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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신부님의 성서백주간
제 10 회 두 번째 창조 이야기 2부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 창조이야기'인 에덴동산에 대해 살펴봅니다.
이번주는 성경에 드러난 상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이어 다음 시간에
선악과로 인한 '죄와 벌(고통)' 그리고 성경저자가 선과악 이야기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1.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담과 여자
ㅡ 알몸의 상징적인 의미는
ㅡ 알몸과 대비되는 "옷"이 성경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권능과 힘
ㅡ 우리가 힘들여 쌓아놓은 능력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찿아가는데
장애물이 되지는 않나?
2.간교한 뱀의 꾀임
ㅡ 성경에서 '뱀'은 부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ㅡ 뱀의 화법과 진실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여자(하와)
ㅡ 책임을 떠넘기는 여자와 아담
3.벌을 내리시는 하느님
ㅡ 배로 기어 다녀야하는 뱀 / 출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할 여자 /
노동해야 하는 남자
ㅡ 아무 관계가 없던 '땅' 역시 사람으로 인해 저주 받는다.
ㅡ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4.두 번째 창조이야기의 목적
ㅡ 이런 이유로 이렇게 되었다는 원인론에 주목한다.
ㅡ 이스라엘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 왜 아담과 하와(이스라엘)는
에덴동산(가나안땅)을 잃게 되었나?
ㅡ 저주의 이야기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혹시 축복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24-25)
이게 무슨 에로 영화도 아니고, 여기 왜 굳이 알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하는 것이 그게 좀 문제입니다.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여기서 말하는 알몸이라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같이
덧붙여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알 몸
* 옷: 능력 / 힘 / 권능 ㅡ 세속적
* 길가메쉬 서사시
* 엘리아와 엘리사(1열왕 19,19; 2열왕2)
* 하혈하던 여인(마태9; 마르5; 루카8)
* 타보르 산의 거룩한 변모(顯聖容)(마태오 17,2)
* 부활 장소의 천사들(마르코 16,5)
먼저 여기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알몸의 반대인 옷을 입었다라는
옷은 거의 세속적으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 권능 또는 힘
이런 것들을 상징합니다.
요즘식으로 얘기하면 자격증 같은 겁니다. 라이센스(licence)같은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자격증 따느라고 열심히 이런
저런 공부를 하잖아요. 요즘 용어로 뭐라고 그럽니까?
스펙(Spec)을 높이기 위해서 하듯이 뭐 그런 겁니다. 스펙입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예, 그런 겁니다.
※옷: 능력과 권능, 힘을 나타내는 일종의 세속적인 자격증이다.
고대 근동에 그런 테마를 갖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것이 있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 약 4600년 전 기록된 서사시로,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크를 통치한 길가메쉬의 일생을 담고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라는 고대 근동의 아카디아말로 쓰여져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길가메쉬가 우릌이라는 곳에서 너무나 힘이
강해지니까 신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앵키두라는 또 한 사람의
인간을 파견을 합니다.
그래서 앵키두가 길가메쉬를 죽일 임무를 갖고 서로 숲에서 싸우게
되는데, 그런데 이상한 게 둘이서 싸우다가 친해져 버려요.
신들은 황당한 거지요.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지상이 너무 번성해지니까
신들이 오히려 위협을 느낍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근본적인 신학적인 체계는 뭡니까?
신들이 인간을 만들면 인간은 노예처럼 신들을 섬겨야 되는데
인간들이 너무강해지니까 신들이 그게 싫은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들소 떼를 보내는데, 들소떼를 보내서 들판을 황량하게
만드는데, 그런데 그 길가메쉬와 앵키두가 들소떼를 정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신들이 그걸 보고 화가 나서 이번에는 앵키두를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앵키두가 먼저 죽고 길가메쉬가 자기가 너무 아끼는 친구가
죽었으니까.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오라는 그런 신화가 있지 않습니까?
죽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저승으로 가는.
아마 길가메쉬 서사시가 그 근본적인 이야기의 원형인 것 같습니다.
