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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년 전에 태어난 조선시대 가정주부 허초희의 恨과 그녀 보다 42년 더 먼저 태어난
조선시대 가정주부 송덕봉의 잔소리 이야기다.
허초희의 호는 난설헌이다. 조선시대 천재 여류 시인이며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의 누나로 15살 무렵에 시인 김성집과 결혼 하였고 27살에 요절 하였다.
송덕봉(宋德峯)은 평범한 조선시대 여인이지만, 특이한 그의 남편은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이다.
유희춘을 간단히 설명하면 러시아 곤충학자 류비세프가 매일 매일 자기가 사용한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듯이 조선의 유희춘은 자기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생활 일들을 가계부 적듯이 매일 매일 물건의 종류와 수량과 금액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하는데, 그 기록물이 <미암 일기>이다.
<미암일기의 부록>에 아내 송덕봉이 보낸 편지가 조선중기 기록 유산으로 소중하게 남아있어 송덕봉의 이름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동생 허균이 남긴 글에 의하면 누이가, 기방을 드나들며 가정 생활에 불성실한 매형과, 시 쓰는 며느리의 재능을 시기한 시어머니로 인해,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불성실한 남편과 시어머니로 인해 恨을 품고 살았던 조선의 여인이 어디 서초희 혼자 뿐이랴?
그녀의 恨이 조선 시대 보통 여인들의 恨과 다른 것은 어린 자식 두명과 뱃속의 아기까지 모두 잃었고 사화로 인하여 친정집도 몰락하여 그 고통과 恨이 남달리 크다는 것이며, 남보다 더 큰 슬픔과 피눈물 나는고통을 詩와 그림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는 것이다.
허난설헌은, 여성의 억압을 말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추앙 받고 있는데, 허초희가 어떤 주장을 하였기에 선구자가 되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1 아마도 남과는 다르게 여인의 恨을 詩로 표현하고 기록으로 남겨 우리가 그녀를 알게 되었기에 그녀를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모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 허난설헌은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당시엔 매우 개혁적인 사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송덕봉 또한 부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또 한명의 선구자로 추앙 받기에 충분한 기록을 남겼다.
남녀가 평등해야 하고 부부가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을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恨 많은 조선여인들도 가지고 있었을 터이나 여인으로서 아내로서의 恨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허난설헌이 선구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고, 동시대에 같이 살았던 신사임당은 여인의 恨을 품은 기록이 없었으므로 여성해방 운동의 선구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편지 기록물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송덕봉은 아직 부부평등 운동의 선구자로 인정을 못받았다.
가정 주부 송덕봉의 恨이 비록 허난설헌의 恨 크기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아내로서 여인의 恨은 조금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구자로 모시기에 충분하다고 추천하는 이유는, 조선시대 여인 송덕봉이 높은 관직에 있었던 남편에게 대단한 잔소리를 당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대단한 잔소리를 한 내용이 편지 기록물로 전해져 내려와 우리 모두가 이 편지 내용을 확인한다면 틀림없이 부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구자로 모시기에 타당하다고 인정 할 것이다.
허초희(허난설헌)의 이야기 부터 시작 한다.
허초희(호:난설헌)는 1563년 남인의 수장이었던 아버지 허엽과 어머니 강릉 김씨(허엽의 후처) 사이에서 태어 났다. 동생 허균과 둘째 오빠 허봉이 친 남매이고 큰오빠와 자매 두명은 배다른 남매(자매)이다. 오빠들과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오빠와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은 어린 초희는 8살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이라는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면서 그 천재성을 알렸는데, 오빠 허봉이 가장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었다.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고 하는 허난설헌의 집안은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이었다. 그녀는 동인계 문인 가문으로 가풍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나 15세에 보수적인 남인계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다.
남편 김성립은 시(詩)에 명성이 높았다고도 하나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신의 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한 바도 있는 것으로 봐서 김성립은 실력은 없으면서도, 자신감과 배짱으로 글을 쓰기도 했던 사람이므로 허난설헌이 존경하고 모실 만한 위인은 아니었으리.
허초희의 시 중에 "기방에 새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운운하는 글도 있고, 남편의 친구가 허초희에게 남편이 기방에 있다고 거짓으로 놀린적도 있다 하므로, 남편은 기방을 드나들며 아내 허초희의 속을 썩이던 사람이었다.
시어머니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시기와 질투심으로 며느리를 학대 했다고 한다. 하여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 -규원가와 푸른하늘 흰구름은 등- 를 짓기도 하는 등 외로운 주부였다.
푸른 하늘 흰구름은 시 노래를 짓고 -허난설헌 -
碧空白雲作詩歌 벽공백운작시가
牽牛織女繡深夜 견우직녀수심야
夢中戀君何處行 몽중연군하처행
愁丘霖淚濫大河 수구림루람대하
푸른 하늘 흰구름은 시 노래를 짓고
견우와 직녀는 깊은 밤 수 놓는데
꿈속에 그리는 임 어디로 가셨는지
근심 언덕에 장마 눈물 큰강을 넘치네
채련곡(采蓮曲) (연꽃을 따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 가을에 맑은 호숫물 옥돌처럼 흘러가고
추정장호벽옥류
蓮花深處繫蘭舟 련꽃 피는 깊은 곳에 란초 배를 매놓고서
련화심처계란주
逢郞隔水投蓮子 당신 보고 물건너서 련꽃을 던졌는데
봉랑격수투련자
或被人知半日羞 혹시 남이 봤을가봐 반나절 부끄럽네요
혹피인지반일수
<규원가> -허난설헌-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 버렸는고?
어릴 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을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더니, 전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요 부부의 인연으로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하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하였다.
열다섯 열여섯 살을 겨우 지나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나타나니, 이 얼굴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하였더니,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다 새암하여 봄바람 가을 물, 곧 세월이 베틀의 베올 사이에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임이 나를 사랑할 것인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기> 과거의 회상과 자신에 대한 한탄
엇그제 저멋더니 하마 어이 다 늘거니. 少年行樂(소년행락)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업다. 늘거야 서른 말씀 하자니 목이 멘다. 父生(부생) 母育(모육) 辛苦(신고)하야 이 내 몸 길러 낼 제 公侯(공후) 配匹(배필)은 못 바라도 君子(군자) 好逑(호구) 願(원)하더니, 三生(삼생)의 怨業(원업)이오 月下(월하)의 緣分(연분)으로, 長安(장안) 遊俠(유협) 경박자를 꿈가치 만나 잇서, 當時(당시)의 用心(용심)하기 살어름 디듸는 듯. 三五(삼오) 二八(이팔) 겨오 지나 天然麗質(천연여질) 절로 이니, 이 얼골 이 態度(태도)로 百年(백년) 期約(기약) 하얏더니, 年光(연광)이 훌훌하고 造物(조물)이 다 猜(시)하야, 봄바람 가을 믈이 뵈 오리 북 지나듯 설빈화안 어디 두고 面目可憎(면목가증)되거고나. 내 얼골 내 보거니 어느 님이 날 괼소냐. 스스로 慙愧(참괴)하니 누구를 怨望(원망)하리.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는 술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꽃 피고 날 저물 때 정처없이 나가서 호사로운 행장을 하고 어디 어디 머물며 노는고?
집안에만 있어서 원근 지리를 모르는 데 임의 소식이야 더욱 알 수 있으랴?
겉으로는 인연을 끊었지마는 임에 대한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임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한 달 곧 서른 날이 지리하다. 규방 앞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겨울 밤 차고 찬 때, 자취눈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긴 때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
봄날 온갖 꽃 피고 버들잎이 돋아나는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다.
가을 달 방에 비추고 귀뚜라미 침상에서 울 때 긴 한숨 흘리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승> 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애달픈 심정
三三五五 冶遊園의 새 사람이 나단 말가. 곳 피고 날 저물 제 定處(정처)없이 나가 잇어, 백마마금편으로 어디어디 머무는고. 遠近(원근)을 모르거니 消息(소식)이야 더욱 알랴. 因緣(인연)을 긋쳐신들 생각이야 업슬소냐. 얼골을 못 보거든 그립기나 마르려믄, 열 두 때?길도 길샤 설흔 날 支離(지리)하다. 玉窓(옥창)에 심근 梅花(매화) 몃 번이나 픠여진고. 겨울 밤 차고 찬 제 자최눈 섯거 치고. 여름날 길고 길 제 구즌 비난 므스 일고. 三春花柳(삼춘화류) 好時節(호시절)의 景物(경물)이 시름업다. 가을 달 방에 들고 실솔이 상에 울 제, 긴 한숨 디난 눈물 속절업시 헴만 만타.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려울사.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 것인가?
등불을 돌려 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히 안아 백련화곡을 시름에 싸여 타니,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온 특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아름다운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 가락이 아직 남아 있지마는 연꽃 무늬기 있는
휘장을 친 방안이 텅 비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릴 것인가?
마음 속이 굽이굽이 끊어졌도다.
<전> 외로움을 거문고로 달래는 심정
도로혀 풀쳐 혜니 이리하여 어이하리. 靑燈(청등)을 돌라 노코 綠綺琴(녹기금) 빗기 안아, 碧蓮花(백련화) 한 곡조를 시름 조차 섯거 타니, 瀟湘(소상) 夜雨(야우)의 댓소리 섯도난 닷, 華表(화표) 千年(천년)의 別鶴(별학)이 우니는 닷, 玉手(옥수)의 타는 手段(수단) 옛소래 잇다마난, 芙蓉帳(부용장) 寂寞(적막)하니 뉘 귀에 들리소니. 肝腸(간장)이 九曲(구곡)되야 구븨구븨 끈쳐서라.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임을 보려 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 속에서 우는 벌레는 무슨 일이 원수가 되어 잠마저 깨우는고?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칠월 칠석 일년에 한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만나는데,
우리 임 가신 후에는 무슨 장애물이 가리었기에 오고 가는 소식마저 그쳤는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임 가신 데를 바라보니, 풀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갈 때 수풀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섧다. 세상에 설운 사람 많다고 하려니와 운명이 기구한 여자야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 듯 말 듯 하여라.
