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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麗水)지역 유적자료집
출발(07:20) → 흥국사(10:30~11:40) → 선소(11:50~12:20) →점심(12:20∼13:00)→ 이순신 어머니 거처소(13:10∼13:30) → 오충사(13:40~14:00) → 충민사(14:20∼15:00) → 진남관(15:00~15:20)→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15:20∼15:40)→오동도, 향일암(15:40∼17:00)→대구도착(20:00)
1. 흥국사(興國寺)
광양에서 이순신대교를 건너서 여수의 여천공업단지를 지나면 곧바로 영취산(439m)으로 들어선다. 공단에서 배출되는 심각한 공해에 시달리는 여수의 허파라 할 수 있는 영취산의 품안에는 흥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흥국사는 그 이름처럼 나라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관련 깊은 절이다. 사적기에 적힌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택지를 택해서 가람을 창설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절이 흥할 것이다.” 등의 글은 절과 나라를 공동운명체로 여긴 흥국사의 창건 배경을 명확히 드러낸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신정권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사회기강과 그러한 세속의 흐름에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불교계에 대한 강한 반성을 담는 수행실천운동인 정혜결사를 떠올려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흥국사의 탄생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승군은 수군, 곧 해군이었다는 점이다. 영취산 너머 여수에 있던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전라좌수영이 호남수군의 본영 역할을 했으므로, 흥국사의 의승수군(義僧水軍) 전력이 어떠했을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흥국사의 의승수군 활동은 절에서 발견되는 각종 상량문과 비문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승군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에는 700여명으로 조직되었다가 이듬해부터 300여명 정도로 정비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1812년까지 해체되지 않고 있다가 구한말로 접어든 이후로 차츰 줄었다고 한다. 전쟁시 이들의 활동은 주로 지역경계 근무, 조선 및 전함수리, 군사작전수행, 종이 만들기, 밥 짓기, 짚신 삼기 등이었으며, 전후에는 산성 축성과 보수·관리, 종이 만들기, 사원의 보수·관리 같은 일을 하였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항전활동이 두드러진 의승수군의 중심지였기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심해 전후에는 아예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몽고 침입으로 완전 소실되었다가 명종 15년(1560) 법수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된 바 있으며, 임란 이후에는 인조 2년(1624) 계특대사에 의해 중건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계특스님의 뒤를 이은 중창은 숙종16년(1690) 통일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흥국사는 영취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 사이의 계곡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흥국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유적은 계곡의 물줄기가 한데 모여 흐르는 계류에 걸쳐 있는 무지개다리(홍교)이다. 이 다리는 계특스님의 중창 시기인 인조 17년(1639)에 놓였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홍예를 이룬 뒤 홍예와 계곡 가장자리의 공간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자연스럽게 쌓았다. 다리 위 길은 거대한 판석을 깔고 위에 잔자갈을 덮어 만들었다. 본래 보드라운 흙길이었는데 근래 홍수가 일어나 다리 일부가 훼손되자 이를 복원하면서 자박자박 소리나는 자갈을 깔았다.
홍예가 그리는 자연스러운 곡선미가 이때 좀 흐트러졌다. 다리 중간 부분에 다리 바깥으로 가로지른 머릿돌이 튀어나와 있는데, 머릿돌 끝마다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홍예 아래 천장에도 이무기돌이 매달려 계곡의 물을 굽어보고 있다.
이 무지개다리는 선암사 승선교와 닮은 꼴이지만, 길이 40m 높이 5.5m 폭 11.3m 내벽 폭3.45m로 현존하는 무지개 다리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보물 제 563호이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뒤 절에 머물러 있던 승군들이 쌓았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승군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풍수지리상의 지맥을 끊기 위해 관아에서 놓게 했다고도 전해온다.
일주문을 지나면 왼편 언덕 비탈에 부도 12기가 조붓이 모셔져 있다. 창건주인 보조국사와 중창주인 법수스님의 부도가 이곳에 있다. 여기서부터 경내까지 이어지는 왕벚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흥국사중수사적기’라 쓰인 비가 서 있다. 이 사적비의 글씨는 숙종 29년(1703) 명필 이진휴가 쓴 것이다. 지금은 훼손 방지를 위해 설치한 보조 철틀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수의 꽃구름을 탄 용조각이나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가 민화처럼 친숙하다.
