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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의 힘이 현대미술에 미치는 영향
-보는 것(대상)과 보여 지는 것(마음)? -
2010년 선도회 하계수련회는 담양 청와헌에서 있었다. 여느 수련회만큼보다 더웠던 만큼, 이번 수련회는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법사님들의 많은 참여와 함께 동생 벌(?) 되는 회원 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해 주었던지 감히 손을 놓고 모른 척 할 수 없어 나 역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수련회 두 번째 광주모임 혜정법사님의 법문은 생각지 못했던 이벤트였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사진/메모)도 하지 못한 채 열심히 보고 들어야 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법문 내용(강의)을 나름대로 이해한 수준으로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 해 본다.
강연 방법으로 슬라이드 시청 자료와 함께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빔 프로젝터 램프가 나간 바람에 반만 진행이 되고 반은 혜정법사님의 평상시 담고 계셨던 작품세계관을 말씀하셨다. 강의내용은 선禪의 힘이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다’라는 것으로 현대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시대적으로 어떻게 그 정서가 표현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이다. 그리고 19~20세기의 예술은 새로운 인식전환으로 바뀌어 간다. 그 인식전환은 마음의 치유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 데 기반이 되어 예술가들이 등장한다.“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인간을 위한 예술”(윤양호 「현대미술에 끼친 선사상의 영향」)로써 승화시키려는 예술가들의 현대미술사적 흐름을 예술가들의 작품속에서 알아보고, 조형미술가로써 현대미술사의 흐름에 맞추어 혜정법사님의 작품세계관을 비추어 가는 구성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은 윤양호 선생님의 논문제목(현대미술에 끼친 선사상의 영향-예술작품에 나타나는 미학적 특성을 중심으로-)과 비슷하다. 논문을 리뷰했던 터라 혜정법사님의 강연은 나의 기억력을 다시 되살리고 미술에 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 문외한에게 뭔가를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강연 자료가 슬라이드 외는 없었지만 슬라이드 필름을 넘기면서 설명되어졌던 내용을 벗어나지 않고 가깝게 이해해 보려고 했다. 수련회에 참여하여 강연을 들었던 회원분들께서 혹여 작성자가 잘못 이해되어 작성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해 주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이 글을 임의대로 올린다는 것에 조심스러움을 더하게 된다.
현대미술사의 흐름
미술사의 전개과정은 선사 미술에서부터 고대 미술(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 고대 그리스미술, 고대로마미술, 중세미술(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 미술, 로코코 미술, 19세기미술(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20세기미술(초현실주의,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추상주의,액션페인팅,앵포르멜, 팝아트, 옵아트, 키네틱아트, 미니멀리즘, 비디오아트, 하이퍼 리얼리즘)로 그 전개과정을 나눌 수 있다.
강연내용은 혜정법사님이 말씀하신 현대미술사 즉 20세기 미술을 놓고 강의내용이 진행된 것으로 1950년대 전후로 미술사 흐름으로 시작된다. 1950년 이전의 예술은 대상의 재현을 통한 인간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반면, 1950년 이후 예술은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욕망에 대한 물음 속에 예술가들은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어 새로운 구성으로 실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대상을 선택하여 대상을 통해 예술로 승화시켰다면 현대미술 시대의 예술가들은 대상의 선택보다 더 중요한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이 자신들을 파괴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마음의 치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윤양호 「현대미술에 끼친 선사상의 영향」). 그래서 ‘대상’이 예술의 중심이 아닌 ‘마음’으로의 이동으로 볼 때, 대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대상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작용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그 초점이 무엇인가? 를 놓고 고민하며, 그 초점은 ‘정신성’이라는 것에 맞추었다. 결론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대상에 대한 표현성 보다는 정신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며 “예술을 위한 예술”로부터 “인간을 위한 예술”로 가고 있다고 정리될 수 있다.(윤양호)
