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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과 강렬한 대비색이 자유자제로 구사된 채색,
절재된 율동미를 가진 신비스러운 평면의 세계
내가 대상으로 한 것은 자연이었고,
그것을 탐구해온 형태는 비구상을 바탕으로 한, 즉 추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들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선이나 면이나 색채 그리고 그런 선과 면과 색 작품 채들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서의 자연이다.
화가가 자신이 보고 느끼고 나서 생각하는 자연,
그것은 단순히 보이는 구체적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그런 자연의 형태를 떠나서 선과 면과 색채로써
화면(캔버스)에 더 주관적으로 탐구되는 나의 자연,
나의 자연의 형태에의 탐구이다.
나의 선이나 면이 놓이는 자리를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직선이나 직선적인 면의 추구도 되고
어떤 때는 두터운 색면의 질감도 탐구하게 되며 ,
또 어떤 때는 더 기하학적인 색면이나 선과 형태들이 되기도 한다.
그런 공부를 60세까지 해온 셈이다.----유영국
유영국
동년배의 거의 모든 우리나라 작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영국(劉永國)의 초기 작품활동 역시 일제 (日帝)치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대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걸친 시기로 그의 나이 20대 때의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로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영국이 애초부터 추상화가로서 화단에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그의 추상을 시종일관 추구해 가거니와, 이는 한국 근현대미술에 있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유영국의 활동무대는 물론 일본이다.
그는 1937년에 창설된 『자유미술가협회전(自由美術家協會展) 』(이하 자유미협전)에 2회 때부터 회원으로서 참가하게 되며 당시의 일본의 화단 풍토로 미루어 볼 때 이 『자유미협전』은 당시 일본 추상미술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5회에 걸친 이 그룹전을 통해 선보인 작품들이 당시로서도 매우 실험적인 성격의 일련의 평면 릴리프(부조) 작품들이다.
우선 캔버스에 유채라고 하는 회화적 통념을 거부하고 합판에 의한 이들 구성물은 그 재료(매재)부터가 이색적이랄 수 있는 것이며 아울러 콜라쥬 수법을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면 자체가 기하학적 패턴의 구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미 이들 초기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추상 세계의 전조(前兆)같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한가지 참고로 덧붙이건대 이들 초기 작품 중의 몇 점은 1979년에 재제작된 것들이다).
1942년까지 「자유미협전」에 참가해온 유영국은 바야흐로 제2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도는 43년에 급히 귀국하며 그 2년 후에 조국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했다고는 하나 그 조국의 남북분단, 이에 따르는 6·25전쟁, 부산 피난살이 휴전 그리고 서울 환도 등 민족적 수난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유영국은 구체적인 작품 활동에 관해서도 작품상으로나 자료상으로나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임도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의 작가로서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1947년에 신사실파(新寫實派) 창립에 참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45년 당시의 우리나라 미술계의 전반적인 동향을 두고 볼 때, 그것이 일단은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 역시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시기는 일반적으로 1930년대 후반기로 간주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해방과 더불어 일본의 영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것을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유영국을 비롯한 일본에 유학 중인 뜻 있는 작가들(김환기. 이규상 등)에 의한 그룹이 탄생하거니와, 앞서 언급한 바 신사실파의 창립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그 수명은 짧은 것이기는 하나(47, 49, 53년의 세 차례 그룹전) 신사실파의 등장은 전후의 혼란기에서 태어난, 한국현대미술의 하나의 이정표를 획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정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 최초의 추상 지향적 모더니즘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집단 의식화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곡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 그룹의 명칭이 신사실파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나, 그 명칭에 있어서의 "신(新)"은 자칫 그것과 혼동하기 쉬운 "후기 (後期)"(Post-)라는 개념을 대신하여 잘못 사용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후기사실파라고 했어야 옳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신 사실파의 출현 이후 갖가지 새로운 집단적 움직임이 연이어 태어나는 것이다.
50년대 들어서서의 유영국의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앞서 지적한 바대로 유보할 수 밖에 없다(이번 전시회에서도 이 시기의 작품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나마 50년대 전체에 걸친 시기의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에 관해서는 얼마간의 주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해서 이 시기의 유영국의 회화는 강인한 구성적 의지로 특징 지워진다.
