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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지식(善知識) 세계에서 으뜸
이렇게 정법(正法)을 존중하여 많은 선지식(善知識)과 인천도사(人天導師)가 나왔지만 그
가운데 특히 석가여래 가신 뒤 삼천년 동안에 부처님을 완전히 대신해서 성도한 이는 중국
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인도에도 없고 오직 한국의 원효대사(元曉大師)밖에 없다고 일본
사람들이 저희끼리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도 선지식이나 도인이 나
왔지만 어느 누구도 원효대사에 비하면 반쪽도 안된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사명대사(四溟大
邪)도 있고 아무 지도 없이 대각(大覺)을 해서 성불한 이가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불교 유학생(留學生)이 중국으로 갔었는데 중국사람들이 못 당합니다. 저번에 말한 왕화산
(王火山) 스님의 경우처럼 중국 중운 그렇게까지 다부지게 하지 못합니다. 중국에 건너가기
만 하면 우리가 항상 일 등을 했고 우승을 했으며 인도까지 건너갔다가 오는 이도 있었습니
다. 그러니까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훌륭한 분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머리
가 좋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단합만 되면 세계 제일의 민족이 되고 우리 삼
천만이 불법으로 무장해서 나서면 삼십억 되는 인류는 하루아침거리 밖에 안됩니다. 유엔총
회니 연합총회니 하지만 지금 모양으로 도둑놈만 몰아 놓은 총회 만날 있어 봐야 소용없습
니다. 우리 한국이 불교의 진리로 뭉쳐서 세계를 교화해야 평화가 올 것입니다.
如法受持分 第十三 tc "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當何名此
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잇고 佛(불)이 告須菩
提(고수보리)하사대 是經(시경)은 名爲金剛般若波羅密(명위금강반야파라밀)
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
야바라밀)이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
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所說法不(유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여래)-無所說(무소설)이니이다 須菩
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삼천대천세계소유
미진)이 是爲多不(시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제언)하사대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은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
진)이라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도 非世界(비세계)라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
相(가이삼십이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삼십이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
오 如來說三十二相(여래설삼십이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
(시명삼십이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
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어든 若復有人(약부유
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
(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이 경전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
하냐. 여래가 어떤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
뢰었다.『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무 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수
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부처님이시여.』『수보
리야, 여래는 이 모든 먼지를 먼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미진
이며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세계
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친
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라 이름을 삼십이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수보리야, 만일 어
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가
지고 보시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내지 네 글귀만이
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심히 많으니라.』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니다
[科解]
이제 오늘 저녁엔 제 십삼분(第十三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인데 부처님 뜻에 어기지
않도록 이 경전을 받아 가진다, 수지(受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의 문자(文字)를
받아 가지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이 문자이전(文字以
前)의 실상(實相) 자리의 내용을 체득(體得)해서 수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완전히 성
불(成佛)해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범부가 우선 부처님 흉
내라도 내어야 할 것이니 먼저 근본적으로는 견성을 해라. 그래서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
닌 중간 보살이라도 되어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 그것이며 나중에 필경에는 부처
가 되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법을 지니는 것을 법답게 진리와 같이 이 경전(經
典)의 정법(正法)인 부처님 법을 받아 가진다는 뜻으로 여법수지(如法受持)라 한 것입니다.
[原 文]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須菩
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解 義 이제 수보리 존자께서 사십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밤낮 없이 많이 듣
기는 했지만 질서 정연하고 조리(條理)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배
우기만 하면 제나름대로 깨닫고 했는데, 이번에 금강경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니 참
그야말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이시라고 느껴졌고 마음이 기뻐서 「이 경전 이름을 뭐
라고 저희들이 이름하여 받들어 모시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경 제
목을 약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셨습니다. 이 금강경의 금강철퇴를 가지면 무
엇이나 두들겨 부수어서 안 깨지는 것이 없고 다른 것을 가지고는 이것을 깨뜨릴
수가 없는 보물(寶物)입니다. 이것은 여물기만 해도 안 되고 날카롭기만 해도 안되
며 굳세고 날카롭고 아주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서 만사만능(萬事萬能)하며 환하게
통달해서 세간중생들 법이나 출세간의 성불하는 보살들 법이나 부처님세계 할 것
없이 하나 빠짐 없이 환히 다 통달한 지혜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 금강입니다. 말하
는 이 자리 말 듣고 앉은 자리, 그 자리가 불멸의 존재고 영원불멸의 생명체인 동
시에 만사만태(萬事萬態)를 다 통달해 가진 금강반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금강에
다 이 마음 자성자리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이므로 반야라 한 것이니 반야는 곧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
지 배웠던 지식은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것으로 이런 지혜는 근본적으로
는 사람의 본분(本分)을 망치도록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을 결과적으
로 지옥으로 보내고 꽁꽁 뭉쳐져서 생사에 윤회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뿐입니다. 금
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있는데 말하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참된 반야고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성(自性)만이 오직 있는 참 구공(俱空)
까지 된 그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인데 그러나 그 실상반야를 깨달아 가지고 거기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소승나한(小乘羅漢)이 되어 버릴 뿐이므로 그 때문에 성불하
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복혜쌍수(福慧雙修)입니다. 그 방법은 곧,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여섯 가지인데 이 육바라밀(六波羅
蜜) 중 마지막 바라밀인 지혜바라밀 하나만 빼 놓고는 앞의 선정하는데 까지는 전
부 복을 닦는 수행입니다. 한량없는 복 닦는 방법이니 우주를 점령해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그만한 신통조화(神通調和)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 앞에 다섯
가지 복짓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지혜바라밀이 곧 복혜쌍수(福慧雙修)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법을 다 듣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깨닫는 그것이 반야이고, 필경
견성(見性)까지 해서 견성한 뒤에 하는 수도(修道)가 진짜 수도인데 그렇게 해 가지
고 수지(受持)해 올라가야겠구나 하는 것도 내내 그 자리가 하는 것이고 수지 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야입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이름하라
하셨고 이런 뜻으로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
羅蜜
解 義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가지라
했느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반
야바라밀 . 관조반야바라밀 . 실상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제까지
그게 실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서 이 문자반야는 어
떻고 또 관조반야는 어떻게 살피는 것이라 했지만 실은 살필 것도 없다. 마지막 자
성자리인 실상반야는 어떻고 어떤 것이라 설명했지만, 또 그래서 그것을 실천해서
바라밀을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는데 지혜가 제일이니까 그랬지마는 사실은 그게 반
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므로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했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늘 긍정하시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시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으로 언제나 같
은 말씀 같은 그런 내용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말씀하시는 구절(句節)에 의지해
서 그 구절은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여지껏 고구정령(苦
口 )으로 이십년 동안 설명하셨는데 이제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자나 반야에 의지해서 걸려 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시하는 것이나 계행 가지는 것이나 인욕이나 다 잘하면 세상에 알려지고 저절로
밖으로 드러납니다. 또 정진하는 것도 모두 보고 알 수가 있고 또 선정한다고 앉아
가지고 며칠씩 먹지도 않고 하게 되므로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새 미술가 들도
선정과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일 주일씩 안 먹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구
상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굉장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일 주일씩 어떤
땐 한 달씩 자기도 모르고 앉아서 구상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일종의 선정삼매(禪定
三昧)에 들어가면 자연히 지혜가 나옵니다. 이 여섯가지 바리밀 가운데 구경(究竟)
에 들어가면 다 하나가 됩니다. 이 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을 밝히는 경전이고 반야를
역설(力說)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복짓는 수행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수즉파파
즉수(水卽波 波卽水)로 물과 물결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복 짓는 것이나 지
혜를 닦는 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반야바라밀을 그렇게 애써 설명했지만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
니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해라.」 하신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합니
다. 그러나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역시 같은 뜻입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한다
고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지만 그것은 초학자(初學者)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체득
해야 하겠으니 이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지, 실상금강이란 마음자
리에서는 그것은 다 버려야 할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반야의 실체는 아
니고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하느라고 이름한 것뿐입니다.
바라밀이다, 도피안이다, 하는 말은 생사니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것이 떨어져
서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체가 온전히 티 하나 없이 드러나면 도피안이고
이것을 성불했다, 생사를 해탈했다, 그럽니다. 그때 가면 일체가 무소부지(無所不知)
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본체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걸 설명하느라고 금강이니
반야바라밀이니하고 또 부인(否認)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마음 자체가
곧 반야바라밀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은 다 끝나신 것이지만 이것을 문자
로 설명하면서 틀림없이 이론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일을 위해 「불설 반야
바라밀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한 게 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
서는 설한 바 아무 법도 없으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입을
떼신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반야경을 네 곳에서 십 육회의 법회를 가지면서 설법하셨습니다. 그런
데 「내가 무슨 말한 법이 있느냐.」 물으니까 「아니올시다. 부처님께서 입 떼신 일
도 없고 언제 누구보고 법문한 말씀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지금 계
속 얘기하시고 계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실상반야는 말로나 생각으로 미치
지 못하고 문자로 기록 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당신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을 소개하는 말씀이 아니라 필경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 자리고
말로서는 소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번뇌 망상을 제거해서
장난치던 그 사람이 장난 안 하고 앉아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당 지옥의 생각을
해서 꿈을 꾸고 돌아다니다가 꿈꾸는 생각을 걷어 버리니까 눈 뻔히 뜨고 꿈꾸는
것이고 꿈을 깨 놓고 보면 잠 자본 일도 없고 꿈꾼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꿈속에
도 그 사람이고 꿈 밖에도 그 사람일뿐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실 부처님께서 당
신 말씀하고 싶은 그 얘기를 한번도 얘기해 보지 못합니다. 꿈속에서 꿈꾸는 사람
한테 나도 꿈꾸는 몸뚱이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 꿈속에 들어가서 얘기를 실컷
하는 격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헛말하고 앉아 있는 것이고 잠
꼬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잠꼬대를 가지고 얘기한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꿈속에서 하던 일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보리 존자 말씀이
「부처님께서 언제 무슨 말씀하셨습니까.」하고 반문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네 말
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몽중지사(夢中之事)니 꿈꾸는 중생들
과 상대하는 얘기인데 또 다시 술에 취해 가지고 여기가 동쪽인지 남쪽인지도 모르
고 헤매는 판이므로 이렇게 달래 주는 것이지만 턱도 안 닿는 얘기입니다. 비록 술
이 취해서 정신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잠꼬대 같은 말을 가지고「내가 말한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말
이 안됩니다. 금강경이고 반야고 이걸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그게 무엇
인지 그 주인공 주체를 찾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떤 법
도 금강경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解 義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한 그 전자의 수가 많으냐 많지 않으냐.』 하셨는데, 수보리존
자 경계로 봐서는 우리가 콩 한 개 보는 만큼 쉽게 압니다. 그래서『참 많습니다, 세
존이시여.』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의 경계로 봐서는 엄청날 것도 없
습니다. 여기서는 일반 중생을 대신해서 하는 말씀이므로 「참 많으옵니다.」하고 말
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수보리야, 이 먼지 이
미진 그것을 부처님은 미진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미진이라고 내가 설명했던
미진이 그게 곧 미진이 아닌데 그것을 미진이라고 말하며,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세계가 아니니 이 이름이 세계니라.」하셨습니다. 천백억 지구덩이 별세계가 모인 것
을 사바세계라하고 극락세계도 무수한 불세계(佛世界)중 하나인데, 화엄경(華嚴經)
같은 데에서는 화장찰해(華藏刹海)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맨 밑에 무한대의 허공
가운데서 무엇 하나를 근거로 해 가지고 이십중광대찰(二十重廣大刹)이 이루어져서
스무 층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 한 층계 세계의 거리가 얼마냐 하면, 삼천대천세
계의 열 배, 곧 백억의 지구의 열배에 해당하는 세계를 부순 먼지를 십중찰미진수
(十重刹微塵數)라 하는데 이 미진수가 다하도록 별나라 하나에 먼지 하나씩 놓아서
이 미진수가 다 하도록 무한히 올라간 거리 그것이 화장세계의 한 계층의 거리입니
다.
