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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학번 맹수호가 자신들의 이야기가 간략히 기술된 것을 보고
수정본을 보내 왔습니다.
이로써, 대학Y제1기의 역사는 클럽사 중에서도 가장 완결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겠지만 학생운동의 경험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Y가 학생운동권과 지역운동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들과
끝내 해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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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Y 제1기(1982 ~ 1990)
1. 대학Y의 설립(1982년)
부천YMCA가 1982년 4월 17일 창립총회를 준비하면서, 권순성(3학년), 염희숙, 김원주, 이현순, 황희양(이상 2학년), 하영상, 이용근(이상 1학년) 등의 대학생들이 창립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주로 부천 지역 교회 출신들로서 수도권 소재 각 대학에 다니던 1 ~ 3학년 학생들이었다. 부천Y는 창립회원들 및 창립총회와 대학Y 모임에 참석한 김동섭, 천용(이상 2학년) 등 10여명을 묶어 ‘가칭’ 대학Y라 칭하였다. 권순성이 회장을 맡아, 염범석 총무, 성수열 간사의 지도로 씽어롱, 독서토론, 인간관계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으나 권순성은 한 달여만에 대학Y를 그만 두었다.
대학Y의 가입회원이 계속 늘어 5월 말에는 20여명에 이르러 대학Y가 정식으로 창립되어, 김동섭이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김동섭은 대학 및 인천지역 이념써클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있었고, 이용근은 부천 친척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YMBA(불교청년회)를 만들기 위하여 YMCA에 가입하였노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하였다.
김동섭은 가을부터 1학년 이용근, 맹주호, 신현훈 등과 사회과학 공부를 주로 하는 청맥(靑脈, 정기 간행물 ‘갈무리’ 발간, 클럽장 김동섭)을 창립하였고, 다른 창립회원들 및 이경숙, 한은옥 등 2학년이 주축이 되어 한얼(독서토론, 클럽장 천용, 2학년)이 창립되면서 대학Y 연합회로 통칭하게 되었다. 청맥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한 82학번이 2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에 새로 맞이할 신입생 재생산을 염두에 두고 청맥과 초리(마당극, 클럽장 장소자, 2학년)로 분화하였고(장회장은 인천 지역 써클에서 추천받았다), YMCA의 청년, 성인 대상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레크리에이션 클럽(클럽장 오희창, 2학년)도 창립되었다.
청맥과 초리는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서적들을 매주 세미나 형식으로 함께 공부하였는데, 해방전후사의 인식, 민족경제론 등 한국 사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지평을 넓히기 위한 책, 철학에세이, 변증법적유물론, 세계철학사, 서양경제사론 등 철학적 사유를 넓히기 위한 책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2. 부천YMCA와 학생운동의 접목(1983년)
한국 YMCA 연맹은 1980년부터 매년 ‘전국 YMCA 대학생클럽 임원 수련회’를 갖는 등,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 흐름을 수용하려고 하였으나, 클럽 스스로 자생력이 갖추어지지 않는 한 지도자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1980년대 상반기 대학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던 학생운동권은 교회, 시민사회단체 등지로 진출하였다. 이런 흐름에 따라 학생운동권의 일부가 부천Y에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대학Y는 ‘피난처’로만 여기고 단체와 동떨어져 활동하던 다른 학생들과는 참여 및 활동 방식이 달랐다. 염범석 부천Y 초대 총무와 성수열 간사는 학생운동권에 호의적이었으나 교회에서 학생 지도 경험만 있었을 뿐이고, 학생운동 경험은 없었다. 실무지도자들은 대학Y 연합회에 지도력이 부족한 한얼, 레크레이션 클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저만치’ 가버린 청맥, 초리와 길이 달라 조화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Y가 주관하는 행사는 물론이고, 대학Y의 운동권 성향 행사에도 함께 참여하였으니 특기할만한 일이다. 대학Y 연합회는 1983. 3. 17. 부천중앙교회(현 기둥교회)에서 마당극 ‘예수전’을 공연하고, 1983. 7. 말 경북 예천군 호명면에서 농촌활동을 전개하였고, 대성리, 강촌 등지로 MT도 갔는데, 대학Y의 운동권, 비운동권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반면, 한얼과 레크레이션 클럽 등 비운동권 클럽은 지도력 부재로 인하여 예천 농촌활동을 끝으로 와해의 길을 걸었다. 1983. 10. 27. 마당극 공연 ‘토끼풀이’는 주로 초리 회원들이 주축이 되었고, 연말까지 청맥과 초리만 남게 되었다. 대학Y는 1983년부터 인천지역의 학생운동 연합인 ‘갈매기’와 연계되면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3. 1980년대의 학생운동
여기서, 대학Y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을 대략 살펴보겠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1960년 4.19로 시작되어 6.3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거쳐 1970년대에 유신 반대 운동으로 지속되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 분신 사건, YH 사건 등을 거치면서 민중의 삶에 점차 관심이 쏠리고,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반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중심 세력은 1981년 이른 바 무학 논쟁을 하면서 ‘반제반파쇼 투쟁’을 선언하였고(무림사건),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전민학련, 일명 학림사건)이 있었으며, 1982년 깃발 사건, 1985년 삼민투 사건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특히 삼민투는 민족, 민주, 민중의 이념을 내세워 이후 학생운동의 대세가 되었다. 1986년경부터 학생운동권은 한국 사회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우선 순위 등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자민투와 민민투로 양분되어, 자민투는 NL로, 민민투는 PD, ND 등으로 계승되었다. 자민투 계열은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거쳐 전대협(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을 결성하였고, 민민투 계열은 공장 등 현장 활동으로 나아갔다.
