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우리의 중학 시절 과학(?)교사로 계셨든 박양생 선생님의 자료중 일부입니다.
얼마전까지는 부산 고신의대 생물학 교수님이셨고, 그때 영랑호를 보트로 맘껏 돌아 다니던 친구들을 찾아서
함께 자리하자 약속했건만, 신통치않은 제자는 지금은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름, 물론 찾을수 있겠지만
그때 함께한 친구들을 찾을수가 없네요.
맨 아래 이름들은 순전히 내 기억속에만 있는 이름이고, 생각나면 더 꼭좀 알려주시길 연락처도 함께. . .
내용 속의 성함은 우선 실명처리 안함.
혁명학사 광시곡
단군 개국이래 처음 실시된 학사자격고사라는 것을 당당히 통과하고 1962년 2월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지만 별로 갈 곳이 없었다. 5.16 군사혁명 직후인지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방침에 따라 군복무를 필하기 전에는 수하를 막론하고 (?) 교사발령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빨리 군에라도 갈까하고 지원하였으나 지원자가 하도 많아서 언제 영장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충청도 산골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도합 7년을 지낸 주제에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갈 수도 없고, 그냥 서울에 눌러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진퇴 양난이었다. 생각다 못해 농촌진흥청 성환 종축장에 취직하여 평소 좋아하던 세포유전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가축육종이라도 배워볼까 하고 이 X식 선생님을 통해 백을 써 보았으나 군 미필자라 해서 그것도 성사되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삼청동 고택(당시 내가 식객으로 있던 김X진 동문의 외가로서 나중에 내 처가가 됨) 에 누어 소일하던 중 신촌으로 이사간 연세의대에 구경 차 갔다가 선배이신 김X환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 김선생님께서는 연세의대 기생충학 교실의 수석조교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별로 할 일이 없으면 기생충학 공부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농촌의 산야에 묻혀 모범적인 목장을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소년시절부터의 핑크빛 꿈을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던 터라 목축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생충학 지식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선뜻 김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약 2개월간 김선생님의 자상하신 수련계획에 따라 낮에는 현미경관찰, 밤에는 책읽기, 학사고시 준비 때보다 몇갑절 열심히 분투했더니 helminthes에서 protozoa까지 꿰뚫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건방진 생각이었으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기생충학 공부가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그곳 분위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학생때 홍X기 교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 홍교수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홍 교수께서는 우리에게 동물생리학 강의를 마지막으로 하시던 날 만일 졸업 후에 연구생활을 하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사실 졸업할 때까지 나는 생리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으며 만일 학문을 한다면 세포유전학을 했으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희망만을 갖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나는 홍교수님과 그리고 생리학과 정식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으나 그것도 한달 쯤 뒤에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교사 발령통지서가 날아 왔기 때문이다.
졸업 당시 몇몇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어차피 우리는 군 미필자라서 발령 받지 못할 터이니 서울 시내는 여자들에게 양보하고 남자들은 지방을 지원하기로 하자고 하여 나는 강원도를 지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직 강원도를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강원도는 지원자가 적어 군 미필자에게도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62년 6월 어느 날 강릉고등학교에 2급 정교사로 부임하니 그 곳 선생님 중의 한 분 왈 "혁명학사 이시니 한번 잘 해봅시다"였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그 분은 "학사고시를 통과한 사람이니 제대로 된 학사일거 아니오?"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혁명학사인 것을 알았지만 그 분이 그런 말을 한 참뜻은 헤아리지 못했다.
당시 강릉고등학교는 강릉사범학교가 없어지면서 생긴 것으로 3학년은 아직 사범학교 학생이고
2학년은 없고 1학년만이 강릉고등학교 학생이었으므로 생물학 강의 시간은 일주일에 서너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 해는 또 유난히도 가물었던 터라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우물파기 작업에 학생들이 거의 매일 동원되었으며 그때마다 강의시간이 적은 내가 인솔교사의 한 사람으로 예외없이 차출되었다.
