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 펑위샹(馮玉祥)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콜럼비아대학의 중국 유학생들. 구웨이쥔은 1910년 탕샤오이의 방문 때와 비슷했다는 회고를 남겼다.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09%2F33-3.png)
지난 세기 말,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짓궂은 구술을 많이 남겼다. “수 십 년 전, 중국인들의 남녀관계가 보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당시 베이핑(北平·베이징)의 남녀관계는 복잡했다. 고관대작의 부인들 중에 애인 없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인간의 얼굴에는 직업과 지위라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그것만 벗겨내면 일반 동물과 다를 게 없다”며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과의 일화를 거론했다.
구웨이쥔은 장쉐량보다 열 두 살 위였다. 장쉐량이 가깝게 지내던 여인이 맘에 들었다. 하루는 “너만 재미보지 말고 내게도 소개해 달라”고 애걸했다. “몇 번 보다 보면 그게 그거”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모른 체 할 테니 재주껏 해보라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구웨이쥔은 뛰어난 외교관다웠다. 얼굴이 두껍고 여자 홀리는 솜씨가 뛰어났다. 보답할 줄도 알았다. 친하게 지내던 여인들을 장쉐량에게 소개시켜줬다. 그 것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구웨이쥔은 네 번 결혼했다. 그 중 한 명이 중국 사교계에 명성을 떨쳤다. 장쉐량은 이 여인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구웨이쥔이 도망가 있을 때 그 부인은 베이징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구웨이쥔의 소식이 궁금해 찾아 갔더니 내게 추파를 던졌다. 나보다 나이가 두 배 가까이 되는 여인이었다. 그날 나는 죽는 줄 알았다. 그 후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장쉐량은 그날의 부인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암시는 줬다. “첫 번째 부인은 본 적도 없고, 두 번째 부인인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의 딸은 보기 드물게 단정한 여인이었다. 마지막 부인도 아니다.” 이런 말도 했다. “내 친구 아들 중에는 구웨이쥔과 똑같이 생긴 애도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주미 공사 시절, 외교부장 취임을 앞두고 일시 귀국한 구웨이쥔(앞줄 가운데). 1922년 5월 상하이.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09%2F33-4.png)
구웨이쥔은 1888년 1월말, 상하이 병기창 재정주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이 손자를 유난히 예뻐했다. 옆집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 “관운이 성하고 장수할 팔자”라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틈만 나면 상하이의 점집을 순례하다시피 했다. 가는 곳마다 점괘가 비슷했다. 열 두 살 때 학질이 걸리자 불안했다. 명의(名醫) 장샹윈(張驤雲·장양운)을 찾아가 손자의 사주를 내밀었다. “네 손녀와 정혼하자.” 장샹윈은 사주 풀이에 일가견이 있었다. 한참 들여다 보더니 군 말없이 수락했다. “어릴 때 병마에 시달리겠지만 별거 아니다. 멀리 떠날수록 좋다. 처갓집 덕을 많이 볼 사주다.”
장샹윈은 손녀와 정혼한 구웨이쥔을 정성껏 치료했다. 효과가 없었다. 할머니는 당황했다. 미래의 사돈에게 정중히 제의했다. “웨이쥔을 멀리 보내자. 멀면 멀수록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왕이면 미국 유학을 보내고 싶다. 비용은 반씩 부담하자.” 장샹윈은 지혜로운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구웨이쥔은 태평양을 건넜다. 1904년, 열 여섯 살 때였다. 이듬해 가을 콜럼비아대학에 무난히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화려했다. 학보를 발간하고, 뉴욕타임즈에 실린 중국 관련기사를 번역해 본국에 보냈다. 유학생회 회장에 출마했을 때도 몰표를 얻었다. 1900년, 10여명에 불과했던 중국인 유학생이 500명을 돌파했을 때였다.
