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학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중심지 였고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철학과 구약성경을 접목시킨 인물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중 필로의 철학을 신약성경에다 적용시켜 소위' 영지주의 (Gnosticism)라 불리는 이단을 만들었다.
이때 영지주의자 대표인물 ----> 바실리데스(주후 125년경) . 발렌티누스 (주후 120-160년경) 이며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학자들
1) 클레멘트 (AD 150-170) ---->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 로 알려짐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세움
2) 오리겐 (주후 185- 254) ----> 18세의 젊은나이에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 교장이 됨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추론적 . 철학적이며 비유적이다. 즉 이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찾기 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신비한 의미가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 학교 영향 -----> 기독교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동방에서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통해서
서방에서는 히포의 '어거스틴' 이 기독교 내로 널리 파급되었다.
* 성경은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 그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들의 회당이라 하는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으나 (행6:9)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임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도 잘못된 길로 인도 했음을 알수 있다.
"'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어떤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렀는데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 기록들에 능통하더라" (행18:24)
"'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노라. 하거늘( 행19:2)
"'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요한의 침례가. 하매 (행19: 3)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시는 부정적도시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를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되고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실어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개혁주의 교단에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긍정적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문물을 받아들였다.
" 솔로몬이 이집트왕 파라오의 인척 관계를 맺고 파라오의 딸을 취한 뒤 자기 집과 주의 집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건축하는 일을 자기가 끝낼 때까지 그녀를 다윗의 도시에 데려다 두니라. (왕상3:1)
참조문맥 ----> 왕상11장1-8 솔로몬에대한 심판 -----> 왕상11:9- 13
오리겐은 성경을 부패시킨 장본이다
오리겐은 " 예수님이 창조된 하나님이다' 라는 이단 교리를 퍼뜨렸다.
오리겐의 믿음에 대해 <뉴 스탠다드 백과사전> 제9권에 기록된것을 보겠다.
----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로고스(Logos)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는데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 세계의 질서에대한 이름이었든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존재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딘 로고스' 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살며 가르치기도 하신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 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가 교리를 정립할 수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
오리겐은 오늘날의 여호와 증인들 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믿지 않고 하나의 창조된 신으로 믿었다.
피커링이 오리겐에 대한 평가
---- 그러므로 자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비추어 볼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면 오리겐은 곧바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비유 해석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사실 성경이란 그것이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말은 곧 오리겐이 자기가 느끼는 바가 바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라고 생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 < 피커링 신약성경 본문의 정체 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 1977 p140. 192)
오리겐에 대한 개신교 개혁주의 학자들이 보는 사상
교회사를 시대별로 나누는 방법
초대교회사 --> 교부시대사 ---> 중세교회사 ---> 종교개혁사 ---> 현대교회사
1) 초대교회사 --> AD 33년 ~ AD 100년 까지
오순절 성령강림후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친 교리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시대.
2) 교부시대사 ---> AD 100년 ~ AD 500년
사도들에 이어 초대교회를 이끌었고 사도들이 전한 교리를 부패시키는 기초가 된 일명 속사도들.
유아침례 . 물침례 중생론. 영지주의 등 .교부들에 의해 카톨릭교리가 세워지는 시대.
313년 콘스탄티 황제 밀라노칙령 . 321년 일요일 국정공휴일 선포. ( 카톨릭 태양숭배의 날) 337년5월22일 콘스탄티대제 병사 .
니케아 공의회 -----> 325년
참석한 주교는 318명 서방교회 주교는 서너명 . 대부분 동방교회 주교들.
* 아리우스파가 아리우스 신조를 발표
내용: 하나님과 예수의 본질은 비슷하나 동질은 아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한분만 영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만 못한 제2의 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 성자는 모든 만물중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 참하나님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 ----> 신성부정.
* 에우세비오스가 팔레스타인 신앙고백서 발표
내용 : 중도파 .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했으나 동일. 본질. 이라는 용어는 회피.
*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 부감독
내용: 정통파적인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본질.위격은 같다고 주장.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어냄>
중도파였던 에우세비오스는 독생자로 나신 ...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다. 라는 구절 삽입하여 참석자의 서명받아냄.
아리우스파는 는 이단정죄를 받고 추방당함 아리우스서책들은 소각됨.
니케아 신조 역시 불완전한 것이고 니케아 신조를 마치 성경 다음가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고백으로 믿고 있는 동.서방교회는 지금도 사도신경과 똑같이 믿어오고 있다. 사도신경을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하는 개신교들은 사도신경의 역사적 근거를 니케아 신조에서 찾고 있다.