한편, 전두환 정권의 부분적 해금조처에 따라 이민우 총재가 종로에서 당선되어 신민당을 재건하고, 신민당은 1986년 2월부터 직선제 개헌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30만명이 운집한 광주 대회에서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나타났고, 10만명이 모인 대구 대회에서 민통련의 플래카드가 등장하고 신민당과 별도의 군중대회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민당은 4월 말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며 결별을 선언하였고, 이에 분개한 재야와 운동권은, 5.3 인천 대회가 열린 시민회관 앞 거리에서 수만명이 운집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여 대회를 무산시켰다. 시위대는 신민당의 각성을 촉구하고 이원집정 개헌 반대, 국민헌법 제정,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후 1987년 6월 전개된 직선제 개헌 투쟁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4. 대학Y의 정립(1984년)
1984년 대학에 학원자율화 조치가 시행되어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하면서 학내 집회, 시위는 자유롭게 되었고, 가을 학기에 어용 학생회인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가 재건되는 등 대학내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단체에 피난 와있던 대학생 상당수는 대학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부천YMCA 대학Y의 청맥, 초리는 그 후에도 6년여 동안 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1984. 2. 부임한 황주석 부천Y 2대 총무 등 실무지도력이 학생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원을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주석 총무는 신현훈, 손영철 등 대학Y 회원들을 지도자로 하여 부천Y내에서 풍물강습을 하도록 하였고, 풍물강습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학교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나중에 전교조로 발전한 부천지역 중등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82학번 이용근은 당시 한국판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던 학생출신의 노동현장 진출을 모색하기 위해 1984년 3월 휴학한 후, 70년대말 노동운동의 경험을 했던 황주석 총무와 상의하고 부천 삼정공단에 취업하여 공장 생활을 체험하였다. 이용근은 군복무를 마친 후에도 복학하지 않고 노동운동에 매진하였다.
대학Y 산하 청맥과 초리는 각자 신입생을 독자적으로 모집하는 등 단위 클럽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984년 중반에 해방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베개’ 클럽이 결성되었지만 1년여의 활동 끝에 초리에 편입되었다. 청맥과 초리는 운동권 서적으로 공부하는 학습 세미나는 따로 가지고, 회원간 동질성 강화를 위한 멤버쉽 훈련 등은 함께 하였다.
초리는 마당굿 공연 등 대중과 접촉하는데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회원들은 사물놀이를 익히는 등 개인 기량을 연마하였고 소사동 성당과 석왕사 등지에서 공연을 하였다.
전국 YMCA 대학생클럽 임원수련회를 참가하는 등 전국 대학생들과 교류를 한 것도 연합회 차원의 활동이었다. 또한 각 대학의 총학생회 또는 총학생회 연합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학내외 집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연합회 차원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5. 지역 공장활동으로의 발전(1985년)
기본적 대학Y활동은 1984년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어 세미나, 멤버쉽 강화 훈련, 갈무리 발간, 사물놀이, 마당굿 공연이 지속되었다.
