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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무왕 김유신 묘비문
2. 왕산 흥무왕 사대비명 병서(또는 흥무왕 신도비명 병서; 김유신)
3. 신라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공(김유신)신도비문
4. 개국공 순충장렬 흥무왕묘 김선생(김유신)묘갈명
1. 興武王墓碑文(흥무왕 김유신 묘비문)
※이 글은 흥무왕(김유신) 서거 후에 비석을 세우고 공적을 기록했는데, 당시는 아무런 석물(石物)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두기 위하여 지은 짧은 글이다. 당시 부윤(府尹) 남지훈(南至薰)이 숙종(肅宗) 36년(1710)에 지었다.
按東史 公生於新羅眞平王十七年乙卯 卒於文武王朝 命有司立碑紀功云 而今亡焉 上下千有餘載 象山宛然 東京婦孺 皆知爲公之墓 過而敬之
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은 신라 진평왕 을묘년(595)에 나서 문무왕 13년(673)에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공적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 후 천여 년 동안에도 묘지가 완연해서 동경(東京: 경주)의 아낙네들까지도 공의 묘소인 줄 알고 지날 때에는 누구나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
獨惜乎墓道 無麗牲石 竊恐年代寢久 陵變谷遷 泯沒而無傳 玆堅短碣以識之 至若公之巍勳偉烈 昭載史冊 不容評云爾
그러나 아깝게도 묘소에는 아무런 석물(石物)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도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공의 훌륭한 업적(業績)과 위대한 공훈(功勳)은 사책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니, 여기서는 더 소개하지 않는다.
崇禎紀元 周甲子 庚寅 冬
숭정기원 주갑자 경인(1710년) 겨울
府尹 宜寧 南至薰
부윤 의녕 남지훈
2. 王山興武王射臺碑銘 幷序(一云興武王神道碑銘 幷序)
왕산 흥무왕 사대비명 병서(또는 흥무왕 신도비명 병서; 김유신)
해석 ; 2005. 6. 5. 金順大
大提學 黃景源 謹撰(대제학 황경원 삼가 지음)
※이 글은 원래 황경원(黃景源)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한 이듬해, 즉 1752년에 고을의 장로(長老) 류의건(柳宜健) 등이 예전의 비석이 풍우(風雨)에 마멸(磨滅)되자 새로 세울 때에 그들의 요청으로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당고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신라국상장군김공신도비명)’ 이라는 제목으로 쓴 것이다. 내용은 대체로 『삼국사기』「열전」의 내용과 비슷하게 흥무왕의 공적을 서술했는데, 특히 끝에 가서도 "공이 어진 임금을 만남과 무열(武烈)이 공을 신임한 것을 후세에 밝히려 한다." 고하여 삼국통일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이루어 졌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산청의 왕산에 ‘王山興武王射臺碑銘(왕산흥무왕사대비명)’ 이라는 이름으로 앞의 몇 줄을 빼고 옮겨 쓴 것이다.
謹按金公 諱庾信 杞谿人也 曾祖仇亥 金官國王 祖武力 新州摠管 獲{擒}百濟王及其將 斬萬餘級 父舒玄 梁州都督 按撫梁州諸軍事 公年十七 見百濟高句麗 侵軼國疆 慨然有削平二國之志 武德中 都督 率師數千人 伐娘臂城 師大敗 死者甚衆 公怒馬拔所佩劍 跳深坑 擊高句麗 斬將軍 提其首而還 都督 見之 遂乘勝 斬五千級 生擒千人 城中恐懼 皆出降 公 由是 名聞三國
삼가 살펴보면 김공의 휘는 유신(庾信)이니 기계인[1]이다. 증조는 구해는 금관국왕이오, 조부 무력(武力)은 신주총관으로 백제왕과 그 장수를 생포하고 만 여명의 적의 머리를 베었다.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도독으로서 양주의 군사를 총괄하였다. 공의 나이 17에 백제와 고구려가 번갈아가며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두 나라를 평정할 뜻을 두었다. 무덕(武德)년간에 도독(서현)이 군사 수천인을 거느리고 낭비성을 칠 때에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공이 분노하여 찾던 칼을 빼어들고 깊은 구덩이에서 뛰어 올라(몸을 날려) 고구려를 공격하여 장군을 베어 머리를 끌고 돌아오니 도독이 보고 싸움에서 이겨(乘勝) 5천명을 베고 1천여명을 생포하자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 항복하니, 공이 이 일로 인하여 이름이 삼국에 떨쳤다.
[1] 杞谿 ; 기계(杞溪)는 경상북도 영일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국통일 직후 5소경(小京)의 하나인 금관(金官, 현재의 경주)에 속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16년(서기 757) 의창군(義昌郡) 모혜(芼兮 또는 화계(化鷄))현에서 기계현(杞溪縣)으로 개칭 하였고, 현재는 영일군에 편입된 기계면(杞溪面)이 되었다.
기계김씨는 신라의 알지계 완진(玩珍)을 시조로 하는 김씨라고 하는데, 왜 황경원공은 김유신을 경주를 뜻하는 왕경인, 경주인, 금관인이나 또는 김해인이라 하지 않고 기계인이라 했는지 알 수 없다. 이보다 이전에 저술된 삼국사기에는 왕경인이라 하였다.(金庾信王京人也)
初百濟兵入梁州 公子春秋所愛女 與其夫品釋 死之 公子欲乞平壤兵 以報百濟 爲公言曰春秋聘于高句麗 若見殺則子來救乎 公 奮然曰公子不還則庾信 請率精兵入車門 必踐高氏之庭 不如是則何以復見公子乎 春秋大悅 則噬指 與公爲盟 入高句麗六十日 囚于獄中 不得還 公 募勇士三千人 慷慨語曰公子入高句麗爲所囚 爾三千人 其可不沫血蹈難乎 衆 皆曰敢不從令 遂建議伐高句麗 會諜者浮屠德昌 告高句麗曰庾信 建議將出師 以救公子 高句麗厚禮公子而歸之
전에 백제의 병사가 양주에 쳐들어 왔을 때 공자 춘추(春秋)의 따님과 사위 품석(品釋)이 죽었더니[1], 공자가 평양에 구원을 청하여 백제에 보복하고자 하며 공에게 말하기를, 춘추가 고구려에 갔다가 만일 죽임을 당하면, 공이 와서 나를 구원하겠는가. 하니 공이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공자가 돌아오지 못하면 유신이 정예병사(精兵)를 이끌고 수레의 문에 들어가(지휘하여?) 반드시 고씨의 정원을 밟을 것이다(고구려를 섬멸할 것이다). 이 같이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공자를 볼 수 있겠는가." 하니, 춘추가 크게 기뻐하며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어> 공과 함께 맹서하였다. 고구려에 들어간 지 육십여 일이 지나도 옥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다. 공이 장사 3천 명을 뽑아 비장하게 말하기를, "공자(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가 옥에 갇혔으니 너의 3천 명은 함께 피를 뿌려 이 어려움에 따라가 보지 않겠는가." 하니, 군중이 다 말하기를 “<누가>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글을 올려 고구려를 칠 때 우연히(會) 간첩인 승려(浮屠) 덕장이 고구려에 알려 "유신이 의논하여 군사를 내어 공자를 구원하려한다." 하니, 고구려가 공자를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편. 선덕왕11년(642년) 8월 대야성 전투에서 품석과 그의 아내가 사망
貞觀十八年 公 爲上將軍 伐百濟 拔其七城 居四月 百濟盛兵屯界上 謀犯王城 王大恐 命公趣兵 公繕兵 卽日西征 其妻子 皆出門外以遲之 公 驅馬 不顧而去 及至界上 百濟人 望公兵衛 不敢犯 於是 乃退 公子歸自高句麗 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 有庾信者 爲人何如 公子對曰 庾信 雖少有才智然 寡國 不藉天威則百濟 豈易除耶 太宗曰 新羅忠順 誠君子之國也 乃詔將軍蘇定方 帥師二十萬 往征百濟
정관(貞觀) 18년(644)에 공이 상장군으로 백제를 쳐서 7개의 성을 빼앗았는데, 4개월만에 백제가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왕성을 치려고 하자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공에게 출전을 명했다. 공이 군사를 모우고 정비하여 그 날 서쪽으로 출정하니 처자(妻子)가 문밖에 전송하여도 공이 말을 몰아 돌아보지 않고 가서 국경에 이르렀다. 백제군이 공의 병사들의 위엄을 보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여기서 물러갔다. 공자가 고구려에서 돌아와 당나라로 건너가서 군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태종황제가 이르기를, "네 나라에 유신이 있다 하니 어떠한 사람인고."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유신이 비록 조금 지혜는 있으나 소국(小國)이 천자 <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백제를 정벌하는 것이 어찌 쉽게 되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신라는 충성스럽게 도리를 잘 따르니(忠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하고,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게 하였다.
