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저명한 작가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정치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옭죄는 궁정생활을 탈출하여 베네치아,피렌체,로마,나폴리,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장 필립 뮐러'라는 가명의 상인으로 신분을 숨긴 채 익명의 자유를 만끽하며 보낸 1년 9개월의 여정에서 그는 다양한 예술적 체험과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지난날 낡은 관습의 틀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로서 변모해가는 내면적 성숙의 과정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 요한 볼프강 괴테 > 174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출생으로 1832년 사망하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 때 미술과 문학에 심취하였다. 1768년에 중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와 요양을 하는 중에는 신비과학과 연금술에 관심을 가졌다. 건강을 회복한 뒤에 슈트라스부르크로 유학하여 1771년에 학위를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따 변호사를 개업했다. 1791년에 신설된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27년간 감독으로 근무했다. 대표작으로 『사랑과 이별』『5월의 노래』『5월의 노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시와 진실』 등이 있다.
* * * * *
괴테는 37세 때인 1786년 독일을 떠나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거기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글로 남겼고 이 기록들을 책으로 묶어 1816년 출판하였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완간된 해는 1829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4월에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출판했는데 그 해에 이 책을 샀던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서점에 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책표지를 살펴보니 그해 6월에 이미 9쇄를 펴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책장에 꽂아두고 10년 가까이 마음만 건네곤 하던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처럼 사람과 책 사이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만나지듯이 만나야 할 책도 그런가 보다. 대문호라는 칭호답게 괴테의 글에선 대가다운 깊이와 무게가 느껴진다. 솔직하면서도 격식을 차릴줄 아는 멋쟁이를 보는 듯 하다. 화가들의 그림과 괴테의 스케치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다. 밑줄 그으며 읽었던 부분을 옮겨 놓기로 한다.
1786년 9월 6일 뮌헨 내가 바람과 날씨에 너무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9월 7일 미텐발트 나의 수호신이 내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수호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9월 11일 트렌토 많은 상인들의 얼굴이 나까지 덩달아 기쁘게 해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의도적으로 유쾌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
9월 11일 술집 주인도 독일어를 전혀 못하니 이제는 내 언어적 재능을 시험해봐야 한다. 좋아하는 언어가 생생히 살아나서 이제부터 사용어가 되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9월 14일 토르볼레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 있는데도 세계와 그 세계의 내막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로 종종 불편하고 위험한 지경에 놓이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하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9월 16일 베로나 나는 웅대한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원형극장은 텅 비어 있을 때 구경할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원형극장은 민중들 자신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고 자신들이 최고라고 느끼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9월 17일 내가 이처럼 놀라운 여행을 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상들에 비추어 나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미술, 혹은 화가의 수작업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렇게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제 2등급이나 3등급의 별들도 깜빡거리기 시작하고 하나하나의 별마다 전체의 성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우리가 생각해 온 것보다 세계는 더 넓어지고 예술은 더 풍부해진다.
9월 28일 베네치아 이제 베네치아는 내게 더 이상 단순한 단어가 아니며 - 무의미한 단어를 철천지 원수처럼 싫어하는 나를 그토록 자주 불안하게 했던- 예의 그 공허한 이름이 아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고독을 이제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완전한 이방이 되어 군중 속을 헤치고 돌아다닐 때보다 더 진한 고독이 느껴지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9월 29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것들뿐이다. 그것은 결집된 인간의 힘이 빚어낸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작품이며 한 명의 지배자가 아니라 수많은 민중이 남긴 훌륭한 유적인 것이다.
10월 5일 나는 항상 나의 지론으로 돌아간다. 자신에게 진정한 대상이 주어졌다면 어떤 예술가라도 진정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10월 6일 아테네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연설 듣기를 더 좋아하고 또 그것을 더 잘 이해한다. 그들은 재판정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면서 뭔가를 배웠음이 분명하다.
달빛을 받으며 나는 곤돌라에 올랐다 두 명의 가수가 한 사람은 이물에, 또 한 사람은 고물에 타고 있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슬픔이 담겨 있지 않은 비탄의 소리 같이 아주 이상야릇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노래 속에 담긴 뜻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진실되어서 지금까지는 생명이 없는 문자로 우리의 골머리를 썩이던 멜로디가 생생한 선율로 살아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고독한 자가 똑같은 심정의 또 다른 고독한 자에게 듣고 응답하라고 넓고 먼 세상으로 띄워보내는 노래이다.
10월 8일 우리의 눈은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주변의 사물들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네치아의 화가는 모든 대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밝고 쾌활하게 보는 것임에 틀림없다.
10월 18일 볼로냐 라파엘로는 다른 사람들이 희망사항으로나 품고 있는 일들을 항상 해냈다.
나는 그렇게 불쌍한 바보 같은 예술가를 생각하면 끝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에 비해 내가 자기관리를 조금 더 잘한다는 것만 다를 뿐. 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10월 19일 예술이란 삶과 같은 것이다. 즉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로운 별들이 계속 나타나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11월 1일 로마 부분적으로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바로 거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없고 아주 낯선 것을 발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기존 관념이 여기서는 아주 명확해지고 생생하고 유기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7일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왔다갔다하면서 관찰할 뿐이다. 로마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로마에 와서만 그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웅장한 발자취와 함께 거대한 파괴를 만나게 된다. 야만인들이 파괴하지 않고 놔둔 것을 현대 로마의 건설자들이 파괴해 버린 것이다.
여행 중에는 누구든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움켜쥔다. 날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판단하는 일로 바쁘다.
12월 2일 로마 나는 그 순간 미켈란젤로에게 반했으며 자연조차도 그 거장만큼의 취향을 갖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거장만큼 위대한 눈으로 자연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영상들을 마음속에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깊은 사람이 어떤 새로운 지방을 관찰할 때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삶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동일한 나 자신이지만 그동안 골수 깊숙이까지 속속들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한다.
12월 3일 내가 자연사 분야에서 주워들은 것이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 세계의 전 역사가 이 도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로마 땅을 밟게 된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나의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된다.
12월 13일 이곳에 와서 나는 마치 '공중제비'를 한 것 같았던 상태에서 점차 회복되어 즐긴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로마는 하나의 세계이며 진정으로 로마를 알려면 적어도 몇 년을 필요할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내가 지금 죽든지 아니면 조금 더 살든지간에 어쨌든 유익한 해였다.
12월 20일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향락이라기보다는 고생과 근심거리이다. 나를 내부로부터 개조하여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배우려는 생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근본으로 돌아가서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다시 배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단 확신을 가지고 완전히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수록 더욱더 즐겁다. 나는 마치 탑을 세우려고 했지만 불안한 기초를 쌓게 된 건축가와 같다. 다행히도 늦지 않게 그것을 깨닫고 이미 땅 속에서부터 쌓아올렸던 것을 기꺼이 다시 헐어내고 기반을 넓히고 개선해서 기초를 더욱 견실하게 다지고자 노력하여 앞으로 완공될 건축물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다.
12월 29일 우리는 사방의 벽이 거울로 된 방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예술가적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에서는 좋든 싫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눈에 비치게 되는 것이다.
* 1787년 밑줄분은 다음에 올려 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