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10) 2018. 10. 11
은혜와 감격이 눈물과 통곡으로
삼상 6:19-7:2
<법궤가 돌아오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감당하지 못했던 블레셋은 결국 이스라엘로 돌려주기로 결정합니다.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점술가들 불러 어떻게 돌려주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점술가들은 두 가지 제안합니다.
먼저 속건제물(배상금)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탈취한 데 대한 배상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섯 성읍의 수대로 금 독종 5개와 금 쥐 5마리를 만들었습니다. 금 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입었던 질병의 종양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처럼 재앙의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저주가 풀리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상식을 벗어난 제안을 합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아니한 젖 나는 암소 둘을 끌어다가 여호와의 궤와 속건제물인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실어 보내자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블레셋에 일어난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놀랍게도 암소들은 벧세메스를 향하여 똑바로 걸었습니다.
‘울며 갔습니다.’ 새끼를 두고 어찌 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돌아서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걸었습니다. 마음은 좌우로 치우쳐 돌아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손이 막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마치 누가 고삐를 잡고 끄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인 벧세메스까지 정확하게 갔습니다. 그것도 두 마리가 함께...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며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빼앗긴 하나님의 언약궤가 7개월 만에 스스로 돌아온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겨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것으로 알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것과 같은 감격과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되찾아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감격한 벧세메스 사람들은 즉석에서 수레를 패서 땔감을 만들고 그 암소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의 은혜와 감격은 금방 눈물과 통곡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19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여호와의 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무려 ‘(오만) 칠십 명’이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오만'이라는 말이 오역이며, 이때에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 명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서 '오만'이라는 숫자가 괄호 안에 기록된 것은 필사자의 실수로 쓰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후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 7만 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칠십 인’이 죽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Keil, Smith, Fay).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 역시 이때에 죽은 사람이 ‘칠십 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Antiquities, vi, 1, 4).
왜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의 언약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인데,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이 새겨 진 두 돌판이 들어 있었고,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반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민 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17-20 “여호와께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말지니/ 19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할 일과 그가 멜 것을 지휘하게 할지니라/ 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성물)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광야에서 성막을 옮겨야 했을 때에는 제사장들이 먼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등으로 그것을 덮은 후 언약궤를 메고 나가도록 하였으므로 그것을 운반하는 사람들조차 언약궤를 바라볼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언약궤는 운반할 때 손으로 조차 만질 수 없었고, 언약궤에 달린 고리 안으로 금을 입힌 봉을 집어넣어, 고핫 자손들이 어께에 메야했습니다.
이 지성소 안으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올 수 있었고, 그 대제사장만이 이 언약궤를 볼 수 있었는데, 그도 일 년에 단 하루만 그곳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조차도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갈 때는 옷 가장자리에 작은 종들을 달았고 발목에는 밧줄을 감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기다리면서 그 작은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딸랑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한 그들은 제사장이 아직 무사한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소리가 한 동안 안 들릴 때에는 밧줄을 당겨 죽은 제사장을 끌어내야만 했습니다. 시체를 가지고 나오려고 들어갔다가는 그들마저 죽을 것이었음으로 밧줄을 당겨 시체를 끌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귀중히 다루어야 하는 성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호기심에 ‘여호와의 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을 후일에도 일어났습니다.
훗날 다윗이 기럇여아림(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이 있는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가져오려 했습니다. 이 때 그동안 언약궤를 관리하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앗사와 아효)이 운송을 책임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않습니다. 금을 입힌 봉을 고리 속으로 꿰어 고핫자손으로 메고 오지 않고, 새 수레를 만들어 그 위에 싣고 소들로 하여금 끌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이라는 곳에 이르러 소들이 뜀으로 언약궤가 흔들려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손을 뻗쳐 언약궤를 붙잡는 순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웃사는 레위인이었을 것이므로 율법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궤는 약 70년간 웃사의 아버지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웃사는 어렸을 때부터 궤에 관한 율법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께 분을 내었고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이란 사람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언약궤로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는 것을 본 다윗은 석 달 후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옵니다. 이번에는 옳은 방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메고 오게 하였고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 제사를 드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삼하6:1-15). 그만큼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성한 물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언약궤는 어디 있는가는 물론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진 이후 법궤도 사라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솔로몬 왕이 제1성전을 건축할 때에 그는 이미 하나님의 영의 계시로 성전이 결국 파괴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성전이 있던 지하에 밀실을 만들어, 성스러운 성전 기구들이 위험에 처할 때 여기에 숨기도록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성전산 밑에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발견을 못합니까? 예, 지금은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장소에 이슬람 사원(황금 돔)이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서쪽벽인 통곡의 벽만 남음). 예전에 이 은닉처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시도된 적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이슬람교의 소요와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답니다. 만일 법궤가 발견된다면 성전이 실제로 존재했음이 밝혀질 것이고, 유대인들이 성전산(聖殿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언약궤를 찾는다면 사상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벧세메스 거민들 중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호기심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지고, 들여다 본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가족을 잃은 백성들은 크게 애곡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호4:6)고 탄식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전했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구원의 복음을 사람들이 알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의 귀중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설 뿐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순간적인 교만과 방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이 들고, 순간적으로 방심하여 그만 들여다보아서는 안 되는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써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이 클 때, 은혜가 클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승리했을 때, 잘 나갈 때, 힘이 생겼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방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교만해 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과거 지향적인 책이 아닙니다. 미래 지향적인 책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바 은혜와 축복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하였습니다.
잘될 때,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법궤를 기럇여아림으로>
그러면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0-21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자신들의 무지와 경솔함을 회개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두렵다고 외치며(“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6:20a)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을 하였습니다(“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회개하기 보다는 언약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보다는 회피하려는 인간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본성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당장의 어려움만 속히 벗어나려는 본성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령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고 부탁합니다. 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약 10㎞ 가량 떨어진 곳으로써 벧세메스가 아직 평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면 이 기럇여아림은 예루살렘 산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보니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궤 때문에 자기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고 왜 이것을 없애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좋은 선물이 있으니 내려와서 그것을 가지고 올라가라”라고만 하였습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벧세메스 주민들의 요청에 기럇여아림 주민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벧세메스 주민의 요청을 받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이 벧세메스로 사람을 보내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 왔습니다.
벧세메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받았을 리는 없습니다.
알았지만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기럇여아림 주민들은 언약궤를 사망의 무서운 도구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궤인 것을 알고 기쁨으로 받고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합니다.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십니다. 아비나답에 대해서는 성경에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훗날 그의 아들들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맡은 것으로 보아(삼하 6:1-5) 레위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는 잘 지키게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말은 제사장을 세우는 데 사용되는 말입니다(출 28:3-41). 이로 볼 때 엘리아살은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법궤를 옮겨옴으로 인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제사장으로 구별하여 세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법궤를 잘 보존하여 블레셋과 벧세메스에서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후 여호와의 언약궤는 다윗이 이 궤를 예루살렘에 옮길 때까지 20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20년은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던 전체 기간은 아닙니다.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 옮겨지기까지 약 70년 동안 보관되었습니다(삼하 6:13, 12:17). 여기서의 20년의 기간은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회개운동을 펼치기까지의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간절하게 사모하였습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