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안 밤고구마를 최초로 재배했던 바닷골의 마을- 망운면 목동5리 해동 | ||||||||||||
| ||||||||||||
[무안신문]해동은 목동5리에 속하는 마을로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1㎞ 쯤 가다가 고가도로 밑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원래 마을의 이름은 밤까시[栗村 또는 栗洞] 또는 빵까시라 하였다. 마을의 지형이 밤알의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강하게 발음할 때는 어감이 좋지 않았다. 또한 얼마 전까지 마을 군데군데 밤송이를 뜻하는 흙무더기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해서 100여 전 남씨들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바다를 생업의 터로 잡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해동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원래 마을 이름이 갯마을 또는 바닷골을 의미하는 海洞으로 표기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海東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 주민들이 海洞으로 고쳐줄 것을 수차례 건의했으나 아직도 행정명으로는 海東으로 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海洞으로 나온다.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한 사람은 의령 남씨 南柱采(1659-?)공이다. 공은 조선초기의 풍운아였던 남이 장군의 후손이다. 남이 장군(南怡將軍)은 26세에 공조판서, 27세에 병조판서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으나 역모사건에 휘말려 품은 뜻을 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장수이다. 그의 후손들인 의령 남씨들은 선대의 역모사건 때문에 대부분이 어렵게 살아야 했다. 이 마을은 무안에서 유일하게 의령남씨가 입향조인 마을이다. 마을 입향조인 남주채공도 충남 서천 비인에 살면서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진도에 사는 친족을 찾아 서해안 뱃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 망운면 원송현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잠시 그곳에서 머문 다음 1708년에 현재의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후에 현경면 외반리에서 평산신씨, 신안군 비금에서 전주최씨 그리고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 마을은 독배기, 가당골, 아래데미 우데미로 이루어졌다. 독배기는 현재 무안자동차학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인데 원래 4기의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던 자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고인돌이 없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때 독배기 주변의 땅들이 대부분 일본인 하시모도(敎本)의 소유였는데 하시모도의 동의를 얻어 남씨들이 현경면 송정리의 바닷골에 둑을 막고 수문을 만드는데 이 돌들을 깨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당골[架堂谷]은 현재 미곡처리장이 있는 자리를 말하는데 지형이 가재형국으로 그곳에 무덤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가당골은 무안 밤고구마의 최초 재배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살았던 스즈끼라는 일본인이 무안의 황토와 물길 등 지리에 맞는 고구마의 신품종을 개발하였다. 시범포를 만들어 재배해서 널리 보급하여 현재의 무안 밤고구마의 명성을 갖게 했던 것이다. 현재 마을은 두 동강이 나 있다. 현경면 외곽 도로가 마을을 가르면서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도로 설계 땐 아래데미 우데미가 외곽 도로에 막혀 완전히 단절이 되었지만 주민들의 노력으로 사람이나 차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가 개설돼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하지만 지역의 발전 때문에 마을이 희생 되었어도 이를 대체할 뚜렷한 대안이 없어 주민들은 답답해하고 있다. 현재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바다가 아닌 양파 등 밭 농사를 통해서 얻어지고 있다. ▲ 망운의 중심지 마을-목동 6리 목남
목남마을은 목동 6리에 속한다. 망운로를 중심으로 아래쪽에 해당되는데 범위는 농협자재 창고에서 면사무소 앞 어린이집까지이다. 망운면의 각종 주요기관이 이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면사무소 농협 보건소 소방서 노인회관 5일시장 등 중심지 마을이다. 5일 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현경면 평산리 구장터에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피해 전주 최씨와 강릉 劉씨, 진주 강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강릉유씨와 평강채씨 그리고 평산신씨가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신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분지형이다. 목내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목성이라 불렀으며 대체적으로 수령이 300여년이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지관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地氣가 허하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야 마을이 번창하게 된다’는 지적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내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 해 살았다. 또한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 포구가 개발되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목화 쌀 등 곡물을 수집하는 조선흥업회사사무소가 압창 마을에 설치되고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망운을 포함하여 해제 현경면을 관할하는 금융조합이 현재 망운농협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망운면사무소 입구에 조성된 목동 공원은 이 지역이 감목관이 있었던 곳임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공원 내에는 15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중 7개가 望雲牧場監牧官善政碑이다. 이중 시대가 빠른 것은 1743년의 감목관 공적비이고 나머지는 19세기의 것들이다. 대부분이 호패형이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것은 1기뿐이다. 그 외 8개는 국회의원 숭모비나 면장 등의 공적비이다. 공원주변에는 40여 그루의 나무들이 있는데 수령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넘는 것들이다. 오래된 나무는 둘레가 4m 20㎝가 훨씬 넘는 것들도 있었다. 또한 공원 내에는 이 지역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흔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 동판에 새겨진 것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곳은 운남면과 해제면을 연결하는 분기점으로 1980년 5월 차량시위대가 오가며 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쳤던 지역이다’고 새겨져 있었다. 배다리에서 목내로 들어오는 고개를 望祭라 한다. 매월 보름이면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곳에 진구렁이라 부르는 구렁이 있었다. 길이 지금처럼 나기 전에는 양 옆에 소나무가 심어진 진구렁이 통행 길이었다. 해서 어둡거나 한적할 때 이 길을 지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실지로 신행길에 봉변을 당한 목외마을과 운남 출신의 신랑신부들이 많았다. 이 길은 용교의 진구렁으로 연결되어 운남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사회가 어수선 할 때 이 진구렁은 한풀이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구렁에는 굴이 있었다. 망운비행장 때문에 미군 폭격기가 자주 나타나 주민들이 이 굴 속으로 피하기도 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