잇따라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한 단 높은 곳에 2층 누각인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봉황루를 지나면 다시 이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법왕문과 범종각이 있으며, 법왕문을 지나야 비로소 대웅전 앞마당이다. 봉황루에 안치된 사물 가운데 사자가 법고를 이고 있는 모습과 범종을 걸어두는 걸대 용도의 용조각이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쉽지 않게 열리는 대웅전 앞마당은 또다시 대웅전과 심검당, 적묵당이 에워싸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정작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보다도 대웅전을 받들고 있는 축대와 중앙계단의 소맷돌을 장식하고 있는 아기자기하고 천진스러운 용·거북이·게 등 각종 조각들이 눈길을 빼앗는다.
축대 여기저기에 드러난 조각들은 대웅전을 반야용선에 비유하는 ‘법화신앙’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나르는 배,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배이다. 이에 따르면 대웅전의 축대는 바다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다인 축대에 용·거북이·게등이 표현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용·거북이·게가 조각됨으로써 축대는 바다라는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 셈이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괘불지주와 석등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괘불지주의 측면에는 화려한 용조각이 있으며, 석등에는 민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리숙한 듯 천진한 듯 만만해 뵈는 거북이가 조각되었다. 석등은 거북이받침 위에 사각의 돌기둥이 놓여 있고, 그위에 공양상이 네 기둥 역할을 하는 독특한 모습의 화사석이 얹힌 모습이다.
화사석 위에는 목조 기와지붕을 완벽히 재현해낸 지붕돌이 얹혀 있는데 다른 곳에는 보기 드문 생김새이다. 숱한 석등 가운데 창조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개성적인 석등인데 화사석 형식을 취하고 있는 공양상의 머리 부분이 없어져 매우 안타깝다. 이 석등은 원래 현재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원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앞에서 보면 봉긋한 영취산의 봉우리가 용마루 위로 솟아올라와 마치 부처의 육계처럼 보이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집으로 보물 제3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러 차례 중건되었는데 현재 건물은 숙중 16년(1690)에 완성된 것이다. 같은 간격으로 구획된 정면 3칸의 기둥사이에 사분합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井자와 빗살무늬가 겸해져 정교하고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창호 위쪽은 다시 교창으로 장식되어 문짝이 다소 높아 보인다. 민흘림의 둥근 기둥도 훤칠하고 장중하다. 마당 쪽에서 올려다보면 그 느낌이 훨씬 강한데, 실제로도 흥국사 대웅전은 세칸 건물로 큰데다 기둥의 높이도 높은 편이다.
창방과 평방위로 보이는 공포도 화려한데, 화려하고 장엄하기로 따지면 내부의 단청이 더 대단하다. 대웅전은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게 되는데 그 안이 바로 불화와 각종 단청으로 장엄된 보물상자인 까닭이다. 우물천장은 연꽃밭인 양 화려하게 치장되었으며, 그 속에 용과 봉황들이 노닐고 있다. 본존불이 모셔진 중앙에는 작고 간결하면서도 화려한 닫집이 있으며 닫집 아래에는 보물 제578호 지정된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후불탱화는 석가여래가 영취산(고대 중인도 마가다국에 있던 산)에서 법회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인데, 석가모니 주위로 네 보살과 여섯 제자, 팔부진중, 분신불 등이 모임에 참여하여 법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화기(畵記)에는 조선 숙종19년(1693) 천신과 의천이라는 두 스님이 수년동안 완성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이 공덕으로 누구에게나 두루 비치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 후불탱화는 가로 4.75m 세로 4.06m의 대작으로 가로가 세로보다 70cm나 더 넓은 가로 구도이다. 그림 크기에 비해 석가여래가 좀 작고 상대적으로 보살등 협시가 커졌으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주제를 뚜렷이 살려내고 있다. 이 불화의 또 다른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한결같이 밝은 얼굴과 탁한 연홍색과 좀 튄다 싶은 녹청색이 고상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한 색채감각이다. 그외 꽃무늬나 옷주름의 선 또한 품위가 있다.
대웅전 안에 보관된 괘불 역시 가로 8.2m 세로 11.15m로 보기 드문 대형작품이다. 괘불은 사찰의 큰 행사 때에나 볼 수 있을 뿐 일반인이 자주 대할 기회는 매우 적다. 화면 전체에 한분의 보살상이 그려져 있으며, 영조35년 (1759)에 제작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색 짙은 대웅전 내부의 각종 장엄에 취해 자칫 못보고 지나칠 수 있는 벽화가 하나 있다. 대웅전 중앙불단의 뒷벽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린 수월백의관음이다. 가로 3.36m 세로 3.89m로 벽 전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은 흰 두건을 머리로부터 내려쓰고 하얀 장삼을 걸쳤으며 아래는 하얀 바탕에 붉은 꽃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었다. 두광은 빛나는 초록색이고 얼굴은 입이 작고 볼이 두툼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손은 자연스럽게 두 무릎위에 얹은 반가상인데 그 자세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 보살의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의 상징인 감로병도 있다. 이 벽화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7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을 나오면 바로 옆에 ‘무사전無私殿)’이란 현판을 단 명부전이 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한 인과응보에 의해서 사후 심판을 받는다는 엄정함이 이름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 대웅전과는 달리 칼칼한 분위기가 풍긴다.
