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의 영향으로 비로소 ‘존재와 뿌리’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는데 내 주변에는 이러한 나의 관심사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다. 보통 뿌리교육은 뜻있는 집안 어른이 맡아서 하기 마련인데,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뿌리 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늦게 기회가 찾아왔다. 학생 시절 집안 선산이 있는 아산 온양에 가면, 그곳에 사시는 여섯째할아버지께서 집안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만드신 “세계(世系)”를 교재로 혈통에 대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법무사 일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뿌리교육을 끝내면 마지막으로 ‘양반 집안의 자부심을 가지고, 가문의 빛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여섯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뿌리교육은 그 셋째아드님 斗자, 熙자 당숙어른이 맡아주셨다. 만약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뿌리교육을 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1) 시원(始原)과 유래
우리 가족사의 출발은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英毅公)으로부터 시작된다. 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의 본명은 본래 김충(金忠)인데, 중국 봉양부 여남(鳳陽府 汝南)분이였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 조선조 이조판서에 해당)에 이르렀고, 안렴사(按廉使)로서 당나라 천보 14년(신라 경덕왕 14년, 755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지(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닿게 되자 그 곳의 풍광이 너무 수려하여 그 곳에 살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라 경덕왕이 이런 사정을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알려 소원대로 현지에서 살게 했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으로부터 왔다하여 ‘남(南)’씨로 사성(賜姓, 성을 내림)하고, 천품이 영민하다 하여 이름을 ‘민(敏)’으로 개명하여 영양현(英陽縣)에서 살게 하였고, 즉시 영의공(英毅公)을 봉하였다. 이 때 공의 나이 40세였다. 영의공(英毅公)의 묘는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에 있으며, 매년 가을 자손들이 모여 추향대제를 올린다. 그러나 김충이 일본에 갈 때 동행했던 맏아들 김석중은 남씨 성을 받기 전에 이미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영양 김씨와 남씨는 시조는 같은 김충이나 그 후손의 대에서 성이 다르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 의령(宜寧) 남씨의 형성과 가문
남씨는 그 후 여러 대(代)가 실전(失傳) 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시조 남민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로 갈라져서 세 계통으로 분관하였다. 영의공 이후 4~5백년이 지난 고려 후기, 후손인 진용(鎭勇)은 세 아들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를 두었는데, 이들 형제는 우애가 돈독할 뿐만 아니라 인물이 출중하고 기품이 있어 능히 한 집안의 으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각각 따로 관적(貫籍)하고 각파의 일세조가 되었다. 맏아드님 홍보(洪甫)는 영양 관조(英陽貫祖), 둘째아드님 군보(軍甫)는 의령 관조(宜寧貫祖), 셋째아드님 광보(匡甫)는 고성 관조(固城貫祖)의 일세조(一世祖)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 ‘남(南)씨’ 성을 가진 사람은 동일 혈통의 3분파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세 분파 중에서 의령관조의 후손이다.
의령 남씨의 1세조인 남군보(南君甫)의 호는 백천(栢川)이며,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직부사였다. 산소는 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일과 9월 9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가문의 인맥을 살펴보면,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대대로 현신(賢臣)과 석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열좌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6명, 대제학(大提學) 6명, 호당(湖當)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 장신(將臣) 1명을 배출하였다. 상신 6명은 본관별 서열로는 20위에 지나지 않지만 씨족 규모로 볼 때에는 대단한 숫자요, 대제학 6명은 전주 이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의 각 7명에 버금가는 숫자였다.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과 남이(南怡)를 내어 더욱 빛났다. 문과 급제자는 모두 180명으로, 이 중에서 의령 남씨가 139명에 달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권문해(權文海)는 그의 저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남씨는 조선 20대 명벌(名閥)의 하나로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을 낳았고, 문과 급제한 사람만도 180명이나 된다고 소개하면서, 이들 세 분파 중에서는 의령 남씨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해서 명성을 날렸다고 했다.