이렇게 현대미술사가 갖는 예술지향에서 예술가들은 캔버스가 아닌 일상의 삶속에서 얻어지는 것들로 예술을 표현하고자 한다. 뒤에 나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뒤샹이나 워홀, 올덴버그, 백남준, 라입 작가들이 사용했던 일상의 물건 혹은 자연으로부터 얻어지는 꽃가루 등을 소재로 한다. 혜정 김인경 법사님도 마찬가지이다. 조소(조형)작품소재 선택은 주로 일반 대리석이나 브론즈(청동)이다. 그러나 대부분 작품소재를 천을 사용하여 묶고 엮어 작품을 표현한다. 특히, 천의 색깔 또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국방색이다. 워홀이 ‘브릴리 상자’에서 겉으로 보는 상자보다 미국문화의 대량소비문화에 대한 경의를 보여주고자 표현했던 것처럼 선禪을 통한 고요한 여행으로 작품을 일구어 가고자 하는 것이 혜정 법사님의 예술세계의 ‘대상에서부터 마음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20세기 이전과 이후의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미술사의 흐름이 갔는지 슬라이드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램프에 문제가 있어 중단되었지만 이어지는 구두 강연은 마지막 단락 <혜정 김인경 법사님의 작품세계와 선禪의 미학 > 에서 정리했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20세기 이전의 예술가와 작품
◉ 끌로드 모네 Claude Monet(1840~1926)
모네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인상·일출(日出)》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생겼다.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인상, 해 뜨는 광경」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밀짚 모자를 쓴 초상화」
네덜란드의 화가로 인상파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풍을 확립하였다.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상주의미술[印象主義美術, Impressionism art]은 19세기 후반, 주로 1860∼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 미술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았다.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고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한다.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된다.
◉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프랑스의 화가로 ‘근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인상파작업을 했으나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목 맨 사람의 집]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입체파(cubisme)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인상파의 기법을 쓰기는 했지만 인상파가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대상에서 발산되는 빛이 나타내는 실재의 모습보다는 대상들에 내재해 있는 구조를 강조했다.
그는 이미 입체적인 양감과 건축적인 선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그의 붓놀림은 인상파와는 달리 색 점 들을 흩뿌려놓지 않고 색의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보완해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목맨 사람의 집 The Suicide's House〉(1872~73)은 이러한 특징들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20세기 이후의 예술가와 작품
현대미술은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일련의 전위적(前衛的)인 미술운동과 함께 싹텄던 것이다. 이를테면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칸딘스키, 몬드리안, 밀레비치, 들로네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미술 운동 그것이다. 추상미술없이 20세기 전후의 현대미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미술을 보다 포괄적으로 20세기 미술을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초두의 약 20년 사이에 유럽 각지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과격하고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거의 동시에 활발하게 전개된다. 프랑스의 야수주의(野獸主義:포비즘)와 입체주의(큐비즘),독일은‘청기사(靑騎士)’운동,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네오플라스티시즘) 운동, 그리고 혁명 전후 소련의 절대주의이다. 또한 구성주의(컨스트럭티비즘),이탈리아의 미래주의(퓨처리즘),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스위스와 미국에서 일어난‘다다’운동이다. 이들은 르네상스 이후 만들었던 전통적 미술을 거부하였다.
◉ 오귀스트 르네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1917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등을 남겼다. 미켈란 젤로 이후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특히, 1898년 「발자크 상」은 실물보다 유령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이 의상은 사실 잠옷이다. 이는 사실적 양감의 조각적 표현과 발자크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두상(頭像)을 집중적으로 표현했다. 백작답게 그 위엄을 내세우려는 내적 추구의 상징을 끄집어 내려했던 근대 조각의 작품이다.