대웅전 뒤켠에는 지눌·법수·계특등 흥국사의 역대 스님들을 모신 불조전이 있으며, 불조전 뒤의 경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팔상전이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는 곳인데, 흥국사의 팔상전에는 팔상탱화가 없고 영조 17년(1741)에 그린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원래 팔상탱화를 모시고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도난당했다.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모신 것은 이 건물이 이전에 대웅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팔상전은 숙중16년(1690)에 대웅전을 확장 불사하면서 나온 목재들을 수습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가로 3.1m 세로 3.2m인 이 영산회상도는 대웅전의 그것과 견주었을 때 작고 단순화된 편이며 색상도 명쾌하지 않다.
팔상전 옆의 응진전은 부처님의 직계 제자를 모신 곳이다. 벽면 둘레에 나한상들을 모시고, 16나한의 모습을 모두 여섯 폭에 나누어 그렸는데 표정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화면을 구성하였으며, 뒷배경은 먹으로 원근을 살려냈다. 한 폭의 크기는 가로 2.6m 세로 2m이다.
이렇게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경내를 두루 살펴본 뒤에는 대웅전 영역에서 왼편으로 조금 벗어나 있는 원통전에 꼭 가보아야 한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이름을 붙여진 전각으로 퍽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중앙 3칸의 방을 둘러싼 사방이 퇴칸이고, 앞쪽에는 따로 정면 3칸 건물이 덧붙어 丁자 모습을 하고 있다.
사방의 처마와 앞으로 덧붙여진 팔작지붕을 각각 활주가 떠받치고 있다. 사방에 마련한 회랑식 퇴칸은 중앙법당에 모신 관세음보살을 탑돌이하듯 돌며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건물의 연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으나 1700년대 초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안에 모신 관음탱화는 대나무가 자라는 따뜻한 바닷가 바위에 오른발을 왼발 위에 살며시 포개고 손을 무릎에 얹은 편안한 자세를 취한 관세음보살을 그린그림인데, 특히 내부가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옷의 곡선은 고려 불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대웅전 후벽 벽화도 관세음보살, 야외 법회 때 내거는 괘불탱화도 관세음보살, 그러고도 또다시 관세음보살을 위해 원통전이라는 전각을 만든 것을 보면 흥국사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게 발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건 때부터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흥국사는 이제 건조하고 삭막한 공단의 사람들에게 쉼터로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대웅전·팔상전·응진전·원통전 등 법당 내부에 모셔진 탱화들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어느새 절 안에서부터 조용히 내뿜어져 나오는 격조 있는 분위기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2. 선소 유적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크고 작은 해상전투가 많았지만 거북선은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 말 그대로 무적함인 거북선은 항상 함대의 선봉장이 되어 맹활약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무적함 거북선은 어디서 만들었을까? 여수(구 여천)시청 뒤쪽 망마산(142m)서쪽 기슭인 시전동 바닷가에 자리한 선소마을은 오래전부터 거북선을 만든 장소로 알려져 왔다.
이미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이 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활용된 거북선은 세척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전라좌수영 선소에서 만든 영귀선, 지금의 여수 돌산읍 군내리로 여겨지는 방답진 선소에서 만든 방답귀선, 그리고 이곳 시전동 선소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순천귀선이라 한다.
그러나 1980년 전라남도가 주관한 발굴조사에 의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 거북선이 머물렀다거나 또는 배를 제작했다고 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만 전선이나 거북선 등이 건조 또는 수리되었을 가능성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결국 이곳에서 거북선이 만들어졌다는 물증은 발견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육지의 한 모퉁이가 자연스럽게 불거져 내륙이 외부로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가리개 역할을 하는 이곳 선소의 천연 요새지 같은 입지조건과, 충무공이 부임한 전라좌수영의 영향권 내에 자리한다는 지역특성 등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거북선이 만들어지고 정박해 있었으리라는 상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유물이 부족한 형편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시전동 선소는 거북선을 기념하며 찾아볼 만하다.