是時 公在梁州軍 飮酒作樂 若無意於軍事 州人 謗之曰三軍 晏居日久 騎有餘勇 步有餘銳 可以一戰 而將軍 恒醉 奈何 公聞之 知民可用 請伐百濟 以報梁州之役 王許之 公遂簡兵入百濟 百濟以卒拒之公 佯北 至玉門谷 伏兵 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一千餘級
이 때에 공이 양주의 군중에 있으면서 술과 풍류를 즐기고 군사에 뜻이 없는 듯하니, 고을 사람이 비방해 말하되 "삼군(三軍)이 오래 편안해서 기병은 용맹스럽고 보병은 날래어서, 마땅히 한번 싸움직 하거늘 장군이 항상 술에 취해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공이 듣고 백성들이 이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백제를 쳐서 양주의 원수를 갚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공이 군사 몇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입하니 백제가 병졸을 내어 막았는데, 공이 거짓으로 패배한 채 하여 옥문곡에 이르러 복병(伏兵)을 내어서 그들의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백제 장군8명을 사로잡고 머리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乃遣使者 告百濟曰 忠臣品釋 及其妻烈女金氏 死於爾國 埋獄中者七年矣 今爾國將軍八人 爲我所獲 匍匐請命 庾信以隣國之義 不忍殺之 今爾國 發一使者 送死者二人之骨 易生者八人 可乎 百濟仲常 言於王曰 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乃函品釋夫妻之骨 以歸之 公 立遣將軍八人還 百濟明日 乘勝拔百濟十有二城 斬二萬級 虜九千人 未幾又 入百濟境 拔其九城 斬九千級 虜六百人 論功進上州行軍大摠管
이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 고하기를, "충신 품석과 그 아내 열녀 김씨가 네 나라에 죽어 옥중에 묻힌 지 7년째이다. 이제 네 나라 장군 8명이 나에게 잡혀 엎드려 기면서 살려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유신이 이웃나라의 의리를 생각해 차마 죽이지 못하니 지금 너희 나라에서 한사람의 사신에게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사람 여덟 명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백제의 중상이 왕에게 간하기를, "해골을 두어 쓸데없으니 보냄이 옳습니다." 하니, 이에 품석 부부(夫妻)의 뼈를 함에 넣어 보내와 공이 장군 8명을 돌려보냈다. 백제를 다음날 다시 쳐서 이겨 백제 12성을 빼앗고 2만 명을 죽이고 9천 명을 생포했으며, 얼마 후에 또 백제 국경으로 들어가 그들의 9성을 뺏고 9천 명을 죽이고 6백 명을 생포하니 그 공으로 상주 행군대총관에 올랐다.
公子春秋歸自唐 以定方兵二十萬 來攻百濟 語公曰 春秋 生還本朝 復與公 相見於此 豈非命耶 公對曰 庾信 仗國威靈 與百濟交刃而戰拔其城二十有一 斬首虜三萬九千六百人 使品釋夫妻之骨 得反鄕里 此 天也 吾何力焉 公子終身感其義
공자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소정방의 군사 20만으로 백제를 칠 때에 공에게 이르기를, "춘추가 살아 고국에 돌아와 다시 공과 같이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유신이 나라 위엄과 영령에 의지하여 백제와 서로 칼로 싸워 그 성 21개를 빼았았고 3만 9천 6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품석 부처의 뼈를 찾아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 왔으니, 이 또한 하늘의 도움입니다. 어찌 나의 힘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평생 그 의에 감복했다.
二十二年 百濟兵 入石吐城 公分其軍爲五道 以禦百濟 有水鳥飛過公營 諸將士以爲不詳 公 謂衆曰 今夜 必有百濟人來諜者 堅壁毋動 待明日援兵大至而後戰 諜者聞之 告百濟 百濟將軍殷相等 疑有援兵 不攻擊 於是 公自道薩城 出旗趣戰 五道兵 前後合攻殺 將軍殷相等十人 虜將軍正仲等百人 斬其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萬匹 將軍正福 以其兵一千 來降 皆釋之
22년에 백제의 병사가 석토성을 쳐 들어오니 공이 군사를 5도로 나눠 백제를 막았는데 난데없는 물새가 공의 진영을 날아 지나가니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의아해 했다. 공이 군중에 말하기를, "오늘밤에 반드시 백제인이 첩자를 보낼 것이니 성문을 굳게 막고 음직이지 말아라. 내일을 기다려 구원병이 많이 오면 그 후에 싸울 것이다." 하였다. 첩자가 듣고 백제에 고하니, 백제 장군 은상 등이 구원병이 있다는 것을 의심해서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이에 공이 도살성으로부터 나와 깃발을 세우고 쳐들어가니 5도의 군사가 앞뒤에서 합동으로 공격하여 장군 은상 등 10명을 죽이고 장군 정중 등 1백 명을 사로잡고, 그 백제 군졸 6천 9백 8십 명을 죽이고 말 만필을 노획하였으며, 장군 정국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항복하였으나 다 놓아주었다.
永徽五年 王薨無嗣 公言於朝曰 公子春秋 當立 群臣 皆曰微將軍 孰建大策 乃迎春秋 入卽位 三國 翕然稱賢王 明年秋公 伐百濟 告于王曰 百濟無道 其暴虐 甚於桀紂 此王者伐罪之時也 王以爲然 顯慶五年 大興兵將伐百濟
영휘 5년(654)에 왕(선덕여왕)이 세상을 떴으나 태자가 없었다. 공이 조정에 말하기를, "공자 춘추를 세움이 어떠합니까."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군이 아니면(微) 누가 대책을 세우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춘추를 맞아서 왕위에 오르니 삼국이 모두 그 현명한 왕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공이 백제를 치고자 왕께 아뢰기를, "백제가 도리에서 벗어나고 그 포학함이 걸주(傑紂)[1]에 더하니, 그 왕이 벌을 받아야 할 때 입니다."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현경(顯慶 : 당나라 고종의 두 번째 연호) 5년(660)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1]傑紂; 중국 고대 은나라의 30대 천자라고 하는 폭군의 군주이다.
會天子詔大將軍蘇定方 率樓船軍十三萬 次德勿道 遣使者文泉 來告王 乃與世子法敏 出南川 以公及眞珠天存 爲將軍 具船百艘 載兵士 會定方軍于德勿島 定方謂世子曰 世子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城 世子來告王 率將士至沙羅
마침 천자가 대장군 소정방에게 조서(詔書)를 보내어 누선군(樓船軍) 13만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집결하게 하고 사자 문천을 보내 왕(태종무열왕)에게 고했는데, 세자 법민(法敏)을 남천(南川;현재의 서울 한강이라는 설이 있음)으로 보내고 공자와 진주 및 천존을 장군으로 삼아 배 100척을 준비하여 군사를 태우고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합세했다. 정방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성에 모이자." 하니 세자가 왕에 고하고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사라(沙羅;지금의 尙州)에 이르렀다.
