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樂死, 어찌 삶·죽음을 말하랴 -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사회적 연습’ 통해 풀어야

[하늬바람]

安樂死, 어찌 삶·죽음을 말하랴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문제…‘사회적 연습’ 통해 풀어야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이 격심한 통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의술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을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국내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킬 수 없다는 만만찮은 반론이 곧바로 제기된다. 이제는 엇갈린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현실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숱한 ‘한국형 테리 사이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안락사. 이것은 우리의 생명에 관한 주제이고, 우리의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서는 누구든 자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듯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나처럼 전문적인 의학지식을 가진 것도 아닌 사람이 자기 느낌만으로 이야기할 성질의 주제는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달 내 이야기의 주제를 ‘안락사’로 잡았다. 함부로 내 의견을 주장하기는 어려워도, 이제 우리 사회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고 또 그럴 시기가 되었다고, 아니 오히려 늦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요 근래 안락사와 관련해 보도된 몇 개의 기사와 뉴스부터 살펴보자.

지난 15년간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미국의 테리 시아보가 4월31일 숨졌다. 시아보의 변호사는 이날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생명보조장치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최근 수년간 뜨거운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에 앞서 미 플로리다주 탬파 법원은 지난달 22일 그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가족들의 청원을 기각했다. 시아보는 1990년 2월 심장발작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됐다. 남편 마이클은 아내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며 6년 전부터 법원에 생명보조장치(영양공급 튜브) 제거를 청원해 왔다. 마침내 지난달 18일 플로리다주 항소법원의 명령에 따라 튜브가 제거됐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이 들고일어났다. 부시는 어떤 경우라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여러 번 밝혔다. 이에 따라 미 의회는 지난달 20∼21일 그의 안락사 결정을 재검토하도록 하는 특별법을 만들었고, 부시는 이 법에 서명하기 위해 쉬고 있던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급히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딸의 안락사를 반대하는 시아보의 부모는 판사의 결정을 또다시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만에 법원은 튜브 제거 명령을 또 내렸다.

(<중앙일보> 2005년 4월1일자)

만약 이런 시아보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나라 법은 의사가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일체의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지난해 6월, 7년간에 걸친 공방 끝에 대법원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던 환자를 보호자의 요구로 퇴원시켜 숨지게 한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을 다루면서 두 명의 피의자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유죄 판결를 내렸다. <

1997년 12월 김모 씨는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서울 시립 보라매병원에서 응급 뇌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김씨의 부인은 집안 형편상 병원비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치료를 계속해도 회생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남편의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 양모 씨 등은 퇴원하면 바로 죽는다고 말렸지만 부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병원 측은 결국 ‘사망하더라도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부인한테서 받은 다음 입원 이틀 만에 김씨를 퇴원시켰다. 당시 수련의였던 강모 씨는 병원 구급차를 이용해 김씨를 집으로 옮긴 뒤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했으며, 김씨는 5분쯤 뒤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시아보에 대한 생명보호장치 제거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때 미국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안락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앵커 : 시아보의 경우처럼 연명치료 중단을 둘러싼 논란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자 : (어느 병원에서) 말기 뇌종양으로 의식불명인 이 환자는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15일째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말기 암환자의 보호자: 저대로 그냥 엄마를 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죠.

기자 : 실제로 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림대 법학부의 조사 결과 불치병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할 때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69%, 환자가 사전에 치료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71%에 달했습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암센터 소장 : 자기 의사 결정권인데요. 본인이 병에 대해 정확한 상황을 알고 본인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이 반영돼야 되는데….

기자 : 그러나 지난해 6월 사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가족의 요청으로 퇴원시킨 의사에게 살인방조죄가 적용되면서 의료계는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김동석(연세의대 신경외과) 교수 : 가족들이 해결하든지, 사회적으로 해결하든지 해야 하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의료인에게 있다는 거죠.
기자 : 하지만 종교계 등의 입장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쪽입니다.