로댕작품에 대한 혁명은 근대조각 이전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이상화된 인간의 형상을 정형화시켰다면, 근대이후 새로운 조각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민 것이다. 마치 발 자크 상의 발을 내민 것처럼?. 즉 그의 주관성에 바탕을 둔 작업방식에서도 그 예를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토막내기, 분리하기 등이다. 그의 작품 [신의 손]등을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실체, 내면적 외형적 실체가 조각작품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해체와 토막내기라는 작업방식으로 전통조각의 종말을 가져다 준 그의 파격적인 작업은 근대조각의 시작을 알리게 했다. 그의 시각과 생각을 표출 해 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철학 예술가였다라는 점과 함께...(서순주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커미셔너 2010.[로댕특별전]) 프랑스 파리를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로댕작품들이 [지옥문]을 필두로 2010년 한국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40여점 전시되었다. 마음 한 켠에 우리 예술문화의 위상을 볼 수 있었던 특별전에서 '해체분리'라는 그의 작품철학을 담았지만 전시공간이 좁았다는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발자크 상 」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로 동양적인 장식양식에 착안하고 추상화와도 관련을 가지면서 템페라·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롭고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올리게 된다.
[kiss]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와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 바실리 칸딘스키Vassily Kankinsky (1866~1944)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청기사파의 일원이었고 추상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다.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역동적인 추상표현을 관철한 뒤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가서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등이 있다.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Über das Geistige inder Kunst](1921) [점 ·선 ·면 Punkt und Linie zu Fläche](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1910 칸딘스키 구성 8」
반원 네개(엷은 보라색으로 표기한 것)은 템포 강, 약, 중강, 약을 의미하며 그 밑의 반원들은 음표와 화음의 연관성을 표기한 것으로 무미건조한 선들에서 원을 중심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것은 칸딘스키의 마음속의 울림을 음악화 하여 강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더 이상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며 마음을 인식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피카소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형태의 여성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단순한 여성의 신체를 표현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1907년 이 작품은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구체화되었다. 또한 도기제작과 조각, 석판화 제작까지 많은 영역에서 새로운 수업을 창조한 그는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거장이 된다.
[아비뇽의 처녀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의 예술가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르셀 뒤샹의 샘(변기)는 인간과의 궁극적 삶의 일상에서 예술을 표현하려 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기존의 예술과는 확연히 다른 반 예술적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것이다. 아마도 팝 아트나 미디어아트로 전개되는 20세기의 현대미술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로 「샘(Fountain)변기」이다. 아마 그냥 단순한 남성 변기로 보일 것이다. 사실 그렇다. 뒤샹은 실제로 이 작품을 위생용품점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위생용품 제조업자 이름을 암시하는 가명(R.Mutt)로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 제출한다.
이 소변기는 전시회 측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전시회 내내 전시회장 밖에 밀려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뒤샹은 이런 작품을 내놓았을까.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의 미술작품) 개념을 세웠는데, 그는 레디메이드 즉 기성품을 일상적인 환경이나 장소에서 옮겨놓으면 본래의 목정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성 만이 남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변기가 화장실이란 고유 공간에서 벗어나 기존 통념과는 다른 낯선 공간에 놓이면 기가 더 이상 변기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즉, 변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변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샘(Fountain)」 작품은 예술 공간에 전시된 일상적인 사물이 과연 예술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의 작품으로 그러한 그의 철학을 표현했다. http://luckymch.egloos.com/2671923
이쯤에서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의 예술이론으로 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하는 말로 ‘아우라’ 개념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우라는 본래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 또는 영기(靈氣)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우라는 유일한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진이나 영화와 같이 복제되는 작품에는 아우라가 생겨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아우라는 종교 의식에서 기원하는 현상으로 "가깝고도 먼 어떤 것의 찰나적인 현상(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라 정의하였다. 또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진이나 영화처럼 현존성이 결여된 작품은 아우라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한 ‘아우라의 붕괴’이다. 독특한 거리감을 지닌 사물에서만 가능한 아우라는 복제품이나 대량생산 된 상품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것으로 본 이 이론은 당시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반대되는 이론가들은 벤야민의 아우라의 신비주의적·비의적 요소를 비판하였다. 어쩌면 시대적 상황과 흐름을 타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예술성을 두어야 하는데, 그 예술성의 진리란 또 무엇이겠는가? 어쨌든 이러한 미술사상의 흐름도 숙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라데팡스 콜더 [Alexander Stirling Calder, 1898~1976]
미국의 조각가로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조각(mobile)'을 제작함으로써 조각을 대좌(臺座)와 양감에서 해방시켰다.