길가메쉬가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죽음의 세계로 가서 자신의 친구를
구해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저승으로 가기 위해서 길가메쉬는
아홉개의 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데 각각의 문마다 문지기들이 길가메쉬가 지나 갈 때 마다 어떤
요구를 하느냐하면 당신의 몸에서 걸친 것을 뭐든 하나를 내려
놓아야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아홉개의 문을 다 통과하고 났을 때 길가메쉬는 어땠을까요?
몸에 걸친 게 없었습니다.
※죽음의 세계에는 지상의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얘기지요?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제가 한 번 꿈을 꾸는데 이제 제가 죽게 된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네가 제일 갖고 가고 싶은 것이 혹시 있느냐? 그러면 내가 세 가지는
허락해 줄께! 뭐 이런 이상한 만화 영화 같은 꿈을 꾼거예요.
하느님 나라로 가져갈 수 있는 세 가지를 고르라고 그러시는데 굉장히
어렵더군요. 무얼 가져가야 될까? 그랬을 때 머리속에 따오르는 그것들이
어떻게 보면 제가 세상을 살면서 조금은 집착해 왔던, 마음에 집착이
있었던 그런 것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슨 신용카드를 갖고 가자니 하늘나라에 별로 쓸 일이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무슨 라면을 가지고 가자니 그것도 그럴 것 같고,
그래서 뭘 가지고 가야될지 꿈속에서 굉장히 고민이 되더라구요.
여러분들은 한번 그런 묵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를 고를 수 있다면 나는 뭐를 가지고 간다고 그럴까?
예, 따라서 죽음의 세계로 갈 때는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결국은 알몸이다라는 것에 대한 그와 같은 이야기로 길가메쉬 서사시는
되어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런 옷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 1열왕 19,19입니다. 여기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인데
※열왕기 상권: 19,19-21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다)
엘리아가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굉장히 부자인 겁니다. 소를 열두 마리나 갖고 있었으니까.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이 겉옷이라는 것은 어떤 엘리야가 갖고 있었던 예언적인 직무 내지는
그 자신의 어떤 권능의 상징입니다.
※ 겉옷: 예언적인 직무와 권능을 상징
그런데 그것을 그에게 벗어 주니까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요번에도 성소주일이 지난 번에 있었는데 성소주일 날 신학교에서
여러가지 행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섹션의 제목이 뭐냐하면
'수단 한 번 입어 보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복사들이 와서
신부님들이 입는 수단을 한 번 탁 입거나 아니면 신학교 고학년들이
입는 수단을 한 번 탁 입는 겁니다.
신학생 때도 저희 때는 4학년이었는데 요새는 5학년으로 올라 갔습니다만
어떤 의식이 있느냐면, '착의식'이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수단을 입을
수 있는 겁니다. 나중에 부제가 되면서부터는 로만 칼라를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엄격한 교회법적인 규정이 있는 건 아닌데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하나의 틀이 있습니다.
예,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조금 그 이야기를 지나서 열왕기
후서 2,8을 보면은 그 이야기가 더 강조가 됩니다.
※ 열왕기 하권 2,1-18 :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다
이제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는 장면이 첫 장면이었다면 이 장면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와 같은 장면입니다.
2장 8절 엘리야가 엘리사와 어딘가를 가다가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 저쪽으로 갈라졌다.
갈대바다의 기적은 뭐 이 이야기와 조금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물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2열왕 2,8). 나중에 탈출기에서도 마른 땅, 그냥 땅이 아닙니다.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쭉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나중에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 갑니다. 그러자 12절에 엘리사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시며 기병이시여!"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습니다. 그런 다음 13절에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자기가 입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요르단 강에 서는데 그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다시 치니까 물이 이쪽 저쪽으로 갈라집니다.
※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 저쪽으로 갈라졌다(2열왕 2,14)
여기서 말하는 옷은 따라서 예언자의 권능을 이야기 합니다.
그 옷을 입으면 어떤 힘을 얻게 되는 약간은 좀 마술적인 이야기
비슷합니다만, 신약에 와서는 마태오복음 9장, 마르코복음 5장,
루카복음 8장을 보면 모두 하혈하는 여인이 감히 예수님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간 걸 느끼고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고 얘기를 하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지요.