(3) 충경공(忠景公) 자손
우리의 본관(관향)은 의령이다. 본관은 시조의 고향을 뜻하는 말이다. 어떤 성이든지 관(貫)이 있고 또 파(派)가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대를 이어가며 자손이 불어나 어느 형제의 후손인지 구별 짓기 위하여 만든다. 그리고 파(派)의 형성은 으레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여 만든 혈통도가 소위 ‘세계(世系)’인 것이다. 세계에 따르면 우리 가계는 충경공 자손이다.
충경공은 의령 남씨의 세조(世祖)인 군보(君甫)로부터 익지(益?), 천로(天老), 을번(乙蕃)을 거쳐 4대손(代孫)인 재(在)의 시호이다. 1세 군보는 시조 민(敏)의 후손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고려 충렬왕 때 의령군에 봉해졌다. 2세 익지는 부사(副使), 3세 천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4세 을번은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의령계통은 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삼형제가 유명했다.
재(在)는 고려 때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에서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을번(乙蕃, 시호는 敬烈)의 아들로 1351년(충정왕 3년)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겸(謙)이며, 자는 경지(敬之)요, 호는 귀정(龜亭),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색(李穡)의 문인(門人)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내고, 아우 은(誾)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공신으로 봉해지는 것을 피하여 은거했으나 태조가 그를 찾으려 애쓴 끝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이름을 재(在)로 사명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그리고 개국1등 공신으로 전지(田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하사 받았다. 중추원 학사 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남재(南在)는 천명의 거취를 알고 인심의 향배를 살피어 민사(民社)의 대의로써 결의정책(決意定策)하여 나를 추대하여 같이 대업을 이루니 그 공이 심히 크다’고 하였다.
그 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使),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태조 7년(1396)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쓰시마도(대마도)를 정벌했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에 아우 은(誾)이 살해되자 잠시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다시 풀려 나와 1400년(정종 2년) 세자 사부(世子師傅)가 되었다. 후에 경상도 관찰사, 의정부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1414년에 관제가 개정되어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로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의령부원군에 진봉(進封)하고, 왕명으로 하륜(河崙)과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하였다. 1415년 자리에서 물러나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 兼 世子傅)가 되었는데 이는 집안이 검약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 1416년(태종 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419년 12월 1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는데, 상왕은 재신 윤회(尹淮)를 보내어 제사를 내리시고 세종께서는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사제(私第)에 행차하여 친히 제사를 지내고 조위하였다. 이듬해 2월에 1등 예로써 양주 줄곡에 장사지내니 이곳은 태조께서 한양에 정도하고 친히 선침(仙寢)을 건원릉(建元陵)에 정하고 공에게 배장지지(陪葬之地)로 하사하고 전지를 주어 영세토록 총호(塚戶)를 지키게 한 곳이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정승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한다.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경제에 밝고 산수에 능하여 ‘남산(南算)’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廷)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에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다. 지금 충경공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있다. 그 묘역에는 업적을 기리는 충경사(忠景祠)가 있다. 이곳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문화재(제114호)로 지정되었다.
(4) 충간공파(忠簡公派), 충간공 삼자(三子) 간성공파(杆城公派)로 분류
우리는 충경공(忠敬公) 자손이면서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분류된다. 충간(忠簡)은 영의정 재(在, 의령 남씨 5세)의 손자 지(智, 의령 남씨 7세)의 시호이다. 지의 자는 지숙(智叔)이며, 지(智)의 아버지는 증영의정 병조의랑(贈領議政兵曹議郞) 경문(景文, 6세)이다.
17세 때 감찰이 되었고, 세종 때 경상도 경력(經歷)?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의성군(宜城君)을 습봉(襲封),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5년(세종17년) 형조 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올 때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한 질을 받아왔다. 1439년 대사헌?경상도 관찰사?형조 판서?호조 판서를 지냈다.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폐비로 승하하자 자청하여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년) 우의정을 거쳐 1451년 좌의정이 되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고명을 받았으나 그 해에 풍질로 벙어리가 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딸이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할 때에도 풍질로 인해 화를 면했다. 세상을 떠난 뒤 1489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총명하고 풍도가 단중하며 담지가 있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있다.