<결> 임을 기다리는 마음과 운명의 한탄
찰하리 잠을 드러 꿈의나 보려 하니, 바람의 디난 닢과 풀 속에 우는 즘생, 므스 일 원수로서 잠조차 깨오난다. 天上(천상)의 牽牛織女(견우직녀) 銀河水(은하수) 막혀서도, 七月(칠월) 七夕(칠석) 一年(일년) 一度(일도) 失期(실기)치 아니거든,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弱水(약수) 가렷관듸, 오거나 가거나 소식조차 끄쳤는고. 欄干(난간)에 비겨 셔서 님 가신 데 바라보니, 草露(초로)난 맷쳐 잇고 暮雲(모운)이 디나갈 제, 竹林(죽림) 푸른 고대 새 소리 더욱 설다. 세상의 서룬 사람 수업다 하려니와, 薄命(박명)한 紅顔(홍안)이야 날 가타니 또 이실가. 아마도 이 님의 지위로 살동말동 하여라.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새 -자유스럽게 날고 있는 새- 를 부러워 했던 여인 허난설헌(許蘭雪
軒)은 결혼전에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애서 성장하였기에, 결혼후 외롭고 답답한 생활을 하면서 어린 시절로 다시 되돌아 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새를 바라보는 소녀의 그림을 그렸나 보다.
허초희 스스로 "세상에 서러운 사람 많아도 운명이 기구한 여자로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라고 한탄 할 상황까지 왔으니 이 정도이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남편을 원망하는 상황으로 발전된 것이다. 시어머니의 학대까지 있었으므로 허초희의 외롭고 우울한 마음은 날마다 한(恨)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예쁜 꽃을 보아도 감흥을 느낄 수 없고, 깊은 슬픔속에서 나오는 알수 없는 눈물은 흐르고,
날아다니는 새가 오히려 부러운 허초희! 심한 우울증에 빠진 그녀의 시작(詩作)은 계속된다.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을 재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 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못 속에 연꽃만 맥없이 지고있네
결혼전 자유 분방했던 소녀가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부모 그리고 오빠들과 동생을 떠나 오직 남편만 보고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애가 둘이 되고 뱃속에 또 한명의 아기가 자라고 있는데도 무심하고 무능한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량 짓을 하는 남편과 결혼한 것을 후회 하면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하여 "살동 말동 할까" 생각하며 허초희는 시를 쓰며 외로움을 달래는데, 며느리의 재능을 인정치 않는 시어머니의 박해와 구박은 계속되니 허난설헌은 더욱 깊은 슬픔의 심연속으로 빠져 들었다.
서초희의 결혼이후 삶은 고통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결혼 후 3년 무렵(18세) 아버지가 객사하여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둘째오빠 허봉이 율곡이이의 직무 잘못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귀향을 가게 되었다. 동생 허균도 오빠 뒤를 이어 귀향을 가게 되었다.
옛말에 엎친데 덮친다는 말은, 불행한 자에게 불행이 다시 겹친다는 말인가 보다.
남편과 시어머니 친정 걱정등으로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허초희에게 하늘은 잔인하게도 어린 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방법으로 고통을 더 안겨 주었다.
그러나 허초희의 불행과 슬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린딸이 돌림병으로 급사한 이듬해 어린 아들 마저 돌림병으로 또 목숨을 거두었다. 허초희는 순식간에 사랑하는 두 남매의 목숨을 돌림병으로 저승사자에게 허망하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아! 이때의 피눈물 나는 슬픔을 그녀는 [곡자]라는 시로 남겼는데 지금 아가들 비문에서 볼수있다
곡자(哭子)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鬼火明松楸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玄酒存汝丘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應知第兄魂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夜夜相追遊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安可糞長成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浪吟黃坮詞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血泣悲呑聲
만일,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신이 따로 있다면, 그 신은 천재 허초희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랬을까? 두 어린 자식을 모두 잃어 감당할 수 없는 슬프고도 슬픈 허초희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신은 다시 한번 더 허초희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뱃속의 아이 목숨까지 빼앗아 가 버린 것이었다. 허초희가 이때의 슬픔을 어떤 시로 남겨 놓았는지 나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더 이상 감당 할 수 없는 슬픔과 불행이라는 말은 항상 틀린가 보다. 이보다 더 이상 불행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어린시절 이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아껴주고 귀하게 챙겨주었던 둘째오빠가 귀향갔다 돌아와서 맥 없이 지내다가 금강산 부근에서 객사 하였다.
허초희에게 불행이 거듭되고 그래서 그녀의 한(恨)은 쌓여만 가고,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허초희는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오직 시작(詩作)으로만 달래었나 보다.
하여 그녀는 그녀만의 깊고도 깊은 슬픔과 한(恨)을 담은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녀가 지은 시중에 <감우>(感遇)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감우>(感遇)란 느낀 대로 노래한다는 의미라 한다.
허초희! 그녀의 호가 난설헌(蘭雪軒)인것처럼 허초희는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감우>(感遇) -허난설헌-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큰 불행을 감당할 수없을 만큼 당한 허초희는 이후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였는지 예언시 같은 시를 "부용꽃 삼구 떨어지니"하고
지었는데, 훗날 결국 그녀는 삼구 이십칠, 27세의 나이에 목숨을 거두게 된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초희! 십오세에 시집와서 이십칠세에 목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십이년간 잔뜩 쌓인 한(恨)!
그 恨은 아무도 풀어 줄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남편과 시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구원이 될 수 없었다.
먼저 이승을 떠난 사랑하는 오빠도 귀향간 동생도 구원이 될 수 없었다.
깨어나면 괴롭고 이제는 잠이 들어도 괴로운 서초희!
'이제 괴물같이 괴로운 이 곳을 떠나가야 하는데...'하고 서초희는 다시 안간 힘을내어 꿈틀댄다. '아, 세상 모든 길이 이미 다 무너져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서초희는 울부짖는다.
세상의 모든 길이 막히고 어두움이 찾아왔는데, 시(詩)마저 밤이 무서워 떠오르지 않는다.
서초희는 목숨이 다하기 전 고요함과 적막함에 눈물 흘리며 마지막 시(詩)로 알려진 <길을 잃고>를 쓰고 하늘에 먼저 가있는 아기들을 찾아 지상에 없는 길을 더듬 더듬 거리며 길을 찾아 떠나갔다.
<길을잃고> -허난설헌-
가슴에 묻은 아기의 얼굴이
북두칠성이 되어 반짝인다.
그 어느 것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거든 깨어나
나의 괴로움이 되지 말고
이미 세상의 어디에도
나의 길은 무너져 버렸다면
갑산으로 가는 길조차 폭설에 덮였으리라.
경포의 달처럼
깊이 갈아 앉아 있는 나의 시도
이 무서운 밤 떠오를 줄 을 모른다.
적막의 울타리 곁에서
반쯤 얼굴을 가린 복사꽃 울고 있구나.
돌아 올 줄 모르는 그대의 밤은
우리의 인연이 아니라면
저승에서 그 머리를 풀어야 할까?.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리움이 시들어가는 나의 창에
이렇게 코를 박고 떠나지 못하는 낯익은 얼굴아
고요함에 눈물을 흘리는 나의 마음아.
빈 마당에 선 오동나무야
우리 갑산으로 떠나자 꾸나
백옥루 상량문을 짓게 하던 스승이여
시를 쓰는 일이
겨울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같은 신세 인줄은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문을 서성이면서 얼음도 되지못하고
몸을 데불고 이 산천을 떠난다.
눈에 쌓여 눈에 쌓여
내가 길을 잃었는지 가르쳐 주는 이도 없는 길은
지상에 없는 길을 찾아간다.
허초희는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 동생 허균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초희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초희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재가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이자 시인으로 알려진 주지번(朱之蕃)에게 허초희
의 시를 보여주었고,-이보다 앞서 명나라에서 허난설헌의 시가 이미 소개되었다- 주지번은 매우 경탄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 가져가 중국에서 그녀의 시집을 발행하였다.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중국의 문인들이 그녀의 시를 격찬하였다 한다.
그녀의 시는 1711년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서포 김만중은 허난설헌을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아내의 잔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타당하다: 조선시대 아낙네 송덕봉의 잔소리>
허난설헌 보다 42년 앞선 1521년 담양에서 태어난 송덕봉(宋德峯)은 허난설헌·신사임당 등과 더불어 뛰어난 여성문인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처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시대 가정 주부(후에 정경부인까지 되었다)이다.
송덕봉 보다는 <미암 일기>(보물 제260호)가 더 알려져 있는데, 송덕봉은 일기의 저자인 미암 유희춘의 아내로, 남편 미암과 주고 받은 편지가 일기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 세상에 그녀의 존재가 알려졌다.
남편 미암이 갑자사화( 甲子士禍)로 인해 함경도로 귀향(歸鄕)을 갔을 때 시어머니가 돌아 가시니 송덕봉은 혼자 예(禮)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상(喪)이 끝나자 미암의 귀향지인 먼길 함경도까지 女子의 몸으로 가면서 아래의 시(詩)를 지었다.
登磨天嶺吟 마천령에 올라서 읊다
行行遂至磨天嶺 가고 또 가서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東海无涯鏡面下 동해는 끊임없이 거울처럼 평평하다.
萬里夫人何事到 만리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는고
三從義重一身輕 삼종의 의는 무겁고 한 몸은 가벼운 것
1571년 10월 전라도 감사를 지낸 남편 미암은 사헌부 대사헌( 司憲府 大司憲)에 제수되어 아내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자 아내 덕봉은 "學文하는 선비로써 이미 극진한 영화를 누렸고 예전에 벼슬을 사양 할수 있다고 당신(남편)이 말한 바도 있으니 건강을 돌보기 위해 서라도 그만 물러나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잔소리를 아래와 같이 詩에 담아 보냈다.
黃金橫帶布衣極 황금 띠를 둘렀으니 선비로써는 극진한 영화
退臥茅齋養氣何 초당에 누워 건강을 돌봄이 어떠 하리오
爵祿可辭曾有約 벼슬을 사양 할 수 있다고 일찍이 약속했으니
遊庭見月待還家 뜨락에서 달 보며 돌아오길 기다리오
덕봉의 아들이 1571년1월 영릉 참봉시절(英陵 參奉時節) 휴가(休暇)내어 친가( 親家)에 와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드린다.
孤羊攀石壁... 외로운 양이 석벽을 오르다가
砥雪耐嚴寒... 눈을 핥으며 차가움을 견디네
骨露毛雖落... 뼈가 드러나고 털도 비록 빠젔지만
春來意自歡... 봄이오면 뜻이 절로 즐거우리
이 詩를 지어 바치니 어머니는 비록 힘들지라도 뜻을 갖고 참으면 언제가는 기쁜 날이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격려하는 다음의 화답시(和答詩)를 지은다.