유학생은 여러 부류가 있었다. 공부 외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을 문사파(文士派), 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학생은 유외파(留外派), 몰려 다니며 놀기에 열중하는 유학생은 류외파(流外派), 몸값 올리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학생은 명예파(名譽派) 소리를 들을 때였다. 구웨이쥔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석사 과정 입학을 앞두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잠시 다녀가라는 할머니의 전보를 받고 짚히는 바가 있었다. 할머니의 분부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장샹윈의 손녀와 혼례를 마쳤다. 신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다.
친구의 소개로 망명 중이던 쑨원(孫文·손문)을 만났다. 남에게 말은 안 했지만 허황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진한 아버지가 큰집을 마련하고, 넓은 땅을 매입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만나는 바람에, 상상도 못했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인생이다. 조선 땅에서 탕샤오이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구웨이쥔과 탕샤오이의 만남도 우연이었다.
1910년 1월, 청나라 정부는 만주총독 탕샤오이를 미국에 파견했다. 탕샤오이는 만나고 싶은 유학생 명단을 외교부에 건넸다. “이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라. 열흘 간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명단에 구웨이쥔의 이름이 빠질 리 없었다. 초청 받은 유학생들은 구웨이쥔을 대표로 선출했다.
탕샤오이가 베푼 만찬에서 구웨이쥔은 환영사를 했다. 탕샤오위는 대학 후배의 연설에 만족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 윌슨(8년 후 28대 대통령에 취임)과 만날 때 구웨이쥔을 데리고 갔다. 구웨이쥔은 윌슨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계속>
김명호
27세에 주미 대사로 변신, 벼락 출세한 구웨이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6-
![1921년 10월, 국제연맹 이사회 의장 시절, 중국에 있던 외국의 조계(租界) 회수와 영사재판권 취소, 관세 자주권 협의를 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구웨이쥔(오른쪽)과 세 번째 부인 황후이란. 왼쪽은 수석대표로 참석한 대리원(大理院. 대법원에 해당) 원장 왕충후이(王寵惠).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1.png)
중화민국 최고의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일생을 보면 외교관은 장가를 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고 그런 집안 사위가 됐다가는, 변두리만 맴돌다 매너 좋고 무책임한 훈수꾼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911년 10월 10일 새벽 호북신군(湖北新軍)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성(省)이 동조했다. 청 제국은 고향에서 눈치만 살피던 북양(北洋)신군 설립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국의 실력자로 부상한 위안스카이는 혁명세력과 연합했다.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선포했다.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수십 년 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를 초대 내각총리에 임명했다. 탕샤오이는 위안스카이에게 구웨이쥔을 추천했다. “미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총기가 넘치는 청년이다. 총통부 비서로 제격이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논문에 열중하던 구웨이쥔은 본국의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총리 탕샤오이가 자신을 모른 체 할 리가 없었다. 귀국 요청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우선 부인 장(張)씨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너나 나나, 얼굴 한 번 못 보고 결혼했다. 첫날밤 나는 엄마 방에서 잠을 잤다. 그 후에도 그랬다. 할머니가 억지로 네 방에 집어넣었을 때,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했다. 미국에 와서도 우리는 떨어져 살았다. 말이 부부지 콧김 한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다. 너도 그걸 당연시 여겼다. 나는 겨울날 네 손에 쥐어진 부채나 다름없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다.” 부인이 먼저 도장을 꺼내들었다.
이듬해 2월, 구웨이쥔은 주미 공사의 호출을 받았다. 총통부 비서로 임명됐다는 말을 듣자 호기를 부렸다. “박사논문을 마치고 귀국하겠다.” 탕샤오이는 귀국한 구웨이쥔을 위안스카이에게 데리고 갔다. 내각비서도 겸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위안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삼기로 작정을 했구나.” 구웨이쥔은 총통부와 내각을 분주히 오갔다.
탕샤오이는 야유회를 좋아했다. 딸 바오밍(寶明)과 베이징 교외에 갈 때마다 구웨이쥔을 불렀다. 바오밍은 어릴 때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구웨이쥔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이유를 밝혔다. “매너가 너무 좋다. 뭔가 수상하다.”
