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돌아왔을 때 무혁은 남은 수적들을 모두 제압한 뒤였다.
귀검은 여전히 등에 있었다.
철검 한 자루만으로 스물넷의 귀수진과 채주 한조를 꺾었다.
하지만 무혁의 시선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세 사람에게 향했다.
“다친 곳은 없소?”
“나는 괜찮네.”
백리운이 대답했다.
당소혜가 소연의 손목을 가리켰다.
“소연 언니가 쇠사슬을 막았어요.”
무혁이 즉시 소연의 손을 살폈다.
“많이 아프오?”
“검을 쥘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검을 쥘 수 있다고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오.”
무혁이 백리운을 바라보자 그가 소연의 맥과 손목을 확인했다.
“뼈에는 이상이 없네. 약을 바르고 하루 정도 무리하지 않으면 되겠어.”
무혁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혁은 누군가를 걱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다정한 말을 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세 사람의 상처부터 살폈다.
소연의 마음은 그런 무혁에게 조금씩 더 깊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두려움도 커졌다.
남궁세가가 태허문 멸문에 깊이 가담했다는 진실이 밝혀지면 지금의 관계를 잃을 수도 있었다.
무혁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다른 곳도 아픈 것이오?”
“아닙니다.”
소연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무혁.”
“말씀하시오.”
“검은 배에서 무엇이 나오더라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나도 숨기지 않겠소.”
“우리 가문에 불리한 증거라도요.”
“그렇기에 함께 확인해야 하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소혜가 백리운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백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환자를 살피는 척 자리를 피하는 것이 의원의 지혜지.”
“다 들리오.”
무혁의 말에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조된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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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조가 정신을 되찾은 것은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백리운은 그의 턱 아래에 꽂은 은침을 뽑았다.
“입안의 독환은 제거했네. 다시 죽으려 해도 당분간은 뜻대로 되지 않을 걸세.”
한조가 냉소했다.
“의원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군.”
“자네가 아는 진실을 말한 뒤에는 관아가 죄를 판단하겠지.”
무혁이 한조 앞에 앉았다.
남궁소연과 당소혜, 백리운도 곁에 있었다.
“이 년 전 태허문이 멸문하던 날, 귀수채는 누구의 명을 받았소?”
한조는 소연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에서 두 통의 밀서가 왔다.”
소연의 손이 굳었다.
“두 통이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는 태허문에서 장강으로 이어지는 세 나루를 봉쇄하라는 명령이었다. 살아남은 제자는 한 사람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
무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태허문이 멸문한 이 년 전.
열여덟 살이었던 그는 불길 속에서 사형제들과 흩어졌다. 강으로 달아난 제자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이제 드러나고 있었다.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요?”
“남궁세가의 내당총관 남궁진호.”
소연이 물었다.
“가주인이 찍혀 있었습니까?”
“그렇다.”
“두 번째 밀서는요?”
“첫 번째 밀서가 도착한 뒤 반 시진쯤 지나 도착했다. 첫 번째 명령은 거짓이니 나루를 열고 태허문의 생존자를 구하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보냈습니까?”
“남궁가주 남궁천호.”
소연의 호흡이 흔들렸다.
“아버지의 친필이었습니까?”
“친필과 혈인이 함께 찍혀 있었다.”
“그렇다면 왜 두 번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한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진짜 명령을 받았을 때는 다른 수채들이 이미 나루를 막은 뒤였다. 남궁진호는 남궁세가의 가주인을 도용했을 뿐 아니라 창해십팔채의 절반을 미리 매수해 두었다.”
“누구와 손을 잡았소?”
무혁이 묻자 한조가 대답했다.
“무림맹 비검당과 칠성검문.”
갑판 위에 침묵이 흘렀다.
소연은 아버지가 태허문을 구하려 했다는 말에 안도하지 않았다.
남궁세가 내부에서 가주인이 도용되었고, 그 거짓 명령으로 태허문의 퇴로가 막혔다. 가주가 직접 명령하지 않았더라도 관리하지 못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통의 밀서가 남아 있습니까?”
“선주실의 철함 안에 있다.”
당소혜가 곧장 움직였다.
잠시 뒤 그녀는 기관 자물쇠가 달린 검은 철함을 들고 돌아왔다.
“열 수 있어요. 다만 잘못 건드리면 안에 든 문서가 모두 타 버릴 거예요.”
백리운이 물었다.
“우리도 함께 타는 것은 아니겠지?”
“문서만 타게 만든 기관 같아요.”
“‘같다’는 말이 불안하군.”
소혜는 갑판에 앉아 자물쇠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무혁은 한조에게 다시 물었다.
“태허문이 멸문한 사건과 나의 출생은 별개의 일이오.”
한조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이 년 전 사건뿐이오?”
“내가 직접 아는 것은 그렇다.”
“이십 년 전 나를 사마진천이 구했다는 사실은?”
“소문으로만 들었다. 태허문이 멸문한 이 년 전의 수로 봉쇄와 네 출생을 섞어 생각하지 마라.”
무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생의 비밀은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태허문 멸문은 이 년 전의 일이었다.
두 사건이 귀검과 청허진인을 통해 이어질 가능성은 있었지만, 같은 날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성급히 연결하면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청허진인이 일곱 번째 검객이 된 이유를 알고 있소?”
한조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두 달 전 칠성검문의 밀선이 이곳을 지나갔다.”
“청허진인도 타고 있었소?”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사자가 이런 말을 남겼지.”
“무슨 말이오?”