개개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구체적인 대상의 환기를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환기에 그칠 뿐 재현적인 성격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모든 대상이 네모꼴 내지는 세모물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환원되고 있으며 그것들의 견고한 평면적 구성으로 작품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색채는 대체로 매우 억제되고 꺼칠한 색조의 것이기는 하나, 화면에 밀착된 중후한 마티에르가 화면에 깔리며 작품으로 하여금 통일된 은근한 계조(階調)를 지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반세기(半世紀)를 훨씬 넘는 화력(畵歷)이고 보면 그간의 유영국의 화풍에도 변화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화력을 8·15해방의 1945년을 기점으로 했을 때 1580년의 시점에서 그 변모 과정을 연대순에 따라 대체로 네 시기로 잡는 것이 통례인 듯 싶다. 참고로 예를 들건대 1) 1945∼50년대, 2) 60년대 초∼66년경, 3) 73년 이후∼(오광수) 또는 1) 1945∼50년대 말, 2) 60년대 초 ∼60년대 중반 3)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4) 70년대 중반 이후(김인환). 요컨대 대동소이한 시기 구분인 셈이다.
이와 같은 연대 중심의 시기 구분은 그 자체로서 한 작가 연구의 기본 데이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 접근에 있어 이와 함께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작가의 작품 세계 전개 과정과 그 양상을 그 전개의 전체적인 맥락(Context)에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기에서는 유영국의 회화세계 전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이랄 수 있는 60년대와 70년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화가 자신도 이 시기의 작품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 하며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이 전시회에서도 60∼70년대 작품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이건대, 유영국이 첫 개인전을 꾸미는 것은 1954년의 일이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영국의 회화는 과거와는 분명한 획을 긋는다.
그 전환의 계기 내지는 상황 에 대해서는 추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는 하나, 적어도 화풍에 나타난 변화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일종의 자기 극복의 필연적인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그 극복의 방법이다. 유영국은 우선 그때까지의 기하학적 패턴에 의한 구획선과 그 선에 의해 엄격하게 형성된 색면의 대비적 (對比的) 구성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에 대신하여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비정형의 유동적인 색면 공간이요 또한 그것을 섬광처럼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획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영국의 회화는 보다 "표현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유영국이 "색채 화가"로 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는 차라리 반(反) 기하학적 내지는 반구성적 성향의 것이 되며 실제로 화면에서 기본적인 구성적 골조마저 자취를 감춘 듯이 보인다.
그 대신 테두리 잡을 수 없는 유동적인 형태, 그리고 촉감적인 마티에르와 함께 빛으로 환원된 듯한 원색적인 색채의 다이나믹한 대비가 화면 전체를 누비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회화에 있어서의 조형성 (또는 형태)과 표현성 (또는 색채)의 문제를 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동시에 세잔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기게 되기도 한다. "색채가 풍요로운 것일 때 형태도 또한 충만한 것이 된다.")..
한편 60년대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전반적인 추세를 돌이켜 볼 때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이른바 앵포르멜 시대로 간주되고 있다. 50년대 말경에서 60년대 후반에 걸친 우리나라에서의 이 집단적인 추상미술 운동은 전후(2차 대전) 프랑스에서의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의 액션 페인팅의 때늦은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 최초의 이 표현주의적 추상은 그 일차적 특성으로서 화면으로부터의 일체의 조형적·구성적 요소의 배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마티에르의 중시와 화면과의 "신체적"인 맞부딛침 ("액션")이 가장 "회화적" 인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그 마티에르와 화면에 직접 도입된 행위의 궤적이 당시의 추상회화의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가 저물어 갈 무렵 우리나라의 이 "앵포르멜 열풍"도 일종의 포화 상태를 맞이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열풍이 애초의 생명력을 잃고 공허한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하거니와, 동시에 공허한 행위의 되풀이에 대신하여 보다 기본적인 조형 언어의 재정립이라는 과제가 새롭게 제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탈(說) 표현주의적 추상이 태동하기 시작하며 ,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드 에지 스타일의 기하학적 추상, 또 한편으로는 관조적 성향의 서정적 추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전후 세대의 움직임과 견주어 볼 때, 유영국은 세대 차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그 세대의 움직임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일 60년대의 유영국의 추상이 앞서 지적한 바, "표현주의적" 성향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앵포르멜이나 액션 페인팅 등과 같은 범주의 것은 아니다.