定方軍 入依伐浦海岸 泥濘不可行 乃布柳席以出軍 圍百濟城 公潛師 奪扶蘇山 百濟亡 公功居多 天子下詔褒嘉之 定方謂公曰 吾欲分百濟之地 爲公食邑 如何 公對曰 大將軍以天子兵 滅百濟 報下國之讐 慰寡君之心 寡君及一國軍民 蹈舞不暇而庾信 及受食邑以自利 非臣義也 遂不受 定方 以是 知其忠
정방의 군사가 벌포 해안으로 들어갈 때 땅이 질어 가지 못하여 버드나무로 만든 자리를 깔아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백제성을 포위하고, 공이 군사를 숨겼다가 이를 이용하여 부소산을 뺏으니 백제가 망했다. 공이 이룬 공로가 많아 천자가 조서를 내려 크게 포상하며 기뻐하였다. 정방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백제의 땅을 나눠 공의 식읍을 정하려 하니 어떠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장군이 천자의 병사로서 백제를 멸망시켜 우리의 원수를 갚고 우리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여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백성이 기뻐하며 춤추기에도 바쁜 데, 유신이 식읍을 받아 자신의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받지 않으니, 정방이 이로서 그 충심을 알게 되었다.
龍朔元年 定方 率師征高句麗 公從戰 次于南川 百濟王從子福信 據公瓦城 遮三軍不得直前 公 進兵薄于城下 遂圍之未幾 城陷 公於是 引兵而前
용삭(龍朔) 원년(661년)에 정방이 군사를 몰아 고구려를 칠 때, 공이 같이 전쟁에 참여하여 남천에 이르니, 백제왕(무왕)의 조카(從子) 복신(福信)이 공와성(옹성(瓮城)을 가리킴. 지금의 대전 회덕)에 웅거(雄據)하여 막고 있어 삼군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공이 성 아래로 병사 몇 명 만을 진격시켜 에워싸니 얼마 안되어 성이 함락되어 공이 이에 군사를 끌고 전진하였다.
王遣使 迎勞定方於平壤 定方曰 定方受命 涉大海入高句麗 艤舟海門者踰月矣 軍不至 糧食且絶 定方 烏得以不歸乎 王患之公 流涕曰 國家有事 臣雖死 義不可避 請入平壤 從唐師一戰而死 王大喜 執公之手 且泣曰 得公賢弼 寡人 可以無憂矣 公旣受命 卽閉戶 焚香齊戒然後 行士卒感動
왕이 사신을 보내 평양에 있는 정방을 위로했는데 정방이 말하기를, "네가 명을 받아 큰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들어와 해안(海門)에 배를 대인지 한 달이 넘었으나 구원병(救援兵)이 오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니, 내가 어찌 돌아가지 아니하겠는가." 하니, 왕이 근심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신하가 죽을지언정 피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평양에 들어가 당나라 군사와 같이 한번 싸워 죽으려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며 공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공 같은 현명한 신하를 두었으니 나는 아무 근심이 없도다." 하였다. 공이 명을 받자 문을 닫고 향을 살라 기도한 뒤에 가니 군사들이 감동하였다.
明年正月 入平壤 至七重河 諸將懼 莫肯先登 公揮戈 先自登船渡河 兵威甚盛 粮道不絶
다음 해 정월에 평양에 들어가서 칠중하(七重河;지금의 임진강)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 오르지 못했으나 공이 창을 휘두르며 먼저 배에 올라 하천을 건너니 병사들의 위세가 충천했고 양식이 넉넉했다.
抵蒜壤 與諸將誓曰 庾信 旣滅百濟 又進兵千里渡河者 欲藉天之力 滅高句麗 願諸將翕心一力 破平壤 以奏成功 諸將皆曰 敢不遵將軍之命 至獐塞 會天大寒 公露肩策馬前駒 士無不勞力赴敵 皆流汗不知其寒 遂踰險 次于楊隩 公先使庶子軍勝 入定方營 餽軍糧 定方大喜
산양(蒜壤)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명세하기를, "유신이 이미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군사를 천 리나 움직여서 강을 건넌 것은 천자의 힘에 의지하여 고구려를 멸하고자 함이니, 원하건대 여러 장수들은 마음과 힘을 모아 평양을 쳐서 그 공을 이루게 하라."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감히 장군의 명을 쫓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장새(獐塞; 현재의 황해도 遂安)에 이르니 마침 날씨가 아주 추웠는데 공이 어깨를 드러내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에서 달리니 군사들이 힘을 써서 적에게로 나아가니 모두 땀이 흘러 추위를 잊었다. 드디어 험한 곳을 뚫어 양오(楊隩)에 이르자 공이 먼저 서자(庶子) 군승(軍勝)에게 정방의 영내(營內)에 들어가게 하여 군량미를 보내주니 정방이 기뻐하였다.
高句麗陰遣精兵 伏瓢河 伺公渡岸 公軍少 乃積柴草 夜燃之 使烟火百里相屬 以桴鼓 繫牛尾而搖之 牛驚走 桴鼓俱鳴 高句麗遂不敢犯 公旣渡岸分諸軍 擊高句麗大破之 斬萬餘級 虜將軍一人而歸 後八年 公弟欽純 入平壤將行 從公受方略 滅高句麗
고구려가 몰래 정예의 병사를 보내 표하(瓢河; 임진강 하류)에 매복시키고 공이 하천을 건너는 것을 살피게 했다. 공이 군사가 적어 잡목과 풀을 쌓아 놓고 밤에 불을 지르니 연기가 백 리에 보였고, 북채와 북을 소꼬리에 매달아서 흔들거리자 소가 놀라 달리니 북채와 북이 어지럽게 울려 고구려가 감히 범하지 못했다. 공이 하천을 건너서 여러 군사를 나누어 고구려를 쳐서 크게 부수고 만여 명을 죽이고, 장군 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그 뒤 8년 후 공의 아우 흠순(欽純)이 평양에 쳐들어가 공을 따라서 공의 방법과 책략을 받아 고구려를 멸하였다.
王 敎曰庾信 率師平二國 功績茂焉 其予食邑五百戶 賜輿杖 上殿不趨 天子遣使 冊平壤郡開國公 詔公入朝 不果行
왕이 하교하기를, "유신이 군사를 몰아 두 나라를 평정하니 공적이 아주 많다." 하고, 그에게 식읍 5백 호를 주고 여장(輿杖; 특별한 지팡이)을 주고 임금에게로 올 때에 간섭받지 않았다(不趨). 천자가 사자를 파견하여「평양군 개국공(平壤郡開國公)」을 책봉하고, 공에게 당나라의 조정에 들어오라고 명했으나 이를 행하지 못했다.
百濟旣亡 其大夫黑齒常之 遲受信葆任存山 復百濟二百餘城 公治軍 凝然不動 出奇計授劉仁願以平之
백제가 망하자 그 대부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산을 지키며 백제의 2백여 성을 돌 찾았으나, 공이 군사를 정비하여 동요하지 않게 하고 기묘한 계획을 짜내어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평정하게 했다.
後九年 公 寢疾病 王臨問 爲之泣下曰 卿疾如 不可諱 於社稷何 公對曰 臣愚不肖 賴殿下用之不疑故 得成尺守之功 今三國 旣爲一家 可謂少康 然自古 繼體之君 鮮能有終 願殿下 疎遠小人 親近君子 使基業 垂于無窮 臣死 亦無憾矣
그 후 9년에 공이 병으로 누웠는데 왕이 문병하고 눈물을 흘려 말하기를, "경의 병이 여의치 못하면 사직을 어찌할꼬."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d 우매하고 못나서 전하께서 등용해 주시고 의심치 않으셔서 아주 작은(尺寸) 공을 이루어, 이제 삼국이 이미 한집이 되었으니 편안해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로부터 대통을 이어받은 군주는 끝까지 잘 마치는 것이 드무니, 원컨대 전하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두고 친히 해서, 국가의 기반을 영원토록 보존하면 신이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다." 하였다.
