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대동강 남쪽에 있던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요서로 이주했다’는 이른바 교치설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인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나바이와기치(稻葉岩吉)는
「진 장성 동쪽 끝 및 왕험성에 관한 논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에서
마쓰이(松井) 문학사(文學士)의 「진(秦) 장성(長城) 동부(東部)의 위치에 대하여」
『역사지리(歷史地理)』 13의 3호)라는 논문을 두차례나 비판했다.
마쓰이 문학사가 진 장성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나바 이와기치의 비판을 들어보자.
오인(吾人)은 여기에 있어서 마쓰이(松井) 문학사(文學士)의 “한대(漢
代)에 있어서는 진 장성의 동단은 요동이라 여겼었는데 진대(晉代)부터
이것을 지금의 조선 서북부 변경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여겼다”는 해설은
『사기』·『한서(史漢)』의 「조선열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전연(全燕:연나라 전성기)의 영역 및 진(秦)의 요동군의 변경 경계(邊界)를
거꾸로 잃어버린〔遺却〕 경향이 있음을 재언(再言)하고자 한다.
(이나바 이와기치, 「진 장성 동쪽 끝 및 왕험성에 관한 논고」)60)
마쓰이(松井)가 “한대(漢代)에 있어서는 진 장성의 동단은 요동이라 여겼었
는데 진대(晉代)부터 이것을 지금의 조선 서북부 변경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여겼다”고 서술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성의 동단이 바뀐 것이 아니
라 진나라 때 장성의 동단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수경
주』의 저자 역도원이 패수의 위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꿔 인식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인데, 이 문제는 훗날 다시 거론할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사료로 살펴본 결과 낙랑군은 서기 전 108년부터 조선 서
북부 변경이 아니라 고대 요동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 대동강 남쪽에 있던
낙랑군이 서기 313년 요서로 이치된 것이 아니라 낙랑군은 원래부터 고대
요동에 있었다. 이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시기별 중국 사료가 말해주는 것
이고, 진 장성과 갈석산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유적이 지금도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