현재 선소 유적으로는 거북선을 대피시켰다는 굴강(掘江)이 복원돼 있으며, 정박중인 배가 바다에 표류하지 못하도록 매어두는 높이 2m가량의 계선주(繫船柱)와 충무공이 수군을 훈련시킨 훈련소이자 선소의 관리 관청이었다는 세검정(洗劍亭)터에 복원된 건물 두 채가 있다.
굴강은 천연적인 해안 요새를 택해 만든 인공호이다. 넓은 지름이 42m되는 타원형으로 일본 수군의 오금을 못 펴게 만들었던 무적함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갈 만한 크기라고 한다. 평소 겨레의 자랑으로서 머리 속에 그려오던 거북선의 위용에 견주어본다면 의외로 작은 크기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대형선박에 익숙해진 계산법에서 나온 착각이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크기뿐만 아니라 생김새, 구조, 성능 등 제대로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거북선에 대한 간략한 구조설명과 전투상황이 『이충무공전서』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에 나타난 수치들을 비교·정리해보면, 거북선의 크기는 대체로 선체길이 70자(1자는 30.65cm) 저판(低板) 길이 50자, 선체너비 24자, 상장(上粧) 너비 30자, 탑승인원 125명, 노의 수가 14자루였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들 수치를 오늘날 배의 크기를 가늠하는 잣대로 치면 150톤에 정도의 배에 해당한다. 어쨌든 이만한 크기는 당대의 배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대급에 속했다. 그러니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밖에
굴강 주변에는 선소의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는 표시석의 용도로 쓰인 듯한 돌장승 세 쌍이 흩어져 있다. 이들은 약 400년 전에 만들어 세운 것으로 짐작되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다. 한 쌍은 굴강 바로 옆에 해안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데, 깊이 묻혀 있는 탓에 키가 작다. 또 다른 한 쌍은 문인석처럼 홀대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굴강 앞의 선소체육공원 내에 있으며, 나머지 한 쌍은 망마산 기슭의 밭가에 서 있다. 망마산 밭가에 서 있는 장승은 심하게 훼손되어 얼굴 표정조자 알아볼 수 없다.
그런가 하면 굴강 가까이에 있는 계선주도 표지석 용도로 쓰인 장승이라 주장되기도 한다. 본래 계선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키가 크지 않은 원주형인데, 이 석물에는 풍화로 인한 마모가 심해 분명치는 않으나 사각기둥의 윗부분에 사람 형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선소마을이 편히 기대고 있는 망마산은 기마병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맑은 날이면 산꼭대기에서 남해 일대의 선박출입이 한눈에 조망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망대 역할까지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오충사(五忠祠)와 이순신 어머니 거처소
오충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무렵 여수지방의 명문이었던 정씨(丁氏) 문중에서 정철(丁哲)·정춘(丁春)·정대영(丁大永)·정린(丁麟) 등 네 사람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 수군으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을 기려 세운 것이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을미 5월 27일에 “정철이 서울에서 진으로 서신을 가지고 와 ……” 등의 기록이 나오고 이순신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철은 원래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 사촌동생 춘(春)과 함께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진주 제석당산성(帝釋堂山城)에 주둔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순신의 계문으로 초계군수가 내려졌다. 그 뒤 아우 인, 아들 언신(彦信)과 함께 순절하여 정철에게는 병조판서가 추증되었다. 1921년에 창원정씨(昌原丁氏) 문중과 여수지역향민이 쌍봉면 웅천리(지금의 여수시 웅천동)에 오충사를 재건하였는데, 이 때 이순신을 주벽으로 모시게 되고 정씨 네 사람을 배향하면서 오충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의 팔작지붕의 본사와 신당(神堂)·강당·재실 등이 있다. 웅천은 곰천·고음천(古音川)이라고도 불리었고, 이 마을에 속하는 솔개마을에 정철의 집이 있었으므로 이순신은 어머니 변씨를 이곳으로 모시게 하여 피난처로 삼았다. 변씨부인은 이곳에서 만 5년간 피난살이를 하였으며, 지금도 그 집터가 남아 있다.
4. 충민사
여수시 덕충동 마래산 중턱에 자리한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다. 여수의 진산인 종고산이 한눈에 조망되어 사당에서 약300m 떨어진 입구에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한층 기리는 의미로 여기서부터는 누구든지 타고 온 말에서 내려 옷깃을 바로 여며야 했으리라.