이상원(총신대 기독교윤리학과) 교수 : 인위적 방법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 무엇보다 죽음의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이와 관련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2005년 4월1일 KBS 뉴스)

1999년 4월13일 미국 미시간주 오클랜드 순회법원의 제시카 쿠퍼 판사는 안락사 옹호론자인 잭 케보키언에게 징역 10~25년형을 선고했다. 케보키언은 1990년부터 130여 명의 안락사를 도와 ‘죽음의 시술자’ 또는 ‘신의 대행자’로 불려온 인물이다.

1998년 9월 그는 루게릭병 말기 환자 토머스 유크에게 독극물을 주사해 안락사시키는 장면을 홈비디오로 촬영했다. 두 달 뒤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에서 이 비디오를 방영하자 미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에 4차례의 재판에서 무죄·재판무효 등으로 법망을 벗어났던 케보키언은 검찰에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9년 3월 배심원단의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법원은 그에게 2급 살인죄를 적용했다.

(2005년 4월11일자 <부산일보> ‘이 주일의 역사')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7일 “낙태나 안락사 등에 반대한 요한바오로 2세의 보수적 노선을 승계하고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을 고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로마 성 요한 라테란 성당에서 교황 즉위와 관련한 마지막 공식 절차인 로마 대주교 공식 부임 미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강론에서 “교황의 임무는 하느님의 말씀이 유행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위대함과 순결함을 간직한 채 울려 퍼지도록 지키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낙태와 안락사에 대해 “자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규정한 뒤 “죽일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가혹행위”라고 강조했다.

(2005년 5월8일자 <연합뉴스>)

단지 몇 개의 기사와 뉴스만 살펴보았는데도 우리는 시작부터 서로 다른 양쪽의 완강한 주장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자연권이자 우리 인권의 가장 기본과도 같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의학과 법학과 종교적 윤리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족 간의 도리와 인정, 그러면서도 이런 문제와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환자 보호자들의 경제적 사정까지 더해지면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

사회적 합의 없어 재판·논쟁 불가피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은 더 많은 시간 보호받으며 지켜져야 하는 것인지, 무의식 또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오로지 의술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해 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팽팽하다.

필자 李舜源은…

1957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낮달’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집으로 <은비령>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19세> 등이 있다

위에 인용한 기사에서도 보듯 국내의 안락사 관련 판결은 1998년 발생한 보라매병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보호자의 요구로 환자를 퇴원시켜 사망하게 한 의사에게 법원은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안락사를 용인하는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법은 이처럼 안락사 반대론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황이어서 이와 같은 재판이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 논의를 피할 수 없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락사에 대한 정확한 정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안락사의 영문 표기는 ‘Euthanasia’이다. ‘Eu’는 영어로 ‘Good’을, ‘thanasia’는 ‘Death’를 각각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와 함께 지금과 같은 안락사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Euthanasia는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며 라틴어로는 ‘아름다운 꽃’, 희랍어로는 ‘쉬운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안락사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여러 정의를 종합해 보면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가 통증으로 무척 괴로워할 때 독물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빨리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거나,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장치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식물인간과 뇌사로 판명된 사람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함으로써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정의를 참고하면서 사안별로 안락사의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자의적 안락사

생명 주체가 자신의 안락사를 명령·의뢰·신청 등의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요구해 이루어지는 ‘의뢰적 안락사’와,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나 소극적으로 그것을 승낙해 이루어지는 ‘승인적 안락사’가 있다.

▷임의적 안락사

생명 주체가 의사를 표시할 수 없거나 그 결정이 불가능한 경우, 또는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외부에서 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즉 환자는 무언가 표현하고 있으나 시행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안락사.

▷타의적 안락사

생명 주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데도 시행되는 강제적 안락사.

