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내용상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부(1-8장)와 후반부(9-16장)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장)은 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절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9-16장)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10)장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을, 그리고 (11-16장)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반부(9-16장)기사의 초점은 "올바른 제자도" 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후반부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과 그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때서야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길이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기적인 뜻을 버리고 주님이 앞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참제자의 길은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후반부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 변화 산 사건의 의미*
변화 산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이 극적으로 표현된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앞에서 제자들 중에 살아서 "인자가 권능으로 올 것을 볼 자가 있다"고 예고하셨습니다(막 9:1). 그 후에 주님은 세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인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실 고난의 종인 동시에(사 53;1-12), 부활하여 온 세상의 왕이 되실 분입니다(사 53:13-15). 주님은 이러한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산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면서 식사했습니다(출 24:9-11). 그 후에 모세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계시를 받았습니다(출 24:12-18). 이와 주님께서도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 변형된 주님의 모습(2-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3).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4)"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2). 변화산 사건은 제자들 중에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볼 자가 있다고 하신 날로부터(9:1) 6일 이 지난 때(제 7일)에 일어났습니다. (출 24:16)을 보면 모세도 시내 산에서 계시를 받기까지 6일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6일은 하나님의 중요한 계시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도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위대한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계시 면에서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습니다(5:37, 13:3, 14:33). 이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이들을 주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제자들의 대변자로 세우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간 산이 어느 산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산이 갈릴리에 있는 다볼 산이거나, 아니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헬몬산(약 9,300피트)이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인간의 베일을 벗고 빛과 광채가 나는 신적인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3). 주님의 몸에서 빛과 광채가 난 것은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에 모세도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그의 얼굴에서도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있던 광채는 금방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에서 비취는 빛과 광채는 스스로 비취는 빛이었기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광채가 있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기 위해 잠시 그 빛을 숨기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장차 주님께서 하나님의 날을 완성하실 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4). 모세는 옛 언약의 대표자입니다. 옛 언약의 대표자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했다는 것은 옛 언약이 주님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의 대표였습니다.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오기로 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동시에, 마지막 때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가 좋사오니(5-6)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5),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6)."
이 광경을 본 베드로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청해서 그 곳에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천막 세 개를 짓겠다고 하였습니다(5). 마가는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심히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하였습니다(6). 유대인들은 추수를 마치고 안식할 때에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7일간 살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초막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누리는 안식을 상징하는 초막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광경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착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성급한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주님의 부활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는 구원의 프로그램을 알지 못했습니다.
*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7-8)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7).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를 뿐이었더라(8)."
바로 그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어버렸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에도 구름이 시내 산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가리워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만들어 줍니다. 세 제자들은 구름 사이로 들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7). 하나님은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이러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인류를 구원할 종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구약 성경)의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는 이들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였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보다 더 큰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옳음을 인정하시고,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은 사라지고 주님만이 그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할 일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그 일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 남아서 십자가를 져야 했기 때문에 홀로 세상에 남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구원의 역사는 주님께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이을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남으셨습니다. 이제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은 주님의 양어깨에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세 제자들은 이 일을 증거할 증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주님은 부활과 재림의 영광의 모습을 세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셨다. 이것은 그들이 후에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주님은 구약 성경, 즉 율법과 선지자(모세와 엘리야) 지지를 받는 메시아였다.
3. 하나님은 주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그 말에 순종하라고 지시하셨다.
4. 베드로가 죽기전에 변화산 사건을 어떻게 증거했는지 찾아보자(벧후1:16-17)
인자의 고난과 엘리야 논쟁(막 9:9-13)
묵상 내용
주님은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이 주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주님이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그말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모두 사라지고 주님과 제자들만 남아있었습니다.
* 너희 본 것을 말하지 말라(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9)..."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주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산을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었습니다.