[라데팡스 콜더의 조형물 스타빌]
1925년경 응용미술 등장은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미술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나 용어 자체는 그때 그때마다 달리 사용되었다. 1800년대에 서양 사람이 생각해 낸 미술을 둘로 구분하면 순수미술(純粹美術)과 응용미술(應用美術)로 하여 그림·조각은 순수미술, 공예·건축은 응용미술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을 전후하여 미술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자 시각예술(視覺藝術)·공간예술(空間藝術) 또는 조형미술(造形美術)과 같은 말이 생기고 사용되게 되었다. 시각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이 사람의 시각작용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에 그렇게 불렀고 공간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의 성립이 그 공간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예술(時間藝術:음악·문학 등)과 대치되는 예술로 규정되었고, 조형예술은 미술이 유형적(有形的)인 조형성을 기본방법으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 새로운 용어들은 과학(科學)의 발달과 생활의 변모에 따라 생기는 새로운 미술현상으로 본다? 이를테면 사진(寫眞)이라든가 디자인이라든가, 꽃꽂이 같은 것도 넣을 수 있는가?
1960년대에 들어와 미술계는 팝 아트가 등장한다. 현실 도피적 몽상이나 이국 취향에 반대하며 현실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현실이란 작가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사실주의) 작품의 특징은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사실적인 것만을 묘사한다.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만든 여러 가지 도구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시켰는데 컴퓨터와 비디오, 만화, 영화배우와 정치가의 사진 등등 현대인에게 익숙한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캔버스 자체를 부정한 예술도 등장했다. 이들은 생활 용품, 자연물,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도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다.
또한 산업 제품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회용품이 쏟아졌고 광고 디자인, 사진, 텔레비전 등의 영향으로 대중 스타가 탄생하였다. 산과 물, 꽃, 여인 등의 아름다운 소재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이 시기에는 광고판과 대중 매체를 통해 넘쳐나는 각종 이미지들이 자연스런 환경이 된 것이다. 이 무서운 대중문화의 기세에 화가들도 놀라고 말았다. 미국의 젊은 화가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색채나 형태, 풍경보다 콜라병, 통조림, 만화, 가수, 영화배우 등이 훨씬 흥미로웠다. 팝아트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도시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 앤드류 워홀 Andrew Warhola. (1928~1987)
1962년 캠벨 수프 깡통, 코카콜라 병, 브릴로 비누상자 등을 그린 작품을 전시하여 갑자기 유명해졌다. 1963년에는 사진을 이용한 실크 스크린을 통해 이러한 소비제품들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대량생산해냈으며, 화려한 색채로 약간씩 변화를 주어 이미지를 끊임없이 반복시킨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을 판화로 제작했다.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워홀은 그것을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조수들과 함께 대량생산 한다.
「캠벨 수프 깡통」
「브릴리 상자」
'브릴라'는 세제 상표인데,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상표를 나무상자에 똑같이 찍어서 만든 작품이 바로 '브릴로 상자'다. 수십 개의 브릴리 상자를 쌓아올린 작품은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이다. 사실 상자 그 자체를 예술로 볼 수 있지만 작가의 철학은 그 이면의 보여지는 것 즉 미국의 대량 소비문화에 대한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 클래스 올덴버그 [Claes Thure Oldenburg, 1929~]
미국의 조각가. 팝 아트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50년 말부터 1960년대 초에 오브제(objet)가 관객과 일상적 환경 속에서 전개하는 일련의 충격적인 작품을 시도하였다. 일상의 오브제를 거대하게 확대하여 관객의 심리에 충격을 준다든지, 전기청소기나 선풍기 등의 경질기계제품을 부드러운 천이나 비닐로 모조한 해학적 작품을 전시하는 등의 발상은 그의 일관된 방법론이다.