시행자의 행위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것을 처음부터 의도해 이루어지는 안락사. 이를테면 치사량의 약물을 주사해 환자를 안락사시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적극적 안락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학적, 법학적, 의학적 견지에서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잭 케보키언처럼 환자의 ‘고통 제거 수단’으로 이를 행한 경우에도 위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소극적 안락사

환자가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 것이 확실할 때, 시행자가 그 진행을 일시적이나마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데도 이를 방관하는 방법으로 안락사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중병의 기형 신생아를 수술하지 않고 방치해 사망하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쟁의 대부분은 소극적 안락사를 둘러싸고 빚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논의되거나 논란이 되는 것도 소극적 안락사 문제다.

생존의 윤리성에 따라

▷자비적 안락사

인내하기 힘든 격렬한 고통을 견뎌 나가는 것이 일과가 된 상태에서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비로운 행위라고 여기는 것으로 ‘반고통사(反苦痛死)’라고도 한다.

▷존엄적 안락사

시아보처럼 뇌사 상태에서 의식이 전혀 없고 회복될 가능성도 없을 경우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흔히 ‘존엄사(尊嚴死)’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소극적 안락사’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 많아

▶15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 지난 4월 숨진 테리 시아보(오른쪽)가 생전에 어머니의 간병을 받고 있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회복할 가망이 없는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죽음은 불가피하다. 특히 진통제 외에는 다른 치료법이 없는 경우라면 차라리 그 고통과 비참함을 빨리 종식시키는 것이 낫다. 뇌사 상태거나 의식이 없는 가운데 10년, 20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는 의술에 의존해 겨우 연명하는 셈이다. 스스로 생존해 있음도 느끼지 못하는, 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런 환자는 생명을 통증 없이 단축시켜 주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이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병마와 싸우면서 얻는 것라고는 격렬한 통증뿐이라면, 그래서 환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고 싶어한다면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뇌사 환자의 인격적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의사의 중요한 임무로, 결코 비윤리적 행위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려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환자를 연명시키는 데 따른 경제적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 치료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환자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고 가정을 파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르다. “의사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임무는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일이다. 그러한 의사가 환자를 도와 죽게 한다면 의사 자신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나아가 사회 전체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로 바뀔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를 의미 없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해 안락사를 용인하게 되면, 그것을 빌미 삼아 유사한 수많은 비윤리적 행위가 일어날 것이다. 의학적 필요나 판단을 빌미로 숱한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 따라서 환자 자신이 고통스럽고, 가족에게 큰 부담을 주고, 사회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해서 생명을 종식시키는 일은 결코 허용돼서는 안 된다.”

테리 시아보 사건을 계기로 안락사 문제가 다시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가운데 최근 이인영 한림대 법학부 교수가 일반 국민 1,020명을 대상으로 안락사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고통이 극심한 불치병 환자가 죽을 권리를 요구하며 치료 중단을 요구할 때 의료진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70% 가량이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다. ‘치료 중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경우는 27.5%에 그쳤다.

의사가 환자의 호소를 받아들여 약물이나 의료기구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56%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한 반대는 39%에 그쳤다.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이 소극적 안락사에 찬성하고, 절반 이상은 적극적 안락사까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국민 대다수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하지만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 절반을 웃돈다고 해서 “적극적 안락사를 도입해야 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극적 안락사조차 형법상의 자살방조죄와 의료법상의 진료 거부로 분류해 엄격히 금한다. 대한의사협회는 ‘소극적 안락사’라는 직접적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의사윤리지침을 통해 ‘소생 불가능한 임종 환자에 대한 진료 중단 방침’을 공론화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의사협회의 진료 중단 방침은 살인죄에 해당한다”며 반대했고, 법원은 보라매병원 사건에 대해 유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의료계는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래야 시간과 금전, 의료 기술의 낭비를 줄이고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적 장치가 우선 만들어져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사들이 책임추궁의 우려 없이 소생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의료계의 주장이자 요구다.

“휴머니즘인지 학대행위인지 숙고해야”

▶허대석 서울대병원 암센터 소장은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치료 중단 문제는 지금 당장 공론화해야 옳다”고 말한다.