1)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함
제자들은 아직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고 주님의 영광을 일시적으로 보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해서 고백한 후에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해서 주님을 만류하다가 책망을 들었으며, 변화 산에서 성급하게 초막을 짓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아직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전혀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아직 증인이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을 제자들을 통해서 전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들을 복음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려면 그들은 먼저 주님의 모든 구원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목격한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루신 모든 구원 사역을 목격하고 나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잠시 보기는 했지만, 아직 복음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증거 할만한 증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할 때까지 증인의 역할을 중지시키셨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성령 강림
또한 증인의 역할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시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효과적인 증인이 될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승천하실 때가 되서야 비로소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행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자기가 변화 산에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증거 하였습니다(벧후 1;16-18).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은 받은 후에야 성숙한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함(10-13)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묻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10), 예수께 물어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고 하나이까?(11)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1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13)."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10). 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죽음과 부활을 비유로 해서 어떤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로 놓고 서로 토론했지만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말 3;23). 그리고 이 예언을 따라 서기관들도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하나님의 백성을 회개시키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오면 그가 메시아가 누구인지 증거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변화 산에서 엘리야를 보고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엘리야가 주님보다 먼저 세상에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기관들의 가르침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성경에는 메시아가 와서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12). 오래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당할 고난과 그 후에 받을 영광을 예언했습니다(사 53장). 제자들은 변화 산에서 엘리야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엘리야의 예언과 동시에 주님이 받을 고난도 함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엘리야의 도래와 주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말4:6)의 예언대로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님을 증거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엘리야는 산에서 본 엘리야가 아니고,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엘리야의 사역과 비슷했습니다. 엘리야는 약대털 옷을 입고 산야에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 거하면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여 우상을 향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마음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이 메시아보다 앞서 와서 자기를 증거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알고 정중하게 대접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13).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낙심하여 시내 산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힘을 회복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들로 인해 잠시 시험에 빠져서 주님께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을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헤롯도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고 죽여버렸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였으며, 과연 그가 와서 자신을 증거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3).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출 때까지 주님의 영광에 대해 증거하는 일을 금하셨다.
2.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였다.
3. 세례 요한이 와서 예언된 모든 일을 행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정중하게 대접하지 않고 마음대로 대우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본 일을 부활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는가?
2. 메시아 앞에 엘리야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던 말라기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3.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엘리야의 사역을 비교해보고 그 유사점을 말해보라.
4. 우리는 정직하게 말하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접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고 있는가?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심(막 9:14-29)
묵상 내용
산 위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에 도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산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강력한 사단의 도전을 받고 비난과 좌절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밝게 미칠 때에 사단의 공격 또한 강해집니다. 모세가 40일간 시내 산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에 사단은 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공격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신 직후에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와 사단의 방해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 산 아래에서 일어난 광경(14-15)
"저희가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렸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14),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15)"
주님과 세 제자들은 산을 내려와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일행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들 주위에 서 있었으며,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14). 제자들은 열띤 변론을 하느라고 주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도 몰랐습니다. 제자들과 변론한 서기관들은 주님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리들을 잘못 인도하는 자로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게 되자 즉시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주님이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크게 놀라서 달려와 인사했습니다(14)."
* 변론하는 이유(16-18)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17).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
주님께서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내 제자들과 무엇을 변론하고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16). 그때에 군중 속에서 한 사람(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이 나와서 그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아들을 선생님께 데리고 왔다고 말했습니다(17). 아버지가 말하는 그 아들의 증세는 간질병 증세와 같았습니다. 귀신이 그 소년을 사로잡을 때마다 그 소년은 넘어져서 거품을 물고 발작했으며, 턱이 돌아가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 소년은 이 일로 인해서 점점 체력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사탄은 그 소년 안에 들어가서 그 소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소년의 부모는 그때에 주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 소년을 거치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주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파송을 받았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도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곳에 있던 율법학자들과 변론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18).
*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도와주옵소서!(19-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와라 하시매(19),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20).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21).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
주님은 제자들의 불 신앙을 보고 마음에 심히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서 무리들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고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소년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19) 그 소년을 주님께 데려오자 귀신은 갑자기 그 소년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어서 땅에 구르며 거품을 흘리게 하였습니다(20). 주님은 이 모습을 보고 깊은 동정을 느끼셨습니다. 주님은 그 소년의 영혼 속에서 그를 괴롭게 하는 사단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그 소년의 부모에게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 소년의 부모는 "어릴 때부터 이런 증세를 보였다"고 대답습니다(21). 그리고 "귀신이 그 소년을 죽이려고 자주 불과 물에 뛰어들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소년의 부모는 다시 발작하는 소년을 보고 놀라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면 나를 긍휼히 여기사 도와달라" 고 부탁했습니다(22). 그 소년의 아비는 제자들이 귀신 쫓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미 믿음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할 수 있으면"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23).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24)."
그러나 주님은 그 소년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23). 지금 그 소년의 부모에게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적은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소년의 부모는 주님이 그 소년을 반드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먼저 그 소년의 부모가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나와야 합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를 두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그 소년의 아비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20-24).
*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25-27)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25),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나(26),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27)."
주님께서는 군중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즉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에게 그 소년으로부터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25). 그러자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에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은 심한 발작으로 인해 탈진하여 죽은 송장처럼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그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26). 사단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를 멸망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스스로 일어섰습니다(27).
* 기도 외에는 이런 귀신이 나갈 수 없다(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28)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주님은 그 소년을 고쳐 주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들어간 후에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28). 주님은 "이런 종류의 귀신들을 내쫓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9).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할 때에 잠시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일을 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은사와 능력이 있어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귀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하나님의 계시와 사단의 방해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의 불 신앙이 그 능력을 제한 할 수 있다.