여기서 찰(刹)자는 절찰자로만 알지만 세계란 뜻입니다. 십중찰세계 곧 지구덩
이 백억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나 되는 지구덩이들을 전자나 원자로
환원시킨다면 그 수가 불가사의한 무한대의 수일 것입니다. 불보살이나 헤아릴 수
있는 이렇게 많은 수의 전자 원자를 가지고 지구덩이 하나 지나갈 때마다 한 개씩
놓고 올라가서 그 전자가 다하도록 수 없이 많은 지구를 일직선으로 통과해 올라갑
니다. 이렇게 해서 십중찰세계의 미진수가 다 하도록 올라가서 이렇게 하기를 동서
남북과 네 간방(間方) 상하방(上下方)의 사방으로 다 올라간 세계, 거기엔 부처님 계
신 세계도 있고 안 계시는 세계도 있습니다. 부처님이 안 계신 세계는 범부 세계인
데, 지금 우리 세계는 불세계 아닌 것으로 됐습니다. 그렇지만 대장경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아주 불세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십주찰세계의 전자 . 원자가
다하도록 한 것을 한 계층으로 해서 이렇게 이십층이나 올라간다고 그랬는데 이것
이 하나의 화장찰해입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이렇게 광대무변한 세계는 측정(測定)하지 못했는데 부처
님 께서는 그렇게 굉장한 세계를 설명해 놓으셨지만「그건 세계가 아니니 그래서 세
계라고 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미진은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하
고 세계가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계라 한다.」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三十
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 부
처님의 설흔 두가지 거룩한 특별한 상과 여든가지 뛰어나게 생긴 모양(八十種好)으
로 여래를 친견(親見)할 수 있느냐. 부처님을 뵐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친견 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어째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기 때문이옵니
다. 그래서 이것을 <삼삽이상>이라 하신 것이옵니다.』
부처님의 삼십이상도 비록 육도 만행(六度萬行)을 하고 억만겁 동안 몸뚱이와
온갖 것을 남을 위해 보시한 공덕으로 얻어진 거룩한 상호(相好)이긴 하지만 그러
나 그것도 역시 세계나 먼지처럼 상대적으로 있는 허망한 거짓 존재이며 따라서 상
(相)이 아닙니다. 육체의 오장육부(五臟六腑)나 혈액(血液)과 신경(神經)등이 다 물질
에 불과하고 그 물질은 곧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삼십이상 이라고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
니라 역시 다생겁(多生劫)으로 보살의 인행(因行)을 닦으면 그 정도에 따라서 상호
도 거룩해지고 하나하나 갖추어지게 되며 그래서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힌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
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와 생명을 가지고 보시를 했다면 옷 없는 사람 . 돈 없는 사람 . 밥 없
는 사람을 위해 돈도 주고 옷도 주고 재산 다 털어 주고 나서 더 줄 것이 없으면
코도 떼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기를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몸을 버려서 보시
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 가운데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잘 수지
해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심히 많나니라. 삼천대천세
계에 먼지 수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
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나면 그 복이 한량없을 겁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칠보를 삼
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했다 해도 그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니고,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몸만 남한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남에
게 설명해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리불 존자가 공부하고 앉아 계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
를 「부처님 제자이시죠. 부처님 제자는 다 대자대비 하시다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보시 할 수 있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스님 왼 눈
이 하나 필요한데 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빼
줍니다. 그 사람은 그걸 받아서 더럽다고 탁 침을 뱉아가지고 집어던지더니 발로
비벼서 짓이겨 버립니다. 남은 애써서 아픈 눈울 빼서 줬는데 필요 없어서 내 버리
더라도 자기 안 보는 데 가서 했으면 좋을 텐데 그 빼 준 사람 앞에서 그러니 아무
리 사리불이라 해도 마음이 동해서 고약한 놈이라고 속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
니 그 사람 말이「아 스님이 발심을 덜 했습니다. 철저히 발심을 했으면 내가 그걸
갖다가 똥 속에 집어넣거나 발로 밟아 버리거나 주는 것 뿐이요. 무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안색을 보니까 속으로 마음이 동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응무소주한 보시
가 아닙니다.」 하면서 자기는 제석천(帝釋天)인데 스님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랬다
고 하면서 부처님 비슷한 제석천의 본신(本身)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
히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그것도 못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깨닫기 전이라도 이런 경전을 읽고 배워서 마음을 조복을 받고 항복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 자기 목을 못 빼 준다 하더라도 이 목을 못 빼 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참회가 되고 진실히 중노릇을 잘 하고 인욕도 하고 보시도 하고 모두 잘 할
줄 알면 깨친 뒤에 훨씬 수월해 집니다. 경을 읽을 때마다 하루에 열번 읽어도 읽
을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꼭 이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다가 개가 날 보고 짖으면 마음에 부끄럽고 부처님 뵙기에 황송하고 신
도를 대하기에 얼굴이 화끈하고 이런 식으로 정진되어 올라가야 오늘은 안 돼도 내
일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법문 들을 때만 그렇겠다 생각해 놓고는 개
가 짖거나 말거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천만 겁을 가
도 큰 수행이 안됩니다. 내 것을 주고 내가 다 참아야 할 것을 남더러 주라 하고
참아 달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이고 내가 참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설사 억만겁을 두고 몸뚱이를 보시하고 재물을 보시하고 큰 공덕을 지
었다 해도 그것은 물질로 지은 복이고 몸뚱이라는 형상으로 지은 공덕인데 물질이
나 몸뚱이 자체가 허망한 존재이고 상대적인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그 공덕 또한
무한대한 절대적 공덕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또 상대
적인 공덕으로는 생사를 해탈 할 수가 없고 자기 자성을 체득하지 못한 중생의 경
계일 수밖에 없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는 자성을 깨달아 우주를 소유하고
주재하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탈하여 영원불멸의 대성자인 부처님을 성취하는
비결(秘訣)이므로 그 복이 비교도 안되게 더욱 많다(其福甚多)고 하신 것입니다.
[說義]
문자반야는 곧 실상반야
반야라는 말은 우리말로 눈이 보배란 말이고 소견(所見)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소견이
란 말은 역시 지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머
리를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탐진치(貪嗔痴) 욕심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람이 제가 미친 줄 모르듯이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욕심을 더욱 더 부릴 따
름입니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세상의 지혜도 반야는 반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경의 제목을 풀이할 때 반야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지만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
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상은 하나입니다. 문자반야
인 이 경전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실상반야 . 관조반야의 조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
록한 것이므로 이 뜻을 나중에 참말로 성취하고 보면 문자반야가 곧 실상반야고 그래서 문
자가 곧 실상이고 문자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자리입니다. 그 실상반야가 있
다는 것도 문자가 소개해서 알고 관조반야를 옳게 가지는 방법도 역시 문자가 지도하는 때
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문자가 역시 참으로 소중해서 이 경전이 계시는 데는 곧 부
처님이 계시는 데고, 이 경전을 설명하는 분은 곧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라 하는 말씀을 하
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래서 이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 조리가 어떤 것인지 똑 떨어져야 될 것
입니다. 이것은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 아는 목전지사(目前之事)를 설명한 것
이니까 수보리를 불러서 「개미나 굼벵이를 하나 놓고 이 자체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
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굼벵이나 지옥 중생이나 천당 중생이나 누구든지 지도를 하면 전
부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이니 이게 모두 그런 것을 설명 해놓은 말씀이고 사람이 모두 그
렇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 본문울 말하기 전에 이것이 지금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설명했
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자니 전자니 하는 것 그게 그대로가 환의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자가 인식하듯이 그런 전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진공이고 없는 존재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유
정 무정 이것도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일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금강경 설명 다 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
밀경이라 했다.」하셨으니, 이러면 설명이 다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 한 번 죽
들어서는 어느 대문에 어떤 내용의 골자(骨字)가 있는지 기억에 잘 안 남지만 이것을 천독
만독(千讀萬讀)을 하면 확실히 내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이것이 문자반야바라밀이고 이 문자반야바라밀이 아무 것도 아니지마는 반야를
차차 자꾸 익혀서 실제로 알아지고 깨닫게 해 주는 공덕이 되기도 합니다.
혹 무한동력(無限動力)을 말하지만 아무리 물질절대론자(物質絶對論者)가 있다 해도 상대
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절대적 존재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상계인데 무한동력도 마음
내 놓고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이것만이 아무렇게나 해도 죽지도 않고 가만있지도
않고 사실상 무한동력입니다. 제가 내었던 욕심을 만족하려고 할 때 가령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은 무한인 만큼 남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 죽이고 둘이 달
려들면 둘울 죽이고 백명이 달려들면 백명을 다 죽입니다. 또 27억이 다 달려들어도 할 수
만 있으면 27억을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악할 때는 무한히 무섭고 악
하기도 하면서 또 가장 착하기도 한 존재이어서 착한 생각을 내면 이보다 더 착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역설하셨
고, 내가 그것을 또 어떻게든지 바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 말하고
있는 이 자리, 말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실상입니다. 실존철학자(實存哲學者)들이 말하고 있
는 바 그 실존 자리는 산보면 높다 하고 물 보면 깊다고 알 줄 아는 자리, 공산당은 죽일
놈들이라고 서로 적대시하는 그 자리가 실상자리입니다. 허공도 그 생각 못 내고 물질도 그
생각 못 내는 것이니 이 실상자리 빼 놓고는 그런 생각 내 놓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도 못
내고 아무 것도 못 내는데 오직 마음자리 이것 하나만이 그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켜 놓은 촛불처럼 항상 드러나 있고 이것은 숨을 곳도 없고 사라질 곳
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깨달아야 하겠다는 생각, 견성해야 하겠다 또 무엇을
체득해서 증득을 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막히게 되고 그게 역시 장애입니다.