[올덴버그의 빨래집게]
◉ 백남준 (1932~2006)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도쿄와 독일에서 유학하며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회를 선보였다.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불린다. 비디오 아트의 첫 출발은 1963년 3월, 백남준이 독일에서 <전자TV>를 발표하면서였다. 백남준을 가리켜 ‘비디오 아트의 황제’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비디오 아트에는 백남준처럼 비디오 모니터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비디오에 테이프를 집어넣고 화면으로 흐르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예술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비디오 아트의 성공은 이제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백남준 역시 한 번도 손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다. 백남준의 플럭서스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실험적 예술로서 획기적이었다.
미디어 아트는 인터넷, 웹사이트,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현실 등의 대중매체를 미술에 도입되는 매체예술로 불렀다. 미디어 아트가 기존의 예술과 다른 점은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있다. 전통적인 아트, 즉 회화는 평면적인 작품으로써 심리적 상호소통이 우선적인데 비해 미디어아트는 대중매체를 이용함으로써 심리적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상호작용도 일어난다. 대중과의 소통이 훨씬 더 수월한 미디어아트는 단순한 예술을 넘어서 일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백남준의 작품] 「비디오 아트」
선禪사상이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치다
이와 같이 미술사의 흐름은 19세기말과 20세기 중반을 넘어 정신적으로 재구성되었다. 기존의 예술에서 표현되었던 대상의 외형에서 예술가의 내면으로 이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면의 시대적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과 산업시대를 맞이하면서 어떠한 경계가 없이 일상으로부터의 예술로 전개되어 갔다. 특히, 현대예술이 선 사상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선(Zen)사상이 서양에 도입되는 19세기 말 대상의 재현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즉 모든 것이 마음작용이라는 선 사상의 내용을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느껴가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선사상과 현대예술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음) Helen Westgeest(1958∼ )는 그의 논문「Zen und Nicht Zen, Zen und die Westliche Kunst에서 선사상이 서양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을 선 사상이 도입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중반을 넘어 기존의 예술에서 표현하던 대상의 외형에서 예술가의 내면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할에 고정된 것이 없는 선의 사상으로 보았다. 또한 Hans Guenter Golinski(1940~)는 아름다움은 형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오는데 그 마음은 대상을 관조함으로써 느낄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꽃가루에서 인간의 삶의 모습을 찾은 볼프강 라이프 (Wolfgang Laib 1950~)은 독일출신으로 의학공부를 마치지만 의사의 길을 버리고 예술가로 전향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서구문명의 한계를 알고 동양적 세계로 동경을 갖는다. 동양적 사유를 습득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그는 꽃가루를 통해 자연의 순환하는 원리를 이해하고자 한다.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얻고자 하는 것, 꽃가루를 이용한 작품에서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곧은 마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과 같은 직심이라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즉 자의적인 자극을 가하지 않는 순수함의 마음 직심은 자신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마음을 찾아가는 것을 꽃가루로 가져보려고 했다.
그의 작품 [오를 수 없는 다섯 개의 산]은 그의 예술적 감수성과 인식적 관점이 잘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에게 꽃가루는 시작이자 잠재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꽃가루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쉼 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며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만 한다. 선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 보이는 노란꽃가루가 산처럼 바람 한번 불면 순식간에 흩어져버려 흔적이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이 작품은 삶의 과정이 수행과 다르지 않음을 통하여 생각의 변화가 삶을 변화시킨다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윤양호 「현대미술에 끼친 선사상의 영향). 다음 여름에는 해수욕장에서 곱디고운 모래로 이와같이 산을 쌓아 보시라~ 그리고 어떤 경계를 댈 것인가?
