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를 구하고 아버지를 제외한다면 나는 나의 절반을 버리고 외면한 채 나머지 절반으로만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느끼지만 기쁨은 느끼지 못한다거나, 왼쪽 다리는 쓸 수 있지만 오른쪽 다리는 쓸 수 없는 상태와 같다.
웃으나 박장대소 할 수 없고 걷지만 숨이 끝까지 차오르게 뛸 수는 없다. 최소화되어 생존 하더라도 새는 한쪽
날개로만 살아갈 수 없다. 나는 한쪽 다리가 묶인 반쪽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키 만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담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또한 애초에 나보다 큰 어머니를 구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착각이다. 내가 바라보는 부모님의 관계에서 어머니
가 피해자이고 아버지가 가해자라 한다면 나 스스로가 담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없는 아이라 착각하며 삶의 한쪽
면만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여태껏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어린아이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기란 어렵고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믿는 것은 쉽다.
아버지를 포함하지 못한 가족체는 이 땅에 수 없이 많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가장이라는 존재는 고통과 역경까지
도 짊어지는 선택을 해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를 제외하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행위로
옮기는 순간 나의 절반도 함께 사그러든다. 나는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로 이루어져 있고 두 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동의할 때에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늑대이거나 양 중의 어느 한 면 만을 나의 참 모습이라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영적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동물적 본성이 있음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것 같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이나 영적 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되며 동물적 본성이 있기에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며 살아 갈 수 있다. 이 두 가지 부분을 모두 조화롭게 인식하고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브먼트를 한다.
처음에는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제대로 인식하고 움직이기 어렵지만 양 팔과 머리, 두 다리와 몸통까지 프랙티스를
거치며 인식력이 확장된다.
양이나 늑대 어느 한 쪽을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 상태에서 점차 컨트롤 할 수 있는 정도가 향상되어 간다.
동시에 양이나 늑대 어느 하나의 상태에만 오래 머무는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행동패턴에서
벗어나 평소 금기라 여겨온 스스로의 빗장을 넘는 행위를 시도하며 새로운 인식을 나의 것으로 가져와 나의 경계
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외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자신 안의 불안과 편견을 직면하고 이러한 인식을 넓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마음껏 웃고 울고 소리지르며 절규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새로운 인식을 위한 내 안의 공간을 만들고 영역을
넓히는 방법이다.
반대의 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지금 상태와 위치를 알 수 없을 때 반대의 상태를 만나게 되면 나의 상태를 더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실은 그 반대 되는 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두 모습 모두 제대로 경험 할 수 있어야
포함 할 수 있다. 투쟁이야 말로 변형에 필요한 충격이며 이 투쟁은 반대의 힘의 충돌로 일어 난다.
상대편의 힘은 투쟁을 위해 꼭 필요 하다. 그리고 이 두가지를 통합해야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제 3의 힘에 대한 이해란 양쪽에 영향이 받지 않는 꼭지의 힘이다.
두가지 힘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관조, 관찰을 통해 새로운 것들이 생성 될 수 있다.
두가지 힘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인 후 그것들을 관조 함으로써 더 이상 부딪히지 않는 새로운 방향을 만들
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내적 변형을 이루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당한 수준에서 적당히 만족하면서 그저 그런 삶을
지속하기를 원하는가?
에드가는 에드몬드에 의해서 휘둘리는 상태였지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맞이한 시점 이후에는 무엇인
가에 의해 지배받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중심이 생긴 상태로 전환이 일어났다. 우리 안에는 가해자적인 에
너지와 피해자적인 에너지가 공존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때에는 가해자적인 에너지를 깨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죽음과의 직면을 통해 지
금까지 사용할 수 없었던 힘을 필요한 때에 꺼내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두 가지의 힘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상태, 즉 두 에너지의 조화로운 상태를 reconciling이라고 할 수 있다.
리어왕은 처음에는 자신의 딸들에게 분노했지만 그렇게 만든것은 결국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선 미쳐
버렸다.
온전히 겪어야 새살이 돋아나듯 충분히 폭풍우치는 감정을 허용하고 미쳐버리고 나서야 내면에서는 새로운 변형
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들은 양쪽끝에 놓여진 저울질하고 판단하고 바꿀 수 있는 파괴적인 감정
이 아니라 존재로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 또다른 이해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극한 상황에서만이 변형이 가능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그 마지막에 자신
을 직면하고 포함하고 난 후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통합 할 수 있었고 확장된 시야로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상태
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르지예프는 삶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를 관찰하고 관계속에서 직면하고
관찰하는것을 많이했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우리는 터부시하지만 구르지예프의 아버지는 탐구할 수 있도록 얘기해 주었다.
옥타브의 법칙과 연결해 보면 관이 막혀 있으면 충격을 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죽을 뻔한 경험들이 다시
앞으로 나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많은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마스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직면하지 않고 망상으로 빠진다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데 내적탐구여정은 죽음 이라는
것을 직면할수 있도록 이끌어간다. 우리 안에는 빈 공간이 있다.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버지도 우리에게 그 공간을 주셨다. 죽음의 역할이 그것인 거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4층이 없는 데가 많다, 있지만 쉬쉬한다. 어린 구르지예프에게 새로운 죽음에 대한 경험을 질문했을 때 대답과
탐구해 갈수 있는 빈공간이라는 여정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있다
발현하길 바라고 있다.
태어나서 자라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늙어가고 죽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삶이다.