충민사는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이나 먼저 세워진 충무공 사당 제 1호이다.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4년(1601) 영의정 이항복의 요청에 따라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하였으며, 이후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5년(1868)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다시 고종10년(1873)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충무공과 함께 싸운 이억기, 안흥국 장군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
충민사 바로 옆에 있는 석천사(石泉寺) 역시 충무공과 무관하지 않다. 충무공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승군대장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화엄사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운은 충무공의 군사자문 역할을 했으며, 거북선을 만드는 데도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형은 흥국사 승려로 충무공이 전사할 때 같은 배에 타고 있었으며, 그의 장렬한 죽음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충무공의 충절을 높이 사고 있던 옥형은 충무공을 위해 평소 한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충민사 옆에 초당을 짓고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 초당이 바로 석천사이다.
5. 진남관(鎭南館)
여수는 항구이자 공업도시인 탓에 다소 번잡해 보이지만, ‘여수 가서 돈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일찍이 유행했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어느 미항 부럽지 않다는 여수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여수는 백제의 원촌현이었는데 삼국통일 후에 해읍현으로 불리다가 고려에 이르러 여수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이 지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유탁과 정지라는 이가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수군 방어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으며, 조선 성종10년(1479) 지금의 해군함대사령부라 할 수 있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전라좌수영)이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 폐영될 때까지 400여 년간 조선 수군의 본거지였다.
임진왜란 직전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으며, 전쟁 이후 충무공이 삼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수는 현대적 공업도시로 자리잡기 이전에는 국토방위의 요지였으며, 충무공의 유적이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여수의 한가운데에는 이 고장의 중심산인 종고산(鐘鼓山)이 우뚝 솟아 있다. 산의 높이는 불과 199m밖에 되지 않지만, 충무공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은은한 종소리를 사흘간이나 냈다고 하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충무공이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왜 여수에 있는 종고산이 울었다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당시 충무공은 전라좌도의 수군절도사였고, 그 본부인 전라좌수영이 바로 종고산 기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수군을 총지휘했다.
당시 충무공이 어명을 받았을 때 여수시 군자동 일대 전라좌수영 옛 자리에는 현재 진남관만이 서 있다. 전라좌수영의 성은 대부분은 허물어졌거나 도심에 파묻혀 흔적이 희미하다.
본래 진남관 자리에는 전라좌수영 성의 중심건물인 진해루(鎭海樓)가 들어서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진남관은 전쟁직후인 선조 32년(1599) 삼도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새로 지은 객사로 숙종42년(1716) 화재로 소실되어 숙종44년(1718) 재건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남관은 당시 임금이 사용하던 궁을 제외하고 지방에 세워진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람을 압도하는 이 건물은 길이 75m 높이 14m이며 정면 15칸 측면 5칸의 총 75칸 규모에 둘레가 2.4m되는 기둥만 무려 68개에 이른다. 1910년 무렵부터 1960년대까지는 학교 교실로 사용됐는데 이로 인해 원형이 많이 바뀌었다. 1959년 보수할 때에는 옛 원형을 찾을 수 없어 나중에 보수된 것이 분명한 벽체만을 뜯어냈다고 한다.
객사는 본래 고려 때부터 각 고을에 세운 관사로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를 영접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곳에 임금의 궐패(임금을 상징하는 귈자를 새긴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절을 하였다. 객사 건물은 보통 궐패를 모시는 주사와 주사 좌우에 익사를 지어 관리의 숙소로 사용하도록 건축되었는데 진남관은 주사와 익사의 구분 없이 건물 한 채에 중앙을 막아 궐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진남관이 분명 객사 용도의 건물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종종 이 건물을 수군의 지휘본부 오해하게 된다. 이는 현재 진남관에 궐패를 봉안하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수천만 군사의 사기를 복돋우며 진두 지휘하는 위엄 있고 기세 좋은 장군 같은 진남관의 외형 때문이다.
진남관은 돌을 다듬어 단정하게 쌓아올린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체 없이 팔작지붕을 얹었다. 기둥이나 보를 비롯한 모든 부재가 굵직하고 큼직큼직하여 건물이 퍽 호방해 보인다. 기둥끼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으며, 기둥 위에는 평방 없이 주두를 얹고 외2출목의 공포를 짜 다포식집 모습을 보이며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화려한 연꽃 화반을 얹어 주심포 양식도 도입하고 있다.