그러니까 하혈하는 여자가 자기가 하혈하는 것이 나은 것을 느끼고
넙죽 엎드려서 예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해서 나았습니다."하니까
예수님이 "그래 내가 고쳤어!" 그럽니까? 그래, 내가 고친거야
너 고맙다고 해!" 뭐 이런 얘기 합니까? 아닙니다.
"네 믿음이, 네가 갖고 있는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굉장히 여러가지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부분인데 출발은 뭐냐? 옷이라는 겁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태 9,21)
그래서 여러분들 다음 주부터 미사 끝나고 본당 신부님한테 가서
이렇게 옷 한 번 만지고 … 이런 뜻은 아닙니다. ^*^
여기 그들이 갖고 있는 옷에 대한 신학이라는 겁니다.
교회 전례법 안에는 사제가 성사를 집행할 때 다른 거는 뭐 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의복 만큼은 그것이 없으면은 성사의 유효성에
문제가 생기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영대입니다.
다른 거는 몰라도 영대는 꼭 갖추고 있어야 되는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 그 다음, 나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기 전에 산에 올라가지요?
그리고 거기서 거룩한 변모를 하시는 옛날에 현성용(顯聖容) 이라고 하던
그와 같은 대목입니다.
거룩한 변모를 하시는 장면이 마태 17장, 마르 9장, 루카 9장에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보니까 어떤 얘기가 나옵니까?
그분의 옷이 너무나 눈부셨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예졌다"(마태 17,2)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이 그곳에서 눈부신 모습으로, 또는 나중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젊은이들의 옷이 하얗고 눈부셨다라는 이야기를 그리고 묵시록에서도
그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마르 16,5)
따라서 옷은 어떻게 보면 그런 권능, 천상의 권능까지도 옷으로
반영이 되는 그와 같은 성서의 구절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는
알몸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
다라서 그들은 그와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권능, 능력, 힘이 아직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알몸: 권능과 능력, 힘을 아직 갖추지 않았다.
가질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들이 그런 것을 가질 필요없이 하느님께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다 주셨으니까.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셨으니까
그들이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제가 묵상하는
것은 제가 신학생 때 이 구절을 거의 한 학기를 왜 여기서 알몸이라는
얘기가 나왔을까? 라는 이야기를 자주 묵상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묵상한 결론은 성서학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저 혼자의 묵상은 약간은 심리학적인 접근이기도 합니다만
인간의 어떤 자유로움을 얘기한 것을 아닐까? 하느님께서 세상을,
우리를 창조 하셨을 때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기들이 어른들 앞에서 벗고 있어도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라든지
뭐 이런거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어떻게 보면 그 순수하고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우리들이 흔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때로는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 자유를 막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것들에 자주 걸려 넘어집니다. 한 사람의 아버지 앞에 있는
아들 딸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찿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
쌓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능력들이 하느님을 찿아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그와 같은 것들.
※우리가 쌓았다고 생각하는 능력들이 하느님을 찿아가는데
장애물이 되지는 않나?
우리들이 한번 이것이 나에게 혹시 짐이 아닌가? 라는 생각들에 관해서,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나에게 혹시 짐이 아닌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이 대목에서 함께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 그리고 이제 뱀이 등장합니다.
앞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물과 함께 성경에
등장하는 그런 혼돈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몇 있습니다.
라합, 레비아탄, 베헤못이라는 세 동물들인데 라합이 아마 뱀인 것 같습니다.
레비아탄은 악어인 것 같고, 베네못은 하마인 것 같습니다.
뱀
* 라합(뱀) ㅡ 레비아탄(악어) ㅡ 베헤못(하마)
* 묵시록의 뱀 ㅡ 용
* 아롬( = naked); 아룸( = clever)
* 신약의 뱀
* 간교 = 지혜(?)
앞서서 제가 성서구절 몇 구절을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렸지요?
태초에 뱀을 자르시고, 라합을 물리치시고, 뭐 이런 장면들,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구약 성경에서 라합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그거는 이집트를 상징한다. 이집트의 나일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해졌으니까.
