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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8.30 03:30
영불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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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불해협 위성사진. 위쪽은 영국, 아래쪽은 프랑스예요. /위키피디아
지난 12일(현지 시각)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는 영불해협에서 이민자들이 탄 보트가 뒤집혀 남성 6명이 숨졌어요. 영불해협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는 이민자들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어요. 영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초부터 영불해협을 건넌 이민자는 최근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해요. 이민자들이 영불해협을 택한 이유는 최단 거리가 약 34㎞에 불과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폭이 좁다고 해서 건너기가 쉽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영국사(史)에서는 이 해협을 건너려는 시도 성공 여부에 따라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었어요. 한번 그 사례들을 알아봅시다.
영불해협을 건넌 정복왕과 윌리엄 3세
첫 번째 주인공은 최초의 노르만계 잉글랜드 군주 '정복왕 윌리엄'이에요. 웨섹스 왕가의 고해왕 에드워드(1042~1066년 재위)는 1066년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어요. 그는 생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의 사후 왕위에 오른 것은 처남 해럴드였어요.
윌리엄은 왕위를 뺏기 위해 병력을 모아 노르망디에서 영국으로 향했어요. 북풍 때문에 8주 동안 항구에 발이 묶여 있긴 했지만, 1066년 9월 말 바람 방향이 바뀌자 즉시 해협을 건너 헤이스팅스로 진격했어요. 해럴드도 윌리엄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헤이스팅스에 도착했지만,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훈련받지 못한 병사가 많았어요. 결국 무리하게 전투를 준비하다 10월 14일 윌리엄에게 기습당해 헤이스팅스에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윌리엄은 끊임없이 기병대를 돌격시키며 공격을 퍼부었어요.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가던 잉글랜드군은 해럴드가 화살에 맞아 죽자 흩어져 도망가 버렸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주요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마침내 왕위에 올랐고, 이후 1154년까지 이어진 노르만 왕조를 열었습니다.
영불해협을 건너 왕이 바뀐 사례는 또 있는데, 바로 1688년 명예혁명 때예요. 1685년 잉글랜드 왕 찰스 2세가 아들 없이 죽자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어요. 하지만 그가 전제 정치를 이어가고 가톨릭교를 강화하려 하자 많은 신교도가 불만을 품었어요. 실낱같은 희망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앤이 신교도였고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하지만 곧 제임스 2세가 아들을 낳았고, 그 왕자가 가톨릭 교육을 받고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됐어요. 결국 영국 의회는 비밀리에 메리의 남편 네덜란드 총독 오라녜공 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윌리엄은 이를 받아들여 1688년 11월 군사 약 1만5000명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어요. 사실 이전부터 네덜란드 함대는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바람 방향 때문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영불해협은 겨울철 폭풍이 심하고 북풍이 불기 일쑤였거든요.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린 끝에 잉글랜드 바닷가에 상륙한 윌리엄의 군대는 잉글랜드군보다 수가 적었지만 천천히 진군하면서 세력을 구축했어요. 그동안 제임스 2세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프랑스로 망명했죠. 영국 의회는 1689년 1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어요. 폭력 사태 없이 왕이 바뀌었기에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러요.
스페인 패배 이후 영국 급부상
영불해협을 건너는 데 성공한 사례만 있는 건 아니에요.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 시대 선발 주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어요. 그중에서도 16세기 말 스페인은 국왕 펠리페 2세의 강력한 대외 팽창 정책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죠. 이에 도전장을 내민 나라가 영국이었어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군력을 강화하고 영국 선박의 스페인 선박 약탈을 방치해 스페인의 대서양 무역에 큰 타격을 입혔어요. 또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원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계속 충돌하던 양국은 1588년 해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칼레 해전'이에요.
1588년 5월 영불해협을 향해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출항했어요. 스페인 함대를 방해한 것도 역시 바람이었어요.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죠. 반면 영국군은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위치를 계속 지키면서 전투를 주도했어요. 그리고 먼 거리에서 적선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많은 부서진 배를 끌고 표류하다시피 스코틀랜드 북쪽으로 도주했는데, 거기에서 폭풍까지 만나버렸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량 부족과 질병 때문에 선원들의 상태가 매우 악화됐어요. 스페인 무적함대는 무참히 무너졌고, 이후 영국은 강력한 해상 국가로 급부상했습니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영국만은 뚫지 못했어요. 18세기 후반 프랑스 군대는 유럽 전역을 휩쓸며 승리를 거뒀지만, 나폴레옹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영국을 굴복시켜야 프랑스가 유럽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회를 엿보던 나폴레옹은 1805년 영국이 프랑스와 이전에 맺은 휴전협정을 먼저 어기자 기다렸다는 듯 군대를 일으켰어요.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력이 프랑스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 함대를 유인해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택했어요. 하지만 영국 해군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해군을 이끌던 넬슨 제독은 적의 전열을 끊고 접근전을 벌이며 계속 승리를 거뒀어요. 그리고 마침내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지브롤터와 카디스 사이 트라팔가르곶에서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넬슨 제독은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영국군이 압도적 승리를 거둬 나폴레옹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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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현지 시각) 이민자들이 탄 작은 보트가 영불해협을 건너고 있어요.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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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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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영국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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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9년 왕관을 쓰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그린 그림.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