건물의 앞뒷면에서 안쪽으로 제2의 기둥열을 이루는 것이 고주인데, 그 위로 용이 꿈틀대듯 굵직한 대들보가 높게 걸려 있어 실내공간이 훨씬 높아 보인다. 건물 양쪽 끝에서 세 번째 측면 기둥열만은 예외적인 배치법으로 열을 흐트려놓아 내부가 복도같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출입은 정면 가운데 계단으로 하였으며, 중앙의 출입칸은 가운데 넓은 칸 하나와 좌우에 두드러지게 작은 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느 칸들과 구별된다. 건물의 중앙으로 출입하였기 때문에 실제 사용시에는 크고 긴 건물이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 같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를 비롯해 모든 부재들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붕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네 추녀 끝은 활주로 지탱되고 있다. 현재 진남관 내부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의 약사가 적힌 시설물이 설치돼 있다. 진남관은 보물 제324호이다.
진남관의 왼쪽 좁은 마당 한켠에는 수사, 절도사 등을 지낸 관리들의 선정비가 늘어서 있다. 진남관 정면 뜰에는 두 개의 석주화대가 서 있다. 석주화대는 글자 그대로 불을 밝히던 돌기둥으로 수군들의 야간훈련시 사용된 석물이다. 충무공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앞마당에는 석인상 하나가 서 있는데 충무공이 왜군의 공격을 막고자 전술적으로 사용했던 ‘여수 돌사람’(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33호)이다. 충무공은 좌수영의 곳곳에 이들 돌사람을 세워 적을 교란시켰다고 한다. 왜군들은 돌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공격해오지 못하고 이것이 없는 곳으로 공격을 하다가 매복에 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원래 일곱 개였다는 이 돌사람은 현재 하나만 전해오는데, 지금 남아 있는 돌사람은 2m높이에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관을 쓰고 홀대를 쥔 채 듬직하게 서 있는 문신의 모습이 뚜렷하다. 그런데 돌사람이 왜 무인이 아닌 문신인지 그리고 여수 앞바다를 노려보며 왜군을 위협했을 그 기개는 어디로 가고 왜 지금은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지 그 내력을 알 수가 없다.
바다를 호령할 듯 늠름한 진남관 앞에서 돌사람과 마주 서 있노라면 여수 시가지와 돌산대교, 장군도 등이 바다와 어우러져 시야가 가득 들어온다. 진남관 앞에 새로 지은 2층 누각은 전라좌수영의 문루 역할을 했던 망해루라는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91년 새롭게 지어졌다. 망해루 안쪽 진남관 매표소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힌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표어가 제법 비장하게 느껴진다.
6.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
진남관을 나와 길 건너 맞은편 언덕길을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다보면 여수성결교회가 나온다. 교회 뒤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과 우리 수군의 전적, 그리고 장군과 군사들 사이에 오간 깊은 정을 더듬어 볼 만한 비석들이 있다. 이 비석들이 서 있는 자리는 ‘고소대(姑蘇臺)에 갠 달’이라고 하여 옛부터 여수 8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소정(姑蘇亭)의 흔적도, 기념비를 찾아오는 이도 없이 외지고 한산하기만 하다. 뜰 앞에 서 있는 수령 300년이라는 느티나무마저 쓸쓸해 보인다.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비석이 있는데, 가운데가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왼쪽 비석이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오른쪽이 타루비(墮淚碑)이다. 좌수영대첩비는 광해군 12년(1620)에 충무공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이고, 동령소갈비는 같은 해 현감 심인조가 좌수영대첩비의 건립경위를 기록한 사적비이다. 좌수영대첩비는 높이 3.05m 폭 1.24m이며, 동령소갈비는 높이 1.14m 폭 0.58m이다. 타루비는 두 비석의 건립연대보다 앞선 시기, 곧 충무공 사후 5년되는 선조36년(1603)에 수군들이 충무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타루비는 높이 0.94m 폭 0.59m이다.
좌수영대첩비는 거북받침을 하고 있으며, 지붕돌에는 뿔이 달린 용이 새겨져 있고, 지붕 꼭대기는 큼직한 연꽃봉오리가 올려져 있다. 비문은 백사 이항복이 지었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옥포·노량·한산·명량 등지에서 활약한 충무공의 행적과 애국충정 그리고 전몰상황까지 임진왜란 전편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비에 새겨진 명칭은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이지만, 일반적으로 충무공대첩비, 좌수영대첩비 등으로 불린다.
좌수영대첩비는 본래 좌수영성 서문 밖(지금의 충무동)에 건립되었으나, 1942년 일본인 경찰서장 마쓰기가 비를 서울로 빼돌리는 바람에 그 행적을 모르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비각은 1948년에 지은 것이다.