국내 의료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펴는 대표적 인물이 허대석 서울대병원 암센터소장이다. 국내 최고의 림프 종양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허 박사는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입원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퇴원시키지 않는 ‘방어 진료’가 확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퇴원시켰다가는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사망이 임박해도 의사들이 퇴원시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허 교수는 안락사에도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현재는 의사가 직접 환자의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를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환자의 자살을 도와주는 ‘의사조력자살’로 국한하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소극적 안락사’는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 ‘자연사’ ‘존엄사’ 등으로 정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단순히 생명만 연장시키는 ‘의료 집착적 행위’도 올바른 의학적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 허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자.

“무의미한 치료는 의술을 동원할 경우 연명 가능성이 긴 경우와 연명 가능성이 짧은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연명 가능성이 긴 경우로는 이번에 논란이 된 시아보를 들 수 있습니다. 반면 죽음이 임박한 말기 암환자나 에이즈 환자는 연명 가능성이 짧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 그러한 환자는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보는 의학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소생할 가능성이 전무해 금방 끝날 목숨을 의술로 연장함으로써 계속 고통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이 경우에 해당하는 암환자가 1년에 11만 명이 발생하고 6만 명이 사망합니다. 암 환자의 40%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극심한 통증에 노출되는데, 이때의 통증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대형 유리문에 손가락이 끼였을 때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데, 인공호흡기를 연결해 그러한 고통을 연장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사정이 이러한데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위축된 의사들은 방어진료와 과잉진료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거든요.”

- 고통을 견디지 못한 환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해도 이를 들어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환자나 보호자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말기 암은 이기려 들면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복 가망성이 전혀 없는데도 중환자실에 집어넣고 항암제 치료와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키다 임종이 임박해서야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다반사거든요. 이것이 환자 본인이나 가족·병원·국가 등 누구한테 이득이 되겠습니까? 돈은 돈대로 들고, 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이런 인위적 연명이 과연 휴머니즘적 치료인지, 아니면 일종의 학대행위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 어떤 형태로든 안락사가 불가능하다면 임종 때까지 환자의 통증을 완화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기 암환자의 통증을 줄여 주는 방법은 없습니까?

“속효성 마약(진통제) 사용이 제도적으로 활성화되면 상당부분 해결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행법상 마약성 진통제는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어 사용에 제약이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량은 선진국의 20%밖에 안 됩니다.”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 적극 공론화해야”

- 진통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속효성 마약은 한 알에 10~20원에 불과해요. 법적 규제와는 별개로, 이처럼 싼 약값이 오히려 사용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익금이 적으니 제약회사들이 아예 생산하지 않고 수입도 하지 않으려고 드는 것이죠. 동네 병원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거의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말기 암환자들이 큰 병원으로만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요. 이 문제는 규제나 시장논리에만 맡길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서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죠.”

- 치료약이라고 하지만 중독성과 환각작용이 있어 일정한 규제는 불가피할 것 같은데요?

“그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통제성 마약은 중독성이나 환각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약이 병원 밖으로 유출돼 마약 중독자나 청소년들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말기 암환자는 산소호흡기 같은 연명치료보다 진통제 등에 대한 허용과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호스피스 제도만 잘 활용해도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환자를 굳이 중환자실로 보내지 않아도 되고, 환자 본인도 지금처럼 격심한 통증을 겪지 않으면서 가족의 품에서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거든요.”