탕샤오이와 위안스카이의 밀월은 6개월 만에 끝났다. 총리직을 내던진 탕샤오이가 텐진(天津)으로 가자 구웨이쥔도 뒤를 따랐다. 텐진 조계(租界)의 영국호텔에 거처를 정하고, 틈만 나면 탕샤오이의 집을 찾아갔다.
탕샤오이는 구웨이쥔을 총애했다. 볼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내 처신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직원을 제출하지 마라. 너는 일류 외교관 자질을 타고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외교부에 들어갈 궁리를 해라.” 딸과 만날 기회도 어거지로 만들어줬다. 자주 보다 보면 정도 드는 법. 구웨이쥔과 바오밍은 단둘이 차도 마시고 시장도 같이 다녔다. 탕샤오이는 딸이 늦게 들어올수록 좋아했다.
탕샤오이의 권유로 귀경한 구웨이쥔은 외교부 비서도 겸임했다. 영국과 티베트 문제 담판에 참여해 외교능력을 인정받았다. 1913년, 25세 때였다. 그 해 6월 3일, 상하이에서 바오밍과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은 화젯거리를 남겼다. 원인 제공자는 탕샤오이였다. 원래 결혼일은 6월 2일이었다. 며칠을 앞두고 탕샤오이가 딸과 사위에게 사정했다. “내가 깜빡했다. 2일은 내가 네 번째 부인을 맞는 날이다. 어쩌다 보니 장소도 같은 곳이다. 부녀가 같은 날 결혼식을 하는 것은 전통에 어긋난다. 유사 이래 이런 일이 없었다. 너희들이 3일이나 4일로 바꿔라.” 구웨이쥔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바오밍은 뭇 여인들의 시샘을 받았다.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 메이란팡(梅蘭芳·매란방)과 함께 3대 미남인 청년 외교관을 어린애가 채갔다.” 구웨이쥔은 고관 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1917년 가을, 아들과 함께 구웨이쥔과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탕바오밍.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2.png)
결혼 2년 후 구웨이쥔은 주미대사 임명장을 받았다. 27세, 세계 외교사상 최연소 미국대사였다. 구웨이쥔은 장인덕을 톡톡히 봤다. 부임 첫 번째 가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재혼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탕샤오이와 친분이 두터웠던 윌슨이 구웨이쥔과 바오밍에게 참석해 축하해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 대사 생활이 순조로울 수 밖에 없었다. 맘만 먹으면, 어느 때건 대통령 면담이 가능했다.
바오밍은 명이 짧았다. 결혼 5년 후 미국에서 2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귀웨이쥔은 슬퍼할 틈도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파리 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해 기염을 토했다. 패전국 독일이 누리던 산둥반도(山東半島)의 권익을 승전국 일본이 차지하려 하자 명연설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산둥은 쿵푸즈(孔夫子·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중국이 이곳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바오밍의 빈자리를 인도네시아 화교의 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이 차지했다. 황후이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계속>
김명호
실패한 반군 황즈신 ‘장사의 신’으로 제2 인생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7-

1850년 봄 싱가폴 화교 천칭쩐(陳慶眞·진경진)이 귀국을 서둘렀다. 고향 푸젠(福建)으로 돌아와 소도회(小刀會)라는 혁명조직을 결성했다. 일년 후, 양광(廣東과 廣西)지역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반란을 일으켰다. 소도회도 덩달아 번성했다.
사숙에서 경전만 읽던 푸젠 청년 황즈신(黃志信·황지신)은 소도회에 흥미를 느꼈다. 마을 입구에 “두 개의 길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하건 너와 나를 가리지 말자. 4면이 허공이다. 서쪽으로 갈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동쪽으로 갈 사람은 동쪽으로 향하자”고 크게 써 붙였다. 제 발로 소도회를 찾아갔다. 18세 때였다.
