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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말 씀 : 요한복음 3장 16절 - 21절 (신약성경 p.14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서로 사랑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 사랑합니다.
우리는 2001년 9월 11일, 가상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전 세계와 더불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일반 여행객들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빌딩 한 가운데로 돌진하는
비행기 자살테러를 보면서 분노 같은 것이 끓어올랐습니다.
인간이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고 포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함께 그토록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야 했을까? 그것도 ‘알라’ 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종교는 인류의 평화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여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지를 공격한 테러 집단은
'알라' 의 이름으로 미국과 성전(聖戰)을 계속하고 있는 이슬람 과격단체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미국에 보복한다.' 면서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였습니다.
납치 당한 비행기의 탑승자나 뉴욕 세계 무역센타에서 폭격 당해 죽은 그들은 정치인도 군인도 아닙니다.
그저 평화를 사랑하며 이웃과 정겹게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알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각오한 이슬람의 전사(戰士)'란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행위치고는 너무나 야만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알라신을 위한 위대한 죽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말로 그들이 믿는 알라신이 살아있는 신이라면
그들에게 그런 야만적인 테러 행위를 지시했을까요?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런 야만적인 테러 행위로 수많은 생명을 일시에 앗아간 테러 집단들을 전 세계가
비난을 하며 보복하고 응징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지금 단호한 보복의 의지를 가지고 모든 전쟁 준비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 는 성경말씀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보복과 응징은 또 다른 보복과 응징을 가져와 마침내 이 땅의 평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폭력과 테러도, 그것이 비록 종교와 그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할지라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견디기 힘든 울분과 아픔이 있겠지만, 그들의 국가 이념인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잘못 저질러진 야만적인 테러행위자들까지라도 인류 평화를 위해서 참 종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원수 사랑’을 베풀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게 하소서!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제게 오늘 본문으로 주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미국의 리쳐드슨 선교사입니다.
당시 자바 섬에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었는데, 부족들 간에는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들은 화해할 때는 싸움에서 진 부족이 마을의 갓난 아이 한 명을 상대편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 라고 불렀습니다.
리쳐드슨 선교사가 자바섬에서 생활을 한지 2년째 되던 해에도 자바섬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부족들의 분쟁은 점점 심해지고, 도무지 화해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백인 부부가 갓난아기를 안고 싸움터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리쳐드슨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한 살된 아이를 평화의 아기로 내 놓으며 말했습니다. “제 아이를 평화의 제물로 바칩니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악습과 서로를 증오하는 부질없는 싸움을 중단하십시오.“
자기 아들을 평화의 제물로 내놓은 선교사의 사랑에 두 추장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해의 악수를 나눕니다.
그리고 자바 족들은 백인 부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식인의 악습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자바 섬에는 굳게 닫힌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원주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증오와 분쟁의 섬을 평화의 섬으로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바섬 사람들은 식인종들입니다.
그들은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이 사는 사회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자바섬을 그대로 놔두었다면, 이 섬은 머지않아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망합니다.
사랑이 없으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차서 부족들끼리 싸움이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평화가 없고, 결국은 다같이 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자바섬 사람들이 사는 길은 사랑을 회복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면 패배자가 되고, 패배자가 되면 한 아기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는 것만이 서로가 사는 길임을 알면서도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사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사람이 바로 리처드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사랑의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므로, 두 부족이 화해하고 손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섬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악습이 사라지고, 미움과 증오와 전쟁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원수도 사랑하고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미움은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망하게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미워하며 사는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미워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입니다.
지옥 가고 싶으면 미워해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행복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움과 증오와 전쟁과 죄악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 사는 길이고, 무엇이 스스로 망하는 길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눈뜬 맹인이 되어 그 길이 멸망의 길인지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갑니다.
하나님이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 멸망의 길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바섬의 선교사처럼 자기의 아들을 대속 제물로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 - 21절 말씀은,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첫째로,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돈이라고 생각합니까? 권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을 알아야 사람이고, 사랑 가운데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기에, 사람의 사람됨이 사랑에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한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최선의 뒷바라지를 하는데도 아이들이 자꾸만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마침내 유엔에서 세계적인 의사들을 파송해서 연구했는데, 의사들은 연구한 끝에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아이들이 깨어 있을 때, 꼭 하루에 10분간씩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귀여워해 줄 것'
그 처방대로 했더니 아이들은 원기를 회복했고, 정상적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만큼 중요한 생명과 같습니다.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소녀의 집에 아저씨 한 분이 놀러 오셨습니다.
