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개요:
1228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유무(有無)의 분별을 넘어선 절대적 ‘무(無)’를 탐구한 송나라 때 선승의 공안(公案) 해설집. ‘무문관’이란 ‘무’ 의 정확한 탐구만이 선문(禪門)의 종지(宗旨)로서 선문에 들어서는 제일의 관문이라는 뜻이다. 무문관이란 명칭은 이 책의 총론에 해당하는 제1칙의 해설에서 저자가 ‘오로지 이 하나의 무(無) 자가 종문의 일관(一關)이다. 이것을 선종(禪宗) 무문관(無門關)이라 한다.’ 하고 설명한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 책의 정확한 명칭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며, 중국 남송의 선승 무문혜개(1183~1260)가 옛 선인의 공안 48칙을 선별해 평창(評昌)과 송을 덧붙인 것이다. 전 1권이며, 48칙의 공안에 대한 평석과 송(頌)으로 이루어졌다.
저자:
저자 혜개는 절강성(逝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 처음에는 천룡광(天龍曠)에게 가르침을 받고 출가했다가 뒷날 만수사(萬壽寺) 월림사관(月林師觀)의 제자가 되었다. 월림사관 아래서 「조주무자(趙州無字)각주」 공안을 6년 동안 수행했다. 잠이 오면 절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는 등의 수행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1218년 안길산(安吉山) 보국사(報國寺)에 머물렀고, 여러 절을 편력한 뒤 1246년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의 개조가 되었다.
이 책은 1228년에 혜개가 용상사(龍翔寺)에 있을 때 도를 깨닫기 위해 돌아다니는 운수(雲水)들의 요청에 응해 저술한 것이다. 편자는 혜개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연종소(彌衍宗紹)라고 하는데, 그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책은 1245년에 맹공(孟珙)이 다시 간행하여 남송 때 널리 유포되었다.
제1장 조주의 무
제1장은 조주구자(趙州拘子)다.
혜개慧愷(518~568)가 6년 동안 조주구자趙州拘子의 화두를 넘기지 못하여 고심참담하던 어느 날 활연대오하여 결국 무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을 본다.
어느 날 조주화상에게 어떤 중이 이렇게 질문을 했다.(趙州和尙因會僧問).
“강아지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拘子還有佛性也無)”
조주는 무라고 대답했다(州云無).
불성이란 생사를 벗어나서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부처가 될 수 있는 덕성을 말한다. 불성은 본래 무형 무상 무성 무색. 그러나 준동함령 개유불성(蠢動含靈 皆有佛性), 꿈틀거리는 모든 생물은 영을 품고 있으니 누구에게나 불성은 넉넉히 갖추어 있다. 그런고로 강아지에게도 불성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닦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강아지에게는 불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두된 것은 강아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 하면 태만해지고, 없다 하면 절망에 빠진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조주도 어느 때는 있다고 하고 어느 때는 없다고 하였다. 요는 그 사람으로 나가게 하면 된다. 향상일로(向上一路))다. 절망하지도 말고 태만하지도 말고 낙관하지도 말고 비관하지도 말고 관자재(關自在)를 하여야 한다.
불성이 있다고 놀아도 안 되고 불성이 없다고 잠자도 안 된다. 부지런히 깨는 것만이 문제다. 결국 유무를 초월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있고 없고를 논해 보아도 아무 쓸 데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하지 말고, 있다고 믿고 열심히 찾아가면 결국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없고 이상적으로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현실을 있는 이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수도(修道)라고 말한다.
석가가 부처가 된 것을 보아 만물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수도하기 전에는 강아지나 다름이 없다. 다 자연이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뒤를 따라 닦으면 우리도 부처가 되게 마련이다. 마치 참나무나 가시나무나 모두 불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를 통해서 불이 붙기 시작하면 일체가 불바다가 될 수가 있다.
석가는 불씨다. 성냥이다. 부처에게 닿으면 불이 붙는다. 그것이 이심전심이다. 자기에게서 물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무다. 마르고 또 말라붙어 바짝 붙게 되면 불성이 나타나 성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혜개는 이렇게 설명(評唱)한다.
무문이 말하기를 참선은 나무를 찍는 일이요, 묘오는 물기를 말리는 것이다.(無門曰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나무를 찍지 않고 물기를 말리지 않으면 풀과 나무가 물탕이니라.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그러면 말해 보라. 무엇이 나무를 찍는 것인가. 오직 한 개의 무자가 나무를 찍는 것이다. 이것이 선의 근본이요. 그래서 선종무문관이라 한다.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子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 禪宗無門關.)