母의 和答詩
莫言羊石壁... 양이 석벽에 오름을 말하지 말라
有志忍酸寒... 뜻이 있어 시리고 차가움을 견딘다
苦盡甘須到... 쓴 것이 다하면 단것이 올지니
春風與柳歡... 봄바람은 버들과 함께 즐기리라
남편 미암이 임금이 下賜하신 술상을 집에 보내면서 詩를 지어 보낸다.
雪下風增冷...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지네
思君坐冷房... 그대가 추운냉방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노라
此醪雖品下... 이 술은 하사품이지만
亦足煖寒腸...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 줄수 있으리
德峯 和答詩 덕봉 화답시
菊葉雖飛雪... 국화 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銀帶有煖房... 은대(丞務院)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寒堂溫酒受... 차가운 바에서 다뜻한 술을 마시니
多謝感充腸... 속을 채울수 있어 매우 고맙소
1570년, 송덕봉의 남편 미암이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 집을 떠나 4개월째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어느날 남편이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라는 시를 지어 아내 덕봉에게 보내자 덕봉이 남편에게 벼슬 욕심이 없다 하면서 벼슬 욕심을 내니 잠을 못이루는 것이라고 하며 벼슬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시 잔소리 하는 회답시를 지어 보냈다.
自比元公無物慾 스스로 원결마냥 물욕이 없다 하더니,
如何耿耿五更闌 어찌하여 오경까지 잠 못 이루시오.
玉堂金馬雖云樂 옥당(홍문관)의 금마가 비록 즐겁다지만,
不若秋風任意還 추풍에 마음대로 돌아오는 것만 하겠소.
예나 지금이나 남편들이 처가집 문제 처리에 무심하고 소홀하여 아내에게 잔소리 듣기도 하고, 남편들이 나이들고 늙어가면서도 철나지 않는것은 시대가 변해도 다름이 없나보다.
친정집 아버지 묘 비석 세우는 비용을 남편이 흔쾌하게 내놓지 않자 아내 덕봉은 무심한 남편에게 "妻의 부모라고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시모님이 작고했을 때 眞心竭力하여 葬禮를 禮대로 하고 祭祀도 禮대로 지냈으니 나는 사람의 며느리로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나로 하여금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점잖으면서도 매우 단호하게 남편에게 잔소리 하는 글을 보낸다.
잔소리 글 전문 해석을 옮겨 본다.
◎ 착석문 송덕봉
천지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성현이 있어 교화를 밝히고 三綱五倫의 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를 용감히 실천하는 자가 적었으니 이 때문에 늦게라도 진심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은 지성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부족해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仁人 君子가 척연이 유념하여 구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첩이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綱領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어버이께 효도하려는 마음으로 古人을 따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2품의 직에 올라 三代를 추증하고 저도 古例를 따라 정부인의 반열에 올라 그 기쁨을 함께하니 先塋과 九族이 모두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先世에 積善을 한 陰功의 보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고 가슴을 치는 까닭은 옛날 우리 先君께서 항상 자식들에게 말씀하시기를“내가죽은 뒤에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내 묘 곁에 비석을 새우도록 하라”하신 말씀이 아직도 쟁쟁하게 귀에 남아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어버이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이것만 생각하면 매양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는 족히 인인 군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인인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렵게 물에 빠진 사람도 구하여 건저 줄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나에게 편지하기를“동복끼리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하면 그 밖의 일은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 淸德에 누가 될까봐 그런 것입니까? 妻의 부모라고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또 선군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琴瑟百年이란 시구를 지은 것을 보고 좋은 사위를 얻었다며 몹시도 좋아하셨던 것을 당신도 필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은 나의 知己로써 蚷蛩처럼 함께 늙어 가자고 하면서 불과 네다섯 斛(곡)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 귀찮아 하니. 통분해서 죽고만 싶습니다. 經에 이르기를 “실수를 보면 仁厚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남들은 필히 이 정도를 가지고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先儒들의 밝은 가르침에 따라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정성을 다하여 中道에 맞게 하려 하면서 이제 어찌 꽉 막히고 통하지 아니 하여 於陵仲子(어능중자)처럼 하려고 하십니까? 옛날 범 문정공(范 文正公)은 아들로 하여금 보리 실은 배를 주어 喪을 당한 친구의 어려움을 구해 주었으니 대인의 처사가 어떠하였습니까?
同腹끼리 私備하라는 말은 크게 불가합니다. 과부로 근근이 지탱하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혹은 곤궁해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비용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히 원한만 사게 될 것입니다. 禮에 말하기를“집안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 하라”하였으니 어찌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친정이 마련할 힘이 있다면 저의 성심으로 진작에 해 버렸을 곳입니다. 어찌 꼭 당신에게 구차한 청을 하겠습니까? 또 당신이 鍾山 만 리 밖에 있을 때에 우리 先君이 作故 하셨다는 말을 듣고 素食을 하였을 뿐이요. 3년 동안 한번도 祭奠을 안 했으니 전일 그토록 간곡하게 사위를 대접해 주던 뜻에 보답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귀찮아하는 마음을 누르고 비석 새우는 일을 억지로라도 도와준다면 九泉에서도 先人이 감동하여 結草報恩 하려 할 것입니다.
나도 박하게 배풀고 당신에게 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모님이 작고했을 때 眞心竭力하여 葬禮를 禮대로 하고 祭祀도 禮대로 지냈으니 나는 사람의 며느리로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나로 하여금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至誠에서 느껴서 나온 말이니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신미년 (1571) 선조 4년 7월 5일
남편 미암 유희춘이 아내인 덕봉에게 객지에서 “ 3∼4개월 동안 홀로 자면서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바람피지 않음을 은연 자랑하며 흰소리 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하여 아내 송덕봉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배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원컨대 당신은 영원이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시오."라며 똑바른 잔소리를 잔뜩 담은 장문의 편지를 남편에게 보냈다.
<아내 덕평의 장문 답장 편지>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배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려우기 어려운 것이니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동안 독숙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배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안정하고 결백하여 밖으로 華采를 끊고 안으로 사념이 없다면 어찌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소. 곁에 지기의 벗이 있고 아래로 권속과 노복들이 있어 十目이 보는 바이니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어늘 꼭 힘들게 편지를 보낼 것까지 있겠소.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배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 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나도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가볍게 여기지 마시구려. 강신은 몇 달 동안 독숙을 하고서 붓끝의 글자마다 공을 자랑했지만.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오. 하기사 당신은 귀한관직에 있어서 도성의 만인이 우러러 보는 처지이니 비록 수개월동안의 독숙도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오.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이가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르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소. 그래도 나는 지성으로 례에 따라 장례를 치루면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소.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의 길을 나서서 멀리 험난한 길을 갔는데 이것을 누가 모르겠소. 내가 당신한테 한 이런 지성스런 일이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오.ㅣ당신이 몇 달 동안 독숙한 공을 내가 한 몇 가지 일과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소
원컨대 당신은 영원이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오. 나의 뜻을 이해하고 깊이 살피기를 엎드려 바라오.
宣祖4年 庚午 1570 년 6월 12일
송 씨 아룀
420년전 조선 중기 시대에도 남편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할 말을 조리있게 다하던 우리나라 선배 주부들의 잔소리가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각 가정 가정주부에게 유전되어 그 전통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아 ! "아내의 잔소리를 귀담아 잘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우리집 안해의 말은 진리다. 예나 지금이나 안해들의 잔소리는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 가정 부부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원흉은 대체로 남편들인 사례를 나는 많이 보았기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안해는 아내의 옛말(현재 북한말)이다. 안의 해(태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 =출 처 ====================================
송덕봉 관련 글 참고 자료와 출처
1. 송덕봉 편지 원문과 해석 자료 출처: 다음카페 무등산 일출
2. 미암일기 관련 자료 : 네이버 백과 사전 다음 백과사전과 작자미상 인터넷 자료
허난설헌 관련 글 참고 자료와 출처
1.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 백과사전 다음 백과 사전 작자미상 인터넷 자료
2. 규원가 해석글 인터넷 필명 <가꾸는이>
3. 규원가 원문 비교 참고 정병헌 교수 글
4. 그림등 일부 자료 참고 출처 다음카페 천사들의 소리바다 /인터넷 아름다운 5060
5. 인물과 역사 (조선중기 천재여류시인 허난설헌)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6. 아래 부록 자료 출처 <초희 허난설헌>
7. 기타 신문기사 등 참고
================================= 부록 목차==================================
*윗글에 다 담지 못한 내용과 자료들을 아래 부록에 담아 모았다.
(부록자료 출처: 허난설헌 연구 -류주환-)
1. 허난설헌 작품 목록
2. 한겨레 2001/04/29 중국서 드날린 허난설헌 명성 확인
3.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 - 신영복 - 1995년 12월05일 중앙일보
4. 고정희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1990.
