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지 흥룡동 廣州李氏 石灘公派
< 화지 흥룡동 거주 경기도 광주이씨 계보 >
동방갑족(東方甲族) 명문가문 경기도 광주이씨 석정리 흥룡동 이상술계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20 | 21 | 22 | 23 | 24세 | 25세 | 20 | 21 | 22 | 23 | 24세 | 25세 |
도술 | 병수 | 민희 | 종일 | 자인 |
| 은술 | 병장 | 윤희 | 종수 | 연호 | 동석 |
정인 |
| 종연 | 맹호 | 동원 |
상술 | 병석 | 경희 | 종성 | 철호 | 지훈 |
| 철호 민호 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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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훈 | 호만 | 동인 | 종태 | 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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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천 |
| 종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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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창 | 준호 |
| 오종 | 호경 석호 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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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 | 재희 | 종권 | 정호 |
| 종주 | 호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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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태환) | 동락 | 진희 | 종규 | 봉호 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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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호 | 동선 | 종범 | 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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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호(용국) | 한홀 | 종남 | 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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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 | 종근 | 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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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팔 | 광호 |
| 용희 | 종철 | 승호 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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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연 | 태호 |
| 종칠 | 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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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 | 동규 |
경희 | 종창 | 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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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 | 정란 |
| 종중 | 은호 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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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 | 종욱 | 경호(경태) | 원영 | 종배 | 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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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호(태진) | 동훈 | 병삼 | 관희 | 종식 | 창호 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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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현 |
종상 | 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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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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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 | 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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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용기) | 석환 |
종섭 | 응호(칠성) | 선목 | 정희 | 종길 | 장호 민호 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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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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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석 | 사야 |
병국 | 평희 | 종민 | 기호 현석 |
| 돈희 | 종열 | 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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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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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익 | 석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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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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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희 | 종관 | 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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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 석정리흥룡동 638번지(상술,병일,용이) |
장희 | 종원 | 정호 재호 |
| 석정리화지 72번지(창순,은술) |
종각 | 재상 |
| 석정리원석정 큰공산절터(도술) |
종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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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군문평면송산리(병삼) |
<진례 입향조 경기도 광주이씨>
경기도 광주이씨는 석탄공파 이상술계의 첫 진례 입향은 학교면 석정리 화지부락(전 무안군 진례면)이다. 이상술이 이 마을에 오기 전의 세거지는 영광군이었다가 나주 삼도면에도 잠깐 머물렀다. 18세 지환의 무덤이 삼도면에 있다가 화지로 옮긴 것이다. 19세는 성순과 창순이다. 상술과 은술은 창순의 후손이다. 상술이 함평 화지로 이주하게 되는데는 동학운동이 그 원인이었으니 1880년대 후반일 것이다. 함평군 지역의 동학군 대장이던 이상술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영광보다는 화지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상술은 구한말 민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외세의 침략에 맞섰고, 봉건지주들의 수탈로 암울한 시대에 의기로 일어났다. 의로운 동학혁명 역사에 무안군 진례면을 중심으로 동학군 약 1,000여 명을 모집하여 분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난 반골 의기의 개혁 주창의 인물이다. 장성 전투에서 이상술은 아들 이병일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이상술의 나이는 49세이고 아들 이병일의 나이는 25세였다.
이병일의 아내 인동장씨는 청천병력과 같은 비극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울부짖었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강 건너 신솔 마을에서 인동장씨를 보쌈해 가버렸다. 나이 젊은 엄마는 엄청난 시련에 실신하다시피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남편이 와서 방법을 일러주었다.
“여보, 여보! 나는 목이 잘린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하니 어서 일어나 강을 건너시오. 그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동북방향(흥룡동 친정집)으로 가서 살면 고목나무에 꽃이 피듯이 나중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날이 있을 것이요.”
정신을 차린 인동장씨는 새벽녘 고막강으로 뛰어들었고 떠내려가다가 갈대 뿌리를 잡고 살아났다. 그날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갔다. 죽음을 각오했던 인동장씨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 두 아들을 잘 길러 내었다. 그들이 이재희와 이천희였다. 흥룡동에 광주이씨가 자리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후손은 흥룡동 마을 앞에 ‘열부 인동장씨 비’를 세우고 인동장씨의 장한 사연을 적어 감사한 마음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이상술의 동생 이은술은 화지마을에 효열비로 세워졌다.
꿈에 이병일이 현몽한 것처럼 이경태 교장, 이경란 교장, 이칠성교사, 이종규 장학사, 이호경 육군대위, 서예가 이이호, 공군준장 이태인 장군, 목공예가 이광호, 약사 이용기, 목사 이금석, 신학박사 이양호(목사KAICAM), 이준호 경찰이 있고, 그의 후손들도 이동현 정형외과 의사, 사업가, 요식업, 공무원, 이원영 중앙대 의대 교수 등 각계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이이호는 무슬림권(리비아)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경기도 廣州李氏 석탄공파의 연원>
조선 세조때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제총화에서
“동방갑족 명문사문은 경기도 광주이씨를 능가할 만한 가문이 없다.”
고 하였다. 경기도 광주이씨야 말로 해동에서 충효와 덕행으로 가장 번창한 가문이라고 위상을 높히 표현해 주었다.
경기도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356-402) 때의 내사령이었던 이자성(李自成)이다. 신라가 고려에 망했을 때 그 후손들은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충직한 지조를 지켜 불사이군 했었다. 왕건은
“저들을 모두 회안땅으로 보내어 역리로 삼아라.”