황즈신은 5년 간 전쟁터를 누볐다. 물자 조달 능력이 뛰어났다. 태평천국도 실패하고 소도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배자 신세가 된 황즈신은 갈 곳이 없었다. 작은 배에 올라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았다. 해안선은 보이지 않았다. 배 안에 화약이 한 상자 있었다. 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품 안에 있던 향(香)에 불을 댕겼다.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내 명이 오늘까지라면, 배가 불타고 물고기 밥이 되도 원망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기 바란다”며 향을 화약상자에 꽂았다. 흐린 하늘, 습기가 많다 보니 향불은 오래가지 않았다.
죽을 팔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맘이 편했다. 순풍을 타고 도착한 곳이 네덜란드의 식민지 자바였다. 자바에는 화교가 많았다. 이왕 죽은 거나 진배없던 몸, 못할 일이 없었다. 화교가 운영하는 잡화상에 일자리를 구했다. 주인은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고향 청년을 총애했다. 싫다는 외동딸을 억지로 황즈신의 방 안에 밀어 넣었다. “잡아먹던, 삶아먹던 네 맘대로 해라.”
반란군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황즈신은 경영에 소질이 있었다. 6년 만에 잡화상을 번듯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특산품 사탕수수와 연초를 중국에 수출하고, 비단과 차, 향료 등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
1901년 황즈신은 미화 700만 달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700만 달러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기업 경영은 장남 중한(仲涵·중함)에게 맡겼다. 차남에게는 재산을 떼어주며 형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황중한은 걸물이었다. 공인된 부인만 18명이었고, 그 중 세 명은 친자매였다. 부인 중에는 모녀지간도 있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젊은 시절 도박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빌려준 돈 받으러 갔다가 도박장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받은 돈을 다 날리자 바닷가로 갔다. 투신할 작정이었다.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여인이 있었다. 딸과 같이 사는 예쁜 과부였다. 나이는 십여 살 위로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던,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황중한을 좋아하던 과부는 남편의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건넸다. “훗날 우리 모녀를 모른 체하지 말기 바란다.” 황중한은 한번 한 약속은 손해를 봐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세상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하조직과 혁명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화주의자 차이어(蔡鍔·채악)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거금을 쾌척한 사람이 황중한이었다. 공익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화교학교를 동남아 곳곳에 설립했다.
자바의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을 멸시했다. 돼지라고 부르며 중국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황중한은 중국인, 특히 한족(漢族)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재력과 지혜를 동원해 금기(禁忌)를 깼다. 네델란드 귀족 출신 변호사를 고용해 총독과 교류를 트고, 여왕이 파견한 자바주재 대표도 구워삶았다. 중국인 최초로 서양인 거주지역에 상호를 내걸고 저택도 지었다. 정원사 50여명이 모자랄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구웨이쥔의 부인 시절, 네덜란드를 방문해 여왕 모녀와 환담하는 황후이란.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21.png)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세 번째 부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은 황중한의 조강지처 웨이(魏·위)씨 소생이었다. 황중한은 혈통을 중요시했다. 황후이란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면 손가락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새끼 손가락이 살짝 휘어야 친자식으로 여겼다. 멀쩡하면 황씨가 아니라고 단정했다. 내 새끼 손가락은 정상이었다. 그래도 나를 친자식으로 인정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남의 집 문지방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런던에서 구웨이쥔과 결혼한 후 베이징에 갈 일이 있었다. 도중에 페낭에서 잠시 하선했다. 두 여인이 내 어깨를 치며 반가워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 동생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새끼 손가락이 휘어 있었다. 아버지의 열 여덟 번째 부인 아들은 미국에서 다른 부인의 손녀와 열애에 빠졌다. 남자의 아버지가 여자애의 할아버지인 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이 불가능했다. 네덜란드까지 달려가 결혼수속을 밟았다. 우리 집안은 이 정도로 엉망이었다.”