뭐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묵시록에도 바다에서부터 올라 온 뱀이나 용과 같은 그와 같은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을 쫓아 광야까지 가서 여인 주위에다가
물길을 내는, 그러자 땅이 입을 벌려 그것을 다 마셔버리는 물과 땅의
갈등 안에서 물은 항상 좀 좋지 않은, 따라서 뱀은 거기서 좀 나쁜
짐승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오기는 하지만
2장 마지막에 알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그걸 히브리말로 '아롬' 그럽니다. 그런데 뱀이라는 것이 간교하였다 라는
'간교하였다'라는 표현에서 '간교하다'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아룸'
그럽니다. 따라서 발음이 굉장히 비슷해요.
이것도 아마 하나의 '워드 플레이'입니다.
앞에서는 알몸이었다, '아롬'
여기서는 '간교하였다', '아룸'.
그런데 두 가지 의미는 사실은 정 반대의 의미 입니다.
'아롬', 알몸이었다. 그들은 아직 알고 있는게, 지식도 하나의 힘인데
지식조차도 하나도 없는 겁니다. 갖춘 것이 별로 없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교하였다라는 말은 좀 부정적인 표현이고 조금
긍정적으로 바꾸자면 '클레버(clever)', 영리하였다라는 그들은
지혜로웠다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 아롬: 알몸, 갖춘 것이 별로 없다
아룸: 간교하다, 영리하다
그런데 그 두 가지 표현이 하나는 2장 마지막 하나는 3장을 시작
하면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그렇게 영리한 질문을
뱀이 여자에게 던지게 되는 겁니다. 자, 그전에 신약에서도 뱀에 대한
이야기가 쪽 나오는데 제가 한 번 쭉 읽어 드릴께요.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마태 7,10: 청하여라, 찿아라, 문을 두드려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박해를 각오 하여라)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 너희가 지옥 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마태 23,33)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두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한 것이다."
(루카 10,19: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루카 11,11: 청하여라, 찿아라, 두드려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야 한다." (요한 3,14)
전체적으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뱀은 따라서 어떤 존재입니까?
한편으로는 조금 위험한 존재입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뱀에 물리면은 죽는다. 뱀은 독을 갖고 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 뱀들아! 뭐 이런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로
이야기 되기도 하고 또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렇듯 뱀이 지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의 뱀: 다소 위험한 부정적인 의미도 있고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그런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갖고 있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뱀이 간교하다 또는 영리하다라는 그런 수식과 함께
이자리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예를 들어 사자는 용맹하다 라면
뱀은 지혜롭다라는 그와 같은 붙어있는, 그와 같은 수식을 우리가
생각 하면서 이 구절을 우리가 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창세기 3,1: 인간의 죄와 벌)
예, 그 뱀이 여자에게 와서 물어 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된다. ≠그 말씀 하셨다는데 정말이냐?" (창세기 3,1)
대화를 여는 방법이지요? 우리들도 누군가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고
싶을 때 즉각적으로 그렇게 얘기 하지는 않지요?
우리들의 마음에 사탄의 유혹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얘기를 합니까?
아, 그사람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애! 이렇게 얘기를 시작하지요?
그런데 뭐 한가지, 그런데 뭐 하나 그러면서 여러가지 대화 가운데
유혹에 빠지는 경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자, 그러자 여자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 하셨다.(창세 3,2-3) 라고 여자가 얘기합니다.
여자가 인용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한 번 봅시다.
하느님 ㅡ 뱀 ㅡ 인간
* "너희는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되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까? 하느님이 말씀하신 건 뭐죠?
"절대로 먹지 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에덴동산)
그런데 여자는 왜 이렇게 알고 있을까요?
하느님이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남자에게 하셨지요?
남자가 여자에게 하면서 혹시 이렇게 붙인 건 아닐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자가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자는 말하고 있지 않다.
뱀은 더 광장한 거지요 "아무튼 먹지 말라고 그랬어?" 그랬더니
여자가 "그건 아니고,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그랬어!" 라며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이 과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뱀이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아,
너희가 그것을 먹는날 너희는 눈이 열려."
이 다음 대목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 하신거야!"라고 얘기 합니다.
