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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녹우당안채.
해남윤씨 녹우당(해남군홈피에서 퍼온글http://www.haenam.jeonnam.kr/)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윤선도(尹善道)의 고택(古宅)이다. 본 가옥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의 구성요소도 풍부하여 한국상류주택연구에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가옥이다.
이 가옥은 고산 윤선도의 4대 조부이자 해남윤씨의 득관조인 어초은 윤효정(尹孝貞)이 백연동(현 연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나 당시의 문헌이나 문기가 없어 그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촌은이 해남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세기경에 시창(始創)된 건축물로 여겨진다.
배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서향집이며 동사택(東四宅)에 속한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편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다.
현재의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으며, 본 가옥의 좌측면에는 추원당이란 강당도 있다.
안채는 1472년(성종 3)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여 지며 사랑채는 효종이 사부(師傳)였던 고산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綠雨堂)"이라 현액(縣額)하고 있다.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 되는데, 전면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ㅡ 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의 침방 옆에는 작은 마루를 두고 그 뒤쪽에 곳간을 두어 안채의 부엌칸과 연속시키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ㄷ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함풍팔년무오사월병오초팔일계축시무오중수 상량(咸豊八年戊午四月丙午初八日癸丑時戊午重修 上樑)」
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서쪽으로 부엌, 안방, 작은 대청을 일렬로 늘어놓고,
ㄱ자로 꺾이면서 방, 함실아궁이 부엌, 방, 곳간을 두어 중문까지 연결시켰다. 부엌문을 나서면 안방 동북쪽으로 장독대, 닭장, 광들이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에 쌓은 담장 속에 한채가 있고 또, 담장 밖에 따로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을 세웠다.
외측은 사랑마당 연못의 서쪽에, 내측은 외측으로부터 북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안채 뒤로는 대나무숲이 우거진 후원이 있다.
솟을대문 앞쪽에는 노비집이 부엌과 방으로 ㄱ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건축되어 있다.
이 주택의 구조는 민도리집으로, 안채는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架構)는 4량으로 대들보를 두 개의 고주에 걸고 이 대들보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도 앞면의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었다. 도리는 납도리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ㄷ자형평면의 양측에 합각을 만든 맞배지붕형이다.
특히, 건넌방 사이에 있는 함실아궁이부엌 위에는 한층 지붕을 높인 작은 덧지붕(솟을지붕)이 있다.
사랑채의 구조도 안채와 비슷하여 화강석으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으나 전면 퇴주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4량으로 안채의 가구와 같다. 다만, 사랑채 앞에는 차양이 건축된 바 이는 지붕을 만들기 위하여 사랑채 앞에 따로 기둥을 세우고
이 기둥과 사랑채 기둥 사이에 보를 걸고, 그 위에 작은 기둥을 세워 차양구조의 대들보를 얹고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올라가면서 우측에 있는 유물전시관은 보수중이고 녹우당앞의 500년묵은 은행나무가 있고
현재 윤씨후손들이 살고 있는 녹우당을 둘러보고 후원으로 돌아가면 고산사당과 고산의 4대 조부인 어초은사당이 있다.
사당뒤 산으로 드는 초입에 어초은의 묘지가 잇고 그 우측위로 산중턱까지 올라가면 비자나무숲이다.
다시 내려와 사당옆 우측으로 대나무숲으로 돌아가면 추원당이 있는데 아마도 시나 문학을 강연하던 집인 듯 싶은데
집은 지은지 얼마 않돼 보이는데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벌써 쓸쓸하다. 뒤로 보이는 덕음산과의 조화가 좋다.
초원당아래로는 차밭이 있고 도랑을 건너 나오면 다시 녹우당앞이다.
주차장에 내려오니 한무리의 남도답사 순례팀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다.입장료1000원.
다시 해남읍으로 나가면 읍내로 들어서기전에 직선화된 13번도로가 읍내를 우회하여 시원하게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어가면 뻥뚤린길은 성전면으로 올라가서 광주.목포로가고 ,우회전하면 옥천면 소재지가 나온다.
해남으로 들어온길과 달라져서 다소 으아하던길이 옥천면에 오면 구길이 나와 낯이익다.
한가한 강진가는 18번 도로를 따라 작은고개를 두어번 넘어서 우측으로 도암천협곡을 타고 내려가서
협곡을 빠져나오면 좌측으로 석문사와 백련사 .다산초당 이정표를 보고 조그만 다리를 건넌다.
다산유물 전시관 이정표를 보고 좌측으로 꺽어 조금 올라가면 전시관앞 너른 주차장이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강진군 홈피. http://www.gangjin.go.kr
유물전시관.