[오를 수 없는 다섯 개의 산]
70년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연계된 우리의 미술사 조를 보면 궁극적으로 ‘자연의 순리’라는 대명제를 깨닫기 위한 것으로 민족적인 정서와 미감을 추상적 화면으로 번안해 내는 데 주력하여 한국적 정서를 회화에 도입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1970년대 이후에 나타난 단색주의 선호자들은 우리민족 고유의 자연주의에 기초한 ‘정신성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일본의 획기적 미술운동인 모노파-('모노하物派'라 발음되는 사회운동으로 예술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작가들이 기존의 예술에 도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표출 된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불림. 이우환은 모노하가 운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현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의 이론과 실천을 주도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이우환은 살아있는 미술사로써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일본 미술계를 석권한 모노화(物派)의 핵심인물이다. 모노크롬의 회화표현 방법에 있어 정신으로서 모노화란 이우환이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설치작품을 했듯,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 물질이나 물체를 그 자체로 사용해 예술언어로 삼았던 작가들을 가리킨다. 이우환은 또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단색화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동양화와 철학을 했지만 동서양의 미적 기준의 한계를 모두 피해가면서 양자가 서로 만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조선일보, 2008년 1월 15일 이우환, 점관 선의 문예철/ 작성자 김복기)
캔버스 특유의 탄력 있는 저항에 순응하면서 그는 한 획劃의 선을 긋고 다시 그 선과 나란히 또 다른 선을, 또 그 선 곁에 또 다른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들은 같은 리듬을 타고 그어지면서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마치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점을 찍는다. 그 점들도 역시 찍힐 때마다 차츰 자취를 감춘다. 마치 무無에서 태어나 무無로 되돌아 가는 자신의 논리에 회귀回歸하듯이……
선과 점은 그들 고유의 삶의 물결을 가지고 있다. 그 물결은 화가 자신이 함께 산다.
「점으로부터」
이우환은 우주는 점点에서 성립되며, 인위적인 것도 자연의 삼라만상도 우주의 무수한 점 속에서 되풀이되는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본다. 다시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창조가 아닌 무의미로 본다. 이렇게 무無의 사상에 근거하면서도 모든 행위조차 거부하는 니힐리즘(서양철학에서는 허무주의로 표현되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이 아닌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 인간을 인식하게 하는 점을 예술의 커다란 의미로 두고 있다. 때문에 그는 점을 그린다. 인간은 무엇(세계)에 관해 생각하기 이전 이미 그 속에 계획되어 행동하고 직관하는 신체의 몸이다. 그래서 예술의 목적에서 몸(신체)은 만남의 고리가 된다. 매를리 퐁티는 몸의 원초적 기능을 밥을 먹을 때나 자전거를 탈 때 매순간 '어떻게 해야지?'하고 반성해서 생각한 끝에 몸에 명령을 따라 동작한다고 보았다. 즉 이미 몸이 하는 생각이 몸을 통해 나온 것이다. 즉 정신이 절대화됨으로써 정신적인 세계를 우리가 살아가는 바깥의 세계보다 더 참다운 세계로 보고 있다.
혜정 김인경 법사님의 작품세계와 선禪의 미학
삶 자체가 직관적으로 정신적인 삶을 지향한다는 박서보는 텅 빈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미적 대상을 향하여 관조觀照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모든 것은 스스로 그러하고 구구한 설명이나 이유 따위가 필요치 않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이다. 즉 인위와 조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박서보 [현대미술과 나(2)])
혜정 김인경 법사님의 “고요한 여행으로”속에서 작품은 더 이상 대상으로써 예술의 중심이 아닌 ‘마음’으로 이동이다. 혜정법사님의 지난 개인전시회 작품노트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작가들이 사용하는 대리석이나 브론즈(청동)이 아닌 천을 사용한다. 천을 재단하고 묶고 엮는 방법으로 우리의 시대적 현상을 보려하고 있다. 천의 재료가 갖는 성격을 표출하여 어렸을 적 가장 기억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등장되었던 군인들이 입었던 옷과 끈이 매여진 군화 등 혹은 그들이 던져 주었던 초코렛은 캔버스가 아닌 삶의 일상속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었던 시간으로 ‘고요한 여행’을 끄집어 내었다.
