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한당(慕寒堂)
모한당 현판 |
9문중 30선비들이 한강(寒岡)선생의 학문을 숭상하고 인품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이락서당 동실(東室)을 모한당(慕寒堂)으로 정하고, 모한당이란 편액(扁額)을 문밖에 걸어두고 늘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다.
※ 한강(寒岡)의 행적(行蹟)과 학문적 배경
한강 정구는 1543년 7월 9일 경북 성주 유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산군수를 지낸 정윤증(鄭胤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의 외손으로 충좌위 부사맹(忠佐衛 副司孟)을 지낸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그의 선대는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인과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경북성주에 가서 정착하였다.
한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5세에 이미 신동(神童)으로 불렸으며 10세에《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563년에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뵙고 양 스승에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끝내 벼슬로 출세하는 길을 외면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주변의 권고로 1563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정구에게 여러 벼슬을 주어 불렀지만 모두 사양하고 백매헌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 관료생활(官僚生活) 및 정치활동(政治活動)
학덕으로 명성이 알려지면서 1573년(선조6년) 조식 문하의 동문이자 스승 조식의 외손서인 김우옹(金宇顒)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으로 천거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류성룡 등도 그를 천거하였고 이황, 조식의 문도들의 거듭된 권고로 관직에 나가게 된다. 1578년 1월 사포서 사포(司圃署 司圃)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다시 1578년 사포서 주부(司圃署 主簿)에 임명되어 출사하였다.
이후 삼가현감(三嘉縣監), 의흥현감(義興縣監),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불취(不就)하였다. 그 뒤 1580년(선조13년) 4월 창녕현감(昌寧縣監)에 임명되자 부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갔다. 1581년 9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 되었다가 1582년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1583년 3월 다시 인재를 천거할 때 이이(李珥)가 그를 다시 천거하였다. 그해 10월 이조판서인 율곡(栗谷) 이이가 그를 선조에게 추천하였다. 1584년(선조17년) 3월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했다가 1585년 소환되어 교정청 낭청(校正廳 郎廳)에 임명되었으며 1587년 함안군수로 나갔다. 그 뒤 1591년 12월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부임했다가 1592년(선조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로 재직하면서 창의문(彰義門)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통천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까지 쳐들어온 일본군과 상대하였다.
그 후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이후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등을 지냈다. 1598년 전란이 끝난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뜻을 두었으나 출사하라는 선조와 조정의 끈질긴 부탁, 권고를 이기지 못해 결국 출사하였다.
1600년 9월 행 부호군(行副護軍), 10월 행 충무위 사직(行忠武衛 司直)이 되었으며 이후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선조34년) 9월 영월군수를 거쳐 1602년(선조35년) 1월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교육시설 확장을 원하는 지역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백운서당을 중수, 지원하여 운곡서원(雲谷書堂)으로 개편하였다. 1603년 3월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8월 사직하고 동지(同知)로 재수(再授)되었다. 1604년 3월 공조참판을 거쳐 그해 8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1607년 1월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였다. 선조가 사망하자 관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 학문 연구(學問 硏究)와 후학(後學) 양성(養成)
1608년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까지 나타나자 향리로 돌아가 백매원(百梅園)을 설립하고 후학 유생들을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과 가까워졌지만 그의 수많은 문하생들은 남인과 북인에 두루 폭넓게 진출해 있었고, 그 역시 이황의 문인이자 조식의 문인으로 남인과 북인 모두에 동문수학한 동지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 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 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다. 수많은 문하들을 배출하였으며 한강문인록(寒岡門人錄)에는 문인이 모두 356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더 많다.
유명 문인으로는 초기의 제자인 문위(文緯),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서사원(徐思遠) 등으로부터 이천봉(李天封), 이천배(李天培), 최항경(崔恒慶), 송원기(宋遠器), 손처눌(孫處訥), 후기의 제자인 허목(許穆), 황종해(黃宗海) 등이 이름이 알려졌다. 허목은 그의 제자들 중 특히 이름이 높았으며, 허목은 광해군 때에 한강의 문하에서 오래 수학하였다. 허목은 조선 후기 남인성리학의 거두이자 실학파의 기원이 된다. 또한 그의 문하생들 중 한준겸(韓浚謙) 등 소수는 특이하게도 서인의 당원이 된다.