그런 어느날 경포대 근방에서 우물파기 작업을 하던 중인데 시커멓게 생긴 인사 몇 명이 나타나더니 학생들을 집합시키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고있던 내가 다가가서 알아보니 그 중의 한 사람이 강릉시장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군정때라 해병대 현역 장성이 강릉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아글씨 이분이 우리 학생들에게 우로 나란히 ! 바로! 열중쉬어!를 계속하더니 “학생들 ! 일이란 효과적으로 해야되는 것인데, 여러분은 지금 일하고 있는건지 놀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라”고 일갈을 한 다음 옆에 서있는 나는 본척도 하지않은채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나는 학생들에게 작업중단을 명하고 각반 대항 씨름시합을 시켰다.
한 시간쯤 지난 후 시장일행이 다시 나타나 왜 작업을 중단시켰느냐고 하길래 학생들이 기계가 아니니까 효과적으로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휴식도 필요하고 오락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대답한 후 계속해서 쏘아 부치기를 군대에는 계통도 없는지 모르지만 당신 보기에 일하는 것이
시원치 않다면 인솔교사에게 협의 할 것이지 어찌하여 당신이 직접 학생들을 집합 시켰느냐 ? 멀리서 볼 때 당신이 우리학교 학도호국단 대대장안줄 알았다고 했더니 멀쑥해져서 그냥 가버렸다.
이런일이 있은 다음 학교에 돌아와보니 미리 소문을 듣고 있던 교장선생께서 왜 시장과 쓸데없는 충돌을 했느냐고 나무라면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전에 나에게 혁명학사라는 말을 했던 그 분은 “무식한 인사들과의 투쟁이 해결될 수 있다면 공산당과의 싸움 같은 것은 문제도 아니야”라고 내 뱉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그 분이 학사고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 그 참뜻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내게 온 등기우편 하나가 있었는데 열어보니 징집영장이었다. 결국 강릉에 부임하여 생물학 강의도 몇 시간 해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으며 따라서 강릉에 대한 나의 추억은 혁명학사의 만용밖에는 말 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위복 이라할까, 약 2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등학교 정교사로 재직한 덕택에 단기복무 (00군번) 혜택의 거의 마지막 챤스를 잡을 수 있었다.
핑크빛 호수물
1963년 여름 군에서 제대한 후 충청도 고향에서 과수원 일을 거들고 있던 중 이번에는 속초중학교 과학교사 발령장이 날아왔다.
서울에 들려 최X철 교수님을 만나뵈었더니 “호소학”이라는 일본책을 한권 주시면서 동해안에는 호수가 많으니 육수학 연구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육수학 이라는 말을 들은 바는 있지만 내용도 모르고 공부해 본 적도 없는 판에 어떻게 연구를 하겠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속초를 부임한 다음날 근교를 둘러보다가 영랑호에 다달았다.
우선 그 면적의 광활함에 놀랐고, 무엇보다도 석양의 설악산(울산암) 그림자가 호수위에 드리워져 있는 그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고 말았다.
다음 순간 이 아름다운 호수위에 배를 타고 다니며 연구를 한다면 얼마나 로맨틱할까 하고 생각하니 흥분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속초시청에 들러 영랑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넓이가 약 10만평 정도라는 것 이외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 호수의 내부 구조를 내 손으로 밝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1/50,000 지도상에 50m 간격으로 호수면을 수백 구획(정확한 숫자는 잊었음)으로 등분한 후 군에서 배웠던 독도법 지식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다니면서 각 구획의 수심을 측정하였다.
수심 측정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이론 줄 끝에 납추를 달아 드리운 후 그 길이를 재는 것이었는데, 토요일, 일요일과 공휴일을 모두 바쳐 3개월 이상이나 학생들과 함께 씨름한 끝에 완성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영랑호의 내부 구조를 가장 소상히 아는 사나이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학교에 과학실을 하나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는데, 시골의 작은 학교인지라 예산이 많을리 없고 따라서 학생들을 족쳐서 매일 빈병 수집을 시켜 좋은 것은 씻어서 시약병으로 쓰고, 나쁜것은 팔아서 시약 사는데 보태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날뛰니 교장선생님도 감복했는지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치해 주었다. 그래서 처음 부임 했을때는
실험기구라고는 뚜껑없는 알코올램프 두개 밖에 없었지만 반년쯤 지난 뒤에는 비교적 훌륭하게 갖추어진 실험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기본적인 준비를 모두 끝낸 후 본격적으로 육수학 연구를 시작 하였다.