뱀이 말한 건 진실입니까? 자, 하느님은 뭐라고 그러셨죠?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죽게 될꺼야!"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걸 먹고 죽습니까?"
그런데 뱀은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가 그걸 먹으면 죽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될꺼야, 눈이 열리게 될꺼야 라고 얘기 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진실을 얘기 합니까? 뱀이 얘기하는 겁니다. 웃기죠?
다음 주부터 뱀을 섬기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 이 이야기는 뭡니까?
사실은 고대 신화적인 얘기를 바탕으로 하는 겁니다.
신들은 인간들에게 뭔가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고대 신화 중에 어떤 신화를 여러분들이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 불에 관한 그리스도 신화를 알고 계십니까?
누가 인간에게 불을 갖다 주지요? 프로메티우스 입니다.
그가 인간에게 불을 갖다주고 신들이 프로메티우스를 벌을 줍니다.
어떤 벌을 줍니까? 절벽에다 매달아 놓고 독수리들이 와서 그의
심장을 쪼아 먹게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형벌이 가혹한 게 뭡니까?
그 심장이 다 쪼아 먹힐 때가 되면 새로 심장이 생깁니다.
불사신이니까 새로 심장이 돋아나요. 또 쪼아 먹히는 겁니다.
※ 프로메테우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 준 신
영원한 고통에 사는 프로메테우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주는, 인간을 좋아 한 그와 같은 하나의
신의 이야기(프로메테우스)를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도 사실은 좀 비슷한 흐름을 갖고 있는 겁니다.
신들은 우리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그런데
뱀이라는 그런 존재가 인간에게 그것을 얘기 해 주는.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정말 행복해지는지 아닌지는 한번 두고 보자라는 이야기인
겁니다. 그런 어떤 두 가지 흐름이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고대 신화에서 예를들어 판도라의 상자라든가.
※ 판도라의 상자: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가 모든 죄악과 재앙을
넣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 보낸 상자.
열지 말아야 될, 그것도 굉장이 유혹적인 얘기지요?
"이 상자는 절대로 열지마!" 여러분들의 자녀들 한테
오늘 상자 같은 거 하나 갖다 주면서 "이거는 네가 보관만하고 절대로
열어보면 안돼!" 라고 얘기 하면은 여러분의 자녀들은 아마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려울 겁니다. 예, 인간이 갖고 있는 커다란 유혹중에 하나는
호기심인 것 같애요.
예, 따라서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스스로 먹고 그 남편에게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있었다.
※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기 3,7)
이 두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영어 번역으로는 "에프런(apron)"입니다. 장면으로 생각하면
이게 더 야한 것 같아요. 아무튼 알몸인 것을 알고, 어쨌든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안에는 물론 약간은 좀 성(姓)에 관한 뉘앙스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윤리적인 의식을
뛰어 넘어서 인간이 뭔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뭔가를 이제 찿아
나서기 시작 했다는 겁니다. 그건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는데 거기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거지요.
※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할 무언가를 찿아 나선다.
어! 하느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어야 돼!" 라는 그와 같은 하나의 불신을
이 바닥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대화는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뱀이 이렇게 얘기하자 마지막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쫓아 내는
그 이유가 마지막 하느님의 대사가 어떤 대사가 나옵니까?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안 되니까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인간이 그렇게 됐으니까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되겠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앞에서 제가 드린 말씀은 뭐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길이 열렸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린 겁니다.
구약에 있는 창세기의 하느님은 인간이 영원히 살며 안되겠다,
큰일 나겠다 라고 생각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죽고 부할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다.
※ 구약에서는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지 않으셨지만
신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하나에 두 가지가 맞 닿는 점을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 이제 벌이 내립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묻으십니다.
그리고 그가 대답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러고 나서 남자의 변명이 무지하게 구차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는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기 3,10-12: 인간의 죄와 벌)
그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하느님 한테 있는 거지요.
당신께서 나에게 소개해 주신 그여자가 그 나무 열매을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좀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제는 여자에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너는 왜 그렇게 했느냐?
그러니까 여자도 또 뱀한테 떠 넘기는 거지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질문은 남자 ⇒ 여자 ⇒ 뱀으로 넘어가는데 벌은 거꾸로 갑니다.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라." ⇒ 첫 번째 벌입니다.