이 자리는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이 얘기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치고 육
조대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리는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어디 이론으로 설명할 정도로는 그렇게 안됩니
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어디까지나 깨쳐야 하겠다는 이것이 가장 큰 근본지장입니다. 그래
서 사실은 견성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산보면 높은 줄 알고 미운 것 보면 밉다고 싸우기도 하는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또 보
리심을 발해 가지고 닦는다고 하는 것이 금강의 용(用)인데, 실상이 용이고 용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깨달아 체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념이나마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해야
이것이 불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신심(信心)이 튼튼해집니다. 범부로서 일으키
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곧 자성(自性)에 대해 그 존재가 어떤 거라고 개념으로나마 깨치
기 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께서 설명을 자주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처님께
서 애써서 소개하시고 싶은 것은 말 듣는 그 자리, 일체 시비언설(是非言說)이 다 끊어져서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곧 이것이 없는 거로 있는 거고 있는 것으
로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초월한 자리이지만 부득이 억지로 말을 붙여서 금강
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이므로 실상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소개하고 싶어
하는 그 내용은 문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전체가 그대들 마음이라.」고 하신 육조대사의 말
씀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만들었지, 그 자체가 어디 이름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 아무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고 그러지만 그 실상과는 멀리 어그러집니다. 그 실상은 반야바라밀이 아니
라 그런 내용을 가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붙이라
고 하는 것이니 실지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놈은 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얘기 듣고 추상(推想)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고 생각조차도 아니란 뜻입니다.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口頭禪)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
회에 나간 말입니다. 선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
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것, 책임 없는 말, 실천 없는 말을 뜻하
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
서 장난에 정신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羊車) 사슴수
레(鹿車) 소수레(牛車)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 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이 49년동안 고구정녕으로 말씀
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 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자리는 말
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박고봉(朴古峰)스님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인데 만공스님(宋滿空)제자입
니다. 한번은 고봉 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굴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만공아, 네
가 견성을 했어, 이 도둑놈아, 견성을 좀 내놔 봐라.」 이렇게 욕을 한 나절이나 퍼부어 놓
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구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
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인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이 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 밖에 없
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
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 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
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생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
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울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
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 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스님의 힘이 훨씬 셉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까지 들린다고 하
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
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비구가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
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스
님은 「허 허」하며 돌아 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갈라져서 몇 동
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칭찬도 할 수 없는 거고 껍데기가 욕을 할 거고 욕은 실제
로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화를 낸다는 것은 더 우스운 알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
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에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엔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
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 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간 잘
못 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
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趙州)스님이라는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밑에 한 노인이 호떡 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 스님을 한
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
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 행인은 바
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놓고는 아 그리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
부터 바로 길을 가르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
켜 주고 스님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주스님이 당장 주장
자를 들고 「오늘 이자를 타살(打殺)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리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地獄業報)를 적게 받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
면서 내려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럼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비뚜로 가르쳐 줍니다. 조주 스님은 가리켜 주는 대로 얼마를 가니까 또
불러서 잘못 됐다고 다시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
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 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 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번 만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窮極體)인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돼서
전자니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르
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 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
성자로 보이고 어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너지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
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강강도 댕댕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
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 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 아닌
이 이치까지는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
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事物)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을 때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 똑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로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마는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
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놓은 그 시간부터 숨쉬는
시간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나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完成品)의 반만
만들었다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
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을 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맡는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
는 것은 불교의 불자(佛字)도 안 들어보고 하는 소리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비세계(非世界)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
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닌 과학 . 종교가 아닌 종교 . 초과학 . 초 종교
인 동시에 초(超)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 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 억만배 했다면
말이 안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
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미진 전자 같은 요소(要素)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라고 말하고 중생이
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지 자꾸 베껴 보면 껍데기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처
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 에너지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
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을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
산소 . 수소로 보면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
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
천여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 칠십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 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
절이 「색즉시공 공중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
이니 진공(眞空)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은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
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 것도 거리낄게 없는데 괜히 쓸데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 손이 통과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
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
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
을 얘기 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건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 물 . 보배다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
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미
진이 아니고 세계가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저거
는 중공이다.」 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
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도 있는거고 만일 천지가 날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라고 하는 생명의 실재(實在)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
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게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5천년 문화와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존재
하는 것인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한 데서 잘못 되기 시
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재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
교에서 말하는 현인(賢人)이나 성인(聖人)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에도 못가는 정
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이
고 꿈이고 환(幻)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
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
여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 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
인쉬타인은 수박 겉핥기로 조금 얘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
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 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 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
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施受物三者)가 청정한 것입
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 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
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
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
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닌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아
까 조주스님(趙州)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打殺)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 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滿空)이 절구공으로 고봉(古峰)스님을 때려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
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법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離相寂滅分 第十四 tc "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聞說是經(문설시경)하시고 深解義趣(심해의
취)하야 涕淚悲泣(체루비읍)하사 而白佛言(이백불언)하사대 希有世尊(희유세
존)하 佛說如是甚深經典(불설여시심심경전)하심은 我從昔來(아종석래)의 所
得慧眼(소득혜안)으론 未曾得聞如是之經(미증득문여시지경)이니이다 世尊(세
존)하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心淸淨(신심청정)하면
卽生實相(즉생실상)하리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成就第一希有功德(성취제일
희유공덕)이니 世尊(세존)하 是實相者(시실상자)는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니
是故(시고)로 如來說名實相(여래설명실상)이니이다 世尊(세존)하 我今得聞如
是經典(아금득문여시경전)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는 不足爲難(부족위난)이
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약당래후오백세)에 其有衆生(기유중생)이 得聞是經
(득문시경)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하면 是人(시인)은 卽爲第一希有(즉위제일
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此人(차인)은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
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我相(아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인상중생상수자상)
도 卽是非相(즉시비상)이라 何以故(하이고)오 離一切諸相(이일체제상)이 卽
名諸佛(즉명제불)이니이다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如是如是(여시
여시)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不驚不怖不畏(불경
불포불외)하면 當知是人(당지시인)도 甚爲希有(심위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第一波羅蜜(여래설제일바라밀)이 卽非第一波羅蜜(즉
비제일바라밀)일새 是名第一波羅蜜(시명제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여래설비인욕바라밀)일새 是
名忍辱波羅蜜(시명인욕바라밀)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
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로되 我於爾時(아어이시)
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
相(무수자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
시)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應生瞋恨
(응생진한)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우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
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是故(시
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 多
羅三 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니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
(생심)이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이요 應生無
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라 若心有住(약심유주)면 卽爲非住(즉위비주)니라
是故(시고)로 佛說菩薩(불설보살)은 心不應住色(심불응주색)하고 布施(보시)
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
야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니 如來說一切諸相(여래설일체제상)이 卽是非相
(즉시비상)이며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卽非衆生(즉비중생)이니라 須
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於者
(여어자)며 不 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須菩提(수
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心住於法(심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入闇(입암)하야 卽無所見(즉무소견)이요 若菩薩(약보살)이 心不
住於法(심부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
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當來
之世(당래지세)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能於此經(능어차
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卽爲如來(즉위여래)--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하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나니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개
득성취무량무량무변공덕)하리라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
피울며 부처님께 사뢰었다.『참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
와 같이 심히 깊은 이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
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
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생
긴 것이오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실다운 상이라고 이름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알아서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이 다음 세상 후
오백세에 어느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닌다면 이 사
람은 곧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이 사람은 <나라는 생
각>도 없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고 <오래 산
다는 생각>도 없는 까닭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나라는 생각>이 곧 관
념이 아니오며 <남이라는 생각>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산다는 생각>도
곧 관념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일체의 온갖 상을 다 여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
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
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인 줄 알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이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을 인욕바라밀이라 한다고 여래가 말하였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뚱이를 베이고 찢기었을 적에 내가 그
때에 <나라는 생각> . <남이라는 생각>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었나니,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내가 지난 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
길 때에 만약 <나라는 생각> . <남이라는 생각> .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기 때
문이니라.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던 저
세상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없었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중생살이
라는 생각>도 없었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 . 향기 . 맛 . 부딪침 .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물은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설사 마음에 머물은 것이 있어도 머물은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보살은 마음을 물질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보
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하나니, 여래가 말한
일체의 상도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온갖 중생이라 한 것도 곧 중생이 아
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진여의 말을 하는 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은 이 법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데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 같고,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밝은 눈으로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
지의 온갖 물건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 만일 어떤 선
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
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나니 한량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
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초현상의 적멸 경계
[科解]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 함은 제상비상(諸相非相), 곧 모든 상이 상이 아니므로 그 상을
모두 떠나 버리면 적멸(寂滅)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 가운데 일체 죄악이 다 정적(靜寂)해
지고 모든 혼란이 다 없어지니까 적멸하게 되고 일체 악한 생각이 다 무너져 없어지니까 적
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적멸을 앞세우니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유
생(儒生)들이 종래 욕해 왔었습니다. 허무적멸지도라고 욕을 하긴 했지만 한쪽만 보면 그게
옳게 말한 소리이기도 합니다. 금강경 이론을 듣고 「참 그렇겠구나」하고 좋아하며 쓸데없
는 번뇌 . 망상 . 지식을 청산합니다. 자꾸 청산해서 청산했다는 생각도 내면 안되고 「내가
부처가 되리라 해도 안되겠구나.」 하는 것도 번뇌이고 망상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들어
가면 점점 백척간두(百尺竿頭)로 마음이 깊어 들어갑니다. 나중에는 송곳 끝도 올려놓을 데
가 없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자꾸 해서 실제로 번뇌를 해탈하고 초월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참말로 적멸이 현전(現前)해 집니다.
그러므로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모든 상이 상 아닌 도리를 사무쳐서 번뇌 . 망상 . 현
상을 여의고 본체자리,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물 보면 깊은 줄 아는 마음자리만 오로지 남
아서 드러나는 도리를 밝히는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멸이라고 허공처럼 아무 것도
없는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소승(小乘)에 떨어집니다. 「나 혼자 생사를 해탈했고 자유자재
(自由自在)하게 됐으니 그만이지, 우주가 깨지거나 온 중생이 고해(苦海)에 빠졌거나 말았거
나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하여 적멸만 지키고 있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허무적
멸지도(虛無寂滅之道)가 됩니다. 그러므로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이러한 적멸(寂滅)만을 지키
고 거기에 빠져서 혼자만의 안락(安樂)에 만족하지 않고 무심(無心)한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어 남을 위해 온갖 것을 다 보시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라는 것입니다. 곧 응무소주
(應無所住)하여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살행(菩薩行)을 뜻하는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야
합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 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解 義 그때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걸 듣고 그 이치가 거룩하고 묘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깊이 잘 알고서는 감격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죽죽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기를,
『참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명해 주
신 것은 제가 40년 전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공부를 해서 얻은 저의 지혜 안
목으로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전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40년 후인 지금에서야
금강경의 정체를 알아듣겠아오며 여지껏 이렇게까지 깊은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
은 듣지 못했사옵니다.』하고 감격해서 사뢰었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경전(經典)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계율(戒律)도
있지만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나 육조스님도 이 금강경을 가지고 단속을 해서 범
부를 딱 벗기는 도리를 밝히셨습니다. 육조대사께서는 금강경에「응무소주 이생기
심」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견성을 했으니 이 금강경이 그런 것인데, 중생들은 문자
를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절에서는 강당(講堂)에서 먼저 경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선방(禪房)을 만들어서 참선시키고 그랬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역시
그러셨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의 도인(道人)이라 하면 선교(禪敎)를 다 통해야 되는 것이므로
세계에서 제일 어렵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모두 자기 전문이 따로 있고 그
전문분야에 따라 절이 따로 있습니다. 금강경 하면 금강경 잘하는 법사가 금강경만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당을 만들어서 그 금강경 전문강원(專門講院)에 학인(學人)들
이 경책(經冊)을 싸가지고 다니게 마련입니다. 우리 한국 강사(講師)는 무엇이든지
잘해야 하고 또 견성(見性)까지 해야 선지식(善知識)이라 하게 됩니다. 이런 선지식
네들의 말을 들어보면 훨씬 티를 벗어서 탁 트입니다. 이렇던 한국 불교가 근래에
와서 잘못돼 가지고 「경전 보지 마라, 그걸 보면 사람 버린다. 그 경이 무슨 필요
가 있느냐.」고 공공연(公公然)하게 말하면서 「그 맛있는 고기를 무엇 때문에 안먹
느냐. 먹기도 좋고 기도 나고 건강해져서 속히 성불(成佛)한다.」는 겁니다. 「시래
기 산초나 뜯어먹고 노랗게 시들어 앉아 있으면 그거 언제 성불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변했습니다. 경을 못 보고 발심이 잘못 되면 자기도 잘못 되고 남도
역시 그릇됩니다.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하는 이런 사람들의 과보(果報)는 세세생
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도 납습니다.
[原 文] :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
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解 義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얻어듣고서 신심
(信心)이 청정하면「틀림없이 그렇겠다. 꼭 그와 같이 해야겠구나. 사실 그런 게 있
다. 내가 그런 존재다. 이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로구나. 내가 듣고 앉아 있는 이
마음자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리겠구나. 단지 현상계를 보고 좋으니
나쁘니 하고 집착하는 그것이 허물이구나. 그러니 일체 생각만 내 버리면 되겠구
나.」하는 실다운 상이 생길 것이옵니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나중에는「아아 이것도 틀렸구나.」하고 차근차근 밤 껍데기 벗기듯이 한겹 두겹 벗
겨 들어갑니다. 밤 껍질 자꾸 깍다 보면 재미가 나서 나중에 밤도 어디로 가고 없
어지도록 깎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락없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청정하
면 곧 실상(實相)이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참말로 철저하다는 말도 되고
때 없는 신심이니까 아무 것도 붙은 게 없는 것, 티없는 옥과 같이 되어 간다는 뜻
입니다. 그러면 즉 실상(實相)입니다. 곧 그 자리에서 그 사람한테는 실상자리가 생
길 것이니, 실상자리만 남아서 즉견여래(卽見如來)하면 여래를 보고 곧 부처가 될
겁니다.
『마땅히 제일 가는 마지막 최후위 참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는 사람인 줄 알겠
나이다. 그 법문을 이렇게 듣고 그 자리에서 실천해 가지고 실상자리까지 체득해
버리니 참 맹렬한 사람이오며 아주 약고 영리한 사람이옵니다.』 그러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이 실상이라는 것도 상이 아니고 있는 것이 아니오니
이름이 붙을 수 없는 자리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 실상이라 이름하셨아옵니
다.』(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수보리존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조리가 논리에 맞는지 안 맞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것 다 정리해 버리고 즉
견여래(卽見如來)한 자리입니다. 신심이 청정한 그 자리, 앉은자리에서 얻어 낸 그
실상이라는 것을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다고 잘못 알까 염려하여 이렇게 또 그 잘
못된 생각 . 덧붙이기 생각 . 가질 거 있는 것으로 아는 그걸 떼려고 하신 겁니다.
사실 그 이름을 실상이라고 했지마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
러니까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객관적 존
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실상이 아닙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일으키
면 벌써 인식하는 주관이 있고 인식된 객관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
다. 그러니 그게 실상도 아니고 실상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그래서 이름을 실상이
라고 합니다.