지(智)는 윤(倫), 칭(?), 구(?), 휴(休), 의(儀)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윤(倫)의 후손을 감사공파(監司公派), 둘째아들 칭(?)의 후손을 부정공파(副正公派), 셋째아들 구(?)의 후손을 간성공파(杆城公派), 휴(休)의 후손을 별좌공파(別坐公派), 의(儀)의 후손을 참판공파(參判公派)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충간공의 삼자(三子) 구의 후손이므로 충간공 삼자 간성공파(忠簡公 三子 杆城公派)에 해당한다. 구(?)는 조선조에 간성군수를 역임하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와 같은 계보로 보아 우리는 재(在, 5세)-지(智, 7세)-구(?, 8세)를 거치는 충경공((忠景公)자손, 충간공파(忠簡公派), 그 중에서도 간성공파(杆城公派)로 분류된다.
(5) 설애공파(雪厓公派)로 분류
위에서 보듯 우리는 충경공(忠敬公) 자손이면서 충간공파 그 중에서도 간성공파로 분류되는데, 11세의 언진(彦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설애공파(雪厓公派)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흔히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로도 불린다.
설애(雪崖)는 8세인 구(?)에서부터 ‘구(?)-계(?)-치욱(致?)-언진(彦縝)’으로 이어지는, 의령 남씨의 11세인 언진(彦縝)의 호이다. 따라서 언진은 개국공신 재(在)의 6대손이며 부사(府使) 치욱(致勖)의 셋째아들로 1531년에 출생하였다. 언진은 병조참의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언순(彦純)과 양주?여주 목사와 공조 참의를 지낸 언경(彦經)의 동생이다. 또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언기(彦紀)의 형이기도 하다.
언진의 자는 경보(敬甫)이며,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사복정(司僕正)을 역임하였고, 77세의 장수를 누렸다. 아들인 발(撥,1561-1646)은 문신으로 자는 공제(公濟), 호는 화은(華隱)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 1602년(선조 35년)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3년 헌납(獻納), 이듬해 장령(掌令)을 지내고, 인조 때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러 사직하고, 온양에 은거 80세 때 노인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이후 내 직계는 언진(彦縝)-발(撥)-황(晃)-필성(弼星)-덕하(德夏)-학우(鶴羽)-무관(懋寬)-호(灝)-명채(明采)-계우(啓友)-용원(龍元)-정환(廷煥)-성희(成熙)를 거쳐 나와 내 형제(相玉, 相範, 相祐)로 내려와 다음의 석우(碩祐)와 경우(?祐)로 이어졌다.
세계(世系)에 의하면 할아버지 대의 항렬자 ‘정(廷)’은 의령관으로부터 22세이며, 아버지 대의 항렬자 ‘희(熙)’는 의령관으로부터 23세, 항렬자 ‘상(相)’은 의령관으로부터 24세인 셈이다. 그리고 다음(아들) 대의 항렬자 ‘우(祐)’는 의령관으로부터 25세이며, 손자 대의 항렬자 ‘기(基)’는 의령관으로부터 26세가 된다.