우선 처음 일년 동안은 호수내에 설정된 몇 군데 조사지점에서 수심에 따른 수온,비중,salinity,
Na,K,Cl,pH,용존산소량 등의 변화를 매달 측정하여 이 호수의 화학적 성상과 그 년중 변화를 철저히 밝히려고 달려들었다.이 중 특히 pH및 용존산소량은 채수 후 시간이 지나면 변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호숫가에 설치된 텐트속이나 남의 집 마루에 뷰렛을 설치해 놓고 측정하곤 하였는데, 생각하면 로맨틱할 것 같지만 추운 겨울날에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다.
겨울에는 무엇 보다도 채수 자체가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아주 추워서 얼음이 두껍게 얼 때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어설프게 얼어 있을때는 채수지점까지 가기가 힘들었다.
이럴 때는 보통 긴 사다리 가운데에 몸을 끼우고 사다리를 수평으로 든 채 얼음위를 걸어가 만약의 경우 얼음이 깨어지더라도 몸이 사다리에 걸쳐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월 측정일이 기다려지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때로는 책에서 읽은 사실을 재발견 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있었으며 때로는 전연 예측치 못했던 현상이 나타나 가슴 설레일 때도 있었다.
한가지만 소개한다면 11월 어느 날 표층으로부터 1m 간격으로 채수를 하던중 수심 4m 이하의
물은 모두 밝은 핑크빛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깜짝 놀라 장소를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채수해 보았으나 모두 같은 현상이었다.
이 물의 비중,염도,Cl 농도 등은 모두 전과 같았으나 pH및 용존 산소량은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그 핑크빛 물을 병에 담아 가지고 오면서 호숫가에 사는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런거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들고와 선생님들께 보여 주었더니 아무도 믿을려고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교장선생께서는 요사이 박선생이 학생들과 산-염기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지시약을 넣어 그렇게 만든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현상은 다음해 3,4월 까지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라진 다음 겨울이 되면 다시 나타났다. 이 핑크빛 물의 정체를 몰라 나는 몇 개월 동안 고생하였다.서울에 올라와 사대,문리대 등을 돌아다니며 물어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물을 병에 담아 며칠 놓아두면 점차 그 색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 혹시 어떤 생물이 일시적으로 번창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하였더니 마치 저 배율로 혈액의 적혈구를 볼 때처럼 동일한 크기의 작고 둥근 물체가 시야에 꽉 차 있지 않겠는가. 며칠 후 색깔이 없어진 다음 관찰하였더니 그 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로서 이것이 박테리아와 같은 생물체인 것으로 짐작했지만 그것이 어떤 생물체인지 또 왜 겨울에만 발생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로 사온 limnology 책을 읽다가 노르웨이 연안의 석호에서 내가 본 것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며 그 원인은 일시적으로 sulfur purple bacteria가 대량 번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영랑호는 석호로서 그 동쪽 끝이 바다에 면해 있는데 보통은 모래톱에 의해 막혀 있지만 가을 추수가 끝나면 호수 주위의 논에 물을 대지 않기 때문에 호수로 유입되는 하천수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수면이 점차 높아져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호구가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 무렵이 되면 북풍에 의해 바다의 파도가 거세 지므로 때로는 바닷물이 호수로 역류해 들어 올때도 있다. 실제 물 분석을 해보면 호수표면에서 1 ~ 2m 수심에서는 거의 완전한 민물이지만 그 이하에서는 Na, K, Cl, 염도, 비중 등이 차차로 증가하여 6 ~ 7 m 층에서는 바닷물의 반 정도의 농도를 보인다. 이러한 무기염류의 농도는 5m 이하층에서는 연중 거의 변화가 없지만 pH는 핑크빛을 나타낼 때는 심하게 낮아진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실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보았다. 겨울 동안 바닷물이 역류해 들어올 때 해수중의 어떤 성분(아마도 유황염류)이 호수로 들어와 밑에 쌓이면서 sulfur purple bacteria와 같은 미생물의 발육에 적당한 영양환경이 조성되므로 이들 미생물이 번창하게 되고 이들의 대사 결과 황산과 같은 산이 생성되므로 물의 Ph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러한 가설의 진위를 밝히기도 전에 속초를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영랑호는 겨울 동안 그 속에 핑크빛 물을 감추고 있으며 그 비밀을 알아낸 최초의 단군 자손이 아마도 나 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즐겁기만 하다.