라고 칠원성(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사는 후손들을 멀리 북쪽에 있는 회안(지금의 경기도 광주)땅으로 모두 옮겨 살게 했다. 경기도 광주이씨의 본향은 여기서부터 연유한다. 시조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강인한 가족정신이 되어 후손들은 약 300여년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에야 그 고삐가 풀려 벼슬에 나가기 시작했다.
석탄공 이양중은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 벼슬에 올랐고, 강직한 충절신(忠節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 무렵 석탄공 이양중은 길재, 이색, 서견, 정몽주, 이방원과 6결의형제를 맺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얼마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때 석탄공 이양중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고려조 72현의 충절신과 더불어 두문동 선비가 되었다.
지금의 고덕산으로 퇴거하신 석탄공에게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으로 보위할 것을 전하여 왔으나 사양하였다. 석탄공의 높은 지조를 찬양하며 사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도록 하여 지금의 고덕동의 유래가 되었다. 광주이씨 둔촌 이집(李集)은 광주이씨 중시조로도 불리는데 고려말 공민왕 때 유명한 대학자이며, 둔촌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이분의 호에서 유래하였다.
< 경기도 광주이씨 (廣州李氏) 진례 입향기(入鄕記) >
- 李良澔(아호: 이 용국) 목사시인( 4.4조 시문) -
신라중기 내물왕조 李公自成 할아버지 내사령에 봉직되어 廣州李氏 시조로다
고려왕조 열릴적에 불사이군 내세워서 벼슬길을 마다하고 후손들이 숨었다네
고려태조 참지못해 칠원지역 후손들을 경기회안 지역에다 귀양살이 보냈구나
廣州李氏 본관이름 여기에서 생겼으니 불사이군 가문정신 그누구가 모를손가
석탄양중 둔촌이집 고려말에 벼슬하여 명신들과 사귀면서 나라일에 나섰거늘
고려왕조 사라지고 조선왕조 건국되니 두문동의 칠십이현 나오지를 않는구나
친구하던 태종대왕 한성판윤 준다해도 선조정신 살아있어 벼슬길을 거부하니
양중선비 사시는곳 고덕리라 이름주고 이집선생 사시던곳 둔촌동이 이름됐다
광주이씨 선비정신 곳곳마다 박혔나니 대한민국 올림픽촌 세계인들 노는곳에
광주이씨 숨결들이 서울곳곳 숨쉬누나 자자손손 광영이요 후세인들 교훈일세
그렇지만 어이하리 세월따라 흘러흘러 광주이문 명문가에 나라위기 닥쳐오니
젊은날에 닦은실력 나라위해 나섰구나 팔극조정 동방갑족 공신서열 줄을섰다
조선학자 성현님은 용제총화 기록했네 옳고곧은 광주이씨 동방갑족 틀림없다
불사이군 충효덕행 해동에서 제일이며 경기도의 광주이씨 따를수가 없다했다
상신5명 문형2명 문과급제 백팔십팔 청백리는 5명이오 종묘배향 1명이라
무과급제 백이십사 생원진사 역과음양 의과율과 모두합해 칠백십삼 급제자라
감사천만 아닐손가 不事二君 충직고결 의기가문 이어받은 광주이씨 가문일세
무오사화 갑자사화 가문멸족 당할뻔에 천신만고 삼정승과 육판서에 발탁되고
외교치세 국난극복 이공한음 이덕형의 후대자손 푸른창파 날로날로 번창하다
인조반정 만나면서 광주이씨 쑥대밭길 참혹한길 걸었는데 어찌아니 슬플손가
나라걱정 외세판국 봉건지주 볼수없어 구한말의 갑오동학 농민봉기 일어섰다
영광땅에 살으셨던 廣州李氏 이상술님 함평화지 첫발동네 들여놓고 작전펴니
친자식중 차남동행 우금치로 치달을적 적의흉탄 부친죽고 뒤따라서 아들전사
장성갈재 전투에서 스러져간 영웅이여 동학혁명 후예로서 명예자긍 깊었었다
함평군사 살펴보니 함평지역 동학접주 성만있고 이름없다 이00이 왠말인가
할머니의 비문보고 육성파일 들려주고 이상술을 밝혀줘도 서적없다 못적는다
후손들이 할일이라 여기몇자 적는것은 안타까운 후손마음 풀길없어 그렇다네
동학혁명 조상들이 한날한시 죽었어도 그자식들 흥룡동에 뿌리내려 살아가네
살다가다 떠나가도 함편천지 내고향을 꿈속에서 잊을건가 어디가도 그리웁네
흥룡동의 정중앙에 仁同張氏 열부비석 우리조상 할매로서 증조모님 되시옵네
두자식들 건사해서 큰집작은 화목가정 교장선생 교육감에 교수목사 시인에다
공군장군 별이뜨고 이백이상 후손들로 번영번창 하였으니 진례품속 감사해라
속금산이 굽어보고 영산강물 흘러흘러 우리역사 함께할때 어찌고향 잊을소냐
그속에서 廣州李氏 주하나님 기억하며 진례사랑 고향사랑 영원토록 함께하리
<책임작성자> |
| 이름 : 李二浩(이이호=李泰煥이태환) |
본관 : 경기도 광주이씨 석탄공파 24세손 |
학력 : 학교남 8회, 한학 서예가 |
경력 : 이란,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선교활동 사랑회 선교사회장(1988년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