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일 유 감 (有感)
康 昇 熙
고고(呱呱)의 소리를 지르며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조물주의 축복일까, 아니면 형벌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우리네 속담을 보면 한 생명의 탄생은 그래도 축복 쪽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생각하면 형벌이라는 말에 비중이 더 실리기도 한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이다.
현대는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바뀌고 핵가족이 일반화되다보니 집안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서 밥 한 끼 먹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고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의 모임에 간 적이 있다. 장소를 찾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안내판을 보게 됐는데 '돌잔치'며 '백일잔치' 모임이 수두룩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장내(場內)를 들여다보니 현수막을 내걸고 오색 풍선을 띄운 화려한 실내 장식과 현란(絢爛)한 조명 속에 주인공 아기가 태어나서부터 백일이나 돌을 맞을 때까지의 동영상이 스크린에 나온다. 샴페인을 터트리고 대형 케이크를 자르는 등 '이벤트'진행 사 회자가 축제무드를 조성한다. 호화판 잔치다.
여기서 바로 생각되는 것은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게도 이와 같이 거금을 아낌없이 쾌척(快擲)할 수 있을까 고 생각이 미친다. 자식의 백일, 돌잔치를 챙기지 못하면 큰 죄나 지은 듯 하는 데 비해 효(孝) 사상은 점차 사그라져 가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한국의 본모습인가고 의심된다.
옛날 보리 고개 넘기 힘들던 시절에는 홍역 같은 돌림병으로 인해 태어나서 백일을 넘기기도 어려웠으니 백일이나 돌을 맞으면 이제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에서 잔칫상을 마련해 기쁨을 함께 나눴다지만 지금이야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 않는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웬 참견이냐고 항변하면 할말이 없겠다.
우리 사회도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노인들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무관심 속에 도외시되고 천덕꾸러기가 돼가고 있다. 홀대(忽待)는 아니더라도 자기 자식들에게 쏟는 관심도나 성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차이가 너무 심하게 여겨진다. 이것은 내가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는 원래 내 생일에는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어려웠던 시절,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신 어머니가 내 생일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정월 열사흘, 오랜 세월 이날에 미역국을 먹고 지냈다. 어느 날, 양력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전문기관에 문의하니 3월1일이고 일요일이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 후 내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지내기로 했다. 덕분에 음력으로 따져 생일을 찾곤 하던 불편함도 사라지게 되었고 거기에다 이 날이 국경일이고 보니 나라에서 앞장서 온통 태극기의 물결로 축하해준다. 이만한 호사가 없지 않은가. 스스로 생각해도 잘된 결정이요 만족스러운 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나는 해마다 쌓여진 나이만큼 삶의 성숙도를 더하고 있는 것인가? 고.
올해 생일도 미역국을 먹었고 점심에는 온가족이 모여 건강과 가족의 화목을 기원하며 조촐하게나마 음식을 나누고 기를 살려 노래방에서 흥까지 돋구었다.
나를 살맛 나게 해주는 한 친구가 있다. 그는 잊지 않고 내 생일을 챙겨준다. 나도 간직하지 못한 나의 옛날 사진을 찾아내서 축하카드를 만들어 보내주곤 하여 나를 감동시킨다. 이로부터 나도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보이느라 하지만 그의 정성에 못 따른다. 아무쪼록 나와 그가 사는 날까지 건강하여 서로의 생일을 잊지 않고 전화 한 통이라도 계속되기를 희망해본다.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일 것이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라야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남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 고 생각해본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난 한해의 삶을 반성하면서 내 삶이 보다 성숙해지기를 다짐해본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끝
나의 은인 주임간호장교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제3차 춘기공세가 51년 5월16일부터 감행됐다. 강원도 '현리'에서 아군 3군단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전선이 요동쳤다. 수많은 전상자가 발생했고 적지 않은 국군이 적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나는 그때 3사단 22연대 6중대 3소대장이었다. 3일간이나 후퇴를 계속하여 하진부리 (下珍富里)에 이르러 재편성한 부대의 소대장으로 고지방어에 임했다.