그의 추상은 오히려 액션 페인팅과 때를 같이 한 뉴욕의 색면파(色面派)」 추상과의 그 어떤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으며 또 실제로 이 유파의 추상회화를 두고 아예 "논-액션(non-action)"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면 전체가 그 명칭 그대로 폭넓고 망망한 색면(color-field)으로 물들고 있으며 그 색면 자체에 의해 화면이 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서의 조형적 균형이 깔려 있으며 동시에 색채는(대개의 경우 모노크롬 성향의 것이기는 하나) 또한 그 자체로서 충만한 내재적 표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이 색면파 추상과 함께 조형성과 표현성의 崙화(同化)"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영국의 "색면"을 놓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물론 이 뉴욕파와의 여러 가지 면에서의 차이점을 전제로 하고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색면파가 그 표현성을 평면적이자 기하학적 패턴의 색면성을 통해 내세우고 있는 데 반하여 유영국의 회화에 있어서는 애초부터 비기하학적인 색면으로 화면이 메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색채의 경우, 모노크롬이 아니라 원색의 다이나믹한 대비로 화면이 구성되고 있으며, 만일 그의 회화에서 그 어떤 "구성" 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과 면 그리고 색채 상호간의 연관성에 의해 거의 자생적으로 조성되는 구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영국의 추상 세계에서 여전히 색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색채가 "표현적" 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의 미에서의 색채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첫째는 모든 표현주의적 회화가 그러하듯 색채를 모든 재현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요, 그 두 번째는 색채를 형태의 예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이다.
유영국의 경우는 아마도 두 번째의 표현성에 보다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며, 이때의 그 색채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곧 내면적인 빛으로 물들여진 색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유영국의 회화 세계가 70년대에 가까와지면서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환은 굳이 말해서 조형적 차원의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이전의 표현적인 성향이 가능한 억제되고 기하학적 기본 형태와 그것에 의거한 엄격한 구성이 화면을 지배함과 동시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색채가 이에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색면 자체가 형태 내지는 선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산(山)" 이라는 자연의 이미지가 조형적 모티프로서 화면에 재등장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하나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하학주의는 무엇보다 도 순수 조형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인기 때문이다.
물론 유영국의 회화는 이 시기에 화서도 여전히 색면 공간에 의한 구성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미 그 공간의 활력에 찬 유동성, 즉 표현성은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화면은 거의 전적으로 기하학적 색면 구도(構圖)로 일관되고 있으며 그것은 평면적인 강렬한 원색과 보색 상호간의 대비와 함께 선 또는 형태 상호간의 대비를 주요 요소로 삼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 선과 형태는 세모들 내지는 그것에 준하는 사선(斜線)과 예각의 병치 또는 교차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수평과 수진 구도는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거기에 동그라미가 가세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평면적으로 다루어짐으로 해서 화면이 도안적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개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유영국의 회화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의 등장은 어쩌면 일종의 격세유전(隔世遣傳)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지적한 바, 그의 화가로서의 데뷔 당시의 작품부터가 다분히 기하학적 성향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추상에 있어서의 또 다른 영역의 발견이라 는 의지가 작동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 "또 다른 영역", 그것은 다시 말해서 자연이 그 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우주적 기본구조(primary structure)와 그 리듬"의 세계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바로 그 세계의 표상을 유영국은 곧바로 산(山)에서 발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유영국의 회화 속에 산이라는 대상이 처음 나타나기는 1957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이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춘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감춘 듯이 보였을 뿐 "산"이라는 대상은 하나의 기본적인 라이트모티프로서 50년대 이후의 유영국의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약 10년만에, 즉 80년대 말경에 다시 표면에 나타나거니와, 이와 관련하여 1977년의 유영국 개인전에 즈음하여 쓴 나의 서문의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유영국이 근년에 와서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산> 연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자연을 그는 엄밀하게 다듬어진 어법 (語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근작이 보여주고 있는 이 화가의 양식적인 특징은 자연 형태의 도식화에서 우선 찾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도식화는 그의 경우 결코 메마른 기하학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평면적으로 구성된 화면은 때로는 대담한 색면 구성에 의한 형상의 환기와 또 때로는 간결하면서도 탄력성 있는 선묘의 억양에 의해 너그러운 충만감으로 물들어져 있다. (…) "
1577년의 개인전 그리고 그 2년 후인 79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대대적인 「유영국전」 이후, 다시 말해서 80년대 들어 서면서부터의 유영축의 작황(作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듯 하다.