나무를 찍은 자는 비단 조주를 만나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대고 같이 보고 같이 듣고 이 얼마나 즐거움이랴.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 把手共行 眉毛厮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우선 찍고 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밤낮 찍어 헛치지도 말고 잘못 치지도 말아, 마치 빨갛게 달아 오른 쇳덩어리를 꿀꺽 삼킨 것처럼 토할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고 쓰러뜨린다.
(莫有要透關底麽 將三百六十骨節 入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書夜提廝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 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가지를 치고 오래 말리면 안팎이 바짝 말라 조금만 불기가 와 닿아도 곧 붙게 된다.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加啞子得夢只許自知.)
일단 불이 붙기 시작하면 하늘땅이 뒤집힐 듯 마치 장수가 칼을 얻어 큰 나무, 작은 나무, 마구 불속에 집어넣듯 일대 불바다를 이룩하여 모조리 불바다가 된다.
驀然打發 警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이렇게 되려면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를 찍고 빈틈없이 계속 말려야 성냥 한 개피에 불바다가 될 수 있다.
且作麽生提廝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결국 무(無)자는 자기를 아는 일이요 계속 수도하여 자기가 되는 일이다. 자기를 보는 것이 무다. 자기와 자기의 사이가 아무것도 막힌 것이 없는 세계다. 자기를 보고 자기가 사는 것, 이것이 지행일치이다.
혜개는 이렇게 송(頌)에서 말한다.
강아지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이는 불교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다. 조금이라도 있다든가 없다든가 상대에 빠지면 꼼짝도 못하고 죽게 되리라.
구자불성(狗子佛性) 전제정령(全提正令) 재섭유무(纔涉有無) 상신실명(喪身失命).
불도란 상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렇고 저렇고 한가하게 논란할 겨를이 없다. 화살이 몸에 와 꽂히고 빨갛게 단 쇳덩어리가 목에 걸렸는데 한가하게 이렇고 저렇고 논할 수가 없다. 사람은 어제 죽을지 모른다. 또다시 생사 윤회의 쳇바퀴를 돌지 않으려면 결사적인 수도가 필요하다. 생사는 절대적인 것이다. 생사를 넘어서려는 도심만 있으면 깨달음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 같다.
大地山河隱箇無
山河大地顯箇無
春天之花冬天雪
非有非無無亦無.
대지산하도 무 속에 숨고
산하대지도 무 겉에 드러난다.
봄의 꽃과 겨울의 눈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무 또 무.
...
무문 혜개가 말했다.“참선이란, 먼저 조사 스님들이 세워 놓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지극히 묘한 깨달음은 궁극에 이르러 의식의 흐름이 끊어져야 가능하다. 고승들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마음의 움직임을 끊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자, 말해 보아라. 고승들의 관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본칙에 나오는 하나의 ‘무(無)’, 그것뿐이다. 선종 문중의 제일 관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일러‘선종무문관’이라 한다.”
無門曰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子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 禪宗無門關.
무라는 이 관문을 꿰뚫고자 하는 이가 있는가? 그는 삼백육십 골절(骨節)을 팔만사천의 털구멍에 넣어서 전신에 의단(疑端)을 일으켜 밤낮으로 이 '무(無)' 자를 들어 참구(參究)하되 허무한 무도 아니며, 있다 없다의 무로 알지도 말고, 마치 뜨거운 쇠공을 삼켰는데 뱉어 내고 싶어도 뱉어낼 수도 없는 것처럼 되어 지금까지 배웠던 모든 지식이나 앎이 깨끗이 씻겨 나가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오래오래 묵혀 순수하게 되고 숙성하게 되면 저절로 안팎이 하나가 되니, 마침내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스스로 깨달음을 알게 된다.
莫有要透關底麽 將三百六十骨節 入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書夜提廝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 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如啞子得夢只許自知.
문득 이러한 깨달음이 발동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것이며, 마치 관우 장군의 큰칼을 빼앗아 든 것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어 버리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며, 생사의 백척간두에서 대 자유를 얻고, 육도 윤회의 세계 속에서도 유희삼매를 즐길 것이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무(無)' 자를 들되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게 되면 문득 한 점 등불이 켜지듯 법열의 기쁨이 솟아날 것이다.
驀然打發 警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且作麽生提廝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첫댓글 춘천지화동천설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