以咸亨四年七月一日 卒于正寢 享年七十九 訃聞震悼 命有司 賜帛千匹租二千石 賻恤其家 葬之日 特賜鼓吹一百人 以備軍樂 又賜民戶 守其墓 後贈王爵 諡曰興武
함형(咸亨) 4년(673) 7월 1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79세였다.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유사에게 명하여 비단 1천 필, 벼 2천 석을 주어 그 집에 부의(賻儀)하고, 장례 하는 날에 특별히 장구와 피리부는 사람 1백 명을 주어 군악(軍樂)을 갖추고, 또 사람들(民戶)을 시켜 그 묘를 수호하게 하였고, 뒤에 왕의 작위(爵位)을 추증하고 시호를 「흥무(興武)」라 했다.
公機明 不出里巷而 能知隣國之事 嘗夜 徐步出門外 有男子自西而來 公心知平壤諜者 使之前曰 爾國有某事乎 諜者震悼 不能對 公正色曰 吾王仁聖 上不違皇天之命 下不逆兵民之心 爾往告爾國君臣 無勞游士行諜爲也 謀者遁去 高句麗 聞之大驚曰 庾信神明 不可輕也
공은 명철함은 동네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능히 이웃나라 사정에 밝았다. 일찌기 밤에 문밖에 거닐었는데 한 사내가 서쪽에서 걸어오니, 공이 마음속으로 평양의 간첩임을 알고 그 앞에서 말기를, "네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첩자가 두려워 대답지 못하니 공이 얼굴빛을 엄하게 하고 말하기를, "우리 왕이 인자하고 성스러워 위로 천명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니, 너는 가서 네 나라 임금과 신하에게 고하여 부질없이 간첩행위를 하지 말라고 일러라." 하니 첩자가 도망갔다. 고구려왕이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유신의 신과같은 명철함은 가벼이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公爲將二十四年 能下士得其死力 蘇定方 圍高句麗 旣七月 軍中食盡 將班師 公憂之 與步騎監裂起 語曰庾信載糧以行 汝先告定方軍中 毋令班師 裂起遂從仇近等十五人 抵平壤 言庾信轉輸而來 定方悅 遂不班師 金官太祖曰首露 自漢建武十八年 王金官國 至仇亥 降于新羅 其後子孫 仍三世爲名將家
공이 장수가 된지 24년에 능히 병사에게 자신을 낮추고 죽을힘을 다하게 했다. 소정방이 고구려를 포위한지 일곱 달만에 군중에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자 공이 근심하며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에게 말하기를, "유신이 군량을 싣고 갈 것이니, 너는 먼저 가 정방 군중에 고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 열기가 구근(仇近) 등 15명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가 유신의 말을 전하고 <식량을> 운반하여 온다고 하자 정방이 기뻐하며 돌아가지 않았다. 금관국 태조는 수로왕이니, 한(漢) 나라 건무(建武) 18년(42년) 금관국의 왕이 되었고 구형(仇亥:仇衡)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였으나. 그 후 자손의 3세에 명장이 난 집안이 되었다.
公夫人 新羅金氏武烈王 第三公主也 生子五人 長曰三光 天子召爲中郞將 次曰元述 次曰元貞 次曰長耳 次曰元望 庶子一人 卽軍勝 石門之役 將軍義文 力戰死 元述 亡走不能死 公言可斬 元述慙 莫敢請見 及公卒 請見其母金夫人 金夫人 怒曰 爾旣不得見爾父 吾焉得爲爾母乎 卒不見之 諸宗族 皆服其嚴
공의 부인은 신라 김씨 무열왕의 셋째 공주로 아들 다섯을 낳으니, 맏이 삼광(三光)은 천자가 불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다음은 원술(元述), 다음은 원정(元貞), 다음은 장이(長耳), 막내는 원망(元望)이오, 서자 한 사람은 곧 군승(軍勝)이다. 석문(石門)의 싸움에 장군 의문(義文)이 힘껏 싸우다 죽었으나 원술은 도망하여 죽지 않았는데, 공이 호령하여 죽이라 하니 원술이 부끄러워 감히 공을 뵙기를 청하지 못했다. 공이 죽은 후 그 모친인 김 부인을 뵙기를 청하였으나 김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부친을 뵙지 못했거늘 어찌 네 어미를 볼 수 있겠는가." 하며 마침내 만나지 아니하니, 여러 종족(宗族)이 모두 그 엄숙함에 탄복했다.
公當三國交爭時 以上將軍 兼百濟幷高句麗 百餘戰 威震天下 然不遇武烈之明則流言終 必間之 公 安能成其功哉
공이 삼국과 싸울 때에 상장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아울러서 백여 번 전투를 벌여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그러나 무열(武烈)처럼 현명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흘러가는 말로 끝났을 것이고 반드시 이간질이 있었을 것이니, 공이 어찌 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王氏時 門下侍中金富軾 爲公列傳 多傳 會不足考信 今景源 銘公之石 惟叙公之所以得君 與武烈之所以任公者 詒于後世 其銘曰
왕씨의 나라(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부식(金富軾)이 공의 열전(列傳)을 썼는데, 족히 고증하기에 부족한 것들이 많다. 지금 경원이 공의 비문을 짓는데 서문에 공이 어진 임금을 만난 연유와 무열(武烈)이 공을 신임한 것을 후세에 전하려 하며 아래와 같이 새긴다.
曁曁金公 都督之子 摠帥之孫 其猛如兇 天立三社 兵張不弛 父征子戌 繹騷千里
현철한(굳센) 김공은 도독(都督)의 아들이요, 총수(總帥)의 손자로 용맹이 두려워하게 하네. 하늘이 세 나라를 세우니 병화(兵火)가 끊임없어 부자(父子)가 싸움터로 나가 천 리가 소란(소요)했네.
公哀斯民 矢一土疆 結髮取旗 武震四方 公子西聘 幽于園墻 公請移師 于浿之陽
공이 백성을 아껴 통일을 맹세하여 성년(成年)이 되자 깃발을 날리니(취하니) 무예가 사방에 진동했네. 공자(公子)가 서쪽으로 찾아가 옥(獄)에 갇히자 공이 군사를 청하여 패수(浿水)를 넘었네.
公子乃還 入覲天邑 帝感其忠 德音撫輯 公乃定策 公子是立 有赫玄鉞 天誅斯急
공자가 풀려 돌아와 <당나라에 들어가> 천자께 뵈니 천자는 그의 충정에 감동되어 칭찬하며 포상을 내렸네. 공의 계책으로 공자를 왕으로 세우고 서릿발 같은 창과 검으로 반역자를 베었네.
扶蘇嶪嶪 王旅來蹂 鞹鞃孔奭 鳥章厹矛 介曺弓矢 克復王讐 不受食邑 養聞皇州
부소산 높은 곳을 왕의 군사가 짓밟으니 명장(名將)은 나열하고(가죽에는 큰 구멍이 나고?) 무기(武器)는 빛이 나네. 갑옷과 궁시(弓矢)로 왕의 원수를 갚았으나 식읍(食邑)을 사양하여 의리가 중국에 소문났네.
郭彼蒜壤 誓我六師 天寒肩瘃 流汗中逵 鼓聲在尾 萬牛驚馳 終取王儉 由公出奇
강포(强暴)한 평양이 우리 군사를 격동시키니 북방의 추운 지역에서 가슴에 땀방울 서렸네. 북소리 진동하니 일만 마리 황소가 달려 마침내 왕검성(王儉城)을 취한 것은 공의 기묘한 계책이요.
二邦旣定 維公之功 帝降誥命 冊玆上公 西嶽有墓 其碑維豊 守臣銘之 用勸元戎
두 나라를 평정한 것은 오로지 공의 공로이니, 천자가 명을 내려 상공(上公)을 봉했네. 서악의 묘소에 비석도 우람하니, 부윤이 글을 지어 큰 공적을 권장(勸獎)하네.
大提學 黃景源 撰
대제학 황경원[1] 찬
[1]黃景源; 1709(숙종 35)∼1787(정조 11).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이다. 황기(黃璣)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 · 문장가이다.