두 번째 벌은 여자와 너의 관계 사이에서,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창세 3,13-15: 인간의 죄와 벌)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여기 계시는 자매님들 중에 뱀을 밟은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서로 어떤 원수의 관계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냥 옛날에 살던 고대인들은
집에 있는 주부들이 만약 집에 뱀이 들어오거나 그런 경우도 있었을
것 같애요. 그러면 집을 지키던 여인들은 그 뱀을 발로 밟아 죽이고
뱀은 여자를 물고 하는 그런 일들이 여기 반영되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는 성모상을 보면
항상 뱀을 밟고 있는 성모님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요구절이 거기에 신학적으로 역으로 투영된 뱀을 밟고 서있는,
인간을 유혹하는 그 뱀을 밟고 있는 그런 성모님의 모습을 우리는
성모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 그러면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뱀의 운명에 관해서 설명하는
거지요? 너는 배로 그 먼지위를 기어 다니면서 그 먼지를 먹을 것이다.
뱀이 왜 그렇게 기어디니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입니다.
계속 그와 같은 것들이 이어집니다.
그 여자에겐 그 다음에 이렇게 얘기 합니다.
※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기 3,16)
첫째, 따라서 생명을 잉태해야하는 해산의 고통에 관해서 얘기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서 남자에게 조금 속하게 되는 남성의 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는 그와 같은 여성의 운명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라고. 지금의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이 이야기가
쓰여질 때의 이스라엘의 현실이 역으로 투영되는 겁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얘기합니다.
※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기 3,17-19: 인간의 좌와 벌)
자, 문제는 땅의 입장에서는 무지하게 억울합니다.
땅은 잘못한 게 없는데 아담이 잘못하는 바람에 땅까지 저주를 받습니다.
땅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왜냐? 아담은 남자고 땅은 아다마라고 말씀
드렸지요? 아담 때문에 아다마가 같이 저주를 받는 겁니다.
붙어다니는 겁니다.
※ 아담(남자) 때문에 아다마(땅)도 함께 저주를 받게 된다.
에덴동산의 땅은 비옥했는데, 그렇게 일을 많이 하지 않고도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탐스럽게 열렸는데 이제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열심히 일을 해도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소출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땀으로 범벅이 돼서 일을 해야 되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냥 한 줌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는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남자가 왜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지, 그렇게 노동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땅이 왜 이렇게 비옥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이 사건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가지 하느님의 해답,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뱀은 왜? 땅위를 기게 되었는지, 여자는 왜 해산을 하면서 이렇게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남자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땅이
소출을 내지 못하는지, 그리고 여자는 왜 남자에게 속하게 되었는지,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 선악과를 따먹는 그와 같은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 창세기는 왜 뱀이 기어다니고, 여자가 출산하고, 남자는 노동하고,
사람은 죽고 땅은 저주 받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원인론적 설명
벌
* 뱀에 대하여
* 여자에 대하여
* 남자에 대하여(땅에 대하여)
* 원인론(etlology)
* 하와 : 가죽옷 : 커룹
그 다음의 내용이 조금은 재미 있습니다.
※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창세기 3,20)
따라서 이 앞에는 하와라는 이름이 아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좀 괘씸해요. 아직까지는 따라서 이름도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름이 생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지만
그녀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와라는 말 안에는 히브리말 동사 "하이야"라는 동사가 숨어 있는데
하이야라는 동사는 영어에 be동사입니다.
※ 하이야: 존재한다. 산다. 있다; 생명을 의미
따라서 아담은 땅 하와는 생명.
그 땅과 생명이 함께하니 온전히 완성된 인간이 되었다라는 두 사람의
이름만 가지고도 하나의 신학적인 진술을 우리가 해 낼수가 있습니다.
※ 아담(땅)과 하와(생명)가 함께 하니 완성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받는 벌과도 연결이 됩니다.