다시 생리학으로
1965년 가을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일부 정리하여 “영랑호의 자연환경”이라는 제목으로 강원도 과학전시회에 출품하였다. 그 동안의 연구 내용은 모두 물리학적, 화학적인 면이었고 이를 기초로 수행할 생물학적 연구(호수 총생산량의 연중변화 등)는 다음해의 프로젝트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미완성 연구 결과를 출품하는 것이 싫었으나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할 수없이 출품하였는데, 가 보니 최X철 교수님께서 심사위원장으로 와 계셨다.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 드리기를 “실은 제가 이 연구를 완성하여 내년도 전국 과학전시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싶으니 금년도에는 혹시 우수작으로 평가되더라도 낙방시켜 주십시오”했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상 받지 않을려고 빽쓰고 다니는 놈 처음 보겠네”라고 하셨다.
결국 “특상”을 받게 되었지만 선생님께서 귀띰해 주시기를 심사위원회에서 “최고상”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최고상 작품은 반드시 중앙전시회에 출품해야 되므로 특상으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아무튼 사기충천하여 속초로 돌아와 다음 연구를 위해 준비하면서 학교로부터 특별 예산까지 약속 받아 놓은 다음 경복궁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과학전시회 관람차 상경하였다.
간 길에 그동안 호수물의 Na, K 분석에 도움을 주었던 윤X애 동문(당시 연세의대 생리학교실 조교근무)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홍X기 교수님께 인사도 드릴 겸 연세대에 갔더니 홍교수님께서 하시는 첫마디 말씀이 “자네는 언제까지 강원도에서 놀고만 있을건가 ?”였다.
그 동안 했던 일을 말씀드리고 일년정도 영랑호 연구를 더하고 돌아 오겠다고 했더니 그것도 좋은 일 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생리학을 할 거라면 당장 짐을 싸가지고 올라오라는 말씀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그 곳 신장생리 part에서 일하던 조교 한사람이 곧 군에 입대하게 될 것 같아 그 후임자를 물색 중 이었다한다. 한달 내로 결정 하겠다고 말씀 드린후 즉시 속초에 내려와 교장선생님과 상의 하였더니 의외에도 교장 선생님 말씀이 “박선생은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빨리 올라 가시요”였다. 김석래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만일 그 때 그분이 “지금은 학기 중이고 또 학교에서 당신 연구에 온갖 지원을 다 했는데 중도에서 그만두면 되겠오?”라고 하셨다면 아마도 떠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강원도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나는 1965년 10월 초 내 젊음을 바쳐 일하던 핑크빛 호수와 동해바다와 설악산과의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돌이켜 보면 속초에서의 2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로서 연구를 통해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케 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 후의 내 연구생활에 많은 정신적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7년 동안은 생리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변변한 학자가 되지 못했으니 내심 한심한 생각까지 든다. 우리가 졸업 50주년 기념 회고록을 낼 때는 멋있는 생리학자의 라프소디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1.김헌기(010-9036-4096)
2.채영호(속초)
3.강태환(서울)
4.강석현(속초)
5.김봉중(속초)
6.김지윤(속초)
7.장학성(부평)
8.최순학(부산)
9.김일한(서울)
첫댓글 김헌기 (010-5233-4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