구웨이쥔과 황후이란은 영국에서 처음 만났다. <계속>
김명호
황후이란 결혼에 처칠 “퍼스트레이디 탄생 축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8-

![외교부장 부인 시절의 황후이란. 1922년 8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3.png)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의 조강지처 웨이(魏·위)씨는 첫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을 애지중지했다. 세 번째 생일날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걸어줄 정도였다. 황중한도 딸이 원하는 건 뭐든지 사줬다. 사설 동물원에 딸이 좋아하는 곰·사슴·공작·원숭이가 그득했다.
황중한은 학교 교육을 경멸했다. 교사들을 초빙해 딸 교육을 맡겼다. 그 덕에 황후이란은 어릴 때부터 네델란드어와 말레이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좋은 선생에게 붓글씨를 익히고, 음악과 미술도 배웠다. 프랑스어와 영어도 막힘이 없었다. 승마는 아버지에게 직접 사사했다.
웨이씨는 남편이 열여덟 번째 부인을 들여놓자 자바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딸에게도 동행을 권했다. “네 아빠는 영락없는 중국사람이다. 중국문화는 사람의 지혜와 발전을 속박한다. 나는 유럽으로 갈 작정이다. 너도 열여덟에 접어들었다. 함께 가서 새로운 자양분을 섭취하자.” 황중한은 말리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 원 없이 다녀라. 돈은 얼마든지 보내 주겠다.”
런던에 자리잡은 웨이씨는 딸에게 운전과 사교춤을 가르쳤다. 황후이란은 춤에 소질이 있었다. 롤스로이스 타고 승마장에 나타날 때마다 귀족집안 자제들의 눈길을 끌었다. 웨이씨는 프랑스를 자주 출입했다. 파리에 친정 여동생이 있었다.
1918년 11월, 유럽 전선에 포성이 그쳤다. 이듬해 1월, 1차 세계대전의 뒷처리를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중국 대표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회의 끝 무렵 두 번째 부인을 잃었다. 홀아비 되기가 무섭게 “교통부장 차오루린(曺汝霖·조여림)의 딸과 재혼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차오루린이 친일파로 몰려 곤욕을 치를 때였다.
구웨이쥔은 소문을 무시했다. 대신 신부감 물색을 서둘렀다. 하루는 친구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피아노 위에 걸쳐 놓은 젊은 여자의 사진에 눈이 갔다. 친구는 “집사람 언니의 딸”이라며 불필요한 말도 한 마디 했다. “실물이 사진보다 예쁘다. 지금 이태리 여행 중이다. 파리에 오면 만나봐라.” 구웨이쥔은 물고 늘어졌다. 이것저것 캐물었다. 친구의 부인은 눈치가 빨랐다.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웨이쥔이 후이란에게 관심이 많다.”
동생편지를 받은 웨이씨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가관이었다. “중국은 약소국이다. 약한 나라는 외교라는 게 없다. 중국 외교관이라면 꼴도 보기 싫다. 게다가 결혼을 두 번씩이나 했던 놈이다. 그러고 다니려면 빨리 돌아와라.”
웨이씨도 답신을 보냈다. “국력이 약할수록 훌륭한 외교관이 필요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불이익을 강요하는 결의문에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다. 두 차례 결혼 경력도 우리 집안에선 흠이 아니다.” 웨이씨는 딸을 데리고 파리로 갔다.
황후이란은 이모와 이모부가 주최한 파티에서 구웨이쥔의 옆자리에 앉았다. 젊은 외교관의 첫인상은 신통치 않았다. 늙은 티를 내고, 의상도 평범했다. 런던이나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들에 비하면 빠져도 한참 빠졌다. 춤 추자는 말도 안하고 승마에도 관심이 없었다. 운전까지 못한다고 하자 황후이란은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참석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가 궁금했다.