영조 3년(1727) 생원(生員)이 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고, 영조 16년(174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그 뒤 검열(檢閱) · 병조좌랑(兵曹佐郞) · 대사성 · 대사간 · 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을 지냈다. 영조 37년(1761)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이재(李縡)의 상언 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 · 합천에 유배되었다. 그 후 왕명으로 고향에 방환되었다가 복관(復官)되어 이조참판 겸 대제학에 이어 형조 · 예조 · 공조판서를 지냈다. 정조대에는 이조판서 · 활인서제조(活人署提調)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죽었다.
그는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삼례(三禮)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 밝아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했으며, 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절의를 지킨 사람을 들어 《명조배신고(明朝陪臣考)》를 지었다. 그 외에 저서로 《강한집(江漢集)》이 있고 글씨도 잘썼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按有唐 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舒援翰太大角干諡純忠壯熱興武王金公墓在慶州府西岳原故 大學士黃公景源撰 神道碑銘 公以文章鳴 序事甚詳以簡 興武事蹟備述於此故 今因以重刻于王山之興武射臺碑 但興武七年侍陵之蹟有所闕漏 然亦顯于趙公李公兩君子所撰 首露仇衡兩王碑銘焉
생각해보면 당(唐)에서 봉상정경(奉常正卿)과 평양군 개국공(平壤郡開國公)으로서 식읍(食邑) 2천호(戶)에 봉하였으며, 신라국 상장군 서발한(舒發翰) 태대각간으로 충장열흥무왕의 시호를 받은 김공의 묘가 경주부의 서악원에 있어, 대학사 황경원이 신도비명을 찬술하였다. 황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드날렸으며 서문이 아주 상세하고 간결하다. 흥무왕 사적을 정리하여 여기에 서술해 놓았으니, 지금 왕산의 흥무왕 사대비에 이를 새긴다. 단 흥무왕이 7년간 묘를 지켰다는 사적은 누락되어 있으나 이는 조공(조진관)과 이공(이병정)의 양 군자가 찬한 수로 구형 두 왕의 비명에 나타나 있다[2].
[2] 이병정이 찬한 ‘仇衡王畵像碑銘’에는 김유신이 구형왕릉을 7년간 시묘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조진관이 찬한 ‘山淸懸王山王陵碑銘’에는 위의 시묘 관련 내용이 없다.
[참고] 다음은 황경원이 찬한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의 첫 구절이다.
景源旣爲慶州尹 明年三月 其長老柳宜健等 來告曰 有唐奉常正卿 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新羅國上將軍金公 葬在西嶽原 舊有大碑 咸亨中 立于墓隧 而石刻 歲久剝缺 其公德 今不可考 諸士民 各出其材 更具石 欲得當世之有文章者 爲之銘辭 今夫子來爲州尹 宜健等 敢以爲請
경원(景源)이 경주 부윤(府尹)이 되었는데, 다음해 3월에 그 고을의 장로(長老) 류의건(柳宜健) 등이 와서 말하기를, "당(唐) 나라 봉상정경(奉常正卿)으로 추존되고, 평양군 개국공(平壤郡開國公)으로 식읍(食邑) 2천호(戶)를 받은 신라국 상장군김공(新羅國上將軍金公)의 묘소가 서악원(西嶽原)에 있습니다. 예전에 큰 비석이 있어서 함형(咸亨)[3] 중에 묘수(墓隧;묘로 통하는 길)에 세웠으나 석각(石刻)이 세월이 오래되자 부서지고 떨어져나가 그 공덕(功德)을 지금은 상고(詳考)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사민(士民)들이 각각 재물을 갹출(醵出)하여 다시 돌을 마련하고 당세(當世)에 뛰어난 문장가를 찾아 명사(銘辭)를 청하려고 했더니, 지금 부자(夫子)께서 <우리> 주의 부윤으로 오셨으니 의건(宜健) 등이 감히 청합니다." 하였다.
[3]咸亨; 당나라 3대 황제 고종의 연호. 670년~673년(673년은 김유신 卒연도)
3. 新羅太角干純忠壯烈興武王神道碑銘
신라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공(김유신)신도비문
原文 : 1978年刊 安敬公派譜
譯文參考 : 2000年刊 崇武殿誌
解釋 :2006. 11. 19. 金順大
※ 이 신도비문은 계유년(1933) 2월에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받아두고 비석까지 마련했던 것이나, 사정에 의하여 중지된 것을 병신년(1956)에 각자하고 이듬해 정유년(1957) 3월 7일 춘향(春享) 후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내용 가운데 흥무왕이 당나라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辰土 當三國分峙 互尋干戈 民以胥困 其混一區宇 用靖有衆 成於羅氏 時則 有若太大角干金公 誓志髫丱 精裂金石 英氣卓躒 沉略內蘊 忠勇冠時
동방의 강토가 삼국으로 나누어져 대치하던 당시에 서로 침입하여 간과(전쟁)를 벌이니 백성들이 모두 곤궁하였으나 그 국토를 하나로 통일하여 백성대중을 안정시킨 것은 신라시대에 이루어졌다. 그 때인 즉 태각간 김공(김유신) 같은 분이 있어서 어릴 때에 뜻으로 맹세하니 정신은 금석을 찢을듯하고 뛰어난 기상은 탁월하며 깊은 도략을 마음속에 쌓았고 충성과 용맹은 시대에 으뜸이었다.
方其免冑訣父 突敵破壘 才弱冠耳 迨勳勩浸著 竭蹶逾至 凱入禡出 相續如環 而邊圉有截 武節猋逝 所攻者破 所當者服 由是上下倚信 能用國人
바야흐로 그 투구를 벗어 부친께 맹세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성루를 격파한 것은 겨우 약관이었을 때 일 따름이었다. 훈공이 점차 드러남에 미쳐서도 진력을 다하여 들어오면 승전가를 올리고 나가면 마제(전쟁 때 군데가 머무르는 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올림을 서로 이어서 순환하였다. 변방은 위험하고 무절은 빨리 가서 공격하면 격파하고 당도하면 굴복하니 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 사람들이 의지하고 믿어서 국인을 임의로 사용하였다.
公諱庾信 駕洛首露王之後 世仕新羅 祖武力 父舒玄 皆有大功 濟麗旣平 文武王 御南漢城西門 將軍文穎進賀 王歸公元功 且歷美其世 尋授太大角干 位在大角干上
공의 휘는 유신이니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이다. 대대로 신라에 벼슬하였으니 조부 무력, 부친 서현은 모두 큰 공로가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를 이미 평정하고 문무왕이 남한산성 서문에 이르자 장군 문영(김문영)이 나아가 하례를 올렸다. 왕이 공에게 으뜸가는 공로를 돌리고 또한 그 가문을 두루 찬미하여 이에 태대각간을 제수하니 직위가 대각간 위에 있었다.
興德王時 追思股肱之盛 諡公爲興武王 原武烈 文武能任 公能光啓之 若湯 武 昭烈之 有伊 周 諸葛焉 夫混一之業 其事至艱
흥덕왕 때 보필의 공로가 성대함을 추사(미루어 생각함)하여 공의 시호를 흥무왕이라 하였다. 원래 무열왕과 문무왕은 능히 공을 신임하였고 공은 능히 통일의 길을 빛나게 열었으니 진실로 은나라 탕임금에게 이윤(伊尹)[1]이 있었고 주나라 무임금에게 주공(周公)[2]이 있었으며 한나라 소열(昭烈)[3]에게 제갈량이 있었던 것과 같다. 무릇 통일의 대업은 그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1] 이윤(伊尹) :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재상. 이름은 지(摯).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다가 탕왕의 부름을 받고 벼슬에 나가 하(夏)나라의 무도한 걸(桀)을 치고 은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음.
[2] 주공(周公)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이름은 단(旦), 시호는 원(元), 무왕을 도와 주(紂)를 치고,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제도와 예악(禮樂)을 정비하여 주나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3] 소열(昭烈) :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시조 유비(劉備)를 말함. 자는 현덕(玄德), 소열은 묘호(廟號)이다.