(6) 의령관(宜寧貫)의 항렬표(行列表)
같은 혈족 간에 있어서의 관계를 표시하는 계급을 항렬(行列)이라 하는데, 이 항렬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 두 자 가운데 한 자는 공통으로 함께 사용한다. 이 때 사용하는 글자를 항렬자(行列字)라고 하는데 상(相)자 이후 항렬자는 오행상생(五行相生-木火土金水)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항렬자를 표로 보인 것을 항렬표(行列表)라고 한다. 항렬자는 첫 자와 끝 자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데 의령관의 항렬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의 영향으로 비로소 ‘존재와 뿌리’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는데 내 주변에는 이러한 나의 관심사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분이 계시지 않았다. 보통 뿌리교육은 뜻있는 집안 어른이 맡아서 하기 마련인데,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뿌리 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늦게 기회가 찾아왔다. 학생 시절 집안 선산이 있는 아산 온양에 가면, 그곳에 사시는 여섯째할아버지께서 집안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만드신 “세계(世系)”를 교재로 혈통에 대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법무사 일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뿌리교육을 끝내면 마지막으로 ‘양반 집안의 자부심을 가지고, 가문의 빛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여섯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뿌리교육은 그 셋째아드님 斗자, 熙자 당숙어른이 맡아주셨다. 만약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뿌리교육을 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1) 시원(始原)과 유래
우리 가족사의 출발은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英毅公)으로부터 시작된다. 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의 본명은 본래 김충(金忠)인데, 중국 봉양부 여남(鳳陽府 汝南)분이였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 조선조 이조판서에 해당)에 이르렀고, 안렴사(按廉使)로서 당나라 천보 14년(신라 경덕왕 14년, 755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지(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닿게 되자 그 곳의 풍광이 너무 수려하여 그 곳에 살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라 경덕왕이 이런 사정을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알려 소원대로 현지에서 살게 했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으로부터 왔다하여 ‘남(南)’씨로 사성(賜姓, 성을 내림)하고, 천품이 영민하다 하여 이름을 ‘민(敏)’으로 개명하여 영양현(英陽縣)에서 살게 하였고, 즉시 영의공(英毅公)을 봉하였다. 이 때 공의 나이 40세였다. 영의공(英毅公)의 묘는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에 있으며, 매년 가을 자손들이 모여 추향대제를 올린다. 그러나 김충이 일본에 갈 때 동행했던 맏아들 김석중은 남씨 성을 받기 전에 이미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영양 김씨와 남씨는 시조는 같은 김충이나 그 후손의 대에서 성이 다르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 의령(宜寧) 남씨의 형성과 가문
남씨는 그 후 여러 대(代)가 실전(失傳) 되어 세계를 잇지 못하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시조 남민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로 갈라져서 세 계통으로 분관하였다. 영의공 이후 4~5백년이 지난 고려 후기, 후손인 진용(鎭勇)은 세 아들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를 두었는데, 이들 형제는 우애가 돈독할 뿐만 아니라 인물이 출중하고 기품이 있어 능히 한 집안의 으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각각 따로 관적(貫籍)하고 각파의 일세조가 되었다. 맏아드님 홍보(洪甫)는 영양 관조(英陽貫祖), 둘째아드님 군보(軍甫)는 의령 관조(宜寧貫祖), 셋째아드님 광보(匡甫)는 고성 관조(固城貫祖)의 일세조(一世祖)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 ‘남(南)씨’ 성을 가진 사람은 동일 혈통의 3분파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세 분파 중에서 의령관조의 후손이다.
의령 남씨의 1세조인 남군보(南君甫)의 호는 백천(栢川)이며,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직부사였다. 산소는 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일과 9월 9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가문의 인맥을 살펴보면,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오른 뒤, 대대로 현신(賢臣)과 석학을 배출하여 명문의 열좌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상신(相臣) 6명, 대제학(大提學) 6명, 호당(湖當) 3명, 청백리 1명, 공신 7명, 장신(將臣) 1명을 배출하였다. 상신 6명은 본관별 서열로는 20위에 지나지 않지만 씨족 규모로 볼 때에는 대단한 숫자요, 대제학 6명은 전주 이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의 각 7명에 버금가는 숫자였다. 그리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과 남이(南怡)를 내어 더욱 빛났다. 문과 급제자는 모두 180명으로, 이 중에서 의령 남씨가 139명에 달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권문해(權文海)는 그의 저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남씨는 조선 20대 명벌(名閥)의 하나로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을 낳았고, 문과 급제한 사람만도 180명이나 된다고 소개하면서, 이들 세 분파 중에서는 의령 남씨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해서 명성을 날렸다고 했다.
