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필 선생을 만난 김은자 수녀의 모양은 예수를 만난 삭개오와 비슷했다. 여자에게는 허영심이 많은 법이지만, 김수녀는 동광원에 들어와 자기를 걷잡을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리몰았다. 지산동에서 다른 수녀들과 함께 변소의 똥을 쳐서 오물통에 담아서는 거기로부터 방림(芳林)에 있는 동광원 농장까지 운반했다. 그 노릇은 사실 여자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본래 광주 태생인 김수녀는 거리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그런 모양으로 똥통을 메고 가다가 길에서 아는 옛 친구라도 만나게 되는 때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럴 때면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를 책망하며 소리치기를 “너 무엇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니? 예수님은 가장 존귀하신 분으로도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종이 되시지 않았니?” 하며 스스로 책망했다.
이 세상에는 수도원도 많고 수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만 동광원에서 이현필 선생의 정신 밑에서 수도생활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를 부인하고 인욕(忍辱)할 줄 모르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동광원은 경제적으로도 별로 수입 대책이 없었고 어디서 보조받는 데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립(自立)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쓰레기 줍는 자립반(自立班)이 조직이 되었다.
김은자 수녀가 젊은 여자의 몸으로 고향 거리로 똥통을 끌고 다닐 수 있는 용기와 마치 쓰레기 강아지 모양으로 내버린 쓰레기통을 뒤지러 다니며 사람들의 멸시 속에 배추 시래기 잎들을 주우러 다닐 수 있었던 용기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꺾지 못해 주저하다가도 스승을 볼 때 바싹 마른 파리한 얼굴에 헌 누더기를 입고 수녀들을 가르치는 성스러운 이현필 선생의 모습을 실제 보는 데서 새로이 용기와 격려를 얻었다.
이현필 선생은 수도원의 식구들을 식생활 대책이 어려워지자 명령을 내리기를 병원에 가서 환자들이 먹다 남겨 버린 밥을 얻어다먹으라고 했다. 선생의 명령을 받고 김은자 수녀가 처음으로 제중병원으로 버린 밥을 얻으러 갔을 때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수련이었다. 첫날 식당부엌으로 찾아 들어가서 식감(食監)을 만났더니 그는 김수녀를 보자마자 “은자! 너 살아 있었구나!”하고 소리 질렀다. 놀라 쳐다보니 그는 어려서 교회 유년주일학교 시절의 친구였다. 반가워했다.
그 해는 흉년이 들어서 집집마다 식량 사정이 어려워져서 가난한사람들은 비지도 먹지 못하고 지내는 형편이었지만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솥 밑에 붙은 누룽지도 훑어서는 드럼통 속에 있는 구정물 속에 아낌없이 쏟아버리곤 했다. 그때 식모가 6명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자기 집에다 돼지를 기르고 있어서 이 구정물을 받아다가는 자기 집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병원 원장의 양해를 얻어서 누룽지만은 동광원에 주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그러나 실제 부엌에서 일하는 식모들의 심술은 원장의 명령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기네 집돼지를 위하여 그들은 남은 밥이고 누룽지고 모조리 일부러 구정물통에 쏟아 버리곤 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못 할 노릇이었다. 이런 형편을 짐작한 이현필 선생은 “환자들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밥이다. 더구나 누룽지를 돼지에게 준다는 일은 죄짓는 일이다. 정녕 그렇다면 구정물이라도 얻어다 드시오.” 김은자 수녀는 그래도 매일 병원으로 밥을 얻으러 갔다. “모든 굴욕은 다 자기완성을 위한 수도다. 참아야 한다. 아무리 비굴한 노릇이라도 불평 없이 감당해야 한다. 참는 것이 수도다.”
병원 부엌에 가서는 식모들의 천대와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그는 자기의 수도를 위해서 또는 동광원 식구들의 먹을 것을 위하여 구정물통 속을 뒤졌다. 출렁출렁한 뜬물 속에 손을 넣어 밥덩이 큰 것과 누룽지를 건져냈다. 어떤 때는 구정물을 실어가는 인부들까지도 밥을 건져가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한번은 병원의 간호원장이 김수녀가 구정물 통에서 밥을 건져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때문에 식감 노릇하는 이의 입장까지 몹시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 위에서 상당히 꾸지람이 있어서 그 후부터는 누룽지에다 구정물을 쏟아 넣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식모들은 김수녀를 원수같이 미워하며 말 한마디 공손하게 해주는 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방림동 동광원에서 김은자 수녀가 손에 양동이를 들고 병원을 향하여 나설 때면 벌써 미리부터 병원 식모들의 독기 찬 얼굴이 눈앞에 아물거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수님, 저를 위해 그 천대 고생을 다 겪으신 주님, 저도 이런 천대를 달게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늘 기도하며 길을 걸었다. 땅에서 주의 자녀들이 나에게 천대받을 때 그 애처로운 사정은 이같이 기도를 통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병원 직원 중에 김수녀의 친구의 언니가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밥을 얻으러 갔다가 그 분을 만나게 되면 거지같은 자기 꼴이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럴 때면 또 스스로 꾸짖었다. “주님은 너의 죄를 위하여 옷이 벗겨지고 발가벗은 수치로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시지 않았니. 너는 요까짓 일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느냐. 아직 네 얼굴은 깨지지 않고 그냥 있구나?”고.
이 같은 탁발수행(托鉢修行)하는 일은 부끄럽고 쓰라린 일이었으나 그런 멸시 천대가 있었기 때문에 김은자 수녀에게는 간곡한 기도가 있었고 그의 영혼은 그런 기회를 타고 완덕(完德)을 향하여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현필 선생이 찾은 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버리고 돌보지 않는 길이다.
이현필 선생은 제자들의 영혼을 키워주시기 위해 이런 어려운 일을 시켰다. 만일 병원의 직원들이나 식모들이 처음부터 잘 협력해주고 친절하고 착하게 대해 주었다면 이 탁발수행에서 그가 얻은 수확은 적었을 것이고 그의 기도는 심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현필 선생은 그 자신의 일평생 걸어간 길이 그랬고 그의 가르치는 교훈이 모조리 그랬다. 이선생이라는 영혼의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김수녀의 영혼은 어떻게 됐을 것인가. 그가 이선생을 만나 이렇게 모진 훈련을 받는 데서 자기 영혼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병원 안에서도 무료입원 환자들은 배고파 쩔쩔맸다. 김수녀가 간혹 누룽지나 깨끗한 쌀밥을 거두어 그들에게 갖다 주면 배고팠던 그들은 쌀밥을 입에 대고 끔찍이도 기뻐하였다. 때때로 병원에서 환자들이 먹다버린 반찬속에서 생선 찌꺼기를 주우면 원에 돌아와서 뼈다귀의 가시를 골라서 끓여 동광원의 고아들을 먹이면 아이들은 너무도 맛있게 먹고 배가 부르니 게을러져서 마을로 동냥하러 나가려 하지 않았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편은 천 층 만 층 구만 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