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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9) 2022. 8. 14
성령의 열매(9) - 절제
갈5:22-23, 삿13:1-7
우리의 신앙고백 중 하나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크게 두 가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도리(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듬뿍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을 때마다 기뻐하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훈련과 연단’의 가르침도 들어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온 ‘성령의 열매’도 그렇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해 오면서 개인적으로 참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열매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져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기를 바랍니다.
빈칸 채우기 -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채워 보겠습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오늘은 아홉 번째 열매인 ‘절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자어로 ‘마디’ 절(節)자에 ‘마를’ 제(制)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무나 종이 같은 어떤 자료를 규격에 잘 맞추어 자르거나 베어서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NIV)은 self-control, 즉 자기통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절제란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라고 하는데, 특별히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능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규정하는데 정말 맞습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은 육체의 본능입니다(식욕과 성욕).
안목의 정욕은 정신적인 자기만족을 의미합니다(쾌락과 사치).
이생의 자랑은 사회적 관계에서 이루고 싶은 욕망을 뜻합니다(권력, 재물, 명예욕).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절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잘 제어할 때에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삼손 이야기 - 자아 정체성>
오늘 저는 구약 사사 시대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절제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소라 땅 단 지파 중에 마노아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해 자녀가 없었기에, 자녀를 갖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기도 제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 줍니다(삿13:2-5). 그런데 특별한 조건이 붙습니다.
삼손의 출생을 통보합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성별된 나실인이 되어 여호와께 봉사할 것이며, 장차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삿13:7). ‘나실인’은 본래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인해 일정 기간 구별하여 지내겠다고 본인이 서원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에는 삼손 자신도 아니고, 그의 부모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심으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살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나실인의 규례는 민수기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나실인은 몸을 구별하는 동안 세 가지가 금지됩니다. 첫 번째는 포도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라도 먹지 말아야 했고(민6:3-4), 두 번째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아야 했고(민6:5), 그리고 세 번째는 시체에 접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민6:6-7).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모든 에너지를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의 어원인 ‘나지르’(nazir)는 ‘구별된 자’ 혹은 ‘헌신 된 자’라는 뜻입니다.
약속대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사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억압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구원의 새로운 여명을 가져오기를 바란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서 그에게 ‘나실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삿13:24-25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삼손은 자라면서 부모님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실인’으로 특별히 구별되었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삼손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주어졌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자아 정체성’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놀라우신 은혜의 역사로 빚으신, 영원하신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라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더 갚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엡3:16, 딛3:7)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주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기업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귀중하며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백조인 줄을 모르면 미운 오리 새끼로 살게 되듯,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면, 죄의 종으로 죄의 종노릇 하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한 삼손>
삼손은 분명 일정 시간 동안은 ‘나실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순간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나실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블레셋의 딤나로 내려갔다가 한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삿14:1-2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안목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한 여자를 보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누구나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문제는 절제하느냐입니다.
삼손은 자기 부모에게 가서 결혼을 시켜 달라고 졸랐습니다(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 당연히 부모님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삼손의 완강한 고집에 못 이겨 마침내 결혼을 허락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삼손은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그 여인의 집(딤나)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선지 홀로(부모님 몰래) 딤나에 있는 포도원을 찾아갑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든 그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유혹을 받을 것이 뻔합니다.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그런데 왜 갔을까요? 본문에는 설명이 없지만 제 생각에는 가는 길이 그 포도원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에 열린 아름다운 열매를 보았을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결혼을 앞두고 흥분된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젊은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주저 없이 돌이켜야 했지만, 삼손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자가 달려들자 삼손은 마치 새끼 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손쉽게 죽입니다. 자신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았는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여인의 부모로부터도 결혼 승낙을 받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양가로부터 결혼을 허락받고 날을 잡았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삼손은 당시 혼인 풍습에 따라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신붓집으로 향합니다. 그 길에 포도원 앞을 지나가는데, 전에 죽인 사자의 사체에 벌 떼가 모여들고 여기에 꿀이 고인 것을 봅니다.
이 순간 삼손은 또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식욕)에 넘어간 것입니다.
삿14:9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면 먹고, 부모에게도 갖다 줍니다. 하지만 그 꿀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또다시 말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장인과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위해 블레셋 젊은이 삼십 명을 데려다가 들러리로 세웁니다. 일주일 동안 그들과 교제를 하게 합니다.
그런데 또 삼손은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이생의 자랑’에 넘어간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젊은 사자를 마치 새끼 염소를 찢듯이 죽인 것을 자랑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내기 -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삿14: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먹는 자(eater)에게서 먹는 것(food)이 나오고, 강한 자(the strong)에게서 단 것(sweetness)이 나왔다.”(‘먹는 자’, ‘강한 자’는 사자요, ‘먹는 것’, ‘단 것’은 꿀”)
이것이 무엇인지 맞춰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삼손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만든 문제이니, 당연히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일곱째 날까지 풀지 못하자 블레셋 청년들이 삼손의 아내를 찾아가 협박합니다.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이에 겁을 먹은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울면서 자신에게만은 답을 알려 달라고 애원하니 칠 일째에 답을 알려줍니다. 아내는 블레셋 청년들에게 알려주었고, 블레셋 청년들은 삼손에게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며 답을 말합니다. 결국 삼손은 내기에서 집니다.