예술작품의 의미로써 화면에 담을려고 했던 억지가 아닌 법사님의 삶의 한 공간에서 차지했던 흔적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잠재된 의식이 침잠된 세계, 업의 근원으로의 기행이다. 2010년 선도회 하계수련회에서 보여 주었던 현대미술사의 방향이 예술가들이 삶의 과정, 즉 일상에서 선의 수행과 다르지 않음을 대신하고자 했던 시간이었다. 혜정 김인경 법사님의 2009년 아트 다큐(kunst doc)에서 열린 개인전시회에서 올려진 작품노트에도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수련회에 참여하신 어떤 회원분이 "혜정법사님의 작품세계관은 무엇입니까? ".
“조형이라는 것이 완벽한 창작이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어느 창작 행위자가 다듬어 내는 글이나 음악이나 그림이나 조각 따위를 굳이 새로운 창작이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전의 것들과 ‘다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많은 예술가들 역시 그들이 딛고선 세상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관념 덩어리들일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인과론에 의하면, 태어나면서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 인간은 그가 체험하는 오감과 그것을 판단하고 행위하며 저장하는 식에 의하여 인생의 잠재적 행로를 지정받는다고 한다.
이번 생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조각의 길을 선택하고 창작이라는 행위에 몰두하며 십여 년의 세월을 보냈을 때,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만들고 다듬는 조형이라는 결과물들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 깊숙한 어느 곳에서 우러나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외형적 조형의 형식과 미술사적인 위상 등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의식을 보내면서, 때로는 진득하게 기다리기도 하고 혹은 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면서 내 자신 속에 침잠되어 있는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부추겼다. 막대기나 판, 원반이기도 하고, 때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쿠션이나 두터운 캔버스 천으로 된 가방이면서, 그것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금속조각이나 매듭, 실 같은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는 그 형상들은 분명히 내게 몹시 친숙한 사물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 난 그것들의 정체를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것들은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나를 깨우치게 하였는데 그것들은 유년시절부터 내가 겪어온 익숙한 질감이며 형상들이었다.
나는 떠오르는 그들의 주된 이미지에 단편적이고 절제된 요소들을 간결한 조형으로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내 오랜 의식 속에 잠기어 있던 잘 다듬어진 매끈하고 단단한 책상의 엄격함과 초등학교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양초먹인 원지에 철필로 사각사각 흠집을 내어 글을 새기고 그 위에 로울러로 잉크를 밀어내면 흠집 사이로 잉크가 배어나와 하얀 종이 위에 글과 그림이 찍혀 나오던 신기한 등사용 글판의 촉감이었으며, 빠르게 돌수록 제자리에 정지하는 넓적한 팽이의 고요한 에너지와 철길 옆에 버려진 미군의 무전기 밧데리 속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흑연판들의 질서, 그것을 메고 나서면 세상의 어디로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군용 배낭 속의 충만한 존재의 암시 등등이었다.
그들은 성숙해가는 오랫동안의 정제과정을 거쳐 내 의식 위로 떠올라 마침내 실용의 가치가 배제된 무명의 순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의 원래 이름이나 사용처가 무엇이었던 간! 내게 떠오른 이미지들은 그대로 조형이 되는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나의 작업에 ‘고요한 여행’(SILENT VOYAGE, 夢幻泡影)이란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진행되는 나의 작업과정이, 확연하지 않은 내 잠재된 의식의 침잠된 세계, 즉 업의 근원으로까지 펼쳐지는 흥미로운 기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모든 예술가의 공통된 행로가 아닌가.”