3. 악령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로만 물리칠 수 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우리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 응답이 제한되거나 지연된 일이 있으면 말해보자.
3.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을 고백하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언(막 9:30-32)
묵상 내용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실 때까지 주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 여행은 주님의 생애에서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기간 동안 복음의 증인이 될 제자들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내용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마가 복음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세 번 언급되었습니다. 1)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8:27-38), 2) 변화 산 사건 후(9:30-37),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도중(10:32-45). 이렇게 주님은 세 번이나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세계적인 정부를 세울 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고난을 받고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좌우 편에 앉은 권력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종이 되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헌신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곳을(아마도 가이사랴 빌립보)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우리 나라로 말하면 최북단에 있는 백두산이 있는 지역과 같으며, 예루살렘은 우리 나라의 서울 정도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이 여행은 주님에게 있어서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주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을 여행을 하던 중에 (예수님의 전도 사역의 중심지였던) 갈릴리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행기간 중에는 제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공적인 일을 자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날마다 한 걸음씩 (자신이 처형당할)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 두 번째 수난 예고(3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31)."
주님은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후부터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셨다"(막 8:31 참조)).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는 꼭 필요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직장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그들은 곧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처형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갈 각오가 있어야만 주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8:31) 기사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가 될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는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이러한 내용이 없이 간단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에는 첫 번째 예고에서 나타나지 않은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게 될 것" 이라는 말입니다. "넘겨진다"는 말('파라디도타이')는 '넘겨주거나 내어주는 것', 즉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다른 사람에게 그 신변을 넘겨준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렘 33:24)는 이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렘 33:24(상))..."
이 구절에서 "버리셨다"는 말이 바로 오늘 우리 본문에 "넘겨졌다"고 번역된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거부하게 되자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에 넘겨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기 백성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넘겨졌다'(또는 버려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했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인류의 대속물이 되도록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이 일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2(하)).(사 53:6,12)"
성령은 이사야를 통해서 메시아가 당할 고난과, 그가 고난받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방인에게 넘기신 것은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기를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원해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셨습니다. 주님은 강압이 아닌 자원함으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 제자들의 반응(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32)."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러한 메시아가 당할 수난과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듣고 두려워하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한 것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이 생각한 메시아는 섬기는 종이었으나 제자들은 권력만을 요구했다.
2. 주님은 제자들이 이기적 마음을 포기하고 자기 뒤를 따르기를 원하셨다.
3. 십자가의 길을 모면 고난에 대한 가르침을 접할 때에 두려워하게 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성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야 하는가?
2. 왜 마가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3. 나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제자도: 겸손과 섬김(막 9:33-37)
묵상 내용
* 너희가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33-34)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33),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4)."
주님의 일행은 베드로의 집이 있던 가버나움에 도착해서, 그 곳에 있는 한 집에 머물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33). 주님은 종종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실 때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8:27,29,31).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죽으러 가고 있었으나,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지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높아지고 대접받기 위해 서로 다투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35)..."
주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을 받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주님은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2:31, 레 19:18).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권력은 사랑의 봉사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자는 봉사하고 섬기는 자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는 사회는 경쟁과 시기로 갈등하지 않고 서로 섬기는 사회였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길 원하는 자는 이러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막 10:43-45).
* 어린아이를 통한 가르침(36-37)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3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주님은 어린아이를 한 명 데려와서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주님의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겸손한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단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인간은 저주를 받고 수치와 불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로 이해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만으로 파괴된 질서를 겸손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어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했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교훈을 따르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이 가르쳐준 가치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스스로 가장 비천한 신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우리를 섬기고 자기의 목숨을 우리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막 10:45). 이를 통해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사단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겸손을 심어주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더 위대한가? 를 놓고 싸우는지 않고 누가 더 잘 섬길 수 있는가? 를 의논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 이 교훈이 주는 의미 *
1.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지를 놓고 논쟁했으나,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가르쳐 주셨다.
2. 사단은 인간에게 교만을 가르쳤지만, 주님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는 겸손을 가르쳐 주셨다.
3.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주님이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 죽은 것과 같이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하며 섬기고 있는가?
2. 왜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며, 왜 겸손이 사단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지름 길이 될 수 있는 지 말해보자.
3.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같이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 해보고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자.
배타심을 없앨 것(막 9:38-42)
묵상 내용
모세는 한 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들으시고 70인 장로들에게 모세의 짐을 나누어주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70인 장로들을 회막 앞으로 소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회막에 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동시에 임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사실을 보고 모세에게 급히 달려와서 그 일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민 11:27-29). 그 때에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질투하느냐? 나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신을 받고) 선지자가 되길 원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호수아와 비슷한 요청을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요한의 보고(38)
"요한이 예수께 말하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38)."