소녀는 아저씨에게 여러 인형들을 내보이며 자랑을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너 이 인형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소녀는 깊은 침묵을 삼켰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러나 그 인형을
보여드릴 때 절대로 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여야 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약속하자, 소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 다리는 떨어져 나가고 옷은
다 헤어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웃음이 나올려는 것을 겨우 참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너는 그 인형을 좋아하니?"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인형은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소녀의 대답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 아무도 여러 분은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의 표식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 말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에 심방을 가면 농담삼아 큰 아이에게 동생을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살겠다고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동생에게 가까이 가는 것도 막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철모르는 아이도 자기 동생을 그렇게 아끼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은
우리가 참으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뜨겁게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독생자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25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갈등과 고민속에 살아온 한 며느리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때마다 밖에 나가고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25년 동안을 살아온 며느리가 도저히 더 이상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석 달이 지나고 그제서야 남편이 무엇인가 자기가 아내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력을 하는데 아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계속해서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자, 그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당신하고 25년을 살아온 세월보다 집을 나가서 3개월 살 때가 더 크게 숨을 쉬고 살았는데
이제 내가 왜 그 숨 막히는 것으로 다시 들어가느냐?“ 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지 못했으면 아내가 25년보다 3개월이 더 크게 숨을 쉬고 살았다고 말하게 만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온갖 나쁜 짓이란 짓은 다하고 살다가 나중에라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공부 잘하고 머리 좋고 똑똑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할 줄 알고
그래서 가슴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멸망에서 돌아서게 만들었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만들었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나도 살고 나도 삽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멸망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 둘째로,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면,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후 형과 동생은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20년 동안 원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20년이 지나도 그 원한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은 동생을 죽이기 위하여 날마다 칼을 갈고 있습니다.
동생은 형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하여 형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그렇게 천사와 씨름하며, 통곡하며, 기도한 것은 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얼굴을 맞대고 눈물로 화해를 이룬 다음에는 살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원한을 버립니다. 칼을 버립니다. 미움과 증오와 두려움을 버리고, 서로 얼싸안고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형제가 서로 사랑했을 때, 비로서 살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미워하면 서로가 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그리고 영원히 삽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이 우리가 서로 함께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 셋째로,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셨습니다.
어미 닭에게 달걀과 오리 알을 함께 넣어 부화를 시켰더니, 마침내 닭과 오리 병아리가 나왔습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나가면, 닭 병아리는 물을 보아도 본체만체 합니다.
그러나 오리는 물을 보자마자 뛰어들어가 헤엄을 치며 놉니다. 헤엄치는 법을 가르친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는 타고 날 때부터 헤엄치는 본능을 타고났으며, 따라서 물에서 헤엄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영혼의 고향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까지는 참 만족과 평안이 없는 영생할 존재이기에, 구원을 갈망합니다.
낭떠러지에 서 있는 사람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우리는 멸망의 길인 지옥의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오셔서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끊으시고,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의 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인간의 수양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구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3일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살아서 예수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축복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습니까? (요3:16)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 아버지와 아이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소방관들도 알고 있었지만, 불길이 너무 심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아버지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이 이렇게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구속입니다.
이 구원의 사건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청년이 군대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눈을 다쳤습니다.
수술을 하면서 의사는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수술은 하지만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장님으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으니 죽여 달라고 악을 바락바락 썼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청년은 여러 번 되풀이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붕대를 풀 때에 의사 가 말합니다.
"고맙게도 눈 하나를 기증하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한쪽 눈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다시 발악을 합니다. "애꾸눈 필요 없어요. 애꾸눈으로 살기 싫어요" 소리를 쳤습니다.
마침내 의사가 붕대를 풀자, 눈앞이 뿌옇게 보여 오면서, 점점 밝아지는데, 어머니가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비로소 깨닫고 엎드려집니다.
“내 눈 하나가 어머니의 눈이었군요. 이대로 좋습니다. 아니 소경이 되어도 좋습니다.
나를 이다지도 사랑하는 분이 여기에 있다면, 나는 이대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 하나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을 댓가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광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산길을 내려 오던 중 버스브레이크가 파열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사력을 다해 언덕을 내려옵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언덕에서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지만 어린아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망설였습니다. 어린이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승객을 구할 것인가?
그러나 운전사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만 어린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차가 멈추고 차에서 내린 운전사가 어린이에게로 달려 갔지만 어린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운전사를 욕하지 마세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운전사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승객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이 운전사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운전사처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311장에서 우리 주님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사랑을 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과 영생과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과 영생과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믿으신 분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겠습니다. / 박수
+ 찬양합시다. / 311장 찬송 “내 너를 위하여!”
+ 기도 /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제물 삼으사, 사랑과 영생과 구원의 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크신 은혜를 받은 저희들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쳐 주셨사오니, 사랑하며 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하여 행복해지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아직도 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영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믿사오며, 우리에게 사랑과 영생과 구원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