- 허난설헌이 해동의 딸들에게
- 사임당상이라니 기상천외이외다
5. 송유미 시집,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전망시선·1
6. 가을의 고독은 무엇을 낳는가 글 · 조달공/성균관대 명예교수
7. 허난설헌 작품에 대한 표절 시비 (글쓴이 :류주환)
8. 한겨레신문 [문학] 소설로 되살아난 '허난설현'
9. 재평가 아쉬운 허난설헌 작품 세계- 신문기사 2005-11-29 21:25
10. 宋德峯 生涯와 詩文 --- 카페 무등산 일출 <카페지기 남강>
================================================================================
1. 허난설헌 작품 목록 《난설헌집(蘭雪軒集)》 난설헌시집소인 주지번 蘭雪軒詩集小印 朱之蕃 《난설헌집》제사 양유년 《蘭雪軒集)》題辭 梁有年 난설헌시 蘭雪軒詩 오언고시: 소년행, 감우 4수, 곡자, 견흥 8수, 기하곡 (총 15수) 五言古詩: 少年行, 感遇 4首, 哭子, 遣興 8首, 寄荷谷 칠언고시: 동선요, 양지붕선화가, 망선요, 상현요, 사시사 4수(총 8수) 七言古詩: 洞仙謠, 梁指鳳仙花歌, 望仙謠, 湘絃謠, 四時詞 4首 오언율시: 출새곡 2수, 효이의산체 2수, 효심아지체 2수, 기녀반, 송하곡적갑산 (총 8수) 五言律詩: 出塞曲 2首, 效李義山體 2首, 效沈亞之體 2首, 寄女伴, 送荷谷謫甲山 칠언율시: 춘일유회, 차중씨견성암운 2수, 숙자수궁증여관, 몽작, 七言律詩: 春日有懷, 次仲氏見星庵韻 2首, 宿慈壽宮贈女冠, 夢作, 차중씨고원망고대운 4수, 송궁인입도, 제심맹조중연풍우도, 次仲氏高原望高臺韻 4首, 送宮人入道, 題沈孟釣中溟風雨圖, 황제유사천단, 차손내한북리운 (총 13수) 皇帝有事天壇, 次孫內翰北里韻 오언절구: 축성원 2수, 막수락 2수, 빈녀음 3수, 효최국보체 3수, 장간행 2수, 五言絶句: 築城怨 2首, 莫愁樂 2首, 貧女吟 3首, 效崔國輔體 3首, 長干行 2首, 강남곡 5수, 가객사 3수, 상봉행 2수, 대제곡 2수 (총 24수) 江南曲 5首, 賈客詞 3首, 相逢行 2首, 大堤曲 2首 칠언절구: 보허사 2수, 청루곡, 새하곡 5수, 입새곡 5수, 죽지사 4수, 서릉행 2수, 七言絶句: 步虛詞 2首, 靑樓曲, 塞下曲 5首, 入塞曲 5首, 竹枝詞 4首, 西陵行 2首, 제상행, 추천사 2수, 궁사 20수, 양류지사 5수, 횡당곡 2수, 야야곡 2수, 堤上行, 추韆詞 2首, 宮詞 20首, 楊柳枝詞 5首, 橫塘曲 2首, 夜夜曲 2首, 유선사 87수, 야좌, 규원 2수, 추한 (총 142수) 遊仙詞 87首, 夜坐, 閨怨 2首, 秋恨 (이상 총 210수) 부록: 한정일첩, 몽유광상산시서, 시왈, 광한전백옥루상량문 附錄: 恨情一疊, 夢遊廣桑山詩序, 詩曰, 廣寒殿白玉樓上樑文 발: 허균 跋: 許筠
* 참고: 이상의 분류는 "난설헌집" 원본에 있는 분류이다. 시의 형식을 엄밀히 따지면 분류가 잘못 되어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2. 한겨레 2001/04/29 중국서 드날린 허난설헌 명성 확인
한겨레 2001/04/29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여성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논문이 중국에서 처음 발표
됐다.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연구중심 연구원인 김성남(45·사진)씨는 26일 중국 대
륙에서 3년여 동안의 연구 끝에 <조선시기 재녀 허난설헌 문학에 대한 문화교류사적 접
근과 여성학적 해석>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허난설헌 관련 논문이 중국땅에
서, 더구나 중국어로 발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실장 등 여성운동 10여 년 경력의 김씨가 허난설헌 연구에 매달리
게 된 것은 1998년 8월 중국문헌 속에 나타난 중국여성사를 정리하기 위해 베이징의 대
학도서관을 뒤지다 허난설헌의 굵은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김씨는 허난설헌의 작
품이 한국땅보다 중국땅에서 의외로 많은데다, 이제껏 국내에서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에 더욱 놀랐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유소사'(有所思) 등 13수의 시를 새로 발견했고, 시가 실린 13권
의 중국문헌도 일일이 확인했다. 특히 명대의 문학가인 종성이 36권으로 집대성한 여성
시집 <명원시귀>(名媛詩歸)에는 허난설헌 시가 한권(68수)을 차지하고 있으며, 1606년
역사서로 발간된 제갈원성의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도 허난설헌의 시가 수록돼 당
시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고 김씨는 밝혔다.
1589년 27살에 요절하기까지 210여 수의 시를 남긴 허난설헌 작품의 표절 시비에 대해
김씨는 “형식과 주제들이 정형화하고 상투화한 당시 조선시대의 문단풍토는 모방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며 “글자 몇자가 같은 것을 표절의 척도로 삼는다면 당시의
유학자 중 표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허난설헌 작품의 느낌과 내용, 착상은 완전히 다르다”며 16세기에 시작된 표절논쟁
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바탕은 바로 여성에 대한 폄하의식과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
다.
김씨는 “허난설헌은 여성의 몸으로 스스로 이름을 `초희', 자를 `경번'으로 지어 봉건
적인 사대부들의 눈밖에 났다”며 “대표작인 `유선시'(遊仙詩) 86수는 중국신화 속의
여신들을 등장시켜 자유로운 사랑과 주동적인 애정을 구하는 생동감 넘친 장면묘사 등
중국과 한국의 여성작가를 통틀어 유일하게 진보적인 여성의식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사후 작품을 정리한 동생 허균의 정치적 실패도 표절과 위작시비
를 부추긴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허난설헌이 진보적인 실학자들도 수긍할 수 없
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며 “중국문헌 <긍사>(亘史)는 허난설헌이 7살에 지
은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
다”고 강조했다.
3.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 - 신영복 - 1995년 12월05일【4회】중앙일보 컬러기획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 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리고 소설「홍길동」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오죽헌은 당신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곡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를 모신 곳입니다. 사임당은 마침 은은한 국화향기속에 앉아 돌층계위 드높은 문성사(文成祠)에 그 아들인 율곡을 거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율곡선생은 이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낸 사임당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극화(極化)된 엘리뜨주의는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곳은 분명 어떤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거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현실을 창조하는 문화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올려 넋을 부르며“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4. - 고정희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1990.
허난설헌이 해동의 딸들에게 이야기 여성사 4
고정희
해동란집에 대하여
해동의 딸들이여
일찍이 어느 시묵객이 노래하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하여
인생무상을 서러워하였지만
대범 오늘에 상고하건대
강산이 변하여 수전벽해가 된들
사람의 마음은 불변인 듯 싶사외다
물론 나 역시
천오백육십삼 년에 태어나
스물일곱 해 그 짧은 생애 동안
백가서책에 담긴 이론을 섭렵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구름에 앉아
영육의 신선계를 왕래하며
목숨과 운명 사이 창현한
팔만사천 번뇌 굽이굽이 다스려
헤아릴 수 없는 시를 썼다고 하나
임종 직전의 깨달음이란
유한한 인생이 창해일속이라
내 모든 흔적을 불사르라, 유언했사외다
그러나 오라버니 허균의 안타까움으로
그대들 앞에
조선 역사의 비원이 서린
허난설재 문집 한 권이 남겨지니
거기 담겨 있는 내 마음과
오늘 사랑 있는 자매들의 마음에
무지개 다리가 걸려
시간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하고
나라를 초월하여
사람 살아가는 뜻
사람 살아가는 도리
한가지로 고개 끄덕일 수 있다면
이게 만고불변한 마음의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리까
기왕에 유고가 남겨졌으니
서천 서역국에 있는 이 난설헌
해동 조선의 딸들에게
하나 남은 미련을 접지 못하외다
하나 남은 미련이란 무엇이니까
오늘날 조선의 자매들에겐
이념이나 투쟁능력이 승하다고 하나
오천년 서린 여자들의 눈물과 한숨에 대하여
서책으로 남을 만한
자매간의 화답의 묘미가 부족한 듯 싶사외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고백하건대
허난설헌 시집이 처음 출판된 곳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요
이 문집을 탐독하고 공감한 나머지
시 편편에 자매애를 묶어 화답한 합본시집
"해동란"이 출간된 곳도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외다
내 살아 생전
조선에 태어났음을 삼한으로 삼았으나
이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돌아갈 곳은 해동일진대
해동의 딸들이여
수중고혼 같았던 내 이승의 삶과
오늘날 그대들의 눈부신 삶이
어느 시대 창졸간 여자해방의 화답으로 맺어질꼬!
삼한삼원三恨三怨의 서슬 청초 우거진 골에 푸르렀으니
대저 자매간의 화답의 묘미가 무엇이니까
대저 시대간의 조화의 이치가 무엇이니까
앞시대와 뒷시대 하늘에 떠도는
수중고혼의 해원이 아니리까
혹자는 난설헌을
하늘이 낸 시인
하늘이 낸 천재
하늘이 낸 절세가인이라 하지만
아니외다 아니외다 아니외다
곤륜산맥 황하에 넋을 눕힌들
이승의 규방 아자문에 자지러진
삼한삼원의 서슬 아직
청초 우거진 골에 푸르렀으니
하늘은 내게
천기를 다스리는 재능만 주시고
시대를 주시지 않았더이다
하늘은 내게
사랑에 대한 갈망만 주시고
인연을 주시지 않았더이다
하늘은 내게
산고의 쓰라림만 주시고
모성의 열매를 주시지 않았더이다
이 절묘한 이치 그대들 깨닫거든
해동의 딸들이여
이미 시대를 얻었고
인연의 때를 점지받은 그대들은
가을날 오동잎에 떨어지는 찬비 같은
앞시대 고혼들의 눈물 받아
조선여자 해방길 닦아야 할 것이외다
여자 제갈공명이 동아시아에서 깃을 치는 이유?