- 그러자면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암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시스템은 가정 단위로 운영하기보다 공공 의료기관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일 것입니다. 또 지금보다 많은 통증 완화 전문의가 필요하고, 호스피스에 대한 의사들의 인식 전환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쪽으로 제도와 시설이 잘 갖춰진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이나 존엄사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허대석 교수는 “많은 사람이 임종 환자의 치료 중단을 병원의 ‘진료 거부’와 연관시켜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며 “말기 암환자도 최후 순간까지 통증 조절 같은 꼭 필요한 치료는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 혹은 존엄사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문화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실적으로 보면 환자 자신의 의사가 중요한데도 우리나라의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질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보호자들이 “환자한테는 정확한 병명과 상태를 말하지 말아 달라”며 의사와 환자 간의 대화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치료 중단 등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환자가 100명 가운데 7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굳이 사전 유언제도가 아니더라도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미리 자신의 의사를 표명해 두는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가 강조하는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시아보 사건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결을 다시 살펴 보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지만 연명 가능성이 긴 환자의 존엄사 등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반드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야구선수 임수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경기 도중 쓰러져 5년째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 중인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소속 임수혁 선수.(우) 임수혁 선수의 현역 시절 모습.(좌)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는 5년 전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프로야구 경기 중 호흡곤란 증세로 쓰러진 임수혁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도루 능력까지 겸비한 공격형 포수였다.

승부의 순간에 결정적 ‘한방’을 터뜨리는 능력까지 갖춰 야구팬들이 열광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경기 중 쓰러진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의식불명 상태에서 현대 의료기술에 의존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고 있다.

임수혁은 2000년 4월18일 쓰러진 후 강남시립병원에서 맥박과 호흡만 소생시킨 상태로 현대아산병원에서 1년, 경희대병원에서 6개월, 강동성심병원에서 2년, 성남 보바스병원에서 2개월, 다시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겨져 6개월 동안 치료받았다. 오랜 세월 입원치료를 거친 그는 지난해 이맘때 경기도 하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퇴원해 지금은 부모와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나는 임수혁 선수의 아버지와 두 번에 걸쳐 긴 시간 통화했다. 하지만 그의 근황만 물었을 뿐, 내가 쓰는 이 글의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임 선수의 아버지도 아들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법원을 향해 딸의 영양공급 튜브를 연결시켜 달라고 탄원했던 시아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치료받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들처럼 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의식이라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문제라면 결정하기 쉽다. 그러나 가족의 문제는 쉽지 않다. 자식이라면 문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이 우리가 ‘더 인간다운 죽음’이라고 말하는 안락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주요 국가별 안락사 관련 입법 현황

대한민국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는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로 처벌된다.

일본 ‘안락사’ 대신 ‘존엄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95년 요코하마(橫濱) 법원의 판례를 계기로 부분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회복 가능성이 없이 장기간 식물인간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에 대해서는 생명유지장치 등 인위적 생명연장진료를 중단해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존엄사는 환자의 극심한 통증과 희박한 생존율, 본인의 의사, 다른 고통 제거 수단이 없을 경우 등에 한해 허용된다.

미국 40개 주가 환자 가족의 동의 등 엄격한 요건 아래 생명보조장치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지만 적극적 안락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리건주는 주민투표를 거쳐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극약을 처방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하는 ‘존엄사법’을 1997년부터 시행해 1998년 한 해에만 15명의 말기 환자가 합법적으로 고통을 마감했다. 하지만 1999년 공화당 의원들이 연방 하원에서 극약을 자살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고통경감법’을 통과시켰다.

영국 법률로는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인정하는 듯한 판례는 찾아 볼 수 있는데, 3년 이상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환자에게 영양공급장치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 등이 그 예다.

프랑스 뇌사상태라도 심장박동이 완전히 멎지 않는 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동물을 안락사시켜도 형사처벌을 받는다.

독일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형법에 규정돼 있다. 고의로 안락사시킨 혐의가 인정되면 최고 종신형에 처한다.

네덜란드 2000년 11월 세계 최초로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불치병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환자가 이성적 판단 아래 안락사에 동의하면 의사가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돼 있다.

호주 1996년 안락사를 법제화했다 6개월 만에 폐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방 8개 주 가운데 3개 주가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는 의료행위를 법으로 허용하고 있고, 나머지 주들도 관습법상 이를 인정한다.

벨기에는 제한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덴마크에서는 완치 불가능한 환자가 스스로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스웨덴은 의사들이 극단적인 경우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뗄 수 있도록 허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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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05년 06월 01일 355호 / 2005.06.02 09:42 입력 / 2005.06.06 16:3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