대학Y연합회 차원에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세 번째 농촌활동으로 1984년에도 갔었던 홍성에 갔지만 상황은 전년도와 달랐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소위 농민들을 의식화시킨다는 판단 아래 전국의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을 마치 불법인 양 탄압하였다. 이들은 말단 공무원과 이장을 통해 농촌마을에 대학생들이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는 방법을 썼다. 대학Y는 YMCA라는 단체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활동을 하기로 한 마을에 진입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다음날 마을 주민들의 태도가 돌변하여 농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당시 농활대장이던 83학번 김지태 대학Y연합회장의 고향인 안면도로 활동지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안면도의 모래밭, 해변에 있는 해송 등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
대학가는 전국 단위의 대학생 연합조직이 결성되고 각종 투쟁위원회가 조직되어 반독재민주화투쟁 열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Y는 82, 83학번 등 선배들이 군대 문제 등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대학Y 회원들은 경인 지역의 여러 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학 내 써클에 가입하지 않고 대학Y 활동만을 하였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주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독자적으로 이슈를 제기하고 실행할 역량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82학번 신현훈은 이용근처럼 대학에 등록하지 않고 1985년 중반경에 인천 주안공단에서 공장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때에 신현훈의 지도로 대학Y 자체 역량을 강화하고 외연을 확대하고자 대학Y와는 별개로 활동하는 지역 써클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대학Y 회원이 중심이 되어 지역 써클을 조직하고, 인하대, 인천대의 학내 써클, 인천지역의 지역 써클과 교류를 모색하였다. 그 결과 인하대 탈춤반과 집회·시위에 함께 참가하게 되었고, 이후 공장 등지에서 현장활동을 함께 하는 등 조직적으로 결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만으로 대학Y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즉, 대학 이후의 활동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는 대학Y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지속적 운동을 하기 위해서 지역운동체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대학Y는 현장 활동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기, 길게 보고 운동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배양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985년 말에는 83학번 전미숙의 지도 아래 84, 85학번이 부천 공단지역에서 공장활동(이른바 ‘위장 취업’)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천, 부천의 노동운동 세력과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여러 연고를 통하여 지역 노동운동 단체와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장활동 중심 성향으로 보아 당시 학생운동 계열 분류로 본다면 PD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부천 지역에는 많은 공장들이 있었고, 많은 활동가들이 각 공장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6. 현장활동의 강화, 5.3 인천투쟁 참여(1986년)
1986년에는 84, 85학번이 중심이 되어 신입생을 모집하고 세미나, 탈춤 연습 등을 진행하는 등 기본적 활동은 전년도와 대동소이 하였다.
대학Y는 당시 인천지역의 대표적 투쟁인 5.3 투쟁에 신입생인 86학번들을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회원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현장 지원의 일환으로 부평, 부천 공단지역에 유인물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즈음에 주안공단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학Y 선배의 소개로 인천·부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과 결합하게 되었다. 대학Y는 이들과 운동세력으로서 발전 방향 및 개인의 운동지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 결과 대학Y는 현장조직과 적극적으로 결합하기로 하고, 현장지향성을 갖고 있었던 84학번 5명(남3, 여2)은 198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현장활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합숙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선배의 지도 아래 남한 사회의 모순과 그 해결책(소위 사구체 논쟁), 사적 유물론 등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학습과 현장활동 요령 등을 습득하였다. 그 후 이들은 대부분 1987년초부터 부천의 삼정공단 등지에서 공장활동을 시작하였고, 일부는 학습지도역량으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대학Y는 여건상 현장을 갈 수 없었던 84학번과 85학번이 지도하게 되었고, 현장활동팀들과도 정기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대학Y 회원들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유인물 배포 등 현장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6년말 85학번 중 일부가 84학번이 다니고 있던 삼정공단 등지에서 공장활동을 하였다.
7. 직선제 개헌 투쟁과 노동자대투쟁(1987년)
1987년 초, 대학Y를 지도할 일부 역량을 제외하고 85학번 5, 6인이 공장활동을 결의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학습을 시작하였다. 합숙을 하면서 이전과 같은 커리큘럼으로 공부하였는데, 5월초경 학습 근거지가 경찰에게 급습당하여 지도하던 84학번 1명과 85학번 4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87년 대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6.29 선언이 있고 나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85학번 중 일부는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고, 일부는 현장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학Y는 역할 분담에 따라 대학Y를 지도하는 85학번 일부와 86학번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1987년 5, 6월 사이의 민주화 대투쟁기에 대학Y 회원들은 부천, 부평지역의 집회,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가하여 투쟁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벌어진 7~9월 노동자 대투쟁기에는 부천의 공단지역은 물론 부평, 주안 공단지역에 이르기까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부천지역에서 파업하는 공장에는 85, 86학번들을 중심으로 규찰을 서는 등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8.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체성 찾기(1988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 결성 등 노동현장에서 자기완결구조가 갖추어지게 되자, 노동운동 지원 세력으로 남아 있던 대학Y도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전국연맹이나 부천 YMCA도 노동 현장 중심을 지향하는 대학Y에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 대학Y를 지도하게 된 86학번들은 부천Y의 총무, 간사들과 협의하여 후배들을 고교 동문이나 교회 등 인맥을 통해 모집하던 방식에서 ‘예비대학’이라는 공개 교육을 통해 모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예비대학’의 프로그램은 대학가나 사회의 개혁적 인사들을 모시고 역사․사회․문화 등 인문학 강좌를 가지고, 초리(탈춤)․소리터(노래패)․청맥(사회과학연구)의 동아리 활동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학Y의 지도는 인천․부천지역 PD계열의 통합지도방식으로 변화하고, 인하대와 연계활동이 강화된다.