내 살던 시대는 봉건 군주시대요
그대들 시대는 민주 평민시대라 하건만
어찌하여 여자해방 그리 더디나이까
이미 지나간 세 가지 시대,
자기를 극기하여 얻은 성현의 시대와
타인을 정복하여 군림하는 영웅시대와
남보다 월등하여 차지한 수퍼우먼시대 다 지나가고
보통 여자들의 시대가 열렸다 하건만
보통 여자들
자유롭게 밥 먹고
자유롭게 옷 입고
자유롭게 자길 일 하는
해방의 집은 정녕 어디 있나이까
평등의 집짓기란 하나의 전략이외다
주춧돌이 발라야 대들보가 올라가고
서까래가 튼튼해야 집이 들어앉듯
창졸간 허튼 시대 바로잡기란
앞뒤좌우 다림줄 역력해야 할 것이외다
하오나 해방세상 발원하는 조선에
아직 얻지 못한 세 사람이 있으니
우리 저승국 모모한 여자들 다 모여
이 일을 긴밀히 의논한 끝에
천지신명 움직이는 상소문 올렸으되,
딸들이여
그대들이 취해야 할 세 사람
여자 제갈공명이 평등세상 다림줄 놓기 위하여
동아시아로 파송되었사외다
여자 율곡이 평등 정치 주춧돌 세우기 위하여
동아시아로 파송되었사외다
여자 관음보살이 생명의 강 일으키기 위하여
동아시아로 파송되었사외다
보통 여자들로 태어난 그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지는
그대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외다
이에 오등의 나아갈 바를 밝혀
조선여자 해방투쟁을 위한 출사표를 적어 두는 바입니다
여자해방 투쟁을 위한 출사표
이제 해동 조선의 딸들이 일어섰도다
위로는 반만년 부엌데기 어머니의 한에 서린 대업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작금 한반도 삼천오백만 어진 따님 염원에 불을 당겨
칠천만 겨레의 영존이 좌우되는
남녀평등 평화 민주세상 이룩함을
여자해방 투쟁의 좌표로 삼으며
여자가 주인 되는 정치평등 살림평등 경제평등을 바탕으로
분단 분열 없는 민족공동체 회복을
공생 공존의 지표로 손꼽는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다지고
세계 공영의 기치를 오늘에 되살려
청사에 길이 빛날 법치의 으뜸을 두나니,
안으로 조선여자 해방을 실현함은
남녀분열 남북분단 청산하는 하나의 조국을 되찾는 지름길이요
밖으로 조선남자 해방을 성취함은
전쟁폭력 없고 지배복종 없는 세계 인민 해방의 계승임을
거듭 확신하노라
무릇 사람의 도리로 상고하건대
서럽고 원통하도다 조선의 언님들이여
더 이상 이 땅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르지 말자
더 이상 이 땅을 백이의 산하라 말하지 말자
고대광실 문화 통틀어 헤아려 본들
만백성 터를 잡고 땅을 일군 그날부터
철의장막 남자독재 치국평천 웬 말인가
가부장권 굽이굽이 조선여자 비명절규 하늘에 사무치도다
강토의 연혁마다 여자 억압과 착취의 쇠사슬 소리 웅장하도다
정녕 장렬하구나, 어진 따님들이여
그대 단지 여자로 태어나
남자천하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이 되고
식민치하 망국충정의 먹이사슬이 되었건만
죽어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
금수강산 하늘로 땅으로 강물로 되살아나
삼대 치욕의 조선사 넓은 치마폭에 덮어 주나니,
원나라 몽고족에 헌납된 고려의 딸들이여
삼천오백만 자매의 이름으로
사대주의 선비정신 위선을 교수형에 처하노라
왜놈제국 세계침탈 색욕에 유린당한 정신대 딸들이여
삼천오백만 자매의 이름으로
지사주의 매국충정 혈통을 참수형에 처하노라
매판자본 정경유착 아방궁에 바쳐진 기생관광 딸들이여
삼천오백만 자매의 이름으로
친일 친미 매국노 전통을 화형에 처하노라
아아 그리고 오늘날
생존권 투쟁에 피 뿌리는 딸들이여
민족민주 투쟁에 울연한 딸들이여
남자출세성공에 희생된 딸들이여
무엇을 더 망설이며 주저하리
다 함께 일어나 가자
남자들의 뒷닦이는 이제 끝났도다
우리가 시작하였고 그대가 완성할
해방세상의 때가 임박하였도다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여자해방 투쟁 드높은 신명으로
언님들의 어진 땅 어진 하늘 되살려 옴이니
전쟁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폭력의 창을 쳐서 떡을 만드는 이
어머니의 손 말고 뉘 있으리
학살의 능선에서 생명을 품어 안고
대립 갈등 골짜기서 사랑을 보듬는 이
여자의 젖가슴 말고 뉘 다시 있으리
정치혁명 깃발 아래 살림의 어머니 불러내고
성혁명 깃발 아래 생명의 어머니 불러내고
교육혁명 깃발 아래 사랑의 여자 불러내어
가자, 가자, 가자, 딸들이여
기만으로 죽맞은 헌정사 끝장내고
생명세상 개벽천지 살길을 마련하자
대범 해동 조선 어진 따님 일어섰도다
- 고정희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1990.
참고: "해동란집"은 난설헌집에 중국여자 허경란이 화답한 합본시집이다.
허경란은 조선 선조 조에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인 역인 허순의 딸로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8세 때부터 시작하여 총명을 떨쳤으며 그
양친이 작고한 후에는 외가 사씨 문중에서 자라면서 항상 생면 부지의
고국을 그리워했다 한다. 때마침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온 주지번이 발행한
난설헌집을 구독하고 난설헌의 비범한 시재에 놀라 경모한 나머지 자신의
아호를 경란으로 자칭하고 그 시 하나하나에 화답송을 붙이니, 이를
양백아가 편찬, "해동란"으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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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이야기 여성사 3 고정희
사임당상이라니 기상천외이외다
경번당 허 자매
그대 나보다 뒷세상에 태어났지만
기실 명문가에 적을 둔 정실규방 신세 한가지로 살아왔으니
그 허와 실 뼛속에 사무치리라 싶어
꾸밈 없는 속이야기 서둘러 봉하외다
오늘에사 나는
조선의 정실부인들이 모여 해마다
신사임당상이라는 것을 주고받으며
원삼 족두리 잔치를 벌이고
신사임당 사당까지 지어
여자 예절교육 본으로 삼고 있다 하는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외다
아니 이는 분명 흉보 중에 흉보요
재앙 중에 재앙이라 아니할 수 없사외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의 조선은
십년 강산이 몇백 번씩 바뀌고
시대 또한 놀랍게 변하였다 들었사외다
여자들의 무예가 하늘을 찌르고
첨단과학 문명이 옷섶에 나부끼며
민주 진보 급진사상이라는 것이
머리 깨친 사람들의 대세라 들었사외다
그런 조성땅에 아직
손가락 하나 끄떡 않는 세 가지
바뀔 줄 모르고 변할 줄 모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니까
여자에게 현모양처 되라 하는 것이요
남자에게 현모양처 되겠다 빌붙는 것이요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가는 것이외다
시집가서 아들 낳기 원하는 것이외다
그 현모양처 표본이 바로 나 신사임당이라 하여
내 시대 율법으로
내 시대 관습에 특출한 여자 골라
여자들 이름으로 상 주고 박수 친다니
이 무슨 해괴한 시대 변고이니까
요즘 알아듣는 말로 치자면
절반 하늘
절반 땅
절반 경제
절반 나라살림 좌우하는 여자해방하면서
여자 팔자소관 하나 바로잡지 못한다면
기상천외 요절복통 하세월이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대라지만
우리 해동 조선에 버티고 있으니
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
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
남녀분단 장벽 허물 일이 급선무이외다
삼종지도 장벽 무너지지 않는 집에
어찌 민주며 통일이 있으리까
또 내가 현모양처 모범이니
영원한 구원의 여인상이니 하여
칭송 아닌 칭송을 늘어놓는 것도
똑바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외다
솔직히 말하건대 내
당대의 율곡을 길러 냈다고는 하나
당대의 여자 율곡을 길러 내는 일보다
자랑이 못 되며
사대부 집안에서 뼈가 굵은 탓으로 반상에 적응하는 자중을 조금 알고
시국관 거스르지 않는 지혜 조금 깨우쳤을 뿐
(이는 반가 정실부인들의
생존전략이외다)
규방에서 난초 치고 글 짓는 일이란
여자 한이 방울방울 아롱진 탓이로되
내 평생 절반을 친정집에서 살고
반평생 친정부모 모시는 데 바쳤으니
현모양처 계율로는 어림없는 일이외다
하물며 과학만능 우주시대 여자들이
어찌하여 현모양처 망령에 이끌린단 말이니까
오고 있는 시대를 좇아야 하외다
정실부인론을 곡함
그러나 허 자매
다시 거듭거듭 걱정하거니와
오늘날 해동의 어여쁜 여자들이
현모양처 허상에서 깨어나기란
일부일처 관습이 대세를 이루는 한
분단장벽보다 어려울 것이외다
요즘 시국관으로
사회변혁운동이란 말이 유행이라 들었사외다 이
사회변혁운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부르주아 중산층 계급이라 들었사외다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급
관습유지의 보호막인 계급
생각은 많으나 믿을 수 없는 계급
이미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계급
이것이 바로 중산층이라면
그것의 받침목은 중산층 부인들이 아닐 수 없사외다
말하자면 현대판 정실부인들이외다
이 말을 새겨듣기 바라외다
일례로 며칠 전 우주위성중계를 통해
여의도 텔레비전 방송에서 벌어지는
집중 여자토론회를 시청했사외다
그곳에 초청된 모든 정실부인들은
조선조 여자관을 빼다 박았더이다
시국의 변화에는 아랑곳없되
여자 일 남자 일 따로 있어서
여자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기르는 일에
한치도 벗어나선 안된다는 것이외다
이 어찌 가슴 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일찍이 이익이 잘못했던 말,
여자는 학문을 해서는 안되고
재능을 날려서는 나라의 재앙이다, 엄포를 놨던 말이
우아한 유령으로 사라 있단 뜻이외다
대저 일부일처제란 무엇이니까
여자를 소유로 보자는 내막이외다
정실부인이란 무엇이니까
소실과 첩을 엄중히 처단하잔 여자율법이외다
소실과 첩이란 무엇이니까
기둥서방 문화의 희생물이외다
기둥서방 문화란 무엇이니까
무릇 남자의 성기 밑에
여자의 자궁을 예속시키자는
영원무궁한 음모이외다
그러므로 정실부인의 반열에 든 여자들은
여자가 여자 자신의 적이다, 이 말을
거의 선진적으로 깨우쳐
스스로 만든 장벽 넘어가지 않는다면
탄하노니
여자 절개의 무게 태산과 같고
여자 목숨의 무게 깃털과 같다 한들
오천년 피눈물이 부족하단 뜻이니까
저승 여자들이 줄지어 곡하외다
남자들이 싫어하는 여자 세 가지
그렇다고 곡만 할 수 없사외다
생존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듯이 허허실실 병법이 허사는 아니외다
상고해 보건대
어찌하여 신사임당이
조선조 남자들의 철옹성 속에서
조선조 남자들의 붓으로 기록하는
현모양처상이 되었나이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조 남자들이 하나같이 지닌
세 가지 허를 깨쳤기 때문이외다
반상을 막론하고
조선의 남자들이 싫어하는 세 가지 허가 있으니
첫째는 남자 체면 깎이는 것 용납 않는 허요
둘째는 남자보다 높은 식견 인정 않는 허요
셋째는 남자 앞에서 큰소리 거북스런 허외다
그래서 남자가 싫어하는 세 가지 여자란
남자보다 잘난 체하는 여자요
남자 자존심 건드리는 여자요
남자보다 큰소리로 웃는 여자이외다
내 전략이 구식일진 모르지만
여자의 특질과 부드러움 이용하여
이 허를 찌르기란 어렵지 않사외다
다만 이는 전략이로되
이녁 살아 있는 뜻 당당하게 세우는
비수 한 자루 간직할 터인즉
여자는 최후의 피압박계급?