타루비는 연당초문이 새겨진 높직한 네모받침이 있으며 구름무늬만 가득한 지붕돌 위에는 연꽃봉오리가 단조롭게 솟아 있다. 비문 내용에 적힌 비석 건립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영하(營下)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비라 하였다. 이는 중국 양양 사람들이 양호 장군의 덕을 생각하여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타루비는 비록 크지는 않지만 충무공과 좌수영 수군사이에 오갔던 깊은 정이 듬뿍 담긴 비석으로, 거대하게 성역화한 그 어떤 충무공 유적보다 귀중하게 느껴진다. 타루비 역시 좌수영대첩비와 함께 일제강점기 행방불명되었다가 광복 뒤에 경복궁에서 발견돼 이곳에 다시 세웠다.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는 보물 제571호로 지정돼 있다.
7. 오동도
오동도는 1933년 육지와 떨어진 768m 구간에 방파제를 쌓으면서 섬은 육지와 연결됐다. 1996년부터는 동백열차를 방파제 구간에 운행해 오동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방파제에는 바다, 물고기를 주제로 한 그림과 여수의 명물 돌산대교를 그린 벽화가 있어 섬으로 향하는 길이 심심치 않다.
전국 최대의 동백나무 군락지로 알려진 오동도는 0.12㎢의 작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류의 식물들로 가득하다. 섬의 모양이 오동잎을 닮아 오동도라 불리지만, 실은 동백나무 3,600여 그루가 있는 동백나무섬이다. 이뿐 아니라 13여 종의 난대성 희귀수목이 자라나는 천연의 숲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이 이 섬에 ‘시누대’라 불리는 해장죽(海藏竹)을 심어 화살을 만들었다 하여 ‘죽도’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섬에서는 해장죽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섬 안쪽과 달리 섬의 겉모양은 기암절벽으로 이뤄졌다. 완만한 구릉성 산지인 지형에 암석으로 해안이 이뤄졌다. 섬의 밖에서 바라보면 해안선을 따라 해식과 풍화 작용으로 인해 해안에 만들어진 절벽 ‘해식애’가 늘어서 있다. 덕분에 섬의 곳곳은 소라바위, 병풍바위, 지붕바위, 코끼리바위 같은 이름이 붙은 기암들과 오동도의 전설이 내려오는 용굴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오동도에는 오동나무에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말기 신돈은 오동나무가 무성했던 오동도에 여수의 봉산, 봉계, 구봉산 등에 사는 봉황새가 자주 드나든단 얘길 듣고 임금을 상징하는 새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했다. 또한 전라도의 전(全)자가 임금 왕(王)이 들어있는 글자라 하여 이곳에서 혹시 왕이 나올까 우려해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다고 한다. 전설이지만 예전에 많았다던 오동나무가 사라지고 지금은 동백나무가 가득하니 귀에 쏙 들어오는 얘기다. 향토학자들은 오동도의 지형과 식물 분포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라고 설명하지만, 봉황이 날아오는 섬이라니 느낌이 남다르다. 오동도를 멀리서 바라보고 싶다면 동백열차를 타는 코스보다 유람선을 타는 것이 좋다. 여수의 카멜레온이라는 돌산대교와 함께 여수 앞 바다를 다니는 유람선은 한려수도 관광의 시작으로 인기가 높다.
8. 돌산도와 영구암(향일암)
여수의 남쪽에 위치한 돌산도는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다. 1984년 완성된 450m 길이의 돌산대교로 육지와 연결된 이후 자동차 왕래가 쉬워지면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섬의 가장 남쪽에 원효의 관음도량이라고 알려진 영구암(靈龜庵)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해돋이와 낙조 풍광이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돌산대교를 건너 영구암으로 가는 길은 남도의 섬마을 정취가 물씬하고 남해 풍광이 아름답게 펼쳐져 드라이브 코스로 만점이다. 도중 곳곳에서 만나는 절경들 특히 무술목 해변과 방죽포해수욕장이 영구암으로 가는 발길을 붙잡곤 한다. 무술목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왜선 60여척을 격파한 전승지이다. 이때 전사한 왜적들의 피로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여 ‘피내’라고도 불렸는데, 현재 이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남아 있다. 피내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무서운 독’이라는 뜻의 무술목, 혹은 왜군을 섬멸한 전투가 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1598)에 일어났다는 뜻의 무술목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무술목 앞바다에서 돌산도를 바라보면 마치 두 개의 섬처럼 보인다. 이곳이 바로 섬의 잘록한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무술목이기 때문이다. 임란 때 지형 사정을 모르는 왜군들은 이를 뱃길로 오인하여 들어섰다가 섬멸당했다고 한다. 해송과 어우러진 600~700m에 이르는 해안선의 몽돌밭이며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이 볼 만하다.