『마음을 정리해서 번뇌 망상을 해탈하면 실상이 현전(現前)한다, 견성한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품이 다 드러나면 사실 그것은 성품자리도 아닙니다. 성품자리
라고 하는 것은 견성하기 전에 내가 말하는 그 근본자리인데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아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성품이라 하면 야단 벼락을 맞을 소리입니다. 그러
니 일반적인 논리로는 「이것이 성품이 아닙니다. 성품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러
므로 해서 실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래야 논법에 맞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세존이시여, 이 실상자리라고 하는 것은 곧 실상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해야 할 것인데, 「실상이 아
니므로 이것을 실상이라고 합니다.」했으니 이 말의 조리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공
부하는 사람이 구공만 지키고 앉았으면 나한(羅漢)이고 소승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
(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하는 데 범부처럼 보시한다는 생각에서
보시해도 안 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러니
무주색(無住色)하고 보시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적멸(寂滅) 그것 하나만 자꾸
내세우면 그 구공(具空) 그것만 지키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는 데 이 금강경에서는
구공을 체득한 사람이거나,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응무소주해서 자꾸 육도만행
(六度萬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른 점입니다. 이
런 뜻에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도 어긋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맞는 것인가 맞추어 보십시오.
우리가 견성하기 전이라도 견성할 수 있는 발심이 잘못되면 가령 몇 천만 겁을
선방(禪房) 한 복판에 앉아 참선만 해도 그 사람이 부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심이 똑바로 발심(發心)되어야 합니다. 범부 때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는지 어느
곳으로 향해서 성불할 수 있는 것인지 발심이 바로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신(邪
信)이 앞서 있으면 참선보다 더한 방법으로 앉아 정진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 난 그때 부처님 마음이나 부처님이 맨 처음에 중생으로서
연등불한테 처음으로 발심한 그 때 초발심한 그 마음이나 다 무분별(無分別)입니다.
그 두 마음이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발심하는 마음과 마지막 성
불하는 마음, 그 두 마음 가운데 처음 발심을 잘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글에도 「發心究竟二不別如是二心先心難(발심구경이불별여시이심선심난). 마음을
처음 낸 것과 마지막을 성취한 것과 그 둘이 다르지 않은데 이 두 마음 가운데 먼
저 낸 첫 마음이 어려우니라.」라고 한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발심(發心)을 바로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잘 드는 것 그것이
수좌(首座)이고 중이지 다른 것은 중생과 똑같습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남녀도 서로 알고 다른 것 똑같은데 화두(話頭) 드는 그것이 다릅니다.
[原 文] :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解 義 보살님네들은 팔지(八地) 이상 십지(十地) . 등각(等覺)보살까지 부처님이
거의 다 되신 이런 분들도 부처님께 법을 청하실 때에는 역시「앞으로 말세가 돼서
법이 해이(解弛)해지면 계정혜(戒定慧)삼학(三學)이라든지 보시 . 지계 . 인욕 . 정
진 . 선정 . 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든지 보
살만행을 닦을 적에 자기자신을 위해서 대도(大道)를 수행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이고 단지 그날 그날 생활을 계획하기 위해 무량한 죄만 지어서 스
물 네 시간을 심지어는 꿈에 나가서까지도 무량한 죄만 짓는 이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미리 좀 법을 설해 주십시오.」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
다.
이런 경문(經文)을 가만히 읽다가 생각하면, 현재 우리 목전에 세계 인류가 이
렇게 도탄(塗炭)에 빠져서 참 그야말로 얼키고 설켜서 수백명이 물에 한꺼번에 빠
져 가지고 서로 저만 살겠다고 남을 아래로 짓눌러 밟고 위로 올라서려고 하다가
그게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죽어 가는 판입니다. 오늘도 그렇고 옛날도 그랬습니
다. 그 중에서 제일 혼란(混亂)한 게 대한민국일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가운데 없
는 사람 살아나갈 양식을 돌보지 않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잘 살겠다
고 긁어모아서 한시간에도 몇 십만원씩 소비하고 그저 주색잡기에 두드리고 놀고먹
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한
량없을 겁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이런 것을 보고도 눈물은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느
끼고 삽니다.
그렇지만 2천년 . 3천년 전에 보살님들은 오늘날 형편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불쌍한 중생들을 생각해서 부처님께 법을 미리 좀 설해 주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다. 마치 어린 귀한 자식이 몹쓸 중병에 걸려서 숨이 넘어
가려고 헐떡이고 신음하는 것을 보는 부모마음처럼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어서 애
태워하는 불보살님의 대자비를 경을 읽다 보면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듣고 절대적으로 믿고 그걸 그
대로 잘 알고 받들어 실천하고 지니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하
오나 만일 당래세 후 오백세 2천 5백년 뒤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듣고 신해수
지(信解受持)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그랬습니다.
[原 文] :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解 義 어째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곧 수보리처럼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은 사
람일 것이니 아상(我相)이라는 주관(主觀)의 관념이 없어진 사람이고 남이라는 객관
에 대한 관념, 곧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人相)이 없어질 것이고 다 허망한 존재이
니까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한다 하는 중생살이(衆生相)하는 생각도 없고, 설사 시
집가고 장가 간다하더라도 마누라니 남편이니 그런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
이 우리 남편이라는 게 인상(人相)이고 내가 마누라라는 생각이 아상(我相)이고, 살
림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
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살
이 차리는 그런 생각도 다 떨어져 버려서 내가 누구집 맏며느리인지 누구 맏아들인
지 그런 것을 다 없애 버리고 나면 앞뒤가 끊어진 인간이 됩니다.
또 수자상(壽者相)이 떨어져서 이 몸뚱이가 죽고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사는 것
이 아니니까, 이것이 사는 것이고, 죽을 수도 없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그렇게
죽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아상이 즉시비상(我相卽
是非相)이어서 아상이 곧 아상이 아니고, 맹꽁이를 가지고 아상(我相)으로 삼는 것
처럼 몸뚱이를 가지고있는 그 당시에도 확실한 실체가 아니라 번개가 번쩍하듯 찰
라의 도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 알아듣는 사람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다 안 끊어
지겠습니까.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금강경을 똑바로 알아듣는 사람이 무슨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상 . 수자상이 즉시 비상(非相)이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상을 다
떠나 버리고나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
佛) 이런 사람은 곧 부처님 경지에 들어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 사상(四相)
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면 불과(佛果)를 증득한 셈입니다. 수보리존자 모양으로 구공
(俱空)을 증득해서 아직 불과는 증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상(四相)은 다 떨어졌
으니까 구공 한 쪽으로는 부처가 다 된 셈이 아닙니까.
[原 文] :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
人 甚爲希有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분명히 자신 있게 들어선 것을 보시고 참 고마
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 그렇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금도 겁내거나 근심 걱정 다 없이
참 그렇겠다고 긍정을 한다면 그래서 청정한 신심을 내고 참다운 실상을 낸다면 마
땅히 알아라, 이 사람이 참 심히 희유한 사람이니라.』
이렇게 희유한 것을 맹구우목이요 침개상투라(盲龜遇木 針芥相投)라는 문자로
비유합니다. 아주 힘들다는 뜻입니다. 태평양 한 복판의 제일 험하고 깊은 곳에 두
눈이 다 먼 거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삼천년 만에 한 번씩 물위에 머리를 내 밀고
떠올라 구경은 못해도 맑은 공기를 한 번 크게 호흡을 하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요
행히 바다 가운데 거북이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널빤지에 머리를
걸쳐놓을 수 있어야 숨을 쉬게 됩니다. 목을 걸쳐놓고 둥둥 떠서 헤엄칠 것도 없이
한참을 있다가 물속 생각이 나서 다시 고개를 빼고 내려가면서도 참 어쩌다가 평생
에 이런 좋은 기회를 한 번 만났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삼천년 만에
또 올라왔는데, 구멍 뚫린 널빤지를 또 만날 수는 없을는지 우리네 참선하듯이 간
절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가 풍파에 시달려 태평양으로 갔다 대서
양으로 갔다 인도양으로 갔다 북대서양으로 갔다 하는 판이므로 눈먼 거북이로서는
날마다 그것만 찾아서 몇 십만년을 헤멘다 하더라도 못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
년 만에 한 번 나올 때 우연히 썩은 나무 구멍에 목이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우므로 이것을 어려운 것에 비유하여 <맹구우목>이라 합니다.
침개상투(針芥相投)는 하늘 가운데도 맨 꼭대기 하늘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바늘을 떨어 뜨려 이 땅 위에 지정된 곳에 겨자씨를 맞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늘
끝으로 겨자씨를 맞히기로 말하면 한 길위 한 미터 위에서도 어려울 것인데 높은
빌딩 위에서 맞히라 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떠서 맞혀보라 하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초음속(超音速) 비행기
나 인공위성(人工衛星)을 타고 몇 평생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하늘 꼭대기의 아득
한 먼 거리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조계사(曹溪寺) 마당에 작은 접시를 놓고 그 위에
겨자씨를 담아 가지고 맞히라 하면 그것은 아마 불가능의 불가능이 될 것입니다.
겨자씨(芥子)는 식물 중에서 가장 열매가 작으므로 흔히 제일 작은 것에 비유해서
씁니다.
이 세상에 아주 드문일,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 . 침
개상투(針芥相投)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불경(佛經)에 종종 많은데 우리가 사
람의 몸뚱이로 타고나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그럽니다. 사람 중에서도 대장부 남자
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또 남자로 태어나도 불법(佛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
다. 불교 이론을 배운다 하더라도 참다운 정법을 배운다는 것, 가령 금강경을 연구
한다고 하면 금강경을 문자로 생각으로만 배우지 말고 부처님 뜻에 따라서 아상(我
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 떨어진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사신(邪信)이 앞서 놓으면 천하없는 짓을 해도 성불할 수 없습니다. 참선이 아
니라 우참선을 해도 근본으로 꼬부라진 생각이 붙어 놓으면 안 됩니다. 신심이 청
정해서 한 생각도 없는 실상(實相)을 배워야 합니다. 그 이론을 똑똑히 알아 가지고
단지`이 무엇인가.'하나만 남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종교고 이런 것은 더 할말도 없
고 들을 말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단지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다 돼 버리는 것
으로 딱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니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불법을 만나도 모두 의식적(儀式
的)으로 불공 . 시달림이나 하고 식은 밥이나 벌어먹고 사는 그런 불법을 하기가 쉽
습니다. 또 「다라니를 한다. 염불을 한다.」해도 모두 무엇을 구하는 생각에서 하
기가 쉽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서 염불을 하던지 주문을 외우든지 참선을 하든
지 하는 정말 성불하는 방법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정법을 성취한 선지식(善
知識) 밑에서 배워서 연구를 하든지 염불 참선을 하면 가령 경을 안 봐도 눈먼 장
님이 눈 뜬 사람한테 끌려가는 것 한가지로 바른 길로 바로 갈 수 있으니까. 이게
참 어렵고 난득(難得)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
羅蜜
解 義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은 구공소식(俱空消息)을 말하고 지혜바라밀(智慧
波羅蜜)을 말하니 성불하는 데 근본법이 됩니다. 이 <智慧波羅蜜>이 육바라밀(六波
羅蜜) 가운데 제일 끝이 되지만 성불하는 데는 지혜를 제일 앞세워서 바로 들어가
는 성불의 첫째 조건이 되므로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래
가 제일바라밀을 말한 것은 이것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라
고 하셨는데,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떨어져 버려서 완전한 실상만 남아 있는 것, 이
렇게 해서 온전한 자기 정신만 자유자재하게 된 그때라야 자기가 자기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고 객관의 어디에도 의지한 데가 없는 때입니다.(自由) 영감한테도 의지하
지않고 아들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이 천지에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부처님한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실상을 깨달으면 곧 내가 여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것을 <제일바라밀>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바라밀을 설했다」라는 이 구공(俱空)이 아상 . 인상 . 중생
상 . 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완전히 몰락(沒落)되고 탈락(脫落)해 버린
참 순수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합니다. 자기 정신이 오로지 자기로 말미암아 저
하나만이 있다는 뜻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라 하는데, 그렇게 자유자재하여 딱 자
기 마음만 오똑할 뿐이니 이렇게 되면 그때는 만법(萬法)이 자유가 됩니다. 안팎으
로 마음대로 되는데 안이 먼저 자유자재해야 밖으로 자유자재합니다. 여기서 제일
바라밀을 설했다 함은 법공(法空)해서 그것까지도 공했다는 생각도 내 버리는 구공
소식(俱空消息)이어서 참말로 자유자재한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입니
다. 그런데 이 <지혜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내가 그 경지를 소개하기 위
해 할 수 없이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
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
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解 義 인욕이라 함도 참는 겁니다. 욕을 해도 참고 때려도 참고 현풍 곽씨네 깡
패 처녀 하나 데려다 발심시켜서 사람 만들려고 그 신랑이 지독하게 참듯이 참으라
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공자(孔子)님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만들어서
여자 내쫓는 법을 두셨는데, 그 신랑은 안될 뻔한 일을 해낸 것을 보면 암만해도
불경을 본 사람이었는가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전생에라도 불법을 닦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보살이 나와 가지고 그 여자 하나 제도하라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인욕이라고 하는데, 욕되는 걸 참을 뿐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때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
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
고, 억지로 참는 것도 참는 것이지만 생각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욕에 참 굉장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째서 그것이 인욕바라밀이 아
니라고 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저 옛날에 가리왕(歌利王)이란 폭군에게 사지
(四肢)와 몸뚱이를 찢겼지만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어서 성내거나 원한
이 없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가리라는 말은 포악(暴惡)이란 뜻인데 아주 포악한 성
질을 가진 임금입니다. 중국의 걸주(桀主) 같은 포악한 임금이 역사상에 더러 있습
니다. 이 포악한 가리왕이 깊은 산으로 사냥놀이를 갔다가 자기 궁녀들이 산 속에
서 수도하고 있는 인욕선인(忍辱仙人)과 얘기하는 것을 보자 노하여 칼로 사지(四
肢)와 온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인욕선인이 과거세의 부
처님의 전신(前身)이니 석존이 전세에 참는 공부를 하는 도인이었던 시절이었습니
다. 「그때 인욕선인 시절의 내가 온 몸을 찢기어 죽어 가면서도 그 가리왕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때 이미 나는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때 배까지 잘라서 창자를
끄집어낼 때 내가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있었다면 그 즉시에 원한이 일
어나고 성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때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
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우리가 당장
코를 벨 때, 참으려 해도 눈을 찡그려도 됩니다. 참을 수 없이 아플 때 안 찡그릴
수 있습니까. 팔이며 다리를 떼어놓을 때 그렇게까지야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은 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픈 것을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6.25사변 직후에 경남 고성(固城)에서 공산당 청년이 한 사람 붙잡혔는데 고성 경찰
서에서 잡아 놓고 고문을 합니다. 그때는 빨갱이라고 하면 고생하던 일을 생각해서
대번에 모두 씹어 먹으려하고 참 지독한 원수를 갚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참 똑똑하게 생겼고 얼굴도 잘 생긴 대학 졸업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때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억지로 참는 걸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청년이 길을
잘 못 들어서 그렇지, 길을 바로 들어섰더라면 큰 일을 할 수도 있는 청년인데 그
렇게 일찍 오사(誤死)를 한 그런 청년을 보고 몹시 애석해 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참는 것으로 참는 인욕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말씀에는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닌 경지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마음이 공해 있어서 아공 . 법공 . 구공(我空 法
空 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
고 불에 그슬러도 하나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을 못하고 불
도 행세를 못합니다. 그래서 육조대사께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
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전부 네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다.」라고 하신 것
입니다. 그림자라는 것보다도 있는 채로 내 마음이고 전부 허공입니다. 그러니까 약
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어서 모든 상이 상 아닌 겁니다. 이런 무심으로 참는 게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보니 저 과거에 오백
생 동안을 계속해서 인욕선인 노릇을 했는데 그때에도 내가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오백 생을 계속해서 한 번도 아상을 일으키지 않고 무슨 잡
념이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느니라.』하십니다.