(3) 충경공(忠景公) 자손
우리의 본관(관향)은 의령이다. 본관은 시조의 고향을 뜻하는 말이다. 어떤 성이든지 관(貫)이 있고 또 파(派)가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대를 이어가며 자손이 불어나 어느 형제의 후손인지 구별 짓기 위하여 만든다. 그리고 파(派)의 형성은 으레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여 만든 혈통도가 소위 ‘세계(世系)’인 것이다. 세계에 따르면 우리 가계는 충경공 자손이다.
충경공은 의령 남씨의 세조(世祖)인 군보(君甫)로부터 익지(益?), 천로(天老), 을번(乙蕃)을 거쳐 4대손(代孫)인 재(在)의 시호이다. 1세 군보는 시조 민(敏)의 후손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고려 충렬왕 때 의령군에 봉해졌다. 2세 익지는 부사(副使), 3세 천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4세 을번은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의령계통은 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삼형제가 유명했다.
재(在)는 고려 때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조선에서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낸 을번(乙蕃, 시호는 敬烈)의 아들로 1351년(충정왕 3년)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겸(謙)이며, 자는 경지(敬之)요, 호는 귀정(龜亭),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색(李穡)의 문인(門人)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내고, 아우 은(誾)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공신으로 봉해지는 것을 피하여 은거했으나 태조가 그를 찾으려 애쓴 끝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이름을 재(在)로 사명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그리고 개국1등 공신으로 전지(田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하사 받았다. 중추원 학사 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남재(南在)는 천명의 거취를 알고 인심의 향배를 살피어 민사(民社)의 대의로써 결의정책(決意定策)하여 나를 추대하여 같이 대업을 이루니 그 공이 심히 크다’고 하였다.
그 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使),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태조 7년(1396)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쓰시마도(대마도)를 정벌했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에 아우 은(誾)이 살해되자 잠시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다시 풀려 나와 1400년(정종 2년) 세자 사부(世子師傅)가 되었다. 후에 경상도 관찰사, 의정부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1414년에 관제가 개정되어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로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의령부원군에 진봉(進封)하고, 왕명으로 하륜(河崙)과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하였다. 1415년 자리에서 물러나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 兼 世子傅)가 되었는데 이는 집안이 검약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 1416년(태종 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419년 12월 1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는데, 상왕은 재신 윤회(尹淮)를 보내어 제사를 내리시고 세종께서는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사제(私第)에 행차하여 친히 제사를 지내고 조위하였다. 이듬해 2월에 1등 예로써 양주 줄곡에 장사지내니 이곳은 태조께서 한양에 정도하고 친히 선침(仙寢)을 건원릉(建元陵)에 정하고 공에게 배장지지(陪葬之地)로 하사하고 전지를 주어 영세토록 총호(塚戶)를 지키게 한 곳이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정승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한다.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경제에 밝고 산수에 능하여 ‘남산(南算)’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廷)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에 구정유고(龜亭遺稿)가 있다. 지금 충경공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있다. 그 묘역에는 업적을 기리는 충경사(忠景祠)가 있다. 이곳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문화재(제114호)로 지정되었다.
(4) 충간공파(忠簡公派), 충간공 삼자(三子) 간성공파(杆城公派)로 분류
우리는 충경공(忠敬公) 자손이면서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분류된다. 충간(忠簡)은 영의정 재(在, 의령 남씨 5세)의 손자 지(智, 의령 남씨 7세)의 시호이다. 지의 자는 지숙(智叔)이며, 지(智)의 아버지는 증영의정 병조의랑(贈領議政兵曹議郞) 경문(景文, 6세)이다.
17세 때 감찰이 되었고, 세종 때 경상도 경력(經歷)?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의성군(宜城君)을 습봉(襲封), 동부대언이 되었다. 1435년(세종17년) 형조 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올 때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한 질을 받아왔다. 1439년 대사헌?경상도 관찰사?형조 판서?호조 판서를 지냈다. 1446년 소헌왕후 심씨가 폐비로 승하하자 자청하여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년) 우의정을 거쳐 1451년 좌의정이 되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고명을 받았으나 그 해에 풍질로 벙어리가 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딸이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할 때에도 풍질로 인해 화를 면했다. 세상을 떠난 뒤 1489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총명하고 풍도가 단중하며 담지가 있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있다.