내 잠시 잠깐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규방 여자들의 한이 있사외다
동지섣달 길쌈하는 소리는
날 잡숴, 날 잡숴,
여자 사지 찢어 나르는 소리요
달빛 설핏한 밤 다듬이질 소리는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여자 팔자 두룸박 팔자……
조선 여자 뒤통수 내리치는 비명이거늘
오직 천추의 한으로 간직할 뿐
이 결박 스스로 풀지 못했으니
어즈버
문명국이 된 오늘날까지
방직공장과 기성복 공장
그리고 또 무슨무슨 공장에서
우리의 이쁘고 이쁘고 이쁜 딸들이
저임금과 철야, 잔업에 시달리며
생산증대 길쌈과 바느질로
돈받이 달러받이 일삼는 것 아니리까
구중궁궐 기계실과 밀실에서
성폭력과 강간폭력 노동통제 남근에 깔려
어머니 당했어요, 현모양처 되기는 다 틀렸어요, 돈이나 벌겠어요!
기생관광 인당수에 몸 던지는 것 아니리까
딸아, 현모양처상을 화형에 처해라
네 비수로 정절대를 찟어라
단숨에 찢어발겨라, 이 불쌍한 것
여자의 이 아픔
여자의 이 억압
여자의 이 억울함
하늘을 찌르고 땅에 솟구친들
속시원히 노래한 시인이 조선에 있는지요
최근에 박노해라는 노동시인이
이불을 꿰매며, 라는 여자해방시를 썼다고 하나
찬찬히 뜯어보건대
나도 내 아내를 압제자처럼 지배하고 있었다……이런 고백에 지나지 않아요
원통하구려!
오천년 당한 수모 약이 될 수 없으리까
정작 길닦이가 없었나이까
아니외다
사백 년 전 경번당 당신은 이미
여자의 처지를 계급으로 절감했사외다
사백 년 전 난설헌 당신은 이미
여자의 팔자를 피압박 인민으로 꿰뚫었사외다
사백 년 전 초희 당신은 이미
남자의 머리를 봉건제 압제자로 명중했사외다
아니 아니 난설헌 당신은 최초로
조선 봉건제에 반기를 든 여자시인이며
여자를 피압박계급으로 직시한
최초의 시인이 아니리까
밤 깊도록 베 짜는 외론 이 심사
뉘 옷감을 이 몸은 이리 짜는가
팔베개 수우잠도 맛볼 길 없이
텅텅텅 북 울리며 베 짜는 몸엔
겨울의 긴긴 밤이 그저 추울 뿐
뉘 옷감을 이 몸은 이리 짜는가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면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시집살이 길옷이 밤낮이건만
이내 몸은 해마다 새우잠인가
가난한 여자를 위한 이 오언절구 절창에
어느 여자 무릎을 치지 않으리요
어즈버 하늘이 낸 시인 난설헌
조선에 태어난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시인이 있더이까
난설헌 바로 당신이외다
조선에 터잡은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천재가 있더이까
경번당 바로 당신이외다
조선에 뿌리내린 백성 중에서
하늘이 낸 절세가인이 있더이까
초희 바로 당신이외다
세상이 우러르던 재상 허엽과 강릉 김씨 딸로
당신 태어났건만
그 문벌 그 족벌이 무슨 소용 있으리
독서와 강의는 선비의 일이니
부인이 이에 힘쓰면 폐해무궁하리라, 하여
훈학에 힘입은 바 없고
문벌 족벌에 기댄 바 없으나
네 살박이 여자아이의 매서운 눈초리
네 살박이 딸의 처절한 분노는
하늘의 밑둥을 흔든 성싶사외다
오라버니 어깨너머로 깨친 글솜씨
백가서책을 스스로 통달하여
다섯 살에 시 지으니, 여신동이요
여덟 살에 백옥루 상량문 올리니, 조선의 문웅이요
스스로 난설헌이라 호를 짓고
수수편편 백옥 같은 시의 장강 이루니, 여자 두보요
안동 김씨 김성립과 혼인하여
천추의 삼한을 품고 살되,
하늘이여 어찌하여 조선을 내고 나를 내었나이까
하늘이여 어찌하여 남자를 내고 다시 나를 여자로 내었나이까
하늘이여 어찌하여 김성립을 남편으로 점지하였나이까
하늘을 대지른 그 울연한 기상 다스려
가이 득음의 경지에 넘나들 제
글자마다 주옥이요
글귀마다 산호 열려
천의무봉 시세계 천고명작 이루니,
이 세상 일 같지 않다 이르더이다
어즈버 하늘이 낸 시인
어즈버 하늘이 낸 천재
어즈버 하늘이 낸 절세가인이여
중국 대륙에 삼대 부인문장가가 있다고 하나
조대가와 반희와 설도가 당신에 견줄 수 있으리까
아까운 스물일곱 해
그 짧은 생애 마칠 때
평생의 시고가 시의 노적가리 이루었다 하건만
이녁 유언대로 한 점 재로 돌아가 무덤에 덮이니
아깝고 아깝도다
다만 친정에 남아 있던 유고 이백여 수가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의하여
천육백육 년 중국에서 간행될 제
낙양의 종이값을 오르게 하였다니
주지번의 발문대로
이제 허난설재의 문집을 보니 아득히 티끌 속세를 초탈하여
아름다워 때묻지 않고 유현하면서도 구상이 있어 선경에
유영하는 제작품이 다시 선가仙家에 관통했으니……
백옥루각이 한번 이룩됨에 ……떨어진 글자욱은 모두 주옥을
이루어 인간 세계에 영원히 그윽한 감상을 하게 했구나 어찌
어리석고 하잘 나위 없는 우리들이 한숨짓고 억지로 읊어서
그 불평한 심사를 묘사하여 한갓 아녀자의 웃음과 빈축을
사는 것 따위리요……
한번 이룩된 백옥루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대 다시 없으리
- 고정희 시집 "여성해방출사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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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송유미 시집,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전망시선·1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송유미
1
가슴에 묻은 아가의 얼굴이 북두칠성이 되어 반짝인다
그 어느것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거든 깨어나 나의 괴로움이 되지 말고
이미 세상의 그 어디에도 나의 길은 무너져 버렸다면
갑산으로 가는 길조차 폭설에 덮혔으리라
2
경포의 달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는 나의 시도
이 무서운 밤 떠오를 줄을 모른다
적막의 울타리 곁에서 반쯤 얼굴을 가린 복사꽃 울고 있구나
돌아올 줄 모르는 그대의 밤은
우리의 인연이 아니라면 저승에서 그 머리를 풀어야 할까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리움이 시들어가는 나의 창에
이렇게 코를 박고 떠나지 못하는 낯익은 얼굴아
고요함에 눈물을 흘리는 나의 마음아 빈 마당에 선 오동나무야
우리 갑산으로 떠나자꾸나
3
백옥루 상량문을 짓게하던 스승이여, 시를 쓰는 일이 겨울나무에
매달린 나뭇잎같은 신세인 줄은
마을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닫혀 있는 문 앞을 서성이면서 얼음도 되지 못하고 성에 낀 몸을
데불고 이 산천을 떠난다. 눈에 쌓여 눈에 쌓여
내가 길을 잃었는지 가르쳐 주는 이도 없는 길을
지상에 없는 길을 찾아간다
- 송유미 시집, "허난설헌은 길을 잃었다", 전망시선·1
6. 가을의 고독은 무엇을 낳는가 글 · 조달공/성균관대 명예교수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말 그대로 오동나무 잎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다가옴을 안다 하였는데 기실 그런 여유조차 없이 요란한 귀뚜라미 소리에 새삼 놀라니, 그간 지나친 더위에 몹시 시달렸던 때문인가.
자연은 결실과 수확의 풍요로운 때임에도 사람에게는 고독과 우수의 철로 그렇게 여겨지기도 한 다.
산하대지의 두두물물은 조화의 힘으로 그간 무성했던 천지(千枝萬葉)과 오곡백과를 말끔히 떨어 버리고 본래 고요하고 부동(不動)한 무일물의 세계로 자취없이 돌아가건만, 오직 범부중생만이 장 장추야에 번민에 쫓겨 미련 속에 길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리라.
기나긴 가을 밤이 어떤 여인에게 있어서는 소슬하고 애절한 아픔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땅의 옛여인들에게 있어서 독수공방은 한 시대가 남기고 간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
오늘 자유분방한 상대적인 행동이 몰고 온 영국 세자비의 그 종막을 목도하니 실로 금석지감이 없지 않다. 시간적으로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를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동과 서가 하늘과 땅 처럼 현격한 거리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요(堯)의 천하양여(天下讓與)를 물리치고 기산(箕山)에 숨은 허유(許由), 주나라 곡식 먹기를 거부 하고 수양산에서 채미(菜薇)로 연명하던 백이숙제. 모두 동양의 절대적 세계를 지향하는 그런 사 상에 근거한 것이다.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는 불사이부(不事二夫)라. 정포은과 성삼 문 같은 그런 유형의 인물이 동양이 아니고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런 인물에 못지 않게 무수한 열녀들이 독수공방에서 생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가을의 고독이란 풍요로운 정신적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 옛날 독수공방을 지킨 그런 비운의 여인 중에는 고독 속에 자기를 깨끗이 지켜 가냘픈 붓 한 자루에 의지하여 시(詩)를 통해 인생을 승화(昇華)시킨 열부(烈婦)도 있었다. 주옥 같은 많은 시를 후세에 남긴 허난설헌(許蘭雪軒)과 같은 이가 바로 그 주인공. 다음의 허난설헌이 지은 [규원(閨怨)]이란 제목의 시는 시제(詩題)가 말하듯이 긴긴 가을 밤에 귀뚜라미와 더불어 노래하며 운우 (雲雨)의 세계를 초월해 갔던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月樓秋盡玉屛空 霜打蘆洲下暮鴻
월루추진옥병공 상타노주하모홍
瑤瑟一彈心不見 藕花零落野塘中
요슬일탄심불견 우화영락야당중
달빛 가득한 다락에는 가을이 한창인데, 고운 병풍은 쓸쓸히 비어 있네.