말세에는 괜히 대중 간섭하고 살림살이 간섭하고 남 시비하고 이래가지고 공부
룰 해서 좀 알아 놓고도 그만 뒷수습을 못합니다. 그래서 아나마나하게 배워 놓은
격인데, 이것 참으로 애타는 일입니다.
[原 文] :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不應住
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
이니라.』(須菩提菩薩應離一切相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하셨는데 일체 생각이 떠
나 버렸으면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발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호통을
하고 그 자리는 한 생각 까딲만 해도 안 되고 거기다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
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다는 말이 어디 붙을 수 있느냐고 큰소리하는 사
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은 한쪽 눈만 가지고 한쪽만 공부한 사람입니다.
적멸(寂滅)에 들어앉아서 적멸을 체득했다는 생각도 없는 그 지경에서 비로소 아뇩
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해야 하겠다고 발심해서 불과(佛果)가 나타나도록 까지 어떻
게 되는 것인지 경전도 더 봐야 할 것이고 용맹정진(勇猛精進)도 해야 합니다. 그런
걸 모르고 공부하면 그만 낭패 당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생기심이 주장입니다. 응무
소주하되 이생기심하는 겁니다. 거기가서 응무소주하여 거기서 온갖 서원을 다 세
우는 겁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그것이 곧 이생기심입니다. 또 번뇌
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는 뜻은 아직 불과가 증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안 하면 또 아무 생각 없는 적멸 속에 천만 겁을
앉아 있어 봐야 불과(佛果)를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고,
그야말로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생길 수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절대 자유로
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똑똑히 마땅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
(不應住色生心) 물질에 주하지 말고 생심을 해라. 보살행 육바라밀을 행하라.』하셨
는데, 이것이 이생기심하고 똑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색에 주해서 마음을
내지 말라.」이렇게 새기면 마음을 내지 말라는 데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
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생심하라. 저건 산이다 물이다 보는데 무슨 허물이 있느
냐.」 그게 생심이고, 또 보시도 하고 인욕 . 지계 . 정진 하는 게 그게 생심입니다.
그러니까 색에도 주하지 말고 부주성향미촉법심(不住聲香味觸法心) 내지 불법까지
라도 열반까지에라도 어디에고 마음을 두지 말고 <이생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주성향미촉법의 법(法)에는 보리 . 열반까지 부처님 법 . 중생의 세속
법 할 것 없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데에도 주하지 말고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정진하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경문 중간에다가 토를 하나 더 달아서
「불응주색하야 생심하고」(不應住色하야 生心하고) 「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생심
하라」(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하라) 이렇게 새깁니다. 무소주심을 생하라(應生
無所住心), 처음부터 끝까지 생하라는 것만 주장한 겁니다. 지금 나한들을 대승으로
끌고 올라가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돼야 할 것입니다. 현상을 떠나가지고 자꾸 고요
한 것만 좋아해서 푹 잠들고 있는 모양으로 중생제도고 뭐고 천하가 다 망하거나
말거나 보살행 안 한다는 겁니다. 「그놈이 망하거나 말거나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
느냐.」 그래가지고는 성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새기는 게
좀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또 전혀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새기나 저렇게 새기나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原 文] :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
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解 義 만일 마음이 어디에 머물던지 생사번뇌의 망상심을 내고 앉아 있거나 그
마음이 무심한데 머물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심(有心)으로 몸뚱이를 내라고 하고 범
부와 같이 현상에 머물거나, 생사에 머물다가 열반에 머물다가 하거나, 우리 본 마
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기 있을 때나 또 그전 몸뚱이가 간섭해서 아프다
고 생각하던 중생 때나, 열반을 아는거나 아픈줄 아는거나 아는 생명의 본체는 조
금도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본래의 그대로 입니다. 이래도 알고 저래도 알 따름
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주하던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열반이 아무리 좋다고 하
더라도 열반이 좋다는 마음이 있어서 낙착이 되면 거기는 벌써 온전한 열반이 아닙
니다.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그 가운데서 다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만일 마음에 머무는 게 있으면 유주(有住)하면 즉위비주니라. 이 비주라
는 것은 「그릇된 주다」이렇게 새길 수도 있고 「주가 아니다」 이렇게 새길 수도 있
는데 「주가 아니다.」로 새길 때에는 주(住)자 앞에 바를 정(正)자가 숨어 있는 것
으로 「정주(正住)가 아니다」 이렇게 새겨야 합니다(若心有住 卽爲非住). 그러므로 부
처님께서 「보살이 심불응주색하고 보시하라, 마음에 머무는 것 없이 보시하라.」고
하셨습니다(是故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항상 보살을 보살심(菩薩心)이라 하여 마음
심(心)자를 위로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붙이면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이런고로 불설하시되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마음을 마땅히
물질에 주하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보시하라고 했느니라. 금을 주거나 밥을 주거나
옷을 주거나 옷이나 밥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그런 뜻
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마땅히 이와같이 보
시할 것이니라』(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무심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익이 되고 나중에는 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할 때가 있
게 되고 그러면 그 중생도 또 나를 보고 남과 같이 무심히 받을 수가 있지, 나한테
밥그릇이나 얻어먹었다고 나를 보면 그만 황공무지해서 고개를 못들고 뭣 좀 줬다
고 그렇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아들 딸 낳아서 자
꾸 무주상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주의 대통령이 되지 조그만 나라의 대
통령쯤 해서 뭘합니까.
『여래가 일체 모든 상이 곧 이것이 상이 아니라고 설명했고 또한 일체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내가 이제까지 설명하지 않았느냐.』(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 더구나 말세중생들을 위해서 말을 지어 글을 만들어 놓으려
니까 고구정녕(苦口 )으로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말씀하시는 것인데 또 원체
어려운 말씀이고 들었다고 해도 돌아서면 중생들은 잊어버리니까 이런 까닭에 이렇
게 설명을 하십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於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須菩
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解 義 『수보리야,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곧 진실한 말을 하는 이 진리대로만
말하는 이고, 실어자(實語者), 곧 사실대로 말하는 이며, 여어자(如於者), 곧 조금도
변동이 없이 말하는 이니』 한 번 생각하고 말하면 마음을 변경하지 않아서 국가의
법률처럼 꼭 그대로 집행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진실의 실재를 법 그
대로 된 걸 객관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지 중생이 부처님한테 잘못 했다고 해서 벌
을 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잘못해서 제가 제 벌을 받는
거지 부처님이 그 사람을 나쁘게 봐서 벌 줄 마음으로 곱사가 되게 하고 문둥이 되
도록 하는 그런 심술을 하나라도 가지신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인욕선인(忍辱仙人)
으로 도를 한참 닦을 때나 처음 불교를 닦을 때에도 도할에양무심(塗割兩無心)으로
뼈를 부수고 사지를 찢을 때 가리왕(歌利王)에게나 몸을 원상복구시켜 준 제석천(帝
釋天)한테나 두 군데 다 밉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벌
써 아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부처님이 되시고 나서야 하물며 분별심 . 생사심(生
死心) . 생멸심(生滅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꼭 그와 같은 무심을 배워야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진리 그대로 변동이 없는 말씀만 합니다.
『불광어자(不狂語者), 곧 미치광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불이어자(不異語
者), 곧 이렇다고 하다가 저렇다고 하면서 자꾸 바꿔 가며 말하는 이가 아니니라.』
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과 소승을 말이 다르게 하시지마는 그런데는 다를 수 있
는 이유 . 조리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지 그 근본 마음자리의 실재는 항상 불변입
니다.
『수보리야, 여래 소득법(所得法), 곧 여래께서 얻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
이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어서 참된 진리란 법도 아니고, 그리고 허망한
법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없으며 허망법(虛妄法)이 있을 수도 없고 진실법(眞實
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이니까 하나도 아니고 절대이니까 절대
도 아니니 그러면 무엇이냐.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게 무슨 허물이 있느냐』 그것
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解 義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어떤 것에 머물러 가지고 보시를 행하게
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못 보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장님 놀음과 같으니라. 만일 보살이 마음이 일체 법에 주하지 않고 불
법에도 주하지 않고 내 자신에게도 주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데서 보시를 하면,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사람이 두 눈이 밝고 건전한데 또 가을 하늘 처
럼 맑은 태양이 잘 비치는 가운데 모든 물체를 환히 볼 수 있어서 붉으면 붉은 대
로 검으면 검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똑 바로 제대로 아는
것 같으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보시를 하면 똑 떨어진 보시가 됩니다. 그야말로
평등하고 청정해서 깨끗한 사람, 「참인간」하나 생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
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解 義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곧 이 다음 세상에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기도 하고 외우기까지 했다면 여래께서 부처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다 아시기도 하고 다 보시기도 하느니라.』
하십니다. 요새 여기 모이는 여러분은 선남자 선여인이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
루한 잔소리 깨나 하는데 또 이렇게 어려운 얘기만 하는데 이렇게 앉아 배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십리길 동행하는 것도 오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
룻밤 함께 자는 것도 여럿이 함께 자는 것도 과거세에 천생 만생의 인연이 없으면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당히 오랜 시일을 두고 이렇게
부처님 법문 가운데 이 존중한 금강경 살림을 한 법당에서 한다는 것은 무한 겁래
로 불법에 같은 인연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세에 또 불법을 만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이 불법을 만나서 이 금
강경의 한량 없는 공덕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說義]
신해수지(信解受持)
불교는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네 가지에 의지해서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첫째, 믿어야 하
고 둘째, 그것을 이해하고 깨쳐야 합니다. 금강경 산림법회(金剛經山林法會)를 한다는데, 실
달태자(悉達太子)님이 깨달으셨다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있다는데, 어떤 것인지 나
도 좀 들어야겠다고 해서 들어서 이해하고 토론(討論)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이것이 해(解)입
니다. 이유 없는 믿음은 그건 미신(迷信)이고 사신(邪信)이 됩니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어디
까지나 내 말만 들으라고 하는 식이 미신입니다. 기독교의 독신자(篤信者)는 감기가 들어도
약을 안 먹습니다. 쌍화탕을 먹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
만큼 시련(試鍊)을 주고 고생을 주신 것인데 내가 약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이고 무조건적(無條件
的)인 믿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신(信)을 앞세우고 해(解)가 뒤로 갑니다. 가령 불교에 처음 들어와서 여시(如
是)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던 분들도 계셨을 것인데, 이번 금강경 산림(山林)에 나와서 자
꾸 듣다 보면 캄캄한 밤중 같던 여시(如是)의 뜻이 요새는 조금 알듯말듯할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믿음 뒤에 해가 따라가는 것이므로 무조건 맹목적 믿음의 미신과는 다릅니
다. 그런데 또 뭣을 좀 따져서 알았다고 해서 예컨대 이번의 금강경을 조금 들어서 「불교
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해서 신심(信心)이 없어지면 「불교가 별
거 아니구나, 내가 부처인데 뭐 절에 갈 것도 없고, 내가 마음만 착하게 쓰면 안되겠느냐.」
하고 맙니다. 이래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그 이상은 들어가지 못해서 수도가 되지
도 않고 대도(大道)를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다 되지도 않았으면서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안
된 것 같기도 하여, 남이 부처가 되려 해도 틀렸고 안 되려 해도 틀렸고 까딱하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물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
거리고 하여 까딱 안 하는데 걸려 가지고 건방져서 그야말로 입으로만 하는 구두선(口頭禪)
입니다.