鉅觀史書所記 固不能萬一 然循而求之 猶有可以紬繹其髣髴者 公生平 知有社稷 不知有己身 卽使功名己足 勞伐滿國 新羅之黎庶 有一人蹙然而不寧 公亦不能一日而自安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진실로 만분의 일도 실려지질 않았다. 그러나 차례를 따라서 구하여 보면 오히려 그 방불(비슷한 모양)한 것을 뽑아 모을 수 있다. 공은 평생에 국가의 사직이 있는 것만을 알았고 자기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즉 공로와 명예가 이미 족하고 자랑하는 소리 나라에 가득 찼다 해도 신라의 백성이 하나라도 이마를 찡그려 편안하지 못한 이가 있으면 공도 또한 능히 하루도 스스로 편안하지 않았다.
自旌鉞在手 寤寐麗濟 日夜淬磨 思一擧克定之 而師向有所先 則懼其一之窺我虛也 於是決計引唐兵攻濟 以唐與我 則麗不敢不悉力備唐 而我可以師於濟而無所忌 又計唐强大 喜遠功 引以有捷 彼將肆然而自有之
깃발과 도끼를 손에 잡을 때부터 자나 깨나 고구려와 백제를 잊지 않고 밤낮으로 연마하여 일거에 평정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군사의 방향을 한쪽으로 먼저 하면 그 다른 하나가 우리의 빈틈을 엿볼 것이 두려웠다. 이에 당병을 유인하여 백제 공격의 계획을 결정하였다. 당을 우리에게 참여시키면 고구려는 감히 힘을 다하여 당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인즉 우리는 가히 백제에 출병하여도 기탄할 바 없고 또 한편 당은 강대하므로 원방을 공명을 즐길 것이다. 끌고 와서 싸움만 이기면 저들은 장차 방자하게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於是乞師而不求多 且約師出以後衣食 皆新羅任之 唐自念少出師 不費運糧 而他日功成 將安受濟地 威德覃被海表 意欣然幸其如此 公固己策之矣
이에 병사를 빌리되 많은 병력을 요구하지 않고 또 출병 이후의 의식을 모두 신라에게 맡기기로 약속하면 당은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군사를 적게 보내어 군량은 허비하지 않아도 다른 날 성공하면 장차 백제 땅을 편안히 차지할 것이며 위엄과 덕망이 해외까지 뻗쳐진다 하면서 그들은 이같이 다행함을 기꺼이 여길 것」이라고 공은 이미 책략하였던 것이다.
其攻濟也 羅師衆且銳 擣堅蕩險 皆一以當十 唐將按轡其後 苟以自便 稍稍意沮 濟都陷摧 唐開府 姑退師而計 濟人必群聚思報 而唐兵少 無以制之 急則必求助於我
백제를 공격할 제 신라의 장병은 또한 정예로웠다. 견고한 성첩을 부수고 험준한 요새를 소탕하는데 모두 한사람이 열사람씩을 당적하니 당나라 장수들은 그 뒤에서 말고삐를 늦추고 편안하게 지내다가 점점 사기를 잃었다. 백제의 도성이 함락되자 당개부(당나라의 도독부)에 미루어주고 잠시 군사를 퇴각시키면서 계획하기를 백제 사람들이 반드시 군중을 모아 보복을 생각할 것이며 소수의 당병으로는 그를 제압하지 못할 것이니 급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원조를 요구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其始故遲行 使濟人逾張 及其行則姑且定其一方 而不盡其餘 使又起然後 唐府衆被於奔命 而羅師所定輒置守 唐府無以難
처음에는 일부러 천천히 행진하여 백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확장하게끔 하였고 그 작전 수행에 미쳐서도 한 방면만을 평정하여 그 나머지를 모두 점령하지 않았으니 그들로 하여금 또 일어나게끔 함이었다. 그런 뒤에 당의 도독부는 도망가기에 피로하여 신라군이 점령한 곳에 문득 수관(지키는 관리)을 설치하여도 당의 도독부는 논란하지 못하였다.
旣而羅守浸廣 而熊津遂孤寄 四面皆新羅 勢單懷危 漸知往時幸且便之者 實顚倒公筠謀中 乃更慍怒 然知一動則立粉齏矣 欲告唐自救 又懼前日上功告夸矜 一朝愚貿盡露 將詔責 左右無所出 而衣服又仰新周濟 士卒 德其思信 卽其下將不可用 公徐收其歸 而濟地平矣
이미 신라의 점령지는 넓어졌고 웅진의 도독부는 마침내 외로워지니 사면은 모두 신라였다. 형세가 고단하고 위험에 질리자 점점 지난 때의 행복하고 편안하였던 것은 실로 공의 계획 중에 뒤바껴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다시 화내어 노했으나 한번 움직이면 분쇄될 것을 알았고 또 본국에 보고하여 자기들의 구원을 청하고 싶었으나 전날 공로를 상신할 적에 짐짓 과장했으므로 하루아침에 허위가 모두 드러나면 장차 황제의 꾸지람이 내려질 것도 또한 두려웠다. 좌우로 나갈 곳이 없었으며 의식을 입고 먹는 것을 또한 신라의 주선에 의지하므로 사졸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곧 그 병사들을 부리지 못하였다. 공은 천천히 그 돌아간 뒤를 수습하여 백제 땅을 평정하였다.
濟初定 公志取麗銳甚 而麗人苦蓋蘇文暴戾久 意欲息肩寬大 且地邊漢 族類之倫菿明 假唐全有之 終當歸我而不歸唐 故聯唐以取之 而不復與焉 惟董正戎旅 俟時而動 未幾麗人自起困唐府 而鴨水以東 盡歸新羅 唐人恨深 尋以師至 一戰而却之
백제를 처음 평정하고 공은 고구려를 치려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연개소문의 폭정에 시달린 지가 오래이어서 편안히 어깨를 쉬고자 하는 뜻이 있으며 또한 지역이 한수를 가까이 하였으므로 민족의 감정이 월등하게 다르다. 가령 당이 전체를 점령한다 하더라도 종말에는 신라에게 돌아올 것이요, 당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므로 당나라와 연합하여 취하고는 다시 간여하지 않고 오직 군사를 엄정히 경계하여 때를 기다려 움직였다. 얼마 후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나 당의 도독부를 곤궁케 하니 압록강 동쪽은 모두 신라에게 돌아왔다. 당나라 사람들이 깊이 한탄하여 군사를 이끌고 찾아 이르렀으나 한번 싸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蓋其知之審 故計之明 其審與明 非亶智慮曠絶 誠積忱極 不參以私 故成敗利鈍 事機之紛紜百轉 屈折嬗變 近者八九年 遠者數十載 制勝於先而必諸後若神 雖孫吳之行師 何以加諸
대개 그 아는 것이 자세하였던 까닭으로 계획이 분명하였고 자세함과 분명함은 다만 지혜로운 생각을 한량없이 넓혔을 뿐만 아니라 정성을 쌓고 다하여 사사로움을 구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성패의 날카로움과 둔함, 일의 기틀이 복잡하여 백번이나 굴절하고 선변(변화)했다 하더라도 가까이는 팔, 구년이며 멀리는 수십 년이 걸려도 먼저 제압하여 이길 것과 뒤에 필승할 것을 귀신과 같이 알았으니 비록 손무(孫武)와 오기(吳起)[1]가 병사를 부린다 하더라도 어찌 이에 더하겠는가.
[1] 손무(孫武). 오기(吳起) : 춘추시대의 제(齊)나라와 위(衛)나라의 병법가.