작품 발표도 미룬 채 일종의 은둔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아직까지도 작품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 중의 몇 작품이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것을 기대해 본다).
여전히 <산>의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만년(晩年)의 이들 작품을 두고 볼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일단은 자연에의 복귀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여전히 자연을 자신의 조형 이념에 어떻게 동화시키느냐에 있다할 것이며 그리하여 유영국의 만년작이 보여주고 있는 기하학적 원색의 세계 속의 산은 평면 속에 다시금 "구조화된 산"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 화가 자신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내가 대상으로 한 것은 자연이었고, 그것을 탐구해온 형태는 비구상을 바탕으로 한, 즉 추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들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선이나 면이나 색채 그리고 그런 선과 면과 색 작품 채들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서의 자연이다. 화가가 자신이 보고 느끼고 나서 생각하는 자연, 그것은 단순히 보이는 구체적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그런 자연의 형태를 떠나서 선과 면과 색채로써 화면(캔버스)에 더 주관적으로 탐구되는 나의 자연, 나의 자연의 형태에의 탐구이다. 나의 선이나 면이 놓이는 자리를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직선이나 직선적인 면의 추구도 되고 어떤 때는 두터운 색면의질감도 탐구하게 되며 , 또 어떤 때는 더 기하학적인 색면이나 선과 형태들이 되기도 한다. 그런 공부를 60세까지 해온 셈이다." (이흥우, 「劉永國 - 원숙의 서정성」. 《화랑》, 1980, 여름호)
좀 긴 인용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소중한 증언이라 생각되기에 무릅쓰고 옮겨놓았다.
유영국은 물론 이론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 어떤 부연 설명도 필요 없는 확고한 신념의 표명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자연의 근원적 구조의 탐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화가 자신의 말을 되새겨 보더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거창한 문제 제기라든가 자신이 추구하는 추상회화에 대한 체계화된 이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로 추상미술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20세기 미술의 가장 획기적인 주요 미술 사조인 동시에 거기에는 주지하다시피 여러가지 경향, 유파, 유형 등이 있는 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 있는 경향의 하나가 바로 일반적으로 기하학적이라 불리는 추상이거니와, 그의 조형적 시도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나 또는 작품상으로 보나 그 최초이자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는 그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미술 풍토를 일찌기 향음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 경향을 대표하는 운동으로서 신조형 주의 (Neo-Plasticisme)와 절대주의 (Suprematisme)를 꼽을 수 있는 바, 하나는 수평·수직에 의한 직각적 구성과 함께 세 원색과 세 무채색(혹 백 회색)으로 제한된 엄격한 규제의 추상미술 또 하나는 구형 (球形) 원형 세모들 및 십자형을 기본 요소로 삼고 있는 추상이다.
그리고 이 두 추상 운동은 또한 다같이 입체주의 미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실인즉 우리에게는 그 입체주의적 체험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 그와 같은 미술 풍토에서 유영국의 추상회화가 태어나고 또 전개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유영국의 뛰어난 예술적 직관과 확고한 조형의식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회화 세계이며 실제로 그는 동세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의 추상회화를 고수한 이레적인 화가이다.
그가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조형세계를 시류에 결코 영합함이 없이 일관성있게 추구해왔다는 사실이 또한 그의 확고한 조형 의지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러하기에 유영국의 이름과 함께 "외골수의 작가" , 또는 "외고집의 화가" 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막 팔순에 접어든 노화백의 외길 화업(畵業) 50년 그리고 탈속(說俗)의 한평생.
그가 남긴 발자취를 다시 새겨 보는 이번 전시회는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초대전」에 이은 두번째 것으로서 생존 작가로서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여기에 전시되는 작품 중에는 특히 60년대와 70년대의 미공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또 그만큼 소중한 전시회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회의 의의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이 시점, 이른바 다원화(多元化)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유영국 추상의 재조명과 아울러 한국 추상회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그 재검증이라는 데 보다 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영국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에 있어 추상화가의 선구적 모델 케이스로서의 독보적 존재요 또한 그의 예술이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1996.10.16 - 11.24
호암 갤러리
李逸 (홍익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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