“일곱 번째 자리는 배신자가 아니라 문을 지키는 자의 자리라고.”
무혁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청허진인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칠성검문 깊숙이 들어가 무언가를 막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추측일 뿐이었다.
무혁은 스승을 믿고 싶었다.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다른 증거를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
“직접 만나 묻겠소.”
한조가 말했다.
“그때 네가 아는 청허진인과 전혀 다른 사람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분의 입으로 들은 뒤 판단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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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를 무렵 당소혜가 철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밀서 두 통과 얇은 장부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밀서에는 남궁진호의 명령과 도용된 가주인이 찍혀 있었다.
태허문의 수로를 막고 생존자를 붙잡으라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에는 남궁천호의 친필과 혈인이 남아 있었다.
거짓 명령을 취소하고 태허문의 생존자를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남궁소연은 두 통을 모두 오래 바라보았다.
무혁이 물었다.
“어떻게 하겠소?”
“두 통 모두 가지고 가겠습니다.”
“두 번째 밀서만 공개하면 남궁가주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소.”
“그러면 절반의 진실만 남습니다.”
소연은 첫 번째 밀서를 접었다.
“아버지가 태허문을 구하려 한 사실도 밝히겠습니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인장이 멸문에 이용되고 그 거짓 명령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가문의 명예가 무너질 수도 있소.”
“거짓으로 지킨 명예라면 먼저 무너뜨려야 합니다.”
무혁은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았다.
“소연의 선택을 믿겠소.”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소연에게는 어떤 위로보다 깊었다.
당소혜는 장부의 거래 내역을 살폈다.
“당문의 독초가 이 배를 통해 칠성검문으로 갔어요.”
백리운이 물었다.
“누가 보낸 것으로 되어 있나?”
“적갈당의 표식이에요. 하지만 적갈당주 혼자서는 이 정도 양을 반출할 수 없어요.”
소혜는 장부를 꼭 쥐었다.
“내당에 협력자가 있어요.”
남궁소연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함께 확인합시다.”
“남궁 언니도 자기 가문 때문에 힘든데요.”
“그렇기 때문에 압니다. 혼자 확인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진실이라는 것을.”
소혜는 잠시 소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운은 장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익숙한 약재 조합을 찾아냈다.
“이것은 진백현 선생의 배합법이네.”
“당신의 스승이오?”
무혁이 묻자 백리운이 대답했다.
“그렇네. 누군가 선생의 독문 비방을 이용해 칠성검문에 독을 공급하고 있어.”
네 사람의 비밀은 다시 하나의 길에서 만났다.
태허문의 멸문.
남궁세가의 도용된 가주인.
당문에서 흘러나온 독초.
진백현의 사라진 비방.
그리고 청허진인이 차지한 칠성의 일곱 번째 자리.
무혁은 장부와 밀서를 바라보았다.
“여양으로 가야 하오.”
남궁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허진인을 만나면 이 밀서의 진위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당소혜가 장부를 기관 상자에 넣었다.
“독초를 받은 자도 찾아야 해요.”
백리운이 말했다.
“진백현 선생의 비방을 훔친 자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
무혁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위험해질 것이오.”
당소혜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안전했던 적이 있어?”
백리운도 웃었다.
“자네 혼자 가면 오히려 우리가 더 불안하네.”
소연은 무혁의 곁에 섰다.
“처음부터 함께 가기로 한 길입니다.”
무혁은 더 이상 혼자 앞서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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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배가 청수진 나루에 닿았을 때 아침 해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구조된 사람들은 백리운의 치료를 받았고, 살아남은 수적들은 병기를 버렸다.
한조는 관아가 아닌 창해십팔채의 원로회에 태허문 수로 봉쇄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무혁은 그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그러나 칼로 강요한 자백보다 스스로 선택한 증언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네 사람은 청수진의 동문을 나섰다.
이번 싸움에서 무혁은 귀검을 뽑지 않고 귀수진과 한조의 창해육절검을 꺾었다.
그의 무형중검은 흔들리지 않는 땅에서 벗어나 흐르는 물 위에서도 중심을 세우기 시작했다.
절정의 초입에 갓 들어섰던 검객은 실전 하나를 지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더 빠른 검객이 된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힘과 지형, 동료들의 움직임까지 받아들여 가장 필요한 곳에 검을 놓을 줄 아는 고수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가장 소중한 변화는 다른 데 있었다.
남궁소연은 가문의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
당소혜는 당문의 배신자를 혼자 쫓지 않기로 했다.
백리운은 사라진 스승의 비방을 세 사람과 함께 찾기로 했다.
무혁은 자신의 출생과 청허진인의 진실을 더 이상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강호에 나왔다.
이제 그들의 길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소연이 무혁의 오른쪽에 섰다.
소혜는 기관 상자를 메고 왼쪽을 걸었다.
백리운은 뒤에서 세 사람의 걸음과 상처를 살폈다.
누가 먼저 속도를 맞추자고 하지 않았는데도 네 사람의 보폭은 같았다.
멀리 여양으로 이어지는 관도 위로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 길 끝에는 칠성의 일곱 번째 검객이 된 청허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은 배신자인가.
아니면 홀로 칠성의 문을 막고 있는가.
무혁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직접 만나 묻기 전까지 어느 쪽도 진실이라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천애곡을 떠난 뒤 그가 얻은 또 하나의 검이었다.
성급한 원한을 베고 진실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마음의 검.
진무혁과 세 벗은 그 검을 품고 여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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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 「두 통의 밀서」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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