鳴呼 此猶論公成功之盛耳 豈知公隃度遐籌 一生之中崎嶇自苦 出生入死 孤吁獨嗟 彷徨躊躇 將不知爲幾 而期之以久 而不欲其速 達之以遠 而不拘其近 怐懋濡忍 而卒董于成區宇甫一 而公亦心血盡矣
오호라. 이는 오로지 공의 위대한 성공을 논하였을 따름이다. 공의 탁월한 도략과 원대한 포부를 어찌 알겠는가. 한 평생에 기구한 고난을 극복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고독한 역경을 탄식하며 방황하고 주저한 적이 몇 번 인줄은 모르거니와 장구한 기약으로써 졸속을 탐하지 않았고 위대한 달관으로써 가까운 일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품어주고 꾸준하여 마침내 국토통일의 성공을 달성함에는 공께서도 역시 심혈을 다하였을 것이다.
史傳公出門外 呼過者一訊 服爲麗諜 結租未坤 使連濟臣任子 盡得其國隱 由此言之 公於麗濟 知無所不燭 而運饋 唐師之役 公己老白首矣 深入敵地 値寒凍 露肩執鞭 爲士卒先 其純摯之忠 千載以下 猶可以想見
역사에 전하기를 공이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자를 불러서 한번 심문하자 고구려 첩자임을 자복하였고 조미곤으로 하여금 백제의 대신 임자와 연결하여 그 나라의 은밀한 사정을 다 얻었다고 하니 이로 인하여 말하건데 공은 고구려와 백제에 모르는 일이 없었으며 당병에게 군량을 수송한 고역에는 공이 이미 늙어 머리가 백발이었지만 깊이 적에 들어가 바람이 차고 얼음이 얼 때를 만나서 어깨를 드러내고 채찍을 잡아 사졸들의 선두가 되었으니 그 순수하고 지극한 충의는 천년 이후에도 오히려 가히 상상하여 보겠다.
惟其純摯也 乃其所以知之明而無所遺也 其忠義之所感彼 至夫人智炤 拒子元述不見 以其戰敗不死 而元述卒殉以忠 凜乎其不可尙己
오직 그 순수하고 지극함은 이에 지감이 총명하고 원만한 때문이다 그 충의의 감화는 부인 지조에게 이르러 아들 원술을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는데 그가 전쟁에서 패하고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술은 마침내 충의로써 순국하니 그는 더하지 못할 만큼 늠름하였다.
公生 眞平王乙卯 春秋七十九 以文武王癸酉七月朔日卒 禮葬都城西金山原 封壟巋然 樵夫牧者 皆知爲公墓 史傳 命博士薛因宣 立碑紀功云 而碑之失己久 有小表 府尹南至薰識之
공은 진평왕 을묘년(595년)에 탄생하여 춘추 79세로 문무왕 계유(673년) 7월 1일에 세상을 떠나니 도성 서쪽 금산원에 예장하였다. 봉축이 우뚝하여 초부와 목동들도 다 공의 능묘임을 알고 있다. 역사에 전하길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공적을 세우게 하였다고 하는데 비석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조그마한 표석이 있으니 부윤 남지훈이 지은 것이다.
今歲癸酉 公之裔孫 圖所以崇餙墓塋 石旣具 使商冕來徵文 於是 上距公之沒 千二百七(=六)十有一年矣
금년 계유(1933년)에 공의 후손들이 융숭하게 영역을 보수할 계획으로 비석을 이미 마련하여 상면(商冕)으로 하여금 와서 글을 청하였다. 이에 공의 세상 버린 때를 추구하면 1천2백61년이다.
惟公豊功偉烈 重奠三韓 昭日月而炳丹靑 不待文而著 獨其若心混一 經權隨宜 其本末 尙隱約史策 玆特表以揭之 俾有後者焉
공의 풍부한 공적과 위대한 의렬은 삼한(三韓)을 안정시켜 일월같이 밝고 단청같이 찬란하니 비문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현저하거니와 오직 그 통일에 고심하고 경륜과 권도를 시의에 맞춘 그 본말이 아직도 역사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에 특별히 계시하여 후일의 고찰이 있게 한다.
檀紀四二八九年 丙申 九月 日竪
단기 4289년 병신(1956년) 9월 일 건립
東萊 鄭寅普 謹撰
동래(東來) 정인보(鄭寅普) 삼가 지음
眞城 李世鎬 謹篆
진성(眞城) 이세호(李世鎬) 제목을 씀
4.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墓金先生墓碣銘
개국공 순충장렬 흥무왕묘 김선생(김유신)묘갈명
原文, 譯文 : 2000年刊 崇武殿誌
解釋 : 2006年 11月 19日刊 金順大
※ 이 비문은 남지훈이 찬술한 묘표(墓表)가 너무 간략하여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1934년에 후손 용희(容禧)가 짓고, 우곤(友坤)이 글씨를 썼다.
慶州府西金山枕亥之原 惟我 先祖大丞相金先生之藏也 先生諱庾信 駕洛太祖王十三世孫 仇衡王曾孫 新州都 大總管諱武力孫 大梁州都督諱舒玄子 妣葛文王肅訖宗之女 都督公 爲萬弩太守時 娠二十月而生先生于任所 眞平王乙卯也
경주부 서쪽 금산의 해좌 언덕은 우리 선조이신 신라의 큰 정승 김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휘(諱)는 유신(庾信)이고 가락 태조왕 12세손(12대손)이요[1], 구형왕(仇衡王:讓王)의 증손이며, 신주도 대총관 무력(武力)의 손자이고, 대양주도독 서현공(舒玄)의 아들이다. 비(妣;모친)는 갈문왕(葛文王:진흥왕의 생부)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도독공(아버지 서현)이 만노군 태수 때 스무 달만에 도독공의 임소(任所)에서 탄생하였으니, 이 때가 신라 진평왕 을묘년(595)이었다.
[1] 庾信 駕洛太祖王十三世孫이라 함은, 차례를 나타내는 13世에 孫자를 붙인 것으로 잘 못된 표현이다. 世는 世代와 같은 뜻이므로 13世를 13世祖라고 하는 사례 역시 잘 못된 것이다. 三國史記의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에 따라 “가락 태조왕 12세손”이라 함이 상당하며 12대손과 같은 뜻이 된다.
先生 生而新異 背有乙星文 自幼日奉嚴訓 不妄交遊 遂懷書與劍 力學山陰 凡十餘年一夜 仇衡王 有夢感 卽發麾下騎 從者三十人 直入蘇判營中 拜謁大人
선생은 태어나자 신이(神異)하여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자라나면서 부모님의 엄한 교육을 받아 함부로 놀지 않았다. 곧 글과 칼을 가까이 하여 깊은 산골짜기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10여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밤에 공의 증조부인 구형왕을 꿈에서 뵙고 깨달은 바가 있어 곧 거느리고 있던 병졸을 출동시켜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소판공(아버지) 영중(營中:陣中)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배알(拜謁)하였다.