실상 비슷한 이런 원리를 좀 알았더라도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철저히 알기 위해서 또 다
른 교리를 들어야 하고 그래서 삼장(三藏)까지라도 다 통해야 합니다. 칠식(七識) . 팔식(八
識)에 잠재해 있는 깊은 허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견성(見性)을 하고도 계정혜(戒定慧) 삼
학을 두루 익히고 오십이위(五十二位)의 보살행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신(信)이 앞잡이로 끌고 나가고 다시 그에 대한 이유를 자꾸 연구
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 들어가고 그렇게 돼야 철저한 수행을 할 뜻이
더해져서 잘 받들어 지니게 되므로 이렇게 하여 잘 수지(受持)하게 되면 마침내 실상(實相)
을 체득(體得)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완전히 부처가 됩니다. 이것이 신해수지(信解受持)
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무나 몇 천명이라도 다 부처님을 만났으니까 신(信)할 수 있고 깨달아
질 수도 있고 했지만 말세(末世)의 혼란할 때에는 일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복잡하
고 혼란해서 머리 속에 번뇌 망상이 왔다갔다하고 들끓어대는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신해수지하면 참 그야말로 이 세상에 다시없는 제일 가는 희유한 일이라고 수보리존
자께서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구공(俱空)을 실제로 체득하신 대아라한(大阿羅漢)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의 아주 고구정
녕(苦口정녕)하신 참 대자대비하신 이 지도한 생각이라도 그르칠까 잘못 들었을까 해서 이
렇게 참 애를 써서 일러주신 것을 제가 사십년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법을 들었지마는 이렇
게까지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없이 일러주시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아라한과(大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이니까 부처님은 아니지마는 성인입니다. 이런 분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처님이 참으로 너무나 감사하시고 대자대비하시게 남김 없이 조금
도 아낌 없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도해 주실 수가 있는가 해서 자연히 눈물이 났을 것입니
다. 이제 이런걸 우리가 한편으로 보면 이것이 역시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겠지마
는 그 수보리존자 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호강하다가 죽
게 되면 죽는 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으로 허망한 세상을 부득이해서 그러나 저러나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할 수 없이 살던 우리가 이렇게 생사를 해탈하고 또한 생사에 자유로
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지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자기
도 한쪽으로 감사를 느끼고 동시에 만약에 부처님같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그저 멋도 모르고 전생(前生)이 있는지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앞으
로 영원한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고 그 참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이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제 죄를 제가 지어서 끝없는 고생을 할 뻔한 이 신세가 참 다
행히도 이렇게 마지막 높은 도, 최후의 길을 걸어서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된 자기자신을 생
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교를 듣기 전에는 머리를 들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 이렇게
생사를 초월하고 또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영원불멸한 자기의 생명을 건지게 된 것
을 생각해 보니 과거를 회고(回顧)할 때 자연히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성불도 신해수지의 인과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뜰을 거닐고 계실 때입니다.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매나 독수리한테 쫓겨 가지고 대중 앞에 탁 떨어졌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떨고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사람한테 살려 달라고 오기는 왔지마는 사람 역시 어쩔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큰 짐승한테 쫓겨서 죽게 되면 꼭 사람 집에 들어
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꿩 같은 것 한 마리 쫓겨 들어 왔다고 재수 좋다고 볶아 먹어 버
립니다. 살려 달라고 들어오는 짐승을 잠아 먹으니 보통 사람은 인과(因果)를 모르니까 그렇
지 반드시 좋지 않은 재앙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사리불존자 뒤에다 갖다 놔 두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은 나한과(羅漢果)도 증득한 성인이니 안심할 것인데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떱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내 뒤에 갖다 놓아 봐라.'하셔서 부처님 뒤에 갖다
놓았더니 갖다 놓은지 얼마 안 돼서 꼬부리고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성과(聖果)를 증득한 성인이시므로 거리가 얼마 아닐 건데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
이 이상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한을 증득하기 전의 과거세(過去世)에 그 살생하던 악의(惡意), 곧 남의 생명을 죽이기
도 하고 해롭게도 하고 살해하던 살해심(殺害心)이 덜 떨어져서 미세(微細)한 습기(濕氣)가
남아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밑에 가서는 안심을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독한
그림자가 비치고 나쁜 냄새가 나고 하는 것을 짐승들이 촉감(觸感)으로 압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살인이라도 할 독한 마음을 품으면 대번에 오장(五臟)이 푹푹 썩는 냄새가 납니다. 입
에서도 나고 정신으로 풍깁니다. 사리불존자가 「언제부터 불법을 만나서 출가하여 중이 됐
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지금 이 생까지 오백생을 살생한 일이 없느니라.」하십니다. 오
백생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쭉 연속해서 살생해 본 일이 없고 풀 한 포기도 밟아 본 일이 없
는 수행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백생전에 살해하던 습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달이 몇 번씩 우리가 신도단체에서 방생불사(放生佛事)를 합니다. 죽게
된 것을 살려 주는 게 복가운데 가장제일 큰복이 됩니다. 재산 . 지구덩어리를 다 줘도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 주는 것만 못합니다. 미꾸라지가 죽으나 사람이 죽으나 고기나 개미가
죽으나 생명이 죽기 싫어하는 생각은 똑 같습니다. 또 부처님께 「죽기 싫어하는 이 비둘기
가 언제나 비둘기를 면하고 사람이 되어서 또 이 불법을 만나서 대법(大法)을 성취하겠습니
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로 십대제자들에게 물어 보라 하십니다. 그래서 신
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가만히 천안(天
眼)으로 보니까 언제까지나 자꾸 비둘기로만 계속합니다. 비둘기의 몸 바꾸기가 좀처럼 어
렵게 지독스런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겁(一劫)만 해도 굉장한 세월인데 목련존자만 해도
여러 천만겁(千萬劫)의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는 신통입니다. 몇 천만겁 동안 어느 생엔 뭐
가 되고 어느 생엔 뭐가 되고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내생에도 비둘기로 태어나서 어디서
콩 먹고 저희끼리 어디가서 쌍쌍이 되어 사는 것까지 모든 현실이 하나하나 다 보이고 그러
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업이 한 번 막히
면 어려운데 그 가운데도 남자가 여자되기 어렵고 여자가 남자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인제 몇 겁을 지난 뒤에 다른 뭐가 되어 가
지고 언제 또 사람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하지만 불법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 뒤에 다시 삼
악도(三惡道)를 왔다갔다하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사람이 되어가지고 불법을 만나서 사리불
네가 후세에 성불하면 그때는 부처님의 호(號)가 무엇이고 그렇듯이 비둘기도 아득한 내세
에 성불해 가지고서 필경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필경 성불을 다 하는데 그것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만큼 이 비둘기도 지금 오늘 우
리에게 뛰어와서 숨겨주고 감춰 달라고 하는 그것도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필 우리가 나오자 이 시간에 독수리한테 쫓겨 가지고 여기와서 내 그늘에서 잠을 자는 게
이런 게 다 앞으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중이 되어서 수도를 철저히 해서 성불하는데 기초적
인 인연을 밑천으로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법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한 인과(因果)도 필경 성불(成佛)할 인연이 됩니다.
초견성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이광수 선생이 법화경(法華經)을 번역한다고 해서 어떤 스님이 크게 걱정하며 나에게 가
보라고 하여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광수 선생이 불교를 안 믿고 예배당에 다닐
시절인데, 그 분이 법화경을 보고 글이 좋고 내용이 매우 이상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소설적
으로 불교를 보았을 뿐, 경문 그대로를 다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적입니
다. 그러면서 그이가 세계 종교서적 가운데 완전한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법화경이라 판
단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존께서 사십구년 동안 설명하신 것을 총합해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완비해 놓은 부사의한 경인데 춘원(春園)으로서는 소설적으로 들으면 구수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청년이 예술적으로만 보는 그런 소견으로 법화경을 번역해
놓으면 그 사람의 솜씨나 권위 때문에 좀처럼 다른 사람이 손을 대 봐야 잘 안될 터인데 이
한국 불교는 그만 망치고 말 것이니 내가 춘원을 찾아가서 설교를 해 가지고 불교 신도가
되도록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와 춘원선생은 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서로 안면(顔面)
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춘원이 자하문(紫霞門) 밖에 집을 짓고 있을 때입니다. 그 옆에 소림사(少林寺)
에 춘원선생이 돈을 내 가지고 나를 있게 하면서 일 주일이고 한 달이고 한 번 토의 해 보
자는 것입니다. 아침만 먹고 내려오면 깔 것 하나씩 들고 산이나 개울가에 앉아서 얘기하다
가 둘이서 점심때가 되면 올라가서 점심 먹고 또 개울이나 산이나 아무데나 가마니 하나 깔
고 누워서 얘기하고 앉아서 얘기하고 이렇게 해서 나흘 동안까지는 자기는 자기 얘기하고
나는 내 얘기하고 공산주의하고 자본주의하고 유엔총회 하듯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나흘이
되니 내가 한 쪽으로 슬그머니 분한 마음도 일어나고 또 한 쪽으로 내 부족을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닷새가 되는 날까지 얘기를 하니까 춘원선생 얘기는 다 끝이 났습니다. 그런
뒤에 내가 이렇게 저렇게 주장을 하면 말이 안된다고 질문을 하고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해
서 하루 종일 얘기하고 밤새도록 얘기해서 엿새 이레까지 됐습니다.
그 때 마침 내가 법화경 육신통(六神通)을 말했는데 사람이 어떻게 육신통을 할 수가 있
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 가운데 이상한 것 불교에서 말한 일체 부사의한 얘기는 낱
낱이 묻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고 불경을 보는 태도가 전에 보던 것과 지금과는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
술시(藝術視)했고 소설시(小說視)했으며 신화시(神話視)했는데, 이제는 글자 한 자만 빼도 안
되는 내용이며 그것이 다 온전한 참말이고 진실한 과학의 소리 . 철학의 소리며 완전한 종
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라도 잘못 됐다고 생각되는게 있으면 말하라.」하니까 「이
제는 없다. 사실로 다 인정을 하겠다.」 이렇게 됐습니다.