부활절에 관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논쟁을 함. ( 동방교회 니산월14일 기독교 유월절 고집. 서방교회는 부활하신 주일기준으로 부활절 주장 이때 아타나시우스는 춘분후 다음의 만월이 된 후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제안함. 현재도 이것으로 지킴)
니케아신조 20개 법령제정 * 니케아신조 . 부활절 절기. 교회권징 법령 등.
* 니케아신조 이후
중도파 에우세비오스를 통해 콘스탄티 황제누이 콘스탄티아와 콘스탄티를 설득 이단으로 결정내린 아리우스를 유배지에서 돌아오게한다. 정통파 신앙을 니케아 공의회에 관철시킨 알렉산드리아 부감독이 감독이 되고 유배에서 돌아온 아리우스주의자들과 또다시 싸움을 시작한다. 아리우스는 두 번의 공의회(335~336 콘스탄티노플에서 연 의회) 에서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을 무효로 선언함. 콘스탄티황제 사망(337년) 후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에서 해제.(338년11월23)
동방지역을 다스리던 황제의 막내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철저한 아리우스 신봉자였다. 이에 아타니시우스를 두번째 면직
아타나시우스는 동방에서 서방로마로 망명 (339~340) 로마감독 율리우스는 니케아 정통신앙에 확고함으로 아타나시우스를 보호해 주고 적대진영을 단죄할 준비를 함. 서방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동방교회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대립관계가 됨.
동.서방 교회가 나뉘어 싸울때 동.서방 황제가 나선다. 다 같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인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가 343년 일리리아의 사르티카에서 총 공의회를 소집할때 니케아 정통파 로마교회 진영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이때 아타나시우스 주장이 인정된 데에 불만을 품은 아리우스 동방의 감독들은 회의장을 떠나 따로 회의를 했다.
350년 서방콘스탄스가 사망하자 동방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믿고 또다시 351년. 353년 355년 세 차례 공의회를 소집하고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감독들을 폐위시키고 추방하였다. 이때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예배 인도하는 자리에서 5천명의 무장 병력을 풀어서 내쫒고 그 자리에 탐욕 많기로 소문난 카파도키아의 게오르기우스'감독을 앉혔다. 이단 세력인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제국 전역에 흘러가게 되고 결국 이단세력을 종식시킨것은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죽고 나서였다. 이때가 콘스탄티노플 공회(381년)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우스주의는 2세기 이상 6세기가 끝날때 까지 사상이 존속되었다.
칼켈톤 공의회 -----> 451년 개최 620여명으로 니케아공의회 이후 최대규모
칼켈톤 신조 ----- > "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의 따라서 다음 사항을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완전하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참 인간이시다. 그는 신성에 있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도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신성을 따라서는 만세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나 그 동일하신 분이 인성을 따라서는 마지막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 곧 '하나님의 어머니' (테오토코스.Theotokos) 에게서 나셨다 그는 한분이시며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독생자이시다 그는 서로 혼합될 수 없고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고 분할될 수 없는 두 품성을 가지고 계시다. ~~~~~~
그외 200년 이상 계속된 기독론 논쟁
* 아폴리나리우스 논쟁 * 네스토리우스 논쟁 * 유티케스 논쟁 * 단성론 논쟁 * 단의론 논쟁 등.
이런 모든 논쟁의 근원을 성경과 철학의 접목이 원인이다.
니케아 시대에서 그 이후 교부들
* 동방 및 희랍교부 --->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오스 (유세비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에루살렘의 키릴루스. 카피도키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토무스.
* 서방라틴교부-----> 푸이티에의 힐리리우스 .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제롬) .펠라기우스. 아우그스티누스. 도나투스피.
* 유아세례를 공식 결의한 카르타고 회의 (411년)
로마 감독 제 40대 인노첸시오 (Innocentius 재위401-417) 407년 유아세례 시행을 선포함
411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회의에서 아프리카 감독 67명이 모여 유아세례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도입하기로 결정함.
정경이 공식 인정 ----->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때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된것은 많은 신자들이 66권의 성경을 읽고 사용한 것으로 확정이 된것이지 카르타고 회의에서 공식 인정이 아님.
3) 중세교회사 ----> AD 500년 ~ AD 1500년
로마카톨릭 시대
4) 종교개혁사 ----> AD 1500 ~ AD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