時麗兵圍重 城幾陷矣 先生曰臨陣不勇 非孝也 乃突入麗陣 斬將受降 遂振旅而還 王大喜 拜爲侍中 尋爲上將軍 兼太大角干大都 自是出將入相 統合三韓
그때는 바로 고구려 군사가 아버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여 곧 함락될 직전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싸움터에서 용감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 하고 고구려 진중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 항복을 받아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개선(凱旋)하였다. 신라의 왕은 크게 기뻐하며 시중(侍中)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 후 공업이 많아짐에 따라서 상장군겸 태대각간 대도독을 삼았다. 이 때부터 싸움터에 나가면 대장이고 돌아오면 정승으로서 일하여 마침내는 삼국(三國:三韓)을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先時唐將蘇定方 救新羅而來及還 唐帝曰何不因平濟而伐新羅 對曰其君 仁而愛民 其臣 忠以事君 雖小 不可圖也 唐帝曰新羅相金庾信 名聞中國 果何如 對曰卽海東管蕭也 而其才德忠義 不可以富貴動之
그 전에 백제를 섬멸할 때 당의 소정방이 신라를 도우려 왔다가 돌아가니 당 황제가 묻기를, "어찌 백제를 평정한 후 이어서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라는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였다. 다시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의 정승 김유신의 이름은 멀리 이 곳까지 알려져 있으니 과연 그 인물이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는 곧 바다 건너 동쪽의 관중(管仲)[1]이요, 소하(蕭何)[2]입니다. 그리고 그의 재주와 덕행, 충성과 의리를 부귀(富貴)로써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1] 관중(管仲) :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재상.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 환공이 관중의 공을 중하게 여겨 그 나라 대부 백씨(伯氏)의 삼백읍(三百邑)을 빼앗아 주었으나 백씨는 스스로 자기의 죄를 알고 곤궁하게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원망이 없었다고 함. 『논어』<헌문(憲問)>
[2] 소하(蕭何)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신하로서 삼걸(三傑)가운데 한 사람. 초한(礎漢)이 서로 대결할 때 소하가 항상 관중(關中)에 남아 지켜서 군량을 보급하는 일이 중단되지 않았다. 고조가 자주 산동(山東)에서 패하였으나 소하가 항상 관중을 온전히 하여 기다렸으므로 고조가 제위(帝位)에 오른 뒤에 소하의 공을 제일(第一)로 논하였음.『한서(漢書)』39
武烈王 謂諸將曰金庾信 仁智才略 我之諸葛孔明也 眞德王 試度量曰不意頗牧 在吾宮中也
무열왕은 모든 장수에게 말하기를, "김유신이 어질고 슬기로우며 뛰어난 재주와 훌륭한 책략은 나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다." 하였고, 진덕왕도 도량을 시험하고 난 뒤에 말하기를, "뜻 밖에 염파(廉頗)[1]와 이목(李牧)[2]이 우리 궁중(宮中)에 있다." 하였다.
[1]염파(廉頗) :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수로 혜문왕(惠文王)의 상경(上卿)이 되었다. 인상여(藺相如)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고사(故事)로 유명하다.
[2]이목(李牧) :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으로, 북방을 수비했는데, 군사들에게 기마와 활쏘기 연습을 시키고 봉화(烽火)를 삼가며 간첩을 많이 쓰니, 흉노들이 감히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후에 진(秦)을 물리친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先生 於本國中國 屢樹大勳 唐高宗 遣使來聘 冊奉尙正卿平壤開國公 食邑二千戶 文武王 曰若不倚賴公 國之存亡 未可知也 於是授太大舒發翰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趍
선생이 본국과 중국에 수많은 큰공을 세웠으므로 당(唐)나라 고종(高宗)은 예를 갖추어 사신을 보내서 선생을 「봉상정경 평양 개국공」으로 책봉하고 식읍(食邑) 2천 호를 내렸다. 문무왕은 말하기를, "만일 공의 훌륭한 위업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매우 위태로와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고, 이에 「태대서발한」이란 벼슬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또 수레와 지팡이를 내려 궁전에 오를 때는 천천히 걷도록 하였다.
公退而有暇 則幅巾杖履 逍遙于松花洞泉石之間 修治圍林 建禮賢堂 樂賓樓 退思亭 偃武修文 粹然有三代風焉
공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후는 언제나 의관을 갖추고 여가를 선용하여 송화동(松花洞) 물 맑은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고 원림(園林:庭園)을 가꾸었다. 그리고 예현당(禮賢當), 낙빈루(樂貧樓), 퇴사정(退思亭) 등의 건물을 세워 무(武)를 쉬고 문(文)을 닦으니, 그 생활은 마치 그 옛날 삼대(三代:夏,殷,周)의 아름다운 모습과 같았다.
文武王十三年妖星見 地震後數旬餘 寢疾 王 親臨慰問 泣曰寡人之有卿 猶魚之有水 若有不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對曰臣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但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墮廢 甚可痛也 伏願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遠小人親君子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 王泣而受之
문무왕 13년에 요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일어난 후 20여 일이 지나서 병상(病床)에 눕게 되니, 문무왕은 친히 문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경(卿)이 있음은 물고기가 물있는 것과 같은데, 만일 쾌유치 못하면 백성은 어찌하리까! 나라는 어찌되리까!." 하니, 대답하기를, "어리석은 신이 어찌 국가의 중책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옛적부터 임금이 계통을 대대로 이어 받아 내려오는 임금이 간혹 처음에는 하는 듯하나 끝을 잘 맺지 못하는 일이 있어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니, 그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고 이룬 것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시어 어리석은 소인(小人)을 멀리하시고, 군사를 가까이 하시어 화란(禍亂)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며, 기업(基業: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을 영원히 전하시면 신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울면서 받아드렸다.
秋七月 薨于私第 王聞訃震悼 贈賻綵帛一千匹 租二千石 及軍樂鼓吹 葬于此 興德王 追諡純忠壯烈興武王 嘉靖辛酉 建祠 仁祖癸亥賜額 正宗壬子致祭 隆熙己酉 致祭
가을 7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은 매우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부의(賻儀)로 보내고, 아울러 장례도 군악(軍樂)을 울리며 이곳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 후 흥덕왕은 공에게 「순충장열 흥무왕(純忠壯熱興武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명종 16)에 사당을 세우고, 인조(仁祖) 계해년(1623)에 편액(扁額:서악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고, 정조(正祖) 임자년(1792)에 치제(致祭)하고, 또 융희(隆熙) 기유년(1909)에도 제사를 모셨다.
西岳書院 是也 列聖朝崇奉 類此而諸賢撰述 不可殫記 在昔文武王 命國子博士薛仁宣 撰碣記功而亡焉 後府尹南至薰 撰碣而語甚樸 無以稽事蹟 士林若後孫 會于齋所 屬一言于容禧 容禧何敢焉 不顧僭妄 乃伐石 謹按實記而敍之 係之以銘曰
서악서원(西岳書院)에는 열성조에서 숭봉(崇奉)함이 이와 같았으나 여러 선현(先賢)들의 찬술(撰述)에서는 공(公)의 위업(偉業)을 다 기록하지 못했다. 옛날 문무왕은 국자박사 설인선(薛仁宣)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고 새겨 공의 공로를 기록했으나 없어졌다. 그 후 부윤 남지훈(南至薰)이 비문을 지어 새겼으나 너무 소박(素朴)하여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 후 선비들과 후손들이 재실에 모여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어찌 내가 이 글을 지을 수 있으리요. 외람되고 망녕됨을 돌아보지 않고 돌에 새기려는 무렵에 삼가 실기(實記)를 참고하여 글을 짓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以功烈則不惟東方之初出 中國亦鮮有倫比 以爵諡則不惟東方之絶無 中國亦不過關武勇 郭汾陽岳武穆而己則其他盛德大業 有史冊在 庸何尙一二贅焉也 於乎偉哉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 일뿐 아니라, 중국에도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벼슬과 시호도 이 나라에서는 없는데, 중국에서도 관운장(關雲長)[1]과 곽분양(郭汾陽)[2], 악무목(岳武穆)[3] 세 분 정도가 있을 뿐이라네. 나머지 큰 덕망과 위대한 성업(聖業)은 역사책에 있으니, 어찌 한 두 마디 부질없는 말로써 기술하겠는가. 아, 위대하신 분이시어!
[1] 관운장(關雲長) : 촉한의 명장 관우(關羽)를 말함. 장비(張飛)와 함께 유비를 도와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2] 곽분양(郭汾陽) : 곽자의(郭子儀)를 말함. 그는 당 나라 화주(華州) 사람으로 숙종(肅宗) 때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기에 뛰어난 공이 있어 분양왕(汾陽王)에 봉하였음. 오래 살고 자손이 많았는데 자손들이 당 아래서 인사를 하면 누군지 잘 모르고 그저 턱을 끄덕거렸다고 함. 『당서』137
[3] 악무목(岳武穆) : 남송(南宋)의 무장(武將) 악비(岳飛)의 시호. 송나라 탕음(湯陰) 사람으로 자는 붕거(鵬擧). 충성심이 두터워 금(金)나라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여러 차례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西紀一九三四年 戊戌 秋七月 日
1934년 갑술 가을 7월 일에
裔孫 參奉 容禧 撰, 裔孫 友坤 書
예손(裔孫) 참봉(參奉) 용희(容禧) 짓고 예손 우곤(友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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