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알 미역국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찹쌀 새알을 넣은 미역국이 생각난다. 새알 미역국 속에는 바다와 육지의 정겨움이 모두 모였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오르는 새알 미역국 한 그릇은 그리운 인정을 부른다.
예전에 여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어느 분의 소개로 음식을 배우러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만 가도, 몇 가지를 가르쳐주니 경제적 부담도 덜고 시간 내기에도 좋았다.
앞치마와 필기도구를 넣은 가방을 챙겨서 도착한 곳은, 주택가 골목 한가운데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직사각형의 조리대가 주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감색 생활한복을 입고 있던 푸근한 인상을 주는 분이 요리 강사였다. 그분은 수강생들에게 차 한 잔을 권하더니, 미역국 종류가 몇 가지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역국은 계절과 재료에 따라 무려 50여 가지가 넘는다는 말에 놀랐다. 내가 알고 있던 미역국이라야, 소고기나 명태를 넣고 끓인 국이 다였다. 소고기, 전복, 홍합, 굴, 참치, 닭 가슴살, 감자, 오이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미역국이 만들어진다니 신기했다. 강사는 찹쌀 새알을 넣고 끓인 미역국부터 만들어보자고 했다.
새우와 멸치, 다시마, 마늘, 양파를 넣고 육수를 만들었다. 소고기와 물에 불린 미역을 적당히 잘라서 참기름으로 달달 볶았다. 볶은 미역이 육수와 어우러져서 국물 맛이 우러나오도록 푹 끓여야 했다. 우리는 그사이에 다른 것을 배워야 하니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찹쌀가루로 새알을 만들었다. 소금을 약간 넣은 찹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반죽한 것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막대기 형태로 만들어 똑같은 길이로 잘랐다. 부드러운 촉감의 반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새알 크기만 하게 동글동글 빚어내었다. 작고 동그란 것이 모이니, 새 둥지의 산새 알처럼 앙증맞았다. 강사는 새알 미역국과 곁들여 먹으면 좋을 섞박지 김치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먼저 무를 넓적하게 빚어내듯 잘라서 굵은 소금에 절였다. 가을무로 만든 섞박지는 미역국과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다. 양념은 배추김치를 만들 때와 같았지만, 다진 새우와 미나리를 나중에 넣어 버무리는 것이 달랐다. 재료를 썰고 양념을 만들면서 설명하는 강사의 손놀림은 역시 전문가다웠다. 민첩하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양념을 만들면서 설명하는 목소리는 그 속에 자작자작 배어들었다. 요리 초보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마다 놀란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자, 완성품을 보면서 스스로 만든 첫 요리에 뿌듯해 했다.
반년이 지날 무렵, 함께 음식을 배우러 다니던 동료가 재미난 의견을 냈다. 배운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돌아가며 집 초대를 하면 어떨까 했다. 걱정하면서 엄살을 부리는 척해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누구는 영양밥에 밑반찬을 만들겠노라 하니,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이는 돈가스를, 유머 감각이 뛰어난 이는 차돌박이 된장찌개에 전주식의 비빔밥을 점찍었다. 나는 새알 미역국에 섞박지 김치를 외쳤다.
막상 내 차례가 돌아오니 걱정이 되었다. 음식이 맛이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일단 재료를 넉넉히 준비했다. 그런데 강습 시간에 배웠던 대로 똑같이 따라 했건만, 한마디로 국 맛이 엉망이었다. 소고기도 넉넉하게 넣어서 달달 볶고, 육수를 넣었는데도 기대했던 깊은 맛이 나지 않았다. 풀 죽은 미역은 미끄덩거리고 국물은 뻑뻑하고 하나같이 말썽을 부렸다. 조바심에 국솥 뚜껑만 열었다가 닫았다가 마음만 끓였다. 도전정신 하나만으로 깊은 맛을 내려 했던 것이 문제였는지, 내 요리 솜씨를 기대하고 있을 시간만 다가왔다.
새알이 퍼질까 걱정하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국물보다 소고기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느니, 미역은 한참을 문질러서 씻어야 한다느니, 멸치는 찬물에 넣고 끓이다가 먼저 건져내야 쓴맛이 없다는 깜짝 정보를 주었다. 나는 부끄러운 밥상을 차려놓고 기막힌 정보를 선물 받은 셈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요리에 관심이 이어졌다. 음식에 맛을 내는 것도 나이에 비례하는가 보다. 푸성귀 같던 내 나이에도 세월이 물드는 동안, 반찬에도 차츰 여유의 맛이 배어들었다. 참기름에 겉돌기만 했던 나물 무침도, 양념에 버무려져서 감칠맛을 내게 되었다. 무침 요리는 먹기 전에 단번에 무쳐줘야 깔끔한 맛과 향을 낼 수 있지만, 국물 요리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아마도 음식은 인생처럼 많은 시행착오가 진국의 맛을 내는가 보다. 그러고 보면, 손맛은 수많은 연습으로 만들어낸 공든 탑이 아닐까.
진한 국물 한 수저를 입 안에 넣었을 때 ‘그래’하는 탄성이 나오려면, 적어도 묵은 세월을 쏟아줘야 진국을 낼 수 있다. 음식의 참맛을 내려면 무수히 실패했던 노력의 세월도 소중한 재료다. 그 깊은 맛이 잘 우러나오려면 무엇보다 기다려주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도 실수로 범벅된 지나온 세월이 알려주었다.
오늘도 미역국을 끓인다. 들깨 향을 안고 청정해역의 해산물이 폭폭 소리를 내고 뭉근하게 끓고 있다. 오랜 친구의 속정처럼 곰삭은 깊은 맛을 거두어 올리고 싶다. 육지에서 공수한 찹쌀 새알이 깊은 바다색을 입고 두둥실 떠오를 것이다. 국 한 그릇 앞에 놓고, 정담 나눌 생각에 마음은 벌써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