서리 내린 갈대 밭엔 저녁 기러기 내려 앉건만,
옥(玉)장식의 거문고로 한껏 흥을 돋우어도 들어 줄 임이 곁에 없으니,
버려진 연당에는 연꽃이 절로 시들어 떨어진다.
26세로 요절한 강릉 출신의 여류 천재시인 허난설헌(1563-1589)은 허균(許筠)의 누이로서 이달 (李達)에게 시를 배우고,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부부 사이가 뜻대로 원만하지 못 하였음은 낭군의 기방출입에 그 까닭이 있음을 세인은 잘 전하고 있다.
이 시대에 그녀의 주위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종서, 정인지, 유성룡, 이순신, 원균 같은, 그런 감화가 그 집안에도 미쳤으리라. 그녀의 불우한 처지는 시작(詩作)으로 표현되었고 그 필치 가 섬세하며 여인다운 감수성에, 날카로운 애상이 노래마다 담겨있다.
그녀는 중국 초나라의 번희(樊姬)를 사모하여 초희(楚姬)라는 이름에 경번(景樊)이라는 별호도 가 지게 되었다.
그녀의 시명은 널리 알려져,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 의하여 중국에서 시집이 출판되기도 하고, 물 건너 일본에서는 문대옥차랑(文台屋次朗)에 의하여 역시 시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에는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 (遣興) 등 모두 142편 외에 여러 종류의 가사(歌辭)가 전하고 있다.
9. 재평가 아쉬운 허난설헌 작품 세계- 신문기사 2005-11-29 21:25
(허난설헌 묘를 찾아가 쓴 신문기사 글 일부 )
<허난설헌 묘비 글>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어/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영혼아/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자식을 가슴에 묻은 지어미의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다. 그녀의 시 곡자(哭子)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땅에 묻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 더구나 친정아버지 허 엽을 경상도 땅 상주에서 비명횡사로 여의고 딸을 가슴에 묻은 다음 해 아들 희윤이 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홀로 남동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묘 바로 옆에 애기 무덤 두 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딸과 아들 희윤이의 무덤이다. 지하에서나마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묘비에는 허난설헌에게 가장 큰 문학적 영향을 끼친 스승과도 같은 오빠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허 봉이 조카 희윤이를 기리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로 시작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부용삼구타 라는 구절이 뚜렷하게 새겨진 시비 |
10. 宋德峯 生涯와 詩文 --- 카페 무등산 일출 <카페지기 남강>
宋德峯 生涯와 詩文
宋德峯은 中宗16년 (1521)12월20일 全羅道 潭陽 泥八谷에서 태어났다. 洪州 宋氏로 이름은 알 수 없고 字가 成仲이고 號가 德峯이다. 아버지는 宋 駿으로 司憲府 監察과 丹城縣監을 지내시고 號는 二樂堂이며 어머니 咸安李氏는 1468년 戊年文科에 壯元을 하고 北評事를 지낸뒤 司憲府 大司憲과 全羅道 觀察使 禮曹判書를 역임한 李仁亨(葦溪書院 配享)의 따님 이시였다. 德峯은 두 분 사이 3男2女 중 막내였다. 眉巖의 平生行蹟을 記錄한 글(諡狀)에 따르면 그녀는 明敏하고 書와 詩書를 두루 涉獵하여 女性 선비로써의 風貌가 있었다고 傳한다.
實在로 덕봉은 여느 16世紀 女性藝術家 처럼 平生 詩와 文.便紙등을 서서 德峯集이란 詩文集을 남겼다.
德峯集은 그분의 나이 51歲(1571)때 미암이 처조카 宋 震을 시켜 그 동안 덕봉이 지은 詩 38首를 묶은 것을 結冊하여 그 분의 아들 景濂을 通해 그 文集을 傳하니 무척 기뻐하였다.
더욱이 自身의 詩가 없어지지 않고 後世에 傳해지게 되어 喜悲가 엇갈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그 詩集이 傳하여지지 않고 미암 日記와 그 附錄에 便紙 1通 文 2編 詩 20余首 등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作品들은 德峯文集에도 실려있는데 여기서도 日記의 附錄 처럼 미암이 지은 詩文과 함께 묶여있다. 그분의 作品을 보면 (1571년 7월 5일)斲石文 序와 斲石文이란 두 편의 글을 지어 미암에게 親庭父母의 墓所 앞에 碑를 세우는 일을 더 以上 늦추거나 疏忽히 해서는 않된다고 强力하게 主張한다. 이 편지와 글은 이응태 婦人의 한글 편지 “광한정 백옥루 상량문”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 있는 16世紀 女性 散文의 唯一한 作品이다. 이 時期 女性들의 意識 世界를 잘 보여준 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文學史的 意義를 지니고 있다.
특히 朝鮮中期 까지는 이와 같은 家學이 活潑하게 이루워져 뛰어난 女性 藝術家들이 存在할수 있었다. 勸善文牒과 山水畵 두폭을 남긴 薛氏 夫人(1429-1508) 그림.자수.글씨등에서 卓越한 藝術作品을 남긴 申師任堂(1504-1551) 詩人 宋德峯(1521-1578)난설헌집(蘭雪軒集)이란 詩集으로 韓國과 中國의 文人들한테 크게 注目받은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거문고와 노래를 비록해서 매창집(梅窓集)이란 詩集을 남긴 이매창(1573-1610)등이 代表的인 女性이였다. 이외에도 비록 生沒年代는 正確히 알수는 없으나 中宗代에 活躍한 듯한 黃眞伊는 時調 6편과 漢詩 7편을 남겼다. 덕봉 亦是 어릴적 부터 家學과 獨學으로 글을 배웠으며 아쉽게도 어린 시절 부모한테 가르침을 받았다는 資料는 남아 있지 않지만 어머니가 高官宅 따님이 였고 아버지도 兩班官僚이자 딸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父母한테 家學을 받은 可能性이 매우 높다. 그러나 叔父 숙(驌) 의 影響이 컷을 것으로 본다 叔父는 孝誠과 友愛를 하늘로 부터 附與받아 豊富한 文章驅使力을 가지고 있어 선비들의 推仰을 받았다. 특히 詩와 禮를 맛있는 飮食으로 생각하고 즐겼다. 한쪽에는 文人畵와 冊을 한쪽에는 대나무와 꽃을 쥐고 低俗한 享樂을 멀리하고 風月을 벗 삼아 聖賢들의 말씀을 冊으로 엮으셨다. 그리하여 德峯도 詩文을 하게 된 契機였다고 본다. 특히 미암의 結婚도 叔父께서 成婚시킨 것으로 본다. 二樂堂께서 아우인 優遊堂에게 婚處를 求하여 보라고 하자 각 地方의 兩班들의 新郞감을 찾든 중 海南의 善山 柳門에서 미암을 보고 키가 5尺 短軀였으나 그 생김새가 明敏하고 當차며 큰 人物이 될 것을 미리 알고 婚事를 成事 시킨 것입니다.
德峯의 詩들을 살펴보면 便紙나 글과 마찬가지고 生活 속의 感興을 捕捉하거나 家族과 함께 살아가면서 느낀 感懷를 있는 사실 그대로 表現한 것이다. 또 詩語의 使用에서도 日常語. 口語體가 자주 쓰인다. 이것이 덕봉 시의 特徵이요 이시대 女性文學의 特徵 이였다. 그 代表的인 例로써 다음과 같은 詩를 살펴 본다.
덕봉은 16歲에 미암과 結婚式을 올리고 그대로 눌러 사는 婚姻 風俗으로 딸이 父母를 모시고 사는 時代였다. 덕봉 역시 婚姻한 뒤에도 繼續 담양에서 父母를 모시고 살았고 父母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 집과 田畓을 물려받아 祖上의 祭祀를 모시며 살았다. 그렇다고 덕봉께서 媤父母를 전혀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미암이 歸鄕을 떠나자 시어머니 崔氏를 모셔다가 至誠으로 奉養 하였다. 崔氏는 錦南 최 부(錦南崔簿) 의 따님으로 淸白吏이며 漂海錄을 써서 成宗 임금에게 바치었다. 그가 1487년 濟州道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에 任命되어 갔는데 이듬해 1488년 그해 父親喪을 當하여 羅州로 돌아 오는데 배가 16일 동안 漂流되어 中國에 到着한 후 6個月 만에 돌아와 王의 命에 依하여 漂海錄을 씀으로써 당시의 生活上과 中國의 交通 農業(風車) 등을 잘 表現하여 貴重한 資料가 되고 있다. 그리고 己卯士禍의 甲子士禍로 歸鄕을 가서 1504年에 斬刑을 當하여 後에 伸寃이 回復 되었다. 崔氏는 德峯의 孝心에 感動하여 미암의 歸鄕地 鍾城까지 便紙를 보내기도 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 가시니 혼자서 禮에 따라 葬禮를 치렀다. 喪이 끝나자 眉巖의 歸鄕地인 咸鏡道 鍾城까지 女子의 몸으로 가면서 詩를 지은 것이 있는데 이 詩의 內容은....
登磨天嶺吟....“마천령에 올라서 읊다”
行行遂至磨天嶺...가고 또 가서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東海无涯鏡面下...동해는 끊임없이 거울처럼 평평하다.
萬里夫人何事到...만리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는고
三從義重一身輕...삼종의 의는 무겁고 한 몸은 가벼운 것
이란 시를 지었고 德峯은 婦德이 있어 처음 鍾城으로 歸鄕 갈 때 妾을 딸려 미암의 健康을 돌보게 하기 위하여 함께 보내기도 하였다. 1571년 10월 全羅 監司를 지낸 미암은 司憲府 大司憲에 除授되어 덕봉께 便紙를 보냈는데 德峯은 뜻밖에도 學文하는 선비로써 이미 極盡한 榮華를 누렸으니 그만 물러나서 健康을 돌보라는 詩를 지어 보냈다.
眉巖 升嘉善大夫
黃金橫帶布衣極...황금 띠를 둘렀으니 선비로써는 극진한 영화
退臥茅齋養氣何...초당에 누워 건강을 돌봄이 어떠 하리오
爵祿可辭曾有約...벼슬을 사양 할 수 있다고 일찍이 약속했으니
遊庭見月待還家...뜨락에서 달 보며 돌아오길 기다리오
아들 景濂이 1571년1월 英陵 參奉時節 休暇내어 親家에 와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드린다.