황후이란은 정치나 중국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파리 강화회의와 중국 대표단, 국제연맹 같은 용어들이 난무하자 정신이 없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옆에 있는 남자에게 위축됐다. 훗날, 영문 회고록에 구웨이쥔과의 첫 번째 만남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그 사람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신상은 물론이고 업무에 관한 얘기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생활에만 관심을 표명했다.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사람에게 넋을 잃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한적한 창가에 서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했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도 그러면 어쩔까 걱정이 됐다.”
구웨이쥔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황후이란에게 비싼 선물은 의미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사탕과 꽃을 거르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씩, 그것도 불시에 찾아가는 날이 허다했다. 황후이란은 구웨이쥔이 언제 올 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아침부터 단장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프랑스 정부는 구웨이쥔에게 차량과 기사를 제공했다. 황후이란은 이것도 신기했다. “집안에 있는 차들은 모두 돈 주고 구입한 것들이다.” 한번은 오페라 구경을 갔다. 국빈들이나 앉는 자리에서 관람한 황후이란은 황홀했다. “아버지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이었다. 버킹엄궁과 백악관, 엘리제궁에서 겪었던 일을 들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구웨이쥔이 추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닌,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1920년 10월, 영국공사에 임명된 구웨이쥔은 1개월 후 황후이란과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영국의 육군상과 해군상을 겸하던 처칠이 전문을 보냈다. “중국의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의 출현을 축하한다.” <계속>
김명호
황후이란 “외교는 돈”… 부친 힘 빌려 유럽 사교계 평정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9-
![구웨이쥔(오른쪽)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가운데)과 친했다. 1943년 가을, 런던.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33-1.png)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의 부(富)는 상상을 초월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화교 사업가 중에서 첫 손가락을 꼽고도 남을 정도였다. 재산 축적 과정에서 현지 관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공직자들을 사람 취급하지는 않았다. “도둑놈 아닌 놈이 단 한 명도 없다.” 외교관에게는 더 심했다.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첫 부인 웨이(魏)씨가 딸 후이란(蕙蘭·혜란)을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탐정을 고용했다. “베이징·상하이·런던·파리·워싱턴·뉴욕 등 구웨이쥔이 머물던 곳을 뒤져라. 여자관계를 철저히 조사해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최근에 세상 떠난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의 딸은 두 번째 부인입니다. 이혼한 첫 번째 부인이 상하이에 있습니다.” 남편의 편지를 받은 웨이씨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도 익히 알고 있다.”
황중한이 구웨이쥔을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너무 가난하고, 돈이 없다. 이런 사람이 공직에 있다 보면 사고치기 쉽다. 이혼한 부인이 아직 혼자 산다. 탕샤오이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엉뚱한 재주를 부렸을지 모른다. 거짓말을 잘해야 유능한 외교관이다. 구웨이쥔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웨이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유도 그럴듯했다. “구웨이쥔은 보통 외교관이 아니다. 국제사회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용(龍)띠고 남편은 호랑이(虎)띠다. 용호상박, 말이 부부지 서로 양보한 적이 없고, 얼굴만 봤다 하면 싸우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웨이쥔과 후이란은 돼지(猪)와 호랑이, 백발이 될 때까지 해로할, 최고의 궁합이다.” 황중한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웨이씨는 “오건 말건 맘대로 하라”며 신경도 안 썼다.
황후이란은 외교관 부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영어와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응력도 뛰어났다. 권력의 속성과 복잡한 국제정치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0년 여름, 모나코 몬테카를로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는 황후이란(오른쪽 첫 번째). 오른쪽 두 번째가 20여년 후 구웨이쥔의 넷째 부인이 되는 옌요우윈(嚴幼韵).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33-2.png)
황중한은 별난 사람이었다. 사위는 꼴 보기 싫어했지만, 딸에게는 거금을 쏟아 부었다. 당시 서구의 대사들은 부호들이 많았다. 중국은 정반대였다. 십중팔구,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했다. 부인들도 친정이 그저 그랬다. 정부의 지원도 미약했다. 매달 나오는 600달러 외에 파티 비용이 따로 나왔지만, 몇 푼 안됐다.