울울한 해송과 아담한 백사장을 낀 섬마을이 그릇 안처럼 오목하게 들어가 아늑하게 자리한 방죽포해수욕장도 적잖이 알려진 명소이다. 방죽포를 지나면서부터는 해안도로가 산등성이를 타고 돈다. 짙푸른 물 위 하얀 점으로 줄지어 서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이 풍성하고 싱싱한 바다 풍광을 펼쳐보인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바다 위로 섬하나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돌산도 끄트머리에 돌출한 임포마을 영구암 주변이다.
돌산도의 끄트머리 금오산(金鰲山) 중턱에 자리잡은 영구암은 사실 향일암(向日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가까운 지역 주민들도 영구암이라면 못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다. 영구암은 그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원효대사가 창건했을 당시에는 ‘원통암’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 윤필거사가 수도할 때에는 금오산 이름을 따 ‘금오암’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영구암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지형적인 특징에서 나왔다고 한다.
절에서 금오산에 이르는 일대의 바위들에는 기이하게도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줄무늬가 드러나 있는데, 암자가 들어선 자리가 거북이 등에 해당한다고 한다. 암자 뒤편 산등성이의 바위군은 불경이 씌어진 책 무더기에 해당하므로 영구암 주변형세는 마치 거북이가 불경을 지고 팔을 휘저으며 바다로 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실제로 암자에 올라 임포마을 쪽을 내려다보면 주차장 부근이 거북이의 머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바라보자’라는 뜻의 향일암이라 강제로 부르게 한 이후부터는 이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하루 빨리 영구암이 제이름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는데, 한편에서는 잔잔한 바다 위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천하일품의 해돋이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향일암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라 하는 말도 있다. 그 외에 책육암(冊六庵)이라 불렸다고도 하는데, 어쨌거나 현재 절에서는 영구암을 절의 정식 이름으로 내걸고 있다.
방죽포 해수욕장을 지나 다도해 풍광을 만끽하여 영구암이 자리한 돌산의 끄트머리 임포마을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언덕에 모습을 드러내는 퍽 탐스럽고 잘생긴 동백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동백나무로 알려져 있다. 보통 남서해안에서 자생하고 있는 동백나무는 높이5.7m 이하로 체구가 작은 상록수인데 이 나무는 높이 10m 어른 가슴 높이의 둘레가 2.4m 크기나 된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는 마을의 당산나무인 이 동백나무 앞에서 금오산 산신과 사해용왕에게 풍어와 어민들의 안녕을 비는 동백제를 올린다. 그러나 현재 임포마을은 풍어를 간구하는 어촌이라기보다 영구암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민박촌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임포마을의 상가 골목에서 금오산 등성이로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약 15분쯤 오르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아슬아슬한 바위틈이 나타나 일주문을 대신한다. 여기를 통과하면 비탈이 심한 벼랑위로 비좁게 들어선 몇몇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영구암이 나선다. 일단 암자에 들어서면 어느 전각 앞에서나 바다가 보인다. 특히 대웅전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에 맞닿은 기암절벽에 우거진 동백나무숲이 일품이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마을 쪽을 보면 거북이가 불경을 등에 지고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는 형세를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에서 ‘원효스님 수도도량 관음전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면 관음전이 나온다. 이 관음전은 원효스님이 수도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관음전 옆에는 바다를 향해 옥처럼 해맑은 미소를 던지는 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영구암은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함께 남해의 관음도량으로 유명하다.
영구암 입구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따로 나 있다. 영구암에서도 전설처럼 입으로 전해오는 환상적인 해돋이를 목격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수고하여 정상에 오르면 더 황홀한 해돋이를 맞이 할 수 있다. 해질 무렵의 낙조 또한 해돋이 못지 않는 장관을 이루는데, 동해가 아닌 남해에서 보는 해돋이이고 서해가 아닌 곳에서 보는 낙조이기에 더 귀하게 여겨진다.
여수시청 문화관광과 061-659-3874
여수 문화해설사 김기준 010-9965-0357
거북이식당(간장게장) 061-681-4420
복춘식당(아구탕, 서대회) 061-662-5260
광장미가식당 061-662-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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