景濂戱羅袖
孤羊攀石壁...외로운 양이 석벽을 오르다가
砥雪耐嚴寒...눈을 핥으며 차가움을 견디네
骨露毛雖落...뼈가 드러나고 털도 비록 빠젔지만
春來意自歡...봄이오면 뜻이 절로 즐거우리
이 詩를 지어 바치니 어머니는 비록 힘들지라도 뜻을 갖고 참으면 언제가는 기쁜 날이 있을 것이라고 아들을 慰勞하고 다음의 和答詩를 지은다.
母의 和答詩
莫言羊石壁...양이 석벽에 오름을 말하지 말라
有志忍酸寒...뜻이 있어 시리고 차가움을 견딘다
苦盡甘須到...쓴 것이 다하면 단것이 올지니
春風與柳歡...봄바람은 버들과 함께 즐기리라
미암은 임금이 下賜하신 술상을 집에 보내면서 詩를 지어 보낸다 德峯은 딸인 은우어미에게 함께 보낸 詩를 읊어 보도록 한다.
送酒 于 夫人 兼 贈 小詩
雪下風增冷...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지네
思君坐冷房...그대가 추운냉방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노라
此醪雖品下...이 술은 하사품이지만
亦足煖寒腸...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 줄수 있으리
德峯 和答詩
菊葉雖飛雪...국화 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銀帶有煖房...은대(丞務院)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寒堂溫酒受...차가운 바에서 다뜻한 술을 마시니
多謝感充腸...속을 채울수 있어 매우 고맙소
라는 시를 지어 다시 미암에게 보낸다.
斲石文序 眉巖夫人 宋氏 號 德峯 二樂堂公 女
眉巖謫居鐘城十有九年 嘉靖乙丑季冬 蒙上思 丙寅春量移于恩津 余亦陪還同 寓十生九死之 餘唯 所望者立碣石於先塋之側面而石之品好者莫過於此縣之所産 卽招石工給價 以貿載船 以送置海南之海上 隆慶元年丁卯冬 眉巖以弘文校理掃墳還鄕 始曳運于秋城 而人力單弱未得斲立 辛未春適除此道監司庶畿得副宿願中心慆慆 監司忙於除弊不願 私事而簡余曰必須私備而成後 余長其拙而作此文 冀家翁感悟 而扶助又以胎夫後雲仍也
德峰親筆刻豎于南平公 丹城公 同福公 三隧上 斲石文繁不記焉
辛未年 (1571) 宣祖 4年 7月 5日
◎ 착석문서 미암부인 송씨 호 덕봉 이요당공녀
남편 미암게서는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19년째인 嘉靖乙丑年 明宗20年(1565) 섣달에 임금의 은덕을 입어 丙寅年(1566)봄에 恩津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내가 모시고 돌아가 함께 寓居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에 오직 바라는 것은 先塋의 곁에 비석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돌의 품질이 좋기로는 이 은진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곧 석공을 불러 값을 치루고 돌을 사서 배에 실어 보내 해남의 바닷가에 두었다. 隆慶元年인 丁卯年明宗22年(1567) 겨울에 미암께서 홍문관 교리로 성묘를 하러 고향에 돌아올 때에 비로소 추성으로 돌을 끌어서 옮겼으나 . 인력이 부족하여 비석을 새우지 못하였는데. 辛未年 봄에 공이 마침 이 道의 監司로 除授되어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 여겨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미암께서는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 분주하여 개인적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나에게 편지하기를 .반드시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한 뒤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나는 스스로 졸렬함을 잊고 이 글을 짓노니. 家翁이 감동하고 깨달아서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또 한편으로는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이다. 덕봉은 친히 글을 쓰고 남평공.단성공. 동복공 세분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착석문은 번다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신미년 (1571) 선조 4년 7월 5일
斲石文 宋德峯
天地萬物之類 惟人最貴者 立聖賢明敎化 行三綱五倫之道也然自千千萬萬古而來 能勇而行之者蓋寡 是故人苟有追孝父母 至誠之心而 力不足以遂願者 則仁人君子 莫不惕然留念而欲救之 妾雖不敏豈不知綱領乎 孝親之心 追古人而從之 君今二品之職 追贈三代 余亦從古禮而得參 先靈九族 咸得其歡 此必先世積善陰功之報也 然吾獨耿耿不寐 拊心傷懷者 昔我先君 常語子等曰吾百歲之後 須盡誠立石於墓側之言 洋洋在耳 迨未得副吾親之願 每念及此 哀淚滿眶 此足以致仁人君子動心處也 君抱仁人君子之心 操救窘拯溺之力 而簡余曰 私備於同腹 而吾當以佐其外云 此獨何心 得非惡累淸德而然耶 等差妻父母而然耶 偶然不察而然耶 且君家 自君東來之三日 見琴瑟百年之句 自以爲得賢壻而失喜欲狂 君必記憶 況君我之知音 自比蚷蛩而偕老不過費四五斛之米 工可訖功 而厭煩至此 痛憤煩欲死經曰 觀過知仁 聞者必不以此爲過也 公遵前修之明敎 雖至微之事 盡善盡美 求合於中道 今何固滯不通 如於陵仲子耶 昔范文正公 以麥舟 救友人之窘有寡婦僅能支保者 或有窮不能者存者 非但不能收備 必起怨悶之心 禮云 稱家之有無 何足誅哉 若私家可辨之力 則以余之誠心 業己爲之久矣 豈必苟請於君耶 且君在鐘山萬里之外 聞吾親之沒 惟食素而己 三年之內 一未祭奠 可謂報前日款 接東床之意耶 今若掃厭煩 而勉救斲石之役 則九泉之下 先人哀感欲結草而爲報矣 我亦非簿施而厚望於君也 姑氏之喪 盡心竭力 葬以禮祭以禮 余無愧於爲人婦之道 君其肯不念此意耶 君若使我 불수차平生之願 則我雖死矣 必不暝目於地下也 此皆至誠感發 字字詳察 幸甚幸甚
辛未年 (1571) 宣祖 4年 7月 5日
◎ 착석문 송덕봉
천지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성현이 있어 교화를 밝히고 三綱五倫의 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를 용감히 실천하는 자가 적었으니 이 때문에 늦게라도 진심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은 지성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부족해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仁人 君子가 척연이 유념하여 구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첩이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綱領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어버이께 효도하려는 마음으로 古人을 따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2품의 직에 올라 三代를 추증하고 저도 古例를 따라 정부인의 반열에 올라 그 기쁨을 함께하니 先塋과 九族이 모두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先世에 積善을 한 陰功의 보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고 가슴을 치는 까닭은 옛날 우리 先君께서 항상 자식들에게 말씀하시기를“내가죽은 뒤에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내 묘 곁에 비석을 새우도록 하라”하신 말씀이 아직도 쟁쟁하게 귀에 남아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어버이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이것만 생각하면 매양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는 족히 인인 군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인인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렵게 물에 빠진 사람도 구하여 건저 줄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나에게 편지하기를“동복끼리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하면 그 밖의 일은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 淸德에 누가 될까봐 그런 것입니까? 妻의 부모라고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또 선군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琴瑟百年이란 시구를 지은 것을 보고 좋은 사위를 얻었다며 몹시도 좋아하셨던 것을 당신도 필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은 나의 知己로써 蚷蛩처럼 함께 늙어 가자고 하면서 불과 네다섯 斛(곡)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 귀찮아 하니. 통분해서 죽고만 싶습니다. 經에 이르기를 “실수를 보면 仁厚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남들은 필히 이 정도를 가지고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先儒들의 밝은 가르침에 따라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정성을 다하여 中道에 맞게 하려 하면서 이제 어찌 꽉 막히고 통하지 아니 하여 於陵仲子(어능중자)처럼 하려고 하십니까? 옛날 범 문정공(范 文正公)은 아들로 하여금 보리 실은 배를 주어 喪을 당한 친구의 어려움을 구해 주었으니 대인의 처사가 어떠하였습니까?
同腹끼리 私備하라는 말은 크게 불가합니다. 과부로 근근이 지탱하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혹은 곤궁해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비용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히 원한만 사게 될 것입니다. 禮에 말하기를“집안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 하라”하였으니 어찌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친정이 마련할 힘이 있다면 저의 성심으로 진작에 해 버렸을 곳입니다. 어찌 꼭 당신에게 구차한 청을 하겠습니까? 또 당신이 鍾山 만 리 밖에 있을 때에 우리 先君이 作故 하셨다는 말을 듣고 素食을 하였을 뿐이요. 3년 동안 한번도 祭奠을 안 했으니 전일 그토록 간곡하게 사위를 대접해 주던 뜻에 보답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귀찮아하는 마음을 누르고 비석 새우는 일을 억지로라도 도와준다면 九泉에서도 先人이 감동하여 結草報恩 하려 할 것입니다.
나도 박하게 배풀고 당신에게 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모님이 작고했을 때 眞心竭力하여 葬禮를 禮대로 하고 祭祀도 禮대로 지냈으니 나는 사람의 며느리로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나로 하여금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至誠에서 느껴서 나온 말이니 한 글자 한 글자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신미년 (1571) 선조 4년 7월 5일
덕봉의 장문의편지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배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려우기 어려운 것이니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동안 독숙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배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안정하고 결백하여 밖으로 華采를 끊고 안으로 사념이 없다면 어찌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소. 곁에 지기의 벗이 있고 아래로 권속과 노복들이 있어 十目이 보는 바이니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어늘 꼭 힘들게 편지를 보낼 것까지 있겠소.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배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 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나도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가볍게 여기지 마시구려. 강신은 몇 달 동안 독숙을 하고서 붓끝의 글자마다 공을 자랑했지만.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오. 하기사 당신은 귀한관직에 있어서 도성의 만인이 우러러 보는 처지이니 비록 수개월동안의 독숙도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오.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이가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르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소. 그래도 나는 지성으로 례에 따라 장례를 치루면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소.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의 길을 나서서 멀리 험난한 길을 갔는데 이것을 누가 모르겠소. 내가 당신한테 한 이런 지성스런 일이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오.ㅣ당신이 몇 달 동안 독숙한 공을 내가 한 몇 가지 일과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소
원컨대 당신은 영원이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오. 나의 뜻을 이해하고 깊이 살피기를 엎드려 바라오.
宣祖4年 庚午 1570 년 6월 12일
송 씨 아룀
西紀 2010 年 7 月 1 日
南 岡 泰 白 역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