구웨이쥔은 예외였다. 황후이란의 담담한 회고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줬다. 외교는 돈이다. 이왕 외교관과 결혼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달마다 큰 돈을 보내줬다. 그 덕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나는 온몸에 보석을 휘감고,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었다. 남편의 예복도 영국에 직접 주문했다. 엄마가 결혼 선물로 사준 롤스로이스를 다들 부러워했다. 중국 부인들이 진입하기 힘들다는, 서구 귀부인들의 사교 모임도 별게 아니었다.”
황후이란은 하루가 멀게 크고 작은 파티를 열었다. 호화로움에 참석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구웨이쥔이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나는 내 능력껏 네게 장신구를 사줬다. 파티에 참석한 부인들이 너를 부러워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이러다 보면 다들 나를 의심한다. 앞으로는 내가 사준 것들만 착용해라.”
황후이란은 자신의 방법을 고집했다. “결혼 전에는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비로소 알았다. 풍족하지 못하면 저들이 우리를 무시한다. 다른 나라 외교관 부인들의 콧대를 꺾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다.”
파리의 중국대사관은 볼품이 없었다. 구웨이쥔이 대사 발령을 받자 황후이란은 “사비로 대사관을 짓겠다”며 부지를 물색했다. 중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건축 비용은 물론이고, 내부시설도 황후이란이 부담했다. 구웨이쥔은 “사비를 들였지만 완성되면 국가 소유가 된다. 대사를 그만둘 때 우리가 구입한 고가의 가구나 장식물도 들고 나갈 수 없다”고 말렸다. 황후이란은 “알고 있다”며 끄떡도 안했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훗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황후이란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수많은 대사 부인 중 황후이란과 견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황후이란의 공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혼 2년 후인 1922년 여름, 중국정부는 구웨이쥔을 외교총장(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남편 따라 귀국한 황후이란은 싱가포르에서 열일곱 번째 부인과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국의 외교를 관장하는 사람이 관저가 없다. 베이징의 테스쯔(鐵獅子)후퉁(胡同·골목)에 유서 깊은 저택이 있다. 명나라 말기,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던 우싼구이(吳三桂·오삼계)의 애첩 천위안위안(陳圓圓·진원원)이 살던, 사연 많은 집이다. 방도 200개 정도 된다. 이 정도면 총장 관저로 적합하다. 구입하고 싶다.”
황중한은 한술 더 떴다. “집만 구입해서 뭐하냐. 내부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난방과 위생시설도 서구식으로 개조해라.” 수리가 끝나기도 전에 구웨이쥔이 총장직에서 물러 날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구웨이쥔, 베이징 접수한 장제스 피해 국외 탈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0-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외교는 구웨이쥔(왼쪽 다섯 번째)의 몫이었다. 구웨이쥔의 생일 잔치에 초청받은 쑹쯔원 형제들. 1946년 뉴욕.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14.png)
![상하이 시절의 황후이란. [사진 김명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unday.joins.com%2Fwp-content%2Fuploads%2Fsites%2F2%2F2015%2F10%2F29-24.png)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은 톄스쯔골목(鐵獅子胡同)의 저택에서 연일 파티를 열었다. 해만 지면, 베이징에 주재하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외교력을 무시하지 못했다. 다시 외교총장(장관)에 기용했다. 사직 9개월 만이었다.
정국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소련과 손잡은 남방의 혁명세력은 군사력을 배양하기 위해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북방의 군벌들은 수도 베이징을 넘봤다. 구웨이쥔의 집에도 폭탄이 터졌다.
1924년 10월, 베이징에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구웨이쥔은 톈진(天津)으로 몸을 피했다. 정변의 주역들은 쑨원(孫文·손문)을 베이징으로 초빙했다. 쑨원은 황후이란의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웨이쥔에게 톈진은 추억의 도시였다. 틈만 나면 전처 탕바오밍(唐寶明·당보명)과 거닐던 길을 산책하고, 함께 다니던 찻집 구석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고향이 군벌들의 전쟁터로 변하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직접 내려가 탕바오밍의 시신을 구씨 종사(宗祠)에 안치하자 마음이 놓였다.