지(智)는 윤(倫), 칭(?), 구(?), 휴(休), 의(儀)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윤(倫)의 후손을 감사공파(監司公派), 둘째아들 칭(?)의 후손을 부정공파(副正公派), 셋째아들 구(?)의 후손을 간성공파(杆城公派), 휴(休)의 후손을 별좌공파(別坐公派), 의(儀)의 후손을 참판공파(參判公派)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충간공의 삼자(三子) 구의 후손이므로 충간공 삼자 간성공파(忠簡公 三子 杆城公派)에 해당한다. 구(?)는 조선조에 간성군수를 역임하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와 같은 계보로 보아 우리는 재(在, 5세)-지(智, 7세)-구(?, 8세)를 거치는 충경공((忠景公)자손, 충간공파(忠簡公派), 그 중에서도 간성공파(杆城公派)로 분류된다.
(5) 설애공파(雪厓公派)로 분류
위에서 보듯 우리는 충경공(忠敬公) 자손이면서 충간공파 그 중에서도 간성공파로 분류되는데, 11세의 언진(彦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설애공파(雪厓公派)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흔히 ‘충경공 자손 설애공파’로도 불린다.
설애(雪崖)는 8세인 구(?)에서부터 ‘구(?)-계(?)-치욱(致?)-언진(彦縝)’으로 이어지는, 의령 남씨의 11세인 언진(彦縝)의 호이다. 따라서 언진은 개국공신 재(在)의 6대손이며 부사(府使) 치욱(致勖)의 셋째아들로 1531년에 출생하였다. 언진은 병조참의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언순(彦純)과 양주?여주 목사와 공조 참의를 지낸 언경(彦經)의 동생이다. 또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언기(彦紀)의 형이기도 하다.
언진의 자는 경보(敬甫)이며,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사복정(司僕正)을 역임하였고, 77세의 장수를 누렸다. 아들인 발(撥,1561-1646)은 문신으로 자는 공제(公濟), 호는 화은(華隱)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 1602년(선조 35년)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3년 헌납(獻納), 이듬해 장령(掌令)을 지내고, 인조 때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러 사직하고, 온양에 은거 80세 때 노인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이후 내 직계는 언진(彦縝)-발(撥)-황(晃)-필성(弼星)-덕하(德夏)-학우(鶴羽)-무관(懋寬)-호(灝)-명채(明采)-계우(啓友)-용원(龍元)-정환(廷煥)-성희(成熙)를 거쳐 나와 내 형제(相玉, 相範, 相祐)로 내려와 다음의 석우(碩祐)와 경우(?祐)로 이어졌다.
세계(世系)에 의하면 할아버지 대의 항렬자 ‘정(廷)’은 의령관으로부터 22세이며, 아버지 대의 항렬자 ‘희(熙)’는 의령관으로부터 23세, 항렬자 ‘상(相)’은 의령관으로부터 24세인 셈이다. 그리고 다음(아들) 대의 항렬자 ‘우(祐)’는 의령관으로부터 25세이며, 손자 대의 항렬자 ‘기(基)’는 의령관으로부터 26세가 된다.
(6) 의령관(宜寧貫)의 항렬표(行列表)
같은 혈족 간에 있어서의 관계를 표시하는 계급을 항렬(行列)이라 하는데, 이 항렬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 두 자 가운데 한 자는 공통으로 함께 사용한다. 이 때 사용하는 글자를 항렬자(行列字)라고 하는데 상(相)자 이후 항렬자는 오행상생(五行相生-木火土金水)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항렬자를 표로 보인 것을 항렬표(行列表)라고 한다. 항렬자는 첫 자와 끝 자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데 의령관의 항렬표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