이번에는 분노를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삼십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내기했던 블레셋 청년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그 길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삼손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자, 분노한 삼손의 장인은 삼손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들러리 청년 중 한 명에게 딸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삼손은 화가 누그러져 아내를 데려오려 장인의 집을 찾아갑니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을 확인한 삼손은 분한 마음에 보복을 결심합니다. 여우를 300마리나 잡아 두 마리씩 꼬리를 묶어 그 꼬리에 기름 막대기를 매달고 불을 붙여서 풀어놓음으로 딤나의 황금 들판을 다 태워버렸습니다(15:1-13).
그러자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장인과 딸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삼손도 또 다시 복수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쳤습니다.” 이는 관용어귀로서 힘쓸만한 젊은이를 많이 죽였다는 뜻입니다.
삼손의 보복에 블레셋 사람들은 아예 군대를 동원하여 유다 지파 앞에 진을 쳤습니다. 겁에 질린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대신 삼손이 숨어있는 에담바위를 찾아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 넘깁니다. 삼손은 자기 동족에게는 손끝 하나도 휘두르지 않고 잡힙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을 새 밧줄 둘로 단단히 묶은 뒤 블레셋의 손에 넘겼습니다(14-17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자 삼손을 묶고 있던 싱싱한 새 밧줄 둘이 불탄 삼처럼 우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나귀 턱뼈 한 조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블레셋 군대 1천 명을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입니다. 그리고는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턱뼈의 산)라 이름하였습니다.
삼손이 절제하지 못한 것 때문에,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났고, 그의 정체성은 상실되었으며,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존경받는 사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양아치나 망나니 수준의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태어난 삼손의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반복되는 실수>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그의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16장).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손이 ‘가사’라는 블레셋 도시에 갔다가 한 기생을 보고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새벽에 매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죽을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탈출했지만, 그의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이 또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만한데, 또 삼손은 여전히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냅니다. 또 한 명의 블레셋 여인에게 정신을 빼앗긴 것입니다(4-22절). 이 여인의 이름을 ‘들릴라’라고 밝힙니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푹 빠진 것을 본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들릴라에게 "각각 은 천 백 개를 줄 터이니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내라"(5절)고 요구합니다(은 5500개). 노예 한 사람값이 당시 은 20~30개 정도였으니 삼손의 몸값이 천문학적 숫자가 되는 겁니다.
이에 들릴라는 삼손에게 4번에 걸쳐 그의 힘의 근원을 묻습니다. 삼손은 둘러댑니다.
1)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7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였지만, 삼손은 그 줄들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습니다.
2)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1절).
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들였지만,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습니다.
3)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13절).
들릴라가 바디(베틀의 핀)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직조) 블레셋 사람들을 불렀지만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었습니다.
4)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7절).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삼손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삼손은 4번 만에 넘어갔습니다. 반복되는 유혹에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자 그의 힘이 사라졌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눈알을 뽑히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그만 교만한 마음에 실수를 하고 맙니다.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자신들이 모인 곳의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22)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치심에 몸을 떨던 삼손이 하나님께 마지막 소망을 두고 간절히 기도를 올립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28)하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29-31). 힘이 생긴 삼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두 기둥을 오그라뜨려 버립니다. 이때 모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구경삼아 모인 자만도 3000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삼손이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고는 하나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절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 언약을 지키지도 못했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에게 구원하라는 사명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났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삼손을 사사라고 부르며, 이런 삼손의 한심한 생애를 이렇게 4장에 걸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삼손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 생애에서도 반복하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나를 성도로 부르시고, 나를 거룩한 직책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직책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런데 절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
‘절제’는 ‘self-control’, 즉 ‘자기를 통제하는 것’인데,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이는 마치 코치 없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고 말하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더라도, 코치가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과 코치가 짜준 계획표에 따라서 차근차근 운동하는 것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절제란 그런 것입니다. 코치가 세워놓은 훈련 계획에 따라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힘들다고 그만두면 안 됩니다. 쉽다고 건너뛰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코치의 인도함에 맡기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코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코치가 되셔서, 나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고, 바로 잡으시고, 격려하실 때에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를 통제하실 때에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매 주일 하나씩 묵상하였습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꼭 기억할 것은, 이 ‘열매’라는 단어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열매가 아니라 함께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마치 ‘포도송이’라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포도는 한 송이지만 그 속에 많은 포도알이 열매로 달려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이지만 그것은 모두 한 묶음으로 맺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열매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유용한 이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판자를 엮어서 만든 통’(barrel)입니다. 이것은 독일의 생물학자 리비히(Justus von Liebig)가 자신이 발견한 소위 ‘최소량의 법칙’(Law of the minimum)을 설명해놓은 그림입니다. 이 통은 높이가 다른 여러 개의 나무판자를 엮어서 만들었습니다. 이 통에 물을 부으면 어디까지 물이 차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가장 키가 작은 판자 높이까지만 물이 차게 되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다른 좋은 영양소들이 충분히 넘치게 공급된다고 하더라도, 한 부분의 영양소 공급이 부실하면 그것만큼만 식물이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요소는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부족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믿음의 영양소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홉 가지 모든 영양소가 충분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많이 있는데 ‘오래 참음’은 조금 부족하고, 또는 ‘희락’은 충분한데 ‘화평’은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넘치는 부분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만큼만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 부족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본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부족한 부분을 온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면 그 부족한 부분들이 온전하게 세워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자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가 균형 있게 맺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열매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으로는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