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⑦]
종로구 지방자치 30년사
“종로 지방자치 권력의 변천”
이 병기(정치학 박사)
<1991년 선거 - 종로 토호세력 대 호남향우회의 대결>
종로구 국회의원이 내천한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1년 후 실시되는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의 충실한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한다. 그 당시 여당 인 민자당 이종찬 국회의원은 그런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민자당 내천 후보로 선거에 나선 인사들은 이의원이 특별히 선택을 한 것인데 이들은 모두 종로지역의 유력인사들이다. 소위 각 동별 유력인사인 셈이다. 겉으로는 중앙집권적 정치풍토에서 민자당 협의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동안 동네 헤게모니를 쥔 토호세력들 인 것이다. 국회의원 밑에서 충성을 하고, 관제 구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동네 주도권을 부여받은 공적, 사적인 후견인 관계라고 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동네 관변세력들이 모두 맨 처음 종로구 의원 선거에 총출동 하는 것이다. 소위 지역의 토호세력들이 지방자치 선거를 통해 제도권으로 진입하는 형태라고 할 수가 있다. 그것도 후보자 등록 입후보비를 지역 국회의원에게 보조받으면서 제도권 정치인으로 등극하는 셈이며. 동시에 지역의 국회의원과 지방선거 내천자는 확실한 주종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기존의 지역 주도권에 대한 비공식적 관계에서 공식적인 관계 즉 공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식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역 관변세력으로서의 주도적 권력을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1991년 6월에 열린 서울시 의회 의원선거(소위 광역시 의회)는 후보자에 대한 정당공천제에 의해 치러졌다. 정부 여당인 민자당 측의 이종찬 의원은 서울시 의회 종로구 후보로 거물들을 공천했다. 종로는 동. 서, 중부 등 3개 지역으로 나눠서 선거가 실시됐는데 서부지역인 평창. 부암. 청운. 효자. 사직. 무악 교남. 세종로동 선거구에서는 이 영호 전 체육부장관을 발탁, 후보자로 내세웠다. 또한 삼청, 가회, 종로1.2가, 종로3.4가 종로5.6가, 혜화, 명륜3가, 이화동 등의 중부지역에서는 김 찬회 전 서울시 부시장을 공천했으며, 종로 동부지역인 창신1, 창신2, 창신3, 숭인1, 숭인2동에서는 박 선오 한국자유총연맹 종로지부장을 공천했다.
이들 3명 후보 중 이 영호, 김 찬회 후보는 이종찬 국회의원이 특별히 초청, 공천을 했는데 이는 향후 그들이 서울시 의회에 들어가서 의장을 맡아 의회를 장악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는 종로라는 ‘정치1번지’ 자부심과 특성을 살리기 위한 측면도 있었지만 이종찬 국회의원의 향후 대통령 선거를 대비한 전략적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 김찬회 후보는 서울시 의원에 당선된 후 의장이 됐으며 이같은 사실도 이종찬의원의 1991년 3월 17일자 종로신문 인터뷰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들과 달리 박 선호 공천자는 종로 지역사회에서 유지로 인정받는 지역 토호세력 중 한 명이었다. 이종찬 국회의원의 종로지구당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한국자유총연맹 종로지부라는 관변단체의 회장으로 있었던 종로구 관변세력의 유력인사였다. 그 당시 지역의 유지라고 하면 대개 재력과 권력을 쥐고 있는 계층이다.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잡고 있어야 지역 유지로서 행세를 할 수가 있었다. 이 중 권력이라고 하면 지역의 국회의원과 유착된 형태를 말한다. 관선 구청장이나 경찰서장 등 관계 공무원을 제외하고 일반주민들 중에서는 중앙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중앙정치인 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지역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역의 권력은 지역 국회의원이 독점하는 형태였으며 그 국회의원 밑에서 지구당 부위원장이나 관변단체 장을 맡고 있는 인사들이 주로 유력인사로 평가받으며 관변세력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결국 재력과 관계된다. 사업을 하면서 경제력을 갖춘 주민들이 대부분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발탁되어 상호 유착관계를 맺고, 이른바 상호 후견적 입장에서 지역 유지로 행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국회의원이 배척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역 유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정치풍토에서는 지역의 국회의원만이 최고의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상황인 것이다. 중앙의 권위주의 정권이 그대로 지역에서의 권위주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실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지역의 민주화는 ‘실종’, 그 자체였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