황후이란은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구웨이쥔에게 대놓고 투정했다. “중국이 이런 나라인 줄 몰랐다.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 어떻게 된 사람들이, 얼굴에 표정이 없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특출난 사람은 없다. 남들이 그렇게 볼 뿐이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대부호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부를 계승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를 그냥 한 명의 여자로 대해주기 바란다.”
하기 힘든 말도 했다. “우리는 공식적인 장소 외에 함께 외출한 적이 없다. 탕바오밍은 현명했던 여자라고 들었다. 나는 부모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내게서 우리 부모의 흔적을 지워버려라. 아버지는 나를 너무 총애했다. 내가 커서 귀부인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후처가 되기는 바라지 않았다. 금전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남녀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나의 사치와 방종을 모른 체 해라. 나도 간섭하지 않겠다.”
구웨이쥔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의 복구에 나섰다. 황후이란도 기부금을 쾌척했다. 그해 겨울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이 싱가폴에서 세상을 떠났다. 딸 후이란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황후이란은 베이징에 인접한 톈진이 싫었다. 구웨이쥔이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자 짐을 꾸렸다.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두 사람 모두 이성(異性)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구웨이쥔은 유부녀를 좋아했다. 황후이란은 연하의 청년들과 자주 어울렸다. 검증할 방법이 없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는 한번 만나면 다섯 끼를 같이 먹는 사이다. 황후이란은 장쉐량을 홀려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을 싫어했다. 쑹메이링의 언니 칭링(慶齡·경령)과는 가까웠다. 쑹칭링은 황후이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옷도 입으라는 것만 입었다.”
상하이 상류사회 여인들은 황후이란을 따라 하느라 분주했다. 황후이란이 안고 다니는 애완견 가격이 폭등하고, 금붕어를 키우기 시작하면 백화점은 프랑스에 신상품을 주문했다. 황후이란은 구웨이쥔과 탕바오밍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도 친자식처럼 돌봤다. 구웨이쥔이 내각총리에 임명된 후에도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다.
1927년 1월, 광저우(廣州)의 혁명정부가 우한(武漢)으로 천도했다. 혁명의 중심지로 변한 우한은 반(反) 영국 정서가 강했다. 반영(反英)운동이 발발하자 구웨이쥔은 정치력을 발휘했다. 영국조계(租界)를 회수하고 중국의 세무를 총괄하던 영국인을 파면했다. 1865년 벨기에와 맺은 불평등 조약도 일방적으로 폐기를 선언했다. 혁명세력은 외교관 출신 총리에게 갈채를 보냈다.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에 혁명의 회오리가 몰아쳤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명의 호남청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정반대의 길을 향했다. 혈혈단신, 터덜터덜 농촌 조사를 떠났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동북에서 정국을 주시하던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2개월 후인 1927년 6월, 베이징에 입성해 새 정권을 출범시켰다. 구웨이쥔에게는 총리직 유임을 요청했다. 이 현명한 외교관은 장쭤린 정권의 수명이 오래갈 거라고 보지 않았다. 베이징 교외에 칩거하며 자문에만 응했다. 수확도 있었다. 장쉐량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쑹쯔원(宋子文·송자문) 형제와는 한 집안처럼 지냈다.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1년도 버티지 못했다. 1928년 6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 정부의 요직을 거친 구웨이쥔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베이징을 탈출한 구웨이쥔은 중국을 떠났다. 황후이란은 톈진에서 연락을 기다렸다. 제네바에 안착했다는 연락을 받자 바쁘게 움직였다.
구웨이쥔 부부는 파리에서 합류했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톄스쯔골목의 집을 몰수해 버렸다. ‘쑨원기념관’으로 이보다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계속>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