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2006년, 당시 서울신문에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이라는 타이틀로 연재했던 컬럼입니다.
함께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리해 올립니다...요.^^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아침이슬'의 김민기[1]
70년대의 상징, 그 살아있는 전설
사진 01) 고등학교 시절, 김민기.
02) '도깨비 두마리'라는 뜻을 지닌 이름의 듀엣 '도비두' 시절의 김민기(왼쪽)과 김영세(오른 쪽), 1970년.
03) 김민기 첫 독집음반, 1971년.
04) 당시 금지곡 목록. '아침이슬'은 다른 노래와는 달리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아침이슬'의 김민기[1]
70년대의 상징, 그 살아있는 전설
젊은 시절, 캠퍼스 어느 구석에선가 그의 노래를 숨 죽여 불러본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김민기가 '추억'이라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70년대의 역사'일 것이다.
광주의 경험을 가진 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은 '산 자여 따르라'라고 외쳤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70년대의 노래다. 즉 '나 이제 가노라'라고 읊조리던.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노래하는 이'였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연극 연출가, 기획자로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인생 2모작'에 몰두하고 있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12년 째 달려오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어느덧 공연 3천회를 훌쩍 넘겼다.
70년대 젊은이들에게 조차 그의 실체는 가늠이 어렵다. 한동안 '금지'에 묶이고 '상징'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구전'의 문화로만 존재해왔고 그래서 그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현실'이기 보다 '신화'에 가까웠다. 자의건 티의건 간에 70년대 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해온 김민기의 노래 작업들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기록 중 하나다.
감시와 검열과 통제의 시대, 그러나 당시 금지곡 목록에 올려져 있던 김민기 곡은 '아침이슬' 단 한 곡 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른 곡들과는 달리 아무런 금지 사유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만든 노래들은 일순간 방송에서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노래가 아니라 이름 자체에 금지의 굴레가 씌어져 있었던 탓이다.
'우리나라 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대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의식 있는 젊은이' 김민기, 그는 경기중, 고 그리고 서울대 미대를 나온, 속칭 'KS 마크'였다. 이울러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비록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고교 시절인 67년, 그가 처음 만든 노래가 '가세'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노랫말은 이렇다.
'가세'
'1절.
비가 내리누나
나 혼자 가고프나
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
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 그곳에
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쟎나.
2절.
눈이 내리누나
나 혼자 가고프나
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
가세 산 너머로 눈 그친 그곳에
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쟎나.'
-이다.
이어 만든 곡이 '친구'.
이 노래는 고교시절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동해안 여름야영에 갔던 68년, 친구 하나가 익사하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자신의 심경을 그린 것이다. 이 노래는 이로부터 2년 뒤 서울대 시절, 동료 김영세씨와 듀엣으로 활동했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목소리에 실려 처음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그가 만든 노래들은 '친구' '아침이슬'을 비롯해 '작은 연못' '길' '그날' 등 매우 서정적이고 담백하다. 그저 일기 쓰듯 담담하게 노래했다. 때문에 당대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끌어냈던 것이리라.
그 자신 스스로도 "그저 '나의 작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렇게 불려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노래들이 금지된 것은 노래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관여한 실천적 참여활동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그리고 '꽃피우는 아이'를 불렀다는 이유로 이튿날 새벽, 동대문서에 연행되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음반들은 모조리 압수당하기에 이른다. 이 것이 그가 후에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후 야학이나 '금관의 예수(73)' 소리굿 '아구(74)' 등 카톨릭 문화운동, 국악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활동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의식 있는 젊은 한국인'이 한층 '줏대 있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유명해져가고 있었다.
그는 74년 군에 입대한 후 77년 제대하면서 '야인'으로 생활을 시작한다.
'70년대 김민기'에 대한 당국의 시각은 당시 어떠했는가, 그 일화 중 하나.
김민기는 당시 모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관은 그에게 대외비책자 한 권을 펼쳐보였다. 그 책자에는 당시에 대학가에서 주로 불려지던 과거 독립군가나 빨치산들이 불렀을 법한 류의 작자 미상의 노래들이 김민기라는 이름으로 적혀있었다.
이윽고 수사관은 '아침이슬' 부분을 펼쳐보였다. 첫 낱말 '긴 밤'에 밑줄이 그어있고 '유신체제'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풀잎' '이슬' '태양' '묘지' 광야' 등등... 단어마다 빨간 주석의 장황한 해설들.
그가 다그쳤다. '긴 유신체제의 밤을 끝내고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을 열렬히 맞이하자'라는 내용이 아니냐는 거였다.
이 노래를 만든 것이 71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 김민기는 되물었다. "10월 유신이 몇 년도였지요?"
-이에 수사관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책을 큰소리 나게 탁, 덮었다. (계속)
글/박성서(대중음악 평론가/저널리스트)
- Copyrights ⓒ2006-08-17일자, 서울신문
첫댓글 아~ 저 김민기 1집 레코드가 깨져 버렸던 기억이 제일 가슴이 아팠는데,,,이사다니느라,벌써 십오년이나 지난일이지만 지금도 아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ㅠㅜㅠ
저는 김민기 1집 LP를 동생에게 맡기고 해외로 돌다 귀국해보니 동생친구가 빌려 갔는데 그만 분실했다고 하니.....원통하고 분하고 아까워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잠이 안온다는.......ㅎㅎㅎㅎㅎ또다른 하루님과 같은 기분......
김민기의 '친구'는 한 때 제가 18번으로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곡도 좋지만 2절 가사중 "어느누구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가 당시 가슴에 절절하게 들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 노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실을 배우는가....노래도 노래 나름이지.." .그렇게 말하던 친구놈 생각이 문득 납니다요 - 노래 이야기만 나오몬 김민기 김민기 김민기...하던 ...^^ - 그 친구놈이 항상 불러달라 해서 불러주던 김민기님의 두리번거린다..그리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