정순목의 저서 중 한강학통 연원도에 의하면 근기학파에서 미수(眉叟) 허목(許穆)—성호(星湖) 이익(李瀷)―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 진다고 하였다.
※ 사상(思想) 및 학문적(學問的) 치적(治績)
그는 주자학(朱子學)에 깊이 침잠(沈潛)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자(性理學者)였음에도 주자(朱子)의 생각만이 진실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뒤 다른 학자들의 견해 외에 주자의 견해를 직접 해석하였고, 공자와 맹자, 순자의 견해 등도 선학자들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직접 해석하여 문인,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철저한 주자학자로 성리학을 삶에 적용하려 하였다. 한강학파에서는 남인의 시조격인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그 자신은 주자의 이론과 가례(家禮)를 철저하게 지켰으며 이론을 정립하여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절충한 한강학파(寒岡學派)라고 하는 새로운 학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후일 유학자들의 향토지 편찬 주도와 각 지역과 지역 향토지 편찬, 발간 사업에 영향을 주었다. 각지의 지방관과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향토지를 편찬하고 지역 인문학(人文學) 양성에 노력했다. 그의 시(詩) 작품에서는 현실의 자연 경관을 주로 묘사했다. 그러나 시(詩)에도 주자와 성리학적 영향이 함축되어 있다. 《무휼구곡시》는 정구가 배향되어 있는 회연서원 뒤편 봉우리인 봉비암에서부터 대가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김천시 증산면 수도산의 용추에 이르기까지 아홉 구비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이다. 이 시(詩)의 서시(序詩) 에서 밝힌 “주부자께서 일찍이 깃들었던 곳,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라고 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땅에서 주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역사 지식에 영향 받은 허목과 이익, 안정복 등은 후에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역사서를 편찬하면서는 연표형식으로 중국사와 한국사, 그리고 기타 동양의 여러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강목체(綱目體) 서술을 하면서도 정통론(正統論)의 특징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간단한 민간요법 외에도 안질환을 진맥할 수 있었다. 의학서로 눈병에 대한 처방을 담은 《의안집방(醫眼集方)》을 간행하였으며, 집에 소장한 의학서와 기타 의학서들을 참고하여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한 《광사속집(廣嗣續集)》 등의 의서(醫書)를 편찬하여 의사를 만날 수 없었던 시골과 산골의 백성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에 자리잡은 회연서원(檜淵書院)은 학자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역 주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74년 12월 10일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성주군)로 지정되었으며, 청주정씨 문목공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회연서원 전경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8 소재>
이 회연서원은 1581년 정구 선생이 후진 양성을 위하여 성주군 수륜면 양정봉비암(陽亭鳳飛岩) 기슭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지어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실현을 위하여 강론하던 곳이다. 선생의 별세 2년 후에 전국의 사림이 모여 이곳에 서원 창건론을 발의하여, 1622년(광해군14년)에 창건되었다. 한강(寒岡)을 주벽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위패를 모신 이 서원은 1690년(숙종1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향현사(鄕賢祠)에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 다섯 분을 모셨다. 전국 20여 곳에서 위패를 봉안했으나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반(半)이나 폐쇄되었다. 그후 회연서원은 1974년에 복원되어 1984년 5월에 다시 위판을 봉안했다.
노곡정사 화재 이후 칠곡군 소속이던 사수동에 옮겨 사양정사를 짓고 6년간 후학양성과 연구저술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620년 정월 5일 유시에 사양정사 지경재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 후 사수동이 대구시 북구로 편입되어 빠른 개발이 진행되어 지난날의 자취가 인멸될 위험이 있게 되자 달구벌의 얼 찾기 운동 회장인 이정웅 등 인사들과 후손 정건용씨 등의 뜻을 모아 이곳에 한강공원을 만들고 이우성박사의 찬(撰)으로 사적비를 세워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길이 후손에게 전하려 조성한 것이다.
한강(寒岡) 후손 정명(鄭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