아담은 땅이니까 땅에서 일하는, 하와는 생명이니까 생명을 낳는
그와 같은 벌을 받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가 이와 같은 것들로 해서
우리처럼 되었으니까 그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야겠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에덴동산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라는 대목으로 오늘의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자, 사람이 …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
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24)
전체적으로 따라서 두번째 창조이야기에서 우리가 갖고 있었던 본래의
이야기가 주목하는 것은 원인론입니다. 이래서 이렇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왜 그런 결과가 생겼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주된 목적입니다.
※ 두 번째 창조 이야기 :
이런 이유로 이렇게 되었다는 원인론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편집 안에서는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갖고 있는 하나의
포멧이(format) 여기에 작은 틀로 이 안에 역으로 투영되어 있는 겁니다.
※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왜 가나안을 잃게 되었나?
인간은 본래, 이스라엘은 본래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땅에서
살 수 있었는데 그들이 왜 에덴동산을, 그들이 왜 가나안 땅을
잃게 되었는지.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들의 인생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우리들은 자신의 삶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되돌아 봅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와 같은 질문을 이스라엘은 창조 이야기를 역으로 투영하면서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신학하는 일입니다. 신학한다는 것은 멋진 대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한다는 것은 좋은 질문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또 앞으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던지는 질문들, 이런 질문들이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또는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될 질문들이 신화적인 이야기
(태초의 이야기) 안에서 역으로 반성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가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많은 분들과 함께
던지는 질문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남자가 열심히 일을 해서 땅에서 소출을 얻는 것과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서 출산하는 것,
이것이 나쁜 일입니까? 좋은 일이지요?
따라서 남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여자가 가정을 지키고 하는 것,
그것은 굉장히 좋은 일인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축복일지 아니면
저주일지 에 관해서 우리들은 또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전체를 하나의 축복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 노동과 출산을 저주(벌)라고 설명한 창세기를
축복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히브리말 성서에서는 항상 그 두 단어가 서로 붙어다닙니다.
축복이라는 단어와 저주라는 단어가, 또는 같은 단어가 그 두 단어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
어느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가정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하는 것들, 그런 것은 그 여인의 삶에서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 입니까?
여러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축복이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저주라고 느끼는가?
마더 데레사가 한 평생을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 던지는 것.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이 자신의 삶 전체를
수단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송두리째 봉헌하는 것.
우리가 옆에서 보기에는 저게 과연 인간의 행복일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라는 그와 같은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 본 봉사자들, 또는 제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마더 데레사에게 당신의 삶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분들은 당연히 뭐라고 얘기 하겠습니까? "축복입니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제가 사제 생활을 하면서 사제가 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만난 그런 분들이 단 한명도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하는 일을 봉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사십니까?" 그러면
그분들이 하는 대답은 거의 다 다음과 같은 대답입니다.
"아이, 봉사라뇨? 저는 제가 기뻐서 합니다. 제가 좋아서 합니다."
요셉 의원의 돌아가신 선우경식 선생님은 돈 한푼 낼 길 없고,
주민등록도 없는 무의탁 환자들을, 또는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그런 환자들이 자신에게 오면, "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라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요즘에 묵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정말 힘든 일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돕는 일 보다 더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애요.
지난 주의 강론 때도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누가 저에게
이태석 신부님처럼, 아니면 마더 데레사처럼 저기 어디 오지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 살아 볼 수 있겠냐? 그러면 저는
그거는 "예!" 라고 대답할 것 같애요.
그런데 제가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있는데 어머니는 치매예요.
남편은 우울증입니다. 자식은 뇌성마비 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다 꾸려 나가고 성당에 오셔서 또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식사 같은 것을 준비하면 그걸 또 하세요. 그러면서 집에서도 그런데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면 그분이 저한테 하시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여기 성당에 와서 봉사하는 시간이 저한테는 쉬는 시간입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멀리 있는 이웃을 돕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저에게 누가 와서 그렇게 아픈 가족을 평생
돌보면서 살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그거는, 거기에는 선뜻 "예!"
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본당에도 보면은 치매걸린 노인들 가정에서 보살피시는
그런 자매님들이 있으시거든요.
전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도 참 훌륭한 분이지만
그분이 더 제가 보기에는 힘든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는 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알고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하고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 보곤 합니다.
※ "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하고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11회 죄와 벌이 계속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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