(내용출처 http://kunstdoc.com)
앤드류 워홀이 예술품과 공산품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리고 만 앤디 워홀의 「캠벨스프 깡통」이나 브릴리 상자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상자를 예술로 담기보다는 미국 대량 소비문화에 대한 경의를 담고자 했던 마음을 인식하고자 했다. 브릴리 상자는 그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뒤샹의 「샘(변기)」의 작품을 함께 보고자 했을 때, 이 작품들은 모두 일상에서 사물을 예술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즉 상자나 변기가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기존의 고정관념에 상반되는 공간에서 전시되어 예술품으로써 표현하였다. 나에게 볼프강 라입의 꽃가루는 어렸을 적 해수욕장에서 곱디고운 모래로 집을 만들며 무엇인지 모르지만 올릴 수 있는 만큼 올리려다 파도에 실려 나가 흔적도 없어진 기억을 되살려 준다. 볼프강 라입의 [오를 수 없는 다섯 개의 산]의 작품이 예술성을 두었다면 나의 해수욕장에서 모래쌓기 추억은 단지 기억뿐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속에서 찾아 드는 모든 사물과 대상들이 어떻게 예술로 만들어 가는가? 지금 다시 모래 쌓기를 한다고 하면 어렸을 적 아무생각 없이 쌓는 그때와 마음의 인식은 사뭇 다를 것이다. 마냥 대상으로써만 보는 것이 아닌 마음의 인식에서부터 비롯되는 일상 또는 삶의 예술로써 이름 되어진 그 무엇일 것 같다.
이와 같이 현대미술사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 마음을 알아가는 데 있어 수행의 과정으로 꺼내고 싶었던 혜정 법사님의 미술 강연은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보여 지듯 마음의 인식에서 비롯된 ‘정신성’의 발현으로 예술작품이 표현된다라는 것을 전달하신 것 같다. 그것은 일상의 수행과정에서 비롯된 마음작용이 예술가들에게 표출이 되는 '선의 힘'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내 작품은 팔리지가 않는다. 그리고 작품 재질이 천이기 때문에 보존처리를 맡기지 않는 한 오래 갈 수 가 없다. 그래서 어느 시점(10년 후)에서 난 작품들에게 약속을 할려고 한다. 나의 삶의 여로에서 나를 성찰해 주는 작품들이 큰 운동장 같은 곳에 모여 선도회원 여러분 앞에서 다비식을 해 주는 것이 내가 작품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 행위라고 생각한다.”라는 혜정법사님의 강의 엔딩 멘트는 수련회에 참석한 여러 회원 분들이 나를 비롯하여 그 날을 기억하고 기다리게 할 것 같다. 강연내용에 있어 비록 잘못 이해된 부분이 많으리라고 본다.또한 혜정법사님 의견과 달리 미술에 대한 문외한으로써 평소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연내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기록으로 남겨 보고자 했다.
[The office]
지금 해가 저물어 가는 이 시간 2010년 8월 21일 오후 5시 31분을 가리키고 있다. 잠시 일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아~ 너무 예쁘다! 라는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카메라를 찾아 재빠르게 셔터를 눌러 본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안에서 쳐 놓은 커텐은 유난히 오늘따라 다르게 보여진다. 커텐창문 밖의 또 하나의 방범창문 틀은 그 햇빛을 빌려 커텐천으로 캔버스가 되어 선(線)을 그려 놓는다. 나는 그 선을 따라 선만 남겨 놓고 오려서 또 다른 세계를 볼 수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선(방범창문 틀) 안에 채워진 면이 천이 없고 구멍 뚫린 모습을 보면 과연 내일 사무실 동료는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이런 발상이 예술적 기질인가? 아님 엉뚱 생뚱인가? 커텐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작품으로써 바깥의 저물어 가는 햇빛을 통해 비치는 파스텔적 색은 나의 마음의 조명이 되어 준다. 그리고 창문방범 틀에서 비춰지는 선과 선 사이 안의 여백은 내 삶의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첫댓글 구본산 총무님
제천모임 영하산방 무상입니다.
제 글을 이렇게 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하계수련회 때 들었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나름의 구성으로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면서도 그냥 올려는데,
스크랩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