전시관을 둘러보고 전시관 우측으로 다산초당가는 오솔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전시관뒤로 승용차는 넘어갈 수 있는 소로를 따라 넘어가면 다산초당 산밑입구 안내판이있고 식당과 까페도 보이고
큰길에서 직접 올라온 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전시관서 7분거리).
산길로 접어 들어 숲길로 오르면 대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보이는 다산초당이다(입구에서 10 여분거리).
왼쪽이 서암.뒤에 석정. 우측으로 들어서면 다산초당과 추사 김정희 선생의 茶山草堂 모필 현판.
뒤에는 약천.앞뜰에는 다조가 있고 초당우측에 연지석가산이란 연못과 석가산에 홈통물통에 물이 흐르고다.
그 우측에 동암이 있고 동암우측 산등에 천일각에서 내려다보는 강진만이 아름답다.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1808년 봄 다산 선생이 초당(草堂)으로 이주후 연못을 넓히고 탐진강가에서 돌을 주워다 산처럼 봉(峰)을 쌓고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었다.
산속에 있는 물을 나무로 만든 홈통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여 비류폭포(飛流瀑布)를 만들고 연못에는 잉어를 길렀던 곳이다.
다산사경(茶山四景)중하나.
주위에서 자생하는 차잎을 따다가 그늘에 말린후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반석이다.
연지석가산.
연지석가산.
정석(丁石)
정석(丁石)
자연석에다 다산 선생께서 직접 친필로 써서 새긴 것이며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에서 새겼다 한다.
서암은 제자들의 유숙처였으며,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 이라고도 부르는데 1975년에 복원하였다.
천일각 뒤 산길로 백련사와 만덕산을 넘어가는 길은 옛날 다산 선생이 백련사를 오가면서 명상을 하던 길이리라.
백련사차밭.
백련사
백련사
백련사와 만덕산.
백련사대웅전.
백련사대웅전.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장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백련사에서 만덕산으로 오르는길은 큰길에서 올라오는 절입구에서 우측능선으로 오르는 이정표가 보인다.
스님은 관광객이 쉴새없이 드나드는데도 멀리서 온 길손이라고 점심공양을 하고 가라고 호의를 베푸신다.
점심을 강진의 이름있는 집에서 한턱 내겠다고 마누라보고 기껏 얘기했는데 그새 그걸 잊어 먹고 그런다고 했단다
스님이 새로 밥을짓고 점심준비를 하고 있으니 여기서 먹고 가잔다.
강진의 한정식이 유명하다고 해서 마음먹고 점심한번 먹어 볼려고 한 것이니 다시가서 사양의 말씀을 드리고
다시 다산초당으로 넘어와서 유물전시관으로 내려간다.만덕산을 코앞에두고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여기도 다음에 다시와서 옥련사부터 시작해서 넘어와야 할것이다.
유물전시관에서 출발하며 청자골 종가집으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으니 강진 공설 운동장 후문이란다.
강진엔 해태식당.청자골 종가집식당.명동식당등이 유명하다고 책으로 소문으로 들었다.
한갓진곳에 위치한 식당엔 마침 점심 식사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많다.
강진 사람들만 일리는 없고 우리같이 오며 가며 소문듣고 온 손님이 많을께다.
상은 4인이 기준이고 기본 80000원. 중이 100000원.특이 150000원이란다.
무슨 차이냐니까 양은 같고 가짓수가 조금씩 늘어난 단다.
뭐가 나오나 한번에 나오면 사진이라도 찍어 세어 보겠는데 하나둘씩 나와서 그럴수도 없다.
뭐 다른건 그렇고 남도음식이라서 그런지 홍어와 젓갈이 나온다는 것이 좀 다르다.
하여튼 마누라 끌고 다니면서 밥한끼 안사줬다는 뒷말 안들으려고 점심한끼 비싸게 먹었다.
장흥보림사나 월출산 무위사를 둘러보고 내일 아침에 올라갈까 하다가 맘을 바꿔 집으로 직행한다.
강진에서 목포 가는 길은 2번국도가 고속도로 같이 뻥 뚤려 있다.
월출산과 가학산,흑석산 사이를 빠져나오며 언제쯤이나 저 흑석지맥을 하게 될려나!!
한시간만에 목포에 도착하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호남고속도로 전주에 오니 길이 막힌다.
천안에 오니 저녁7시반.남도의 산엘 간다고 한 것이 2박3일 산은 구경만하고 왔다.
혹만 안달고 마누라만 데리고 갔으면 계획한 산들을 훝고 오는건데....
다음부터는 산에는 애들을 안데리고 갈란다!!.
청자골 종가집 한정식집.강진엔 이런 이름있는 식당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