여름방학에 노동 현장을 지원하느라 부족했던 문화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청평으로 대학Y(초리․소리터), 인하대(탈반․공대문화마당․노래패) 문화패와 연합수련회를 가게 된다. 여기에서 새로운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있던 83학번 손영철과 인하대 탈반 예비역들의 지도로 집체극의 제작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 후 부천․인천 지역 파업 현장 답사를 통해 집체극 ‘청사’를 5개 문화패가 연합 제작하여 인하대와 부천 삼정성당에서 공연하였다. 집체극 제작과정에서 새로운 문화단체의 설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인하대 학생회장선거와 겹치면서 공연 성과가 좋지 않아 무산되었다.
1988년 하반기에는 인천지역 문화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던 86학번 강원범의 지도로 소리터의 역량 강화가 이루어졌고, 대학Y(YB/OB) 연합모임에서 노래극 ‘노동의 새벽’을 공연하였고, 지역의 다양한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을 하게 된다.
이처럼 대학Y는 1988년에 노동운동 중심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환하여, 지역 문화운동의 중심체로서의 역할과 학생으로서 노동, 환경, 지역복지 등 지역사회연구라는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9. 대학Y의 해체(1989년 ~ 1990년)
1989년이 되자, 전년도 대학Y 활동 성과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대학Y와 황주석 총무, 간사들이 서로 논의하여 활동 방향을 설정하였다. 예비대학을 확대하고, 기존의 사회과학 중심 세미나를 월 정기 오픈강좌로서 부천Y 회원과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동아리 학습도 지속하여 문화동아리(초리․소리터)는 공연제작 관련 학습을, 사회과학동아리(청맥)는 지역조사 관련 전문 지식 습득 방식으로 전환하여 대중성과 전문성을 갖추려고 하였다. 86학번은 지역의 노동운동 지원 문화단체인 ‘그루터기’에서 활동하고, 87학번이 중심지도력이 되어 대학Y를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87학번들의 갑작스런 사고로 지도력의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어, 노동현장 활동을 하던 선배들이 대학Y를 지도하게 되면서 1988년에 설정된 대학Y의 노선은 백지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학Y는 부천Y의 지도부와 마찰을 빗다가 결국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0. 해체 이후의 활동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운동의 중심이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으로 변화하면서 대학Y는 1990년경에 이르러 활동이 중단되어 해체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경까지 대학Y를 거친 88, 89학번 중 일부는 계속하여 노동, 문화 활동과 결합하였다.
대학Y 출신들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였다. 일부는 노동ㆍ사회운동을 아예 직업으로 삼아 민주노총, 진보정치(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하거나, YMCA 활동가, 문화활동가 등으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청년Y 등에 참여하였다.
대학Y 출신 60여명은 1990년대 후반부터 ‘Y-OB’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서 각자의 소식과 의견을 집단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연락이 닿는 40여명은 1년에도 여러 차례 정기, 부정기적 모임을 가지고 있다.
[Y-OB 명단]
[81학번] 김동섭
[82학번] 이용근, 신현훈, 맹주호
[83학번] 이강인, 김채순, 김지태, 손영철, 전미숙, 이복열, 이부용
[84학번] 이진국, 김형태, 박강준, 최용환, 박은영, 윤선미,
[85학번] 장현옥, 이은복, 박양희, 김애진, 윤정숙, 손미승
[86학번] 김태훈, 박선영, 맹수호, 민길양, 김이화, 정수웅, 이범진, 이애경, 장은하
[87학번] 김형건, 강정화, 양영관, 최부섭, 홍혜숙, 배미영, 박민수, 염상섭, 최승삼
[88학번] 김정훈, 정윤정, 이승우, 공지숙, 서동수, 김종국, 정철호, 박옥수, 윤진희, 이성권, 이승윤
[89학번] 신익선, 김종하, 한윤철, 유경희, 장철현, 이규환, 강재구, 배재희
[90학번] 이현주
첫댓글 본문의 전체 편집까지 완벽하게 끝내셨네요 ^^ 대학Y 1기는 보내주신 원고 그대로 싣겠습니다, 이사장님! 다른 클럽과 균형을 어찌 맞춰야 할지가 고민이 되긴합니다만...현재로선 완성해주신 그 열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