심지어 조선 독립문제까지 불교적으로 나오고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가지고 자기가
주장했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사람의 근성(根性)을 가르쳐서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해야지
오백년 동안 나쁜 습성(習性)이 있어서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니 일본이 차지 안했다면 소
련이 차지했든지 중국이 차지했든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도
록 복을 지어야 나라 운수가 왕성해져서 백전백승(百戰百勝)하게 됩니다. 이런 인과의 원리
를 쭉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과연 그렇겠다고 민족의 잘못된 관념을 먼저 개조해야 한다
는 데 합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법화경을 펴놓고 품품(品品)마다 평소에도 한 번만 보면 안 잊어버리는 기억
력(記憶力)인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물어보면 설명을 하고 해서 법화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의심없이 경문(經文) 그대로 다 신해(信解)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앉아서 둘이 얘기하는데 몇 천만년이 지나갔다는 그런 소리 저런 소리 시공(時空)이 모두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된다는 얘기, 불교의 인과설(因果說) 십계 이백계를 꼭 지켜야 하는
까닭을 모두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법화경을 이렇게만 읽어
가지고 번역하지 마시오. 아직도 법화경 읽어 볼 때마다 모르는 게 또 나타날 겁니다.」 그
랬습니다. 지금 우리가「제일바라밀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닌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 한다」
는 내용을 앞에서 백 번도 더 했고 오늘도 종일 내가 그 얘기를 했지만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각경(圓覺經) . 능엄경을 읽어 보라 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은 상하(上下) 두 권으로 금강경의 몇 배나 될 겁니다. 그래서 원각경을 읽
어보고 법화경을 읽어 보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한 3년 후에 만났는데 원각경을 읽어보고
또 새로 법화경을 읽어보니 법화경에 대해서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꾸 읽어볼수록 모
르는 게 더 많아지고 전에 알았던 게 뭐라고 어떻게 알았었는지, 전에 알았던 생각도 다 잊
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 불교의 독신자(篤信者)가 된 셈입니다. 한국 불
교인으로 춘원 이 한 분이 청년 남녀에게 불교 포교한 것이 대처승(帶妻僧) 7천명이 한 것보
다 몇 10배나 더 됐습니다. 내가 그때 해방 전에도 그런 소리를 대처승에게 늘 했습니다. 그
뒤에 자기가 참선(參禪)도 하고 진실한 불자가 되고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춘원의 경우처럼 이 구공소식(俱空消息) .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도 알 듯 하면서 자세
히 보면 아직 덜 알았고 또 이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아는 것으로 알 수
도 없습니다. 또 설사 깨달았다 그래서 초견성(初見性)쯤 했더라도 제일바라밀을 다 안 것은
아니며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임행을 해야합니다.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야말로 절대(絶對)도 아니며 말로 할 수도 없고 생각을 어떻게 붙일 수 없는 실재(實在)입니
다. 그런걸 어떻게 바라밀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벌써 바라밀이 아니고 바
라밀이란 생각이 있을 뿐 그것이 바라밀은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생각하다보면 또
아무 것도 아닌 걸로만 있는 것인가 보다 하는 데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밀이 무슨 바라밀이냐. 바라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하여 없다
는 생각에 한편으로 치우쳐서 응무소주(應無所住)에만 집착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도리
는 빠뜨리게 됩니다. 아무데도 주한 데 없는 것, 어떤 생각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므로 제일바라밀과 그것이 제일바라밀이 아닌 것과 두 개가 뭉친 것을 뜻하여
「제일바라밀을 설한 게 그게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것이 제일바라밀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고 그런 뜻입니다. 중생들은 절대자성(絶對自性)
자리에서 듣지 않고 들으려 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분별심(分別心)으로 들으니까 허물이
생깁니다. `마음자리는 절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 말
로만 더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보면 보통
문장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말로만 하는 사람은 깨치지는 못했지만 알기는 다 알았다고 그
럽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비판해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 이
것은 한 번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 내 버
린 없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말이고 보니 있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없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러는 거지 이것이 어째 실재의
면목(實在面目)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근사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 내 버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어야 합니다. 있는 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言語道斷)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 곧 이것이 따져 볼 것 없이(心行處滅) 그렇게 듣는게 실체(實體)인데 그게
무어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다. 그게 근본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게 또 바
라밀이라고 할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러한 「바라밀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바라밀
이라」 해도 허물이 없고 「바라밀이 아니다」 해도 더 철저한 실재(實在)를 얘기하는 것도 아
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이 아니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하고 바라밀이라고 해도 괜찮고 바
라밀이 아니라고 해도 허물이 없고 그런 바라밀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지금 수보리
너하고 부처님 나하고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거를
자꾸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을 자꾸 얘기하
려고 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소승불교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되어서 적멸(寂滅)만 자꾸 지키고 그것을 애착하고 인정
도 모르고 없는 것만 애착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한 번은 진묵(震默)대사가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게 됐는데 얼굴이 참 예쁘게 생긴 사미
동자(沙彌童子)가 나타났습니다. 애기 중이 나타나서 공손히 인사를 해서 「물이 깊어서 못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아느냐.」 물었더니 「소승만 따라 오십시오. 제가 이 물을 잘 압
니다.」「그래 그러면 앞에 건너가 봐라.」하고 따라 갑니다. 앞에 가는 사미승을 보니 물이 무
름 밖에 안 차서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진묵대사도 안심하고 따라가는 데 갑자기 물이 목까
지 쑥 빠져 버렸습니다. 그게 나한(羅漢)이 나와서 그런 것인데 진묵대사가 대승 불교의 진
리를 깨쳐서 반야바라밀을 알고 있지마는 신통(神通)은 아직 나한만 못합니다. 그래서 대승
보살 한 번 골려 먹느라고 나한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묵대사 같은 이는 나한
님을 모셔 놓은 법당에 가서 주장자를 가지고 머리를 똑똑 두들기면서 「아무개는 자식이 없
다는데 이거 마지밥(佛供) 얻어먹고 자식 하나 점지해 줘라.」하는 그런 식입니다. 신통이 없
고 이래도 법이 높으니까 그래도 나한들이 꼼짝 못하고 나한들은 큰 스님 명령이니 할 수
없다고 또 아들 하나 점지 해 주고 그럽니다.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과 소승사상(小乘思
想)의 비교하는 예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제일 바라밀이 즉비 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卽
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이라는 말이 내내 「실상자 즉시비상 시명실상(實相者 卽是
非相 是名實相)」과 똑 같은 논법(論法)이고 내용도 같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막행막식은 바라밀이 아니다
이런걸 모르는 무식한 선지식은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라고 막 놀아 납니다.
그래 가지고 중생까지 버려 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리고 그렇게 떠들던 분들이 해
방이 돼서 이제 불교정화(佛敎淨化)가 됐지만 그렇게 우리 비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수십명 있습니다. 무식하기는 해도 발언이 세고 주먹질 잘 하고 그렇게 불량하게 사는데, 소
견이 비뚤어져서 불법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무식하니까 마구잡이로 그런
사람들은 그런 패대로 젊은 수좌들이 해제(解制)하여 다니다가 만나면 마구잡이로 가르칩니
다. 우리는 사월보름과 시월보름이 되면 모두 금족(禁足)을 하고 석달동안 전부 용맹전진합
니다. 그걸 결제(結制)한다고 그러는데 구십일이 지나면 해제를 해서 동 . 서 . 남 . 븍 모두
돌아다니다 사월초승께쯤 되면 그 절에 전부 다 모입니다. 공부하는 장소에 모이면 제가끔
공부하고 싶은 데로 가고 늘 이러는데, 그 날 처음 오는 날 식을 거행하고 금강경을 펴든지,
그걸 내 놓고라도 깨친 소식을 한 번 보여 주고 알아듣든지 말든지 그리고 또 깨치려면 어
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전부 가르쳐서 모두 정신 가다듬도록 만들어서 석달동안 용맹정진
하도록 일러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큰방으로 들어가서 술 먹으라는 겁니다.
술을 안 먹는 수좌가 있으면 저 놈 막걸리도 먹을 줄 모르는 자식이 무얼 하려고 그런다고
이러면서 막 쫓아내는 겁니다. 계를 지킨다고 틀어박혀서 소승불교(小乘佛敎)나 하고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냐고 윽박지릅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술이나 먹고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것도 그런 식으로 또 깨달은 것이 조금 있어서
남 못하는 다른 소리도 할 줄 알고 이래 가지고 모두 그 정신이 옳은가 싶어서 아리송하게
만듭니다. 경전도 그만 똥걸레처럼 만들어서 이게 다 무엇이냐고 하여 확실히 그렇게 알도
록 만듭니다. 이런 소중한 금강경 같은 것도 그렇게 만들고 성불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일승법(一乘法)을 뭣좀 아는 것 같
다 해도 정법을 비방한 그 과보는 이제 세세생생 지옥고(地獄苦)를 몇 천만겁을 받는 법이
고, 어쩌다가 아수라가 되어 가지고 지옥보다는 조금 났지마는 여러 백천만겁을 비둘기보를
면하지 못하듯이 축생계를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면 모두 문둥이 만
신창이 생긴다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대처승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사오십년 동안에 몇 번씩 공적으로 사적으로 웃으면서도 싸
우고, 찡그리면서도 싸우고 한정 없이 싸웠습니다. 이래 가지고 수좌들이 그만 마구잡이로
행동했음이 불애보리요(行盜行 不碍菩提)요,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게 보리에 무슨 거리 낄
게 있으며,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술먹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세계에 무슨 장
애가 될 게 있느냐. 「반야바라밀이 그게 뭔데 그게 어디가 걸리고 막히느냐.」 이래가지고 막
행막식(莫行莫食)을 했는데 듣고 보면 그 말이 어려운 법담(法談)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정
법에 턱도 안 닿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이 그럴듯하고 어렵게 하는 수도 보여 유혹이 되
고 대중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파 . 마늘 . 먹지마라. 중이면 이렇게 해야한다.」하면 몰아
세우고 어디가서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이 됐습니다. 술 생기면 술 먹고 여자 생기면 계집
질하는 것 이것 떼기보다도 파 마늘 안먹기라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이제
마음이 약해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발심한 사람이면 항복기심
(降伏其心)을 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를 닦으라
는 것입니다. 마음 한 번 항복 받기라는 게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게 그렇게 어렵구나
하는 이론을 자세히 치밀하게 알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
가리왕은 본래 폭군인데 따뜻한 어느 봄날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큰산으로 사냥을 가게
됐습니다. 이날은 특별히 궁녀들도 따라 갔는데 산에서 놀다가 가리왕은 몸이 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임금이 잠이 들면 궁녀들이 옆에 있다가 행여나 개미라도 기어올라갈까
염려되어 모두 시위를 하고 있는 법인데, 이 날은 대신과 장수들도 많고 그러니 궁녀들 수
십명이 산 구경하자고 임금 곁을 떠났습니다. 궁 안에만 갇혀 있다가 모처럼 산에 오라오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돼지 막처럼 지어 놓은 토굴(土窟)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어 그 안
을 들여다 보니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을 보니까 인간세상 사람은 아니고 백옥 같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道士)였습니다. 세상에서 욕심만 꽉 차고 심술이 꽉 차서 속된
욕심이 줄줄 흐르는 인간만 대하다가 욕심이 뚝 떨어진 신선(神仙)을 보니 아무 것도 모르
는 범부 눈이라도 존경심(尊敬心)이 생겨서 「선생님,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하고 물었습
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다.」 「그러면 아무 것도 하는 거 없이 무엇 때문에 여기 앉
아 계십니까.」이렇게 문답을 하는데 그만 시간이 간 줄 모르고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궁녀들 수십명이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
그래졌습니다. 옛날에 나쁜 제왕(帝王)들이 시기 질투 많고 참 고약했습니다. 자존심만 많아
가지고 날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는 눈치가 있는 여자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목숨이 달아나
고 그렇게 지독합니다. 그런데 가리왕은 궁녀가 없어졌으니 그만 골이 잔뜩 나서, 여기 저기
찾다가 궁녀가 있는 곳으로 단 걸음에 달려와서 보니 조그만 초막 안에 거기 다 함께 들어
가 있는데 극도의 시기심이 일어나 가지고 다짜고짜로 막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너희들 나
아닌 어떤 놈하고 얘기하느냐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이 그럴 듯 하게 잘 생긴 도인
남자하고 저희끼리만 앉아서 갖은 얘기 다 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니까 당장 그 놈을 칼을
빼서 전부 목을 베어야 하겠지마는 거기까지는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옷은 다 제대로 입고
있는 걸 보고는 훑어보기만 합니다.
