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씨는 중국 주나라의 왕손으로 주나라가 망한 후에 후손들이 성을 주씨라 했다. 후손 주황(周璜)이 당나라 말에 한림학사로 있다가 907년(신라 효공왕11년) "오계의 난(五李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초계에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초계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의 지명이다.
초계주씨 족보에 의하면 주황의 후손에서 상주(14세손), 장흥(12세손), 삼계(12세손), 함안(12세손), 안의(13세손) 등으로 본관이 나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종친회의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시조 주황의 아들 주흥인(周興寅)은 신라 효공왕 때 집사성대사에 올랐으며 시중을 거쳐 아간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 목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손자 주빈(周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초계주씨의 인물은 고려시대에 예부상서를 지낸 주세후(周世侯)를 비롯하여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지낸 주호(周鎬), 평장사를 지낸 주렴(周濂), 호조판서를 지낸 주원의(周原義) 등 여러 관직자들이 있다.
6세손 주세후는 고려 선종 때 임원후 등과 함께 황급탑과 국청사를 창건하고 < 오복상피식 >을 개정하는 등 하례식의 예법도를 개정했다. 그의 아들 주지(周砥)와 주절 형제 후손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주형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의판서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 이성계가 형조판서를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주희(周禧)는 공조판서를 지냈다. 주세흥(周世興)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중종 때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금성군에 봉해졌다.
검교장군 주치(周稚)의 아들 주원의(周原義)는 도적을 토벌하여 왕으로부터 상방검을 하사받았으며, 개국원종익대이등공신으로 예조판서에 올라 팔계군에 봉해졌다. 주상창(周尙昌)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주명신과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周夢得)도 뛰어났다. 특히 주몽득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나무로 만든 활로 대파했다.
공주 판관을 역임한 명흠(命欽), 공조참의 경손(敬孫), 공조참판 만량(萬良) 등도 가문을 빛냈다. 초계주씨는 조선시대에 무과 1명, 사마시 4명, 역과 1명 등 모두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호산동,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단리.연주리.도덕리,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대산리,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충남 천원군 동면 동산리, 충북 괴산군 증평읍 남하리, 충남 청양군 대치면 이화리가 집성촌이다. 2000년 현재 6,665명이다.
주(周)씨는 경주, 능주, 단성, 명주, 삼계, 상주, 신안, 안의, 옥천, 장흥, 정주, 진주, 천안, 철원, 초계, 충주, 포천, 풍기, 함안 등 총 19개의 본관에 인구는 2000년 현재 38,778명이 있다.
상주주씨(尙州周氏)의 시조 주이(周頤)는 786년(신라 원성왕 2년) 당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했다. 후손들이 상주에 터를 잡아 상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후손 주세붕(周世鵬)은 한국 최초의 사설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교육자다. 주시경(周時經)은 1910년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의 편찬에 공헌했다. 상주주씨는 2000년 현재 18,384명이다.
삼계주씨(森溪周氏.영산)의 시조 주사옹(周士雍)은 고려 때 학사(學士)를 지냈다. 삼계(森溪)는 전남 영광(靈光)에 있던 지명이다. 삼계주씨는 2000년 현재 333명이다.
안의주씨(安義周氏)의 시조 주서(周瑞)는 상주주씨(尙州周氏)의 시조 주이(周頤)의 19세손이다. 주서는 임진왜란을 피해 함경도로 들어간 뒤 안의에 정착하여 살면서 상주주씨와 연락이 끊긴 채 살아왔다. 주서의 아들 주언수(周彦守)가 안변지방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고향인 안의를 본관으로 했다. 시조의 묘소는 함남 안변군 배화면 신리에 있다. 함경남도 안변군 환곡면 용평리,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이 집성촌이다. 삼계주씨는 2000년 현재 257명이다.
장흥주씨(長興周氏)의 시조 주언방(周彦邦)은 고려시대에 전법판서를 역임하고 정주군(定州君)에 봉해졌다. 주언신(周彦臣)을 시조로 하는 파도 있다. 장흥주씨는 2000년 현재 453명이다.
철원주씨(鐵原周氏)의 시조 주승광(周承光)은 당나라 사람이다. 당 태종비 즉천무후가 황실을 장악하자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 그 뒤 신라 효소왕이 특별한 예우로 맞이하고 철원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후손들이 철원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철원으로 했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전남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전남 영광군 홍농면 칠곡리, 전남 영광군 법성면 삼당리와 신압리, 전북 고창군 신림면 자포리, 전북고창군 무장면 목우리가 집성촌이다. 철원주씨는 2000년 현재 2,428명이다.
풍기주씨(豊基周氏)의 시조 주숙손(周叔孫)은 조선 세종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이 초계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풍기로 하였다. 풍기(豊基)는 경상북도 영주시에 속해있다. 풍기주씨는 2000년 현재 160명이다.
함안주씨(咸安周氏)의 시조 주영찬(周英贊)은 초계주씨의 시조 주황의 12세손으로 1373년(고려 공민왕 22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밀직부사가 되고 함안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함안으로 하였다. 함안은 경상남도 함안군 지명이다. 함안주씨는 2000년 현재 64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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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타..五季之乱
公元907年,军阀朱温篡夺皇位,建立后梁,为中国带来黄金时代的大唐王朝,终于走下了历史的舞台。从朱温篡唐到赵匡胤于公元960年黄袍加身、建立宋朝之间约有五十年的时间,故曰"五十年中”。 在这"五十年中”,中原地区先后有朱温建立的后梁(907年-923年);李存勖建立的后唐(923年-936年);石敬瑭建立的后晋(936年-946年);刘知远建立的后汉(946年-979年)(后汉950年以后只局限在太原一带);郭威建立的后周(951年-960年)这5个短命王朝,故曰"五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