새벽 네시 경, 주위는 칠흑같이 캄캄했고 군복을 촉촉하게 적시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무선 통신은 불통이었고 지휘 계통은 마비되어 있었다.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두 명의 연락병과 함께 총알이 귀밑을 쌩쌩 빗발치는 가운데도 아무도 부상 없이 하산하여 논두렁에 엎드렸다. 기적이었다.
전면과 좌·우측에서 적의 포위망이 시시각각으로 좁혀오는 것이 완전 포위됐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적 하나라도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30여 미터 전방 큰 느티나무 밑의 적을 향해 정 조준하여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우측방향에서 '따콩'하는 AK장총(일명 따콩 총) 소리가 남과 동시에 내 왼팔이 휙∼ 옆으로 날라 갔다. 총알이 왼팔 중앙을 관통하였다. 동맥을 다쳤는지 피가 솟구쳤다. 김 일병이 재빨리 압박붕대로 상처를 감고 지혈(止血)해 주었다.
우리와 대적한 적은 인민군 6사단이었다. 나는 부상당한 몸으로 포로가 되어 한 민가에 억류되었다.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던 나는 미군의 공습으로 적이 흩어진 틈을 타서 탈출했지만 얼마 못 가서 또다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국군 장교라는 신분이 탄로 나는 바람에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반격에 나선 아군 9사단 29연대 수색대에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엿새만에 국군의 품으로 복귀한 것이다. 하마터면 부상당한 몸으로 북한출신에 이승만 괴뢰정부의 앞잡이 국방 군 장교라고 갖은 고초를 겪고 생사를 알 수 없었을 내 운명에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탈출에만 정신을 쏟았기에 부상부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원주의 121후송병원으로 후송되어 군의관이 압박붕대를 가위로 자르고 상처를 헤쳤을 때 그 속에서 구더기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여러 날 아무런 치료도 없이 산에서 거칠게 지내다보니 고름이 나고 구더기가 생긴 것이었다. 내가 놀라니 군의관은 "이런 상처에는 구더기가 생긴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했다.
응급처치를 받고 울산2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울산시내 농업학교를 병원으로 쓰고 있었다. 복도 바닥은 온통 부상병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으며 부상병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으로 넘쳐났다.
나는 교실에 마련된 장교병실로 배치됐다. 환자용 야전침대로 빽빽이 들어차 서 빈 공간이 없었다. 팔다리 절단환자가 수두룩했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얼굴을 온통 붕대로 감고 고통스러워하는 화상환자였다. 이런 환자들에 비하면 나는 보행이 자유로우니 경상에 속했다. 다만 동맥과 신경을 다쳐서 가끔 피가 솟구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송곳으로 도려내는 듯 쑤시는 통증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온다.
"야. 간호장교! 내 다리 어디 갔어? 군의관 불러와!"
울고불고 악을 쓴다. 수십 명의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간호장교를 불러대는데 4·5명밖에 되지 않는 간호장교는 대부분 어린 소위계급으로 수많은 환자를 돌보느라 밤·낮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입원하고 사흘 째 되던 날 깊은 밤이었다. 잠이 잠깐 들었는데 갑자기 상처부위가 저려오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무엇이 뜨겁게 느껴졌다. 피가 솟구쳐 붕대를 흥건하게 적시고 핏방울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간호장교!"하고 큰소리로 여러 번 소리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고 당직 실로 달려갔다.
간호장교는 책상에 엎드려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나는 적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아군을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 감사의 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간호장교가 환자는 돌보지 않고 잠만 자느냐?"며 흥분하여 정도를 넘는 욕을 막 퍼부어 댔다. 놀란 간호장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언뜻 내 상처를 보고는 얼른 군의관에게 달려갔다. 응급처치로 지혈은 됐으나 송곳으로 후벼파는 듯 한 고통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날이 밝고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의 아침 회진이 있었다. 일행이 내 앞에 와서 환부를 살펴보고는 어떻게 아픈 가고 물었다. 나는
"내 팔을 절단해주시오. 손가락마다 송곳으로 찌르고 쑤시고 도려내는 듯 아파서 못 견디겠습니다. 절단하면 통증이 덜하고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하던데 요."