궁녀들은 잠깐 한 십분 동안만 갔다 온다는 것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만 임금이 잠이 깨도록 있었으니 이젠 죽었다 싶어서 뜰아래 꿇어 엎드려서 대죄(待罪)를
합니다. 가리왕은 그 신선에게 「네가 이런 산중에서 혼자서 뭘하느냐.」 「아무 것도 아니
합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한다면 여기 무슨 재미로 있느냐.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뭐
하나 책임을 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산중에 와서 도를 닦든지 뭐 하나 해야 할 것이 아니
냐.」하며 이렇게 꼬집어 묻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아무 것도 안
하느냐.」 이제 칼이 곧 빠지려고 하는 판인데 「제가 참는 공부를 좀 하고 있습니다.」 마
지못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네가 참는 공부를 했으면 잘 참느냐. 참는 거 몇 해나
공부했느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느 정도까지 참느냐.」 「참는 데
까지 참습니다.」 극도로 노해 있는 국왕의 무서운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냉정한 태도에 왕
은 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네 신체를 도려 내도록 까지 참겠느냐.」 「 글
쎄요, 참는 데까지 참지요.」 그러자 왕은 칼을 쑥 빼어 가지고 한쪽 눈을 푹 도려내 버렸습
니다. 피가 툭 터졌는데도 신선은 가만히 남은 눈을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놈의
자식 항복도 안하고 이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또 한 눈을 마저 빼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하고 찡그리지 않고 등신불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가리왕은 참는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말대접을 해서라고 항복을 해야 할 테인데 이 놈이 임금을 이기려
고 한다고 더 화가 나서는 「네가 참는 데까지 잘 참는다고 했으니 참아 봐라.」하고는 그
만 양쪽 귀를 싹싹 오려 버립니다. 아,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양 볼을
다 베어서 서른 두 개 이빨이 다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도 신선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요런
죽일 놈 보라고 두 팔을 짤라내고 두 다리를 짤라 내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 동체
만 남았는데 그리고는 또 두 젖을 도려내고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리천( 利天)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은 둘째 하늘의 천주(天主)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가리왕의 소행이 하도 악해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곧 내려와 가지고는 태풍을
일으켰습니다. 뇌성벽력을 하고 바윗돌이 갔다왔다 산이 막 무너지는 판입니다. 그래 훍이
수 백길씩 올라갔다 내려치고 하니 가리왕이 겁이 나서 「아, 천벌(天罰)이 내리는구나.」하
고 꿇어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빌고 대신들이고 궁녀들이고 돌에 묻혀 죽을 판입니다. 그런
데 그 때 선인이 제석천에게 자기는 다 죽게 되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말하기를 「오
늘 내가 참는 이 인욕이 정망 인욕다운 인욕이거든 내 앞에 있는 가리왕을 해롭게 하지 마
옵소서.」합니다. 이것이 참는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욕 곧 참으려고 억지로 참는
게 아니고 인욕바라밀이 즉비인욕바라밀입니다. 무심한 지경에 들어서서 하는 인욕입니다.
그러나 태풍이 싹 꺼지면서 앞에 참 거룩한 이가 하나 나타났는데 하늘에 옥황상제가 자
기 본신(本身)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천동천녀(天童天女)를 함께 데리고 와서 무수한
절을 인욕선인에게 하면서 하늘에 전당포라는 신기한 약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팔을 갖다
붙이고 눈도 제자리에 붙이고 귀도 약을 발라서 붙이고 그리고 나니 그게 본래대로 되었습
니다. 그리고 천당에서 미리 준비했던 음식으로 천공(天供)을 올리고는 미래세(未來世)에 성
불하시거든 부디 저 부터 먼저 제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인욕선인(忍辱仙人)은 제석천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없고 가리왕에 대해 아무 괘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할에 양무심(塗割兩無心)이라 합니다. 전당포로 발라 줄
때에도 무심하고 할절신체(割截身體)로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어 놓을 때에도 무심했습니
다. <전당포>를 발라 주는 제석천한테나 내몸뚱이를 잘라 낸 가리왕한테나 똑같이 양무심(兩
無心)으로 아무 생각 없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부루나존자의 인욕
설법제일(說法제일)인 부루나존자(富樓那尊者)께서 체험하신 거룩한 인욕의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부루나 존자는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의 허무
함을 여실히 깨닫고 중될 사람 중 되어 철저히 수행하도록 하고 신도될 사람 있으면 특별한
신도가 되도록 설법을 제일 잘 하는 분입니다. 십재제자가 다 대아라한(大阿羅漢)이고 다 성
인이시지만 수보리존자는 아공 . 법공 . 구공의 원리를 제일 잘 깨달은 해공제일(解空第一)
이고 계를 잘 지키는 분이 우바리존자(優婆離尊者)시고 이렇게 각각 특별히 잘하는 분이 열
입니다. 부루나 존자께서는 한 번은 아직 불교가 전도되지 외딴 지방에 가서 포교할 생각을
냈습니다. 그때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부처님께 반드시 다 여쭈고 실천했습니다. 부처님곁
을 떠나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지금 국민학교 학생이 선생님한테 하
듯이 그랬습니다. 그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있
으면 제자로서 그래야 할 것이고, 부모가 있으면 아들딸이 꼭 물어서 행동을 해야 할 것입
니다. 설사 제자가 스승보다 났다 하더라도 스승은 선각자(先覺者)이니 물어서 해야 하고,
부모가 설사 대학을 못 나오고 아들만 못하다 하더라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상의
하고 물어서 하면 부자간(父子間)이고 내외간이고 그 사이가 서로 이해하게 되고 달라 질
겁니다. 또 동네 노인들한테도 그래야 할겁니다. 아무리 무식하고 농사만 짓고 있더라도 그
래도 내가 평생 못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니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해
야 하고 그만큼 얌전해야 하고 틀림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아무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습니까.」하고 여쭈
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기는 가거라 마는, 그 지방 사람들이 불법이 없고 아주 강강난
폭(剛剛亂暴)한 탐재호색(貪財好色)하는 중생들만 사는 곳이니 요새 말로 깡패 투성이의 우
범지대(虞犯地帶)인데 거기 가서 전도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네가 가서 피땀 흘려서 아는
것, 공부한 것, 애써서 일러주지만 한 사람도 잘 들어서 받들지 안하고 도리어 무슨 미친 소
리인지 개 같은 소리 자꾸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나도 네 말 듣지 안하고 비방만 하면 어찌
할 테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래도 대단히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듣고 안 듣
고간에 전도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 욕만 하면 다행인데 봉변을 하고 몽둥이로 매질
을 당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대단히 착하고 어진 중생이라고 생각하
겠습니다.」 「아 사람을 때리고 돌질하고 병신 만들어 놓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
고 착한 중생이냐. 억지로 지어서 하는 소리 아니냐.」 「아니올시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
하오면, 나에게 달려들어 죽이는 것보다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
겠다. 그러면 그만 달려들어서 사정없이 머리에 돌멩이질을 해서 죽게 하면 어찌할 것이
냐.」
십대 제자 가운데 실제로 이렇게 포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신통이 제
일 가는 목련존자가 그랬습니다. 태산도 뚫고 들어가고 바위 속에도 뚫고 들어가는 신통이
있는 이가 돌맹이에 맞아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실은 바윗돌로 때려 봐
도 허공으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 때리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을 건데 그렇지만 맞아
죽는 법이 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루나 존자는 「그래도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중생을 어
째서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하느냐.」 「부처님, 저희들이 억겁다생(億劫多生)으로 이 생사
고해(生死苦海)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그때 받아서 태어난 육신(肉身) 이것을 가지고 항
상 <나>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 이 생사를 못 면합니다. 그래서 중생이 죄업(罪業)
을 제가 일부러 지어서 만들어 가지고 제 죄 제가 받는 것이지 누가 어디 다른 사람이 하겠
습니까, 그 죄의 원인은 단지 허망한 육신을 애착(愛着)하는 이것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생
사고해를 허덕이는 것이오며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고생의 대가(代價)도 없는 고통뿐입
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그만 두드려 깨 부셔서 해탈시켜 저의 법신(法身) . 참나 . 진아(眞
我)를 드러나게 해 주니 그것이 어질고 착한 대보살이고 부처님 행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고 어질고 착한 부처님이라 믿고 아무 원한이 없겠습니다.」 그때에야 부처님
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서 「그래, 네가 전도할 자격이 있다.」고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법사(法師)라면 자신부터가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각오부터
먼저 하고 그리해야 할 이유부터 이론으로 철저히 따져서 알고, 그런 다음에 오늘 실천을
못했지만은 내일은 기어코 실천하리라 결심하고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
님께서 전도하러 가라는 허가의 말씀을 안 하십니다. 네가 전도가 뭐야, 너도 안 배운 주제
에 설법이 뭐냐고 그렇게 걱정을 하실 건데 부루나존자는 설법제일부루나(說法第一富樓那尊
者)라고 아는 것도 많고 설법도 잘 하지마는 사실 설법할 자격이 되어 있고 참 머리 깍을만
했고 먹물 옷 입을만한 분이 되었습니다.
인욕을 하여 이렇게 까지 들어서면 적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
는 사람도 은인(恩人)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怨恨)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기가 막히게 죽자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
(崇拜)하고 나를 따르고 온갖 것 갖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고 나
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 가면서 원망 안하기보다 참 어렵
습니다. 날마다 황금을 한 말씩 갖다 주고 불사(佛事)에 보태쓰고 용돈 쓰라고 매일 그렇게
하는 신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할 것
도 없는 겁니다. 누가 가져 왔는지도 몰라야지 사실 또 어디 가져온 사람 있습니까. 가져온
사람 있다고 생각해야 옳겠습니까. 그러면 비보살(非菩薩)이지 보살이 아닙니다.
조건부로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해서 도무지 살 수가 없지
앞으로는 우리가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가 될 겁니다. 그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이름을 고
쳐서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라 그럴 겁니다. 이번 금강경 산림이 끝나면 우리가 금강경 부
대(金剛經部隊)를 조직해 가지고 무주상세계로 개조(改造)하는 역군이 되고 독립군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이 인간을 개조하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수 있겠다고 꿈에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아까 부
루나존자처럼 그렇게 굉장한 인욕일지라도 그런게 인욕이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욕이 아닌데 그러나 억지로라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참아야겠다. 참아야겠다. 이러면은
머리끝까지 골이 올라와서 당장 때려죽일 놈인데 그래도 「참아라, 참아라, 그래도 참아야
지.」이렇게 하다보면 도인(道人)이 됩니다.
모든 것은 실상으로부터
이러한 인욕도 실상자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의 본체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상
자리가 배고프면 밥 생각하고 산보면 높은 줄 아는 것이니, 모든 것은 근본실상(根本實相)이
하는 일이고 무심체(無心體)가 아는 거지 생각이 따로 있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니 금송아지 얘기처럼 이 마음 자체가 무슨 관념이 있는 것이고 어떤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다른 것은 모릅니다. 제 생각이 벌써 하나 정해져 있어서 딴 것은 귀
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일체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닥
치는 대로 압니다.
산보면 높다 물 보면 깊다고 아는 것은 높은 것도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압니다. 거울에 먼지투성이가 시꺼멓게 붙어 있으면 무엇을 비춰도 안 나타납니다. 중생 범
부들은 탐심 . 치심 . 욕심덩어리의 온갖 먼지가 마음자리에 묻은 셈입니다. 일상생활(日常
生活)의 쉬운 예로 차려 자세를 해도 몸이 가만히 오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이것도 그
마음에 때가 많이 묻고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부동자세를 잘 하
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실상자리와 마음이 쉽게 계합(契合)할 수 있는
소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상자리인 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게도 보이고 없
게도 보이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有情無情)이라는 관념도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봐야 유정 무정이 다 부처가 돼 있는 내용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있어도 있는 걸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
다. 있는 걸로 없고 없는 걸로 있고 있는 것 그대로가 없는 것이니 그것이 곧 진공입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참말로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이것이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
무 것도 없는 겁니다. 현상이고 보니까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도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부르면 네 하고 똑똑히 대답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가서 하고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있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찾아
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방(十方)을 초월하고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부처도 중생도 아
닌,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것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없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설법을 하고
여기 이렇게 듣고 앉아 있습니다. 듣는 것인 줄도 알고 말하는 것인 줄도 아니까 하는 말인
데 부처님께서 가리왕에게 사지를 찢기고 마디마디를 찢길 때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
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참았지, 만일 그때 내가 내라는 생각을 내든지 육체를 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심경계에 못 들어갔더라도 정말 발심을 했다면 아파 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
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죽지만, 남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 이론을 확실히
알아 놓으면 원망해야 내 신세만 낭패고 죽어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텐데, 내가 맞아 죽는
것도 억울한데 남을 원망해서 삼악도 까지 가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
리가 단식하고 순교할 각오로 하는 것은 정법으로 죽는다는 게 마음입니다. 옳고 바른 생각
아무 생각 없는 데서 죽고 그리고 나를 죽이는 사람을 도리어 빌어 줍니다. 이것이 이생기
심(而生其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