자랄 때는 공부를 잘 하고싶다, 젊은 시절에는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싶다, 나이 들어 가며 이름을 떨치고 싶다
등등.. 이것이 동물적 본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이러한 수평적인 삶에서 수직적인 힘은 인간이 동물적
인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다른 존재로서의 성장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평적인 삶은 수직적인 삶에 대한 전제이고 수직적인 삶은 그것만으로는 실재할 수 없다.
마치 영상 초반부에 언급된 것처럼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에너지가 만나 세계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부분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통틀어 영적본성을 계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은 인간존재 하나에 불과하다.
반복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며 생명이라는 물줄기는 창조의 빛줄기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몸을 입고 있는 한, 거기에 속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동물적인 본성과 폭력성, 충동들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전적으로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라면 동물이 사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러한 과정에 의식이라
는 작은 불빛을 가져오고 키울 수 있다면 우리는 온전히 동물로서 살아왔던 삶에 대한 종지부를 찍고 비로소 진정
한 인간의 삶이라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는 수평적 삶의 과정 또한 반드시 필
요하다.
어떠한 계기로 작은 의식 하나가 내부에 심어진 인간은 마그네틱 센터가 생겨난다고 한다.
수행을 해나감에 따라 마그네틱 센터 또한 계발되어 지고 마그네틱 센터는 그 씨앗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사건과
상황을 끌어당긴다고 한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매 순간들이 내가 만나고 있는 물질성과 영적인 본성이 부딪히
고 있는 충돌지점이 아닐까.
나는 나의 충돌지점에서 나를 보고 있는가. 한편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혹은 나는 그 지점에서 다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인간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는가?
영혼이 담긴 그릇인 육신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는 훌륭한 살림꾼이 되어야 한다.
영적인 삶에 대한 추구가 마치 현실을 저버린 채 고고한 모습으로 앉아 누군가의 피땀으로 내 몸을 먹이며 수행해
야 한다는 뜻은 아닐것이다. 땀흘려 일하며 돈버는것 또한 거기에 의식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하나의 수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과 영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물질성에 갇힌다는 것은 삶을 평면적으로,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편적 사고와
관습, 사회적으로 추구되는 가치, 중시되는 행동양식 등 삶의 어떤 측면에서는 먹고 싸는 기본적인 욕구, 사회적
인 욕구 또한 꼭 필요하며 일정부분 추구해야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그간의 가족세우기 경험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장이라는 다른 차원의 세계 또한 우리의
삶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이다.
우리는 목적지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육체와의 동일시, 온갖 부정적인 감정, 끊임없이 저항하며 갈등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나 셑과의 투쟁에서 호러스는 끝끝내 이기지 않았던가.
구르지예프는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고대 문명 안에 숨겨져 있다 생각해 그것을 찾아다니는 탐사를
시작했다.
바빌론의 외딴 유적지에서 고대 양피지 사본 발견, 그 안에 사몽형제회라는 비전적 지식 전수하는 곳이 있었다.
비전적 지식을 찾고자 바빌론에서 이즈루민 계곡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으로 가던 중 아르메니아 사제를 만나 이
번에는 사막화되기 이전 이집트 지도를 보게 된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이 그토록 그려왔던 것이 이것이라고 하면
서 이즈루민 계곡으로 향하던 길을 접고 이집트를 향해 떠났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 기이자, 처음으로 만난 것이 피라미드, 스핑크스. 이곳에 온 이유를 스핑크스와 그 외 특정한
유적에 관한 설명을 찾아내기 위해 왔다.
유적들은 전부 실증적인 방식으로 증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객관적인 예술, 구르지예프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객관적인 예술을 고대 사원을 말하는 방식을 빌어 말한다.
당신들은 그 고대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던 것을 그대로 지금 현 시점에서 만나게 될거다.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것들을 지금 현재 만나게 될거라고 말하면서 사원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해가 기둥 위
에 떨어지고 그 빛이 바깥을 비추고, 신전의 기둥들 사이로 나오는 빛, 동짓날 일몰, 빛이 천년경에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우리가 볼 수 있음, 그들이 하고자 한 이야기를 그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객관적 예술. 그때 그 사람들도 이 장면을 보았고, 지금
우리도 이 장면을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 시간성이 확 사라지면서 구르지예프도 똑같이 이것을 봤을 거다.
이런 것들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특히 그들이 말한 사람의 신전 같은 경우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 기하학
적이고 이런 것들이 다 3의 법칙에 맞춰 만들어졌다는 것, 이거 보면서 사실 이집트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은 탐구에서 시작된다.
구르지예프는 질문하고 끊임없이 숙고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구르지예프를 만나지 못했지만
정신병 환자도 고칠 수 있을 만큼 한 인간을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한 존재라면 그는 아마도 우리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숙고하며 이면의 역동을 살피며 한 사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애썼을 것
이다. 그리고 구르지예프는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위해 평생을 바쳐서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에 그 정도 깊이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그 탐구의
여정은 목숨을 건 목적 가운데 있었다.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과 고대의 지혜라는 원천을 만난 것이 또한 중요하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의 틀이 아닌 객관
적인 틀에서 제1의 인간, 제2의 인간, 제3의 인간이라는 인간 유형을 발견했다. 정신병환자도 그에게 가면 치료될
수 있을 만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구르지예프의 이해의 폭은 얼마나 클지 우물에서 바다를 상상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그들 따라 이해로 갈 수 있는 길은 우선 나 자신이나 삶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방법 뿐이다.
나라는 기계를 이해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없기에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삶을 전적으로 사는
것에서 이해로 가는 출발점을 삼아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