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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0) 2024. 8. 4
우리가 어찌할꼬
행2:37-41
<베드로의 설교>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놀라는 사람들 앞에 서서 지금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전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베드로는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이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다윗의 시를 통해 예언된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구절이 바로 36절입니다.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서 ‘너희’는 물론 유대교 집권층과 유대인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군중들의 반응 –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의 설교를 진지하게 들은 사람들은 뭔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를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3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깨달아졌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잘못인 줄 모르고 행했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엄청난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존 웨슬리의 ‘선행 은총’). 도덕적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잘못을 깨달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잘못을 깨달아도(마음에 찔림을 받더라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국정을 다루는 주요 직책(장관급)에 사람을 임명할 때에는,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직무를 행하는 데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것입니다. 그때 대부분의 검증 대상자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만 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확신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합리화가 더 강합니다.
이단 사이비의 경우에 교주의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도 추종자들은 가능한 대로 그걸 합리화합니다.
반면에,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물은 것입니다.
행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도 내용이 베드로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는 사람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서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런 사람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7~9)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라고 대답하였습니다(세리와 군인들도).
영생을 추구하던 한 율법사도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하고 물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행22:6~10).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지진이 있은 직후 바울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16:30). 이 질문을 들은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꼭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해결책 제시>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구원의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구원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가 제시한 구원의 해결책은 두 가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세상은 성공하려면 뻔뻔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성공의 첫 번째 조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깡패들은 자신들의 그룹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들이 시키는 악행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도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범한 죄가 깨달아지거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회개를 단순히 어떤 특정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회개는 방향을 180도 전환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죄를 뒤로 한 채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꿨다고 해서 그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가슴을 치는 것과 옷을 찢는 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아니면 근본적인 전환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에 주목합니다.
평생 그 자리에서 뱅뱅 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했다가 다시 세상으로 가고, 또다시 회개했다가 또 탐욕에 굴복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란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두 번째 단계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증표와 같습니다.
이 세례는 두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1) 개인적인 차원입니다.
세례 받는다는 헬라어 ‘밥티조마이’는 물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내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우리가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다는 뜻입니다.
2) 공적인 차원입니다.
세례 받는다는 것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나의 신앙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예수님은 믿는데 세례를 꼭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 나가서 하는 게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자를 만나 사랑은 하는데, 결혼식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안 해도 사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이 부부입니다를 공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한 가정을 이룹니다. 와서 축복해주십시오. 우리 둘이 부부가 됩니다.’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눅23:43).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고 제자들에게 명했으며, 또 제자들 역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에도 이처럼 세례를 베풀고 또 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례는 '구원의 표'(벧전3:21)요, 이제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겠습니다’하고 공적으로 선포하는 자리가 세례입니다.
이처럼 공식적인 선언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회의와 범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공적인 증거가 ‘세례’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증인입니다.
한편, ‘각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의 주체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대신할 수 없는 본인 스스로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회개와 세례가 주는 은혜>
회개와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하나님 역사(은혜)가 임합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첫째,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죄 사함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기에,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갈4:6~7(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둘째,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말 성경인 개역 개정 본문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 각주에서 볼 수 있듯이, 사본에 따라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도 결국은 성령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내주(임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를 성전 삼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의 개방성>
베드로가 제시한 구원의 약속에는 제한이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즉 구원에는 남녀노소, 국적, 인종, 문화적 수준, 사회적 지위 등의 전제적 조건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유대교가 극히 폐쇄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베들로의 선포는 사도 바울을 통해 더욱 확증되었습니다.
롬10:11~1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 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 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골3:11).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세례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구원의 길로 초대한 베드로는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베드로가 여러 말로 전한 메시지의 결론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종교 생활도 아닙니다.
삶의 대전환입니다. 180도 돌아서는 전환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대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적당히 섞여 죄짓고 무심하게 살아가던 삶에서, 이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소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설교를 하니 그 결과가 놀랍습니다.
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초대에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이날 하루에만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나 더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구원의 방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구원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방법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회개하십시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완전히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물세례만 말고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십시다.
그리고 내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