군의관은 "알겠소"하더니 메모를 했다. 일행 중 소령계급장을 단 간호장교가
"이 장교가 밤중에 소란을 피운 장교로군? 진료가 끝나는 대로 간호장교 실로 왔다가요"쌀쌀하게 말하고 떠났다.
순회진료가 끝나면 가족들의 면회가 이뤄졌다. 요새같이 전화사정이 발달된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됐는지 여러 가족들이 떡, 엿, 과일 등 먹거리를 싸 가지고 면회를 왔다. 나는 가족들의 면회가 여간 부럽지 않았다. 나에게는 올만한 가족이 없다. 서울 마포에서 가족들과 작별하고는 1. 4후퇴로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를 모른다. 다른 가족들의 면회광경을 보면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떡과 엿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자리를 피하곤 했다.
회진이 끝났다 싶은 시간에 간호장교 실로 갔다. 주임간호장교는 지난밤에 왜 당직간호장교에게 심한 욕을 해가며 소란을 피웠는가? 고 나무랐다. 몇 명밖에 안 되는 간호장교들이 고된 근무로 모두 쓰러질 직전이라며 환자들의 협조가 절실한데 험한 말로 난동을 부렸어야 되겠는가고 힐책했다.
나는 내 잘못을 솔직히 사과하고 담당 간호장교에게도 사과와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까 군의관에게 말했던 대로 팔을 절단해달라고 사정했다.
주임간호장교는 딱하다는 듯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면회 올 가족은 있는지 등 이것저것 신상문제를 물은 후 절단수술에 관해서 누구에게나 다시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계급도 높으려니와 나보다 5, 6년은 연상으로 보였다.
당시 병원사정은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 약은 귀해서 좀처럼 처방 받기가 어려웠다. 밀려오는 환자에 군의관의 손이 모자라고 항생제 약이 없으니 환부가 상함으로 환자의 의사를 불문하고 웬만하면 절단수술로 처리하는 추세였다. 그러기에 수술실로 실려갔다가 병실로 돌아와 마취에서 깨어나 보면 자신의 팔, 다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난리를 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팔을 절단해주기를 자청하니 절단수술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튿날 주임간호장교는 나를 불렀다.
"강 소위는 부산3육군병원으로 전원명령이 났어요. 여기에 명령과 내가 병원장에게 쓴 편지가 있으니 전달하세요. 앰뷸런스가 준비돼 있으니 오늘 바로 출발해요." 나는 내가 왜 3육군병원으로 가는지, 주임간호장교가 왜 나에게 이토록 신경을 써주는지 영문을 몰랐다. 다만 부산으로 가게 됐다는 것만 기쁠 따름이었다. 나는 주임간호장교의 배려에 고마워하면서도 제대로 인사말도 못하고 작별했다.
당시 부산3육군병원은 남일국민학교를 쓰고 있었으며 병원장은 신경외과 계통의 권위자인 '정희섭 대령'이었다. 직접 집도로 수술을 받고 몇 달간의 치료와 요양 끝에 퇴원하여 다시 군무에 복귀했다.
내가 절단수술을 간청하다시피 했는데도 타 병원으로 전원(轉院)시켜 전문의의 집도와 치료로 정상을 되찾게 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51년도에 울산23육군병원 주임간호장교였던 분을 찾아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행을 못하고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난 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의정장교였던 친구를 통해서 알게된 퇴역 간호장교 이종선 선생한테서 조귀례 회고록 '戰場의 하얀 천사들'이란 책을 보내왔다. 내가 늘 고마워서 찾고 싶었던 분이 바로 조귀례 선생임을 알게 되었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장애인으로 고달픈 신세가 됐을 것이다. 나의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