요한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38). 그리고 요한은 그 일에 대해서 주님께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말하다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8:32-).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요한이 주님의 책망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10장이 되면 요한과 야고보가 동시에 주님의 책망을 듣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10:35-37). 이러한 기록들은 주님이 가장 총애하던 세 제자들도 주님에 사역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변화 산 아래에서 귀신을 내쫓지 못하던 제자들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굳게 의지하거나 기도하지 못하여 귀신을 추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일 그가 주님을 올바로 믿지 않고 귀신을 내쫓으려 했다면 귀신에게 큰 봉변을 당했을 것입니다(행 19:13-16, 마 7:21-23 참조).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39-4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39).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0)."
주님은 제자들의 편협하고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39).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0).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단의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는 하나님 나라의 용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단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일을 금해야 한단 말입니까?
* 영접하는 자와 실족케 하는 자(41-42)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41).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42)."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1).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은 참으로 친절한 행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은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그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자기의 권위처럼 인정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로마 군인들이 반역자의 지도자를 처형할 때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습니다(행 5:37 참조). 이 사건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믿는 소자 한 사람을 실족하는 자는 이것보다 더 엄중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는 요한의 그릇된 행동이 주님을 따르는 한 형제를 실족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은 주님을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귀신들을 내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의 배타적인 태도를 보고 실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귀신을 대적했으며, 귀신이 쫓겨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제자들에게 책망을 받게 되면, 다시는 낙심하여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하게 만든 장본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조심하도록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의 범위를 12제자에만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고 복음 전파에 참여한 모든 숨은 사람들도 제자들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나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 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선교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다른 형제를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주님을 믿는 형제를 낙심하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엄한 심판을 받는다.
3.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특권의식이나 배타심을 버리고 하나가 되야 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전통이나 교회, 또는 교파에 매여서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2. 교만한 마음으로 믿음이 약한 한 형제는 넘어뜨리는 사람이 어떤 형벌을 받게 되는 지 서로 이야기 해보자.
3.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특권 의식과 배타심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킬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해보자.
제자도의 준엄함 요구(막 9:43-50)
묵상 내용
*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43-46).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43-46)
주님은 차라리 형제가 주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죽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셨습니다(42). 주님은 계속해서 "만일 네 손이나 발, 또는 눈이 너를 범죄하게 만들면 그 지체를 찍어 버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기적인 마음과 배타심에 빠져서 형제를 정죄하지 않도록 지체를 베는 과감한 절제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기적이 되고 교만해져서 남을 정죄하는 것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심과 배타심과 같은 마음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인간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로는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성령께서 누시는 힘으로 수족을 베는 것같이 강경하게 대적할 때에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이 교훈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장애자가 되고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록 로마 제국이 성도들의 지체(손, 발, 눈)를 잘라낸다고 해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마카비서 7:2-41)는 영생을 얻기 위해 지체를 절단하고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사를 읽어보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고문 받고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이해 손이나 발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습니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불구자가 되거나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한 자들이 당할 형벌(47-49)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7-49)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이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형제들을 정죄하고 실족하게 하는 요한에게 일한 과감한 자기 절제를 통해서 범죄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자기를 포기하지 못해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들은 평안을 잃고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또한 마가 당시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그들은 수족을 잘리고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상황에 있는 성도들에게 로마가 가하는 위협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 더욱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로마 당국은 그들의 수족을 베고 생명을 빼앗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어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잠시 세상에서 불구자로 사는 것이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한 사람들이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고통을 한 번만 보게된다면 감히 주님을 부인하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배교자들이 갈 지옥은 구더기와 같은 생물도 죽지 않으며, 영원한 형벌의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생선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지옥에서 배교 자들을 불을 가지고 소금을 칠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은 로마가 가하는 고문보다 수천 배나 더 크고 가혹한 형벌임에 분명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순교와 박해의 위협 속에 있던 마가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보다 영원히 지옥에서 우리를 형벌 하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50)."
주님은 34절부터 계속된 이야기의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그들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요한을 책망하고 타이르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성도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실족한다면, 매우 엄한 책망을 받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시기와 배타적인 마음을 수족을 베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야기를 다 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사로 화목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싸움의 대상은 사단과 악한 영들이며,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할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세상을 선하게 만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듯이, 주님의 제자들도 이런 능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제자들도 쓸모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과 희생과 화평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부패를 막아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화목의 능력을 잃고 시기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가 되어 화평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 하면 안됩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성도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 본문이 주는 의미 *
1.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범죄하지 않도록 과감한 결단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2.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체가 잘리거나 생명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3.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서로 화목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한지 말해보자.
2.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는가?
3. 우리는 주님을 믿는 형제들끼리 당을 나누어 다투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간 우리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소금의 맛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