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즐거움]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와
김승희 詩集 ‘달걀속의 生’
-일체의 저서 중에서 나는 다만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남의 피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독서하는데 있어 게으른 자를
증오한다. <짜라투스트라 제1부 「독서와 저작」 中>에서>
朴 水 鎭(시인)
나는, 한밤에, 일어나, / 촛불 아래서
짜라투스트라를 읽네.
이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나는, 오늘도, / 한밤중에 일어나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있네.
이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어제도 / 오늘도
나는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아마 / 내일도 / 난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있으리.
이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나는 왜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있나.
닭장만한 새장 / 아니
이 새장만한 닭장 속에서
왜 보통사람들은 / 금서도 아닌
짜라투스트라를 읽지 않나.
짜라투스트라를 읽지 않고도
어떻게 저렇게 제 정신을 가지고
달캉살캉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나.
- 詩, ’짜라투스트라’
철학자 B.파스칼은, 아무리 王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면 불행에 빠진다고 말했듯이 일과 놀이와 여행으로 그럭저럭 행복을 느끼는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짜라투스트라를 읽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랜 명상 끝에 빛을 발견한 초인의 가르침인 짜라투스트라를 우리는 읽고 또 읽으며 살 필요가 있다. 비록 그것이 더 고독하고 불행해지는 길이 될지라도 ......
읽기의즐거움/1
로마에서 만난 혼자 사랑하게 된 재기발랄한 젊은 여인 루 살로메, 서른 일곱의 나이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실연의 상처 때문에 몇 차례나 죽음을 생각한 끝에 다시 일어난 니이체는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짜라투스트라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대철학자요 시인이었던 니이체 역시 범속한 우리네가 겪는 아픔과 다를 바 없는 경험을 하며 그 결과의 산물이 짜라투스트라라는데 정이 가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약 3년여에 걸쳐 저술한 그야말로 피의 소산이요 니이체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짜라투스트라를 단 몇 일만에 읽어낸다는 것은 참 힘들기도 하려니와 참으로 무성의하고 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복의 염천을 이기기 위한 그럴 듯한 동기를 앞세워 무겁고 미안한 마음을 누르며 짜라투스트라를 만나러 떠나고자 한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독과 명상으로 보낸 10년, 드디어 짜라투스트라는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친다. “大地에 충실하여라. 天上의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말라. 복은 죽었다.” 짜라투스트라, 그는 인간을 위해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온 프로메테우스나 신의 권위에 맞서며 인간의 지례로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아하스페르츠와 같이 분명 인간의 편에 서 있는 존재이다. 내세를 약속하는 댓가로 현실을 희생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그는 통렬히 공박한다. 한 번 뿐인 삶은 그 자체로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따라서 인생을 어떤 사상이나 권력의 희생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외침에 가슴이 뛴다. 그런 한편으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육체를 처참하게 하는 적지 않은 수도자들의 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도 함게 생각해 보았다. 약간의 어지럼을 느끼며.
창세기의 현기증처럼
나, / 언제나, / 어지러웠어.
(중략)
결박이 아무데서도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새는 알속에 머무르지 못하는가?
아니 / 알의 결박이 없었다면
새는 어찌하여며 날개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 詩, ‘아프락사스.5’
궁금증을 묻어둔 채 여행을 계속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러 인간의 유형들 중에서 특히 ‘행위 하기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을 던지고, 또한 약속한 것보다도 더욱 많은 것을 지키는 자’라는 대목에 진하게 밑줄을 그어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설(序設)이라 이름 지은 최초의 말 끝부분 중 마지막 인간에 대한 예언은 마치 성경이 요한
읽기의 즐거움/2
계시록처럼 섬뜩한 데가 있어 한동안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영리하며 세계에 일어난 일체의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투지만 곧 화목하게도 된다. 그들은 낮에도 얼마간의 쾌락을 갖고 저녁에도 얼마간의 쾌락을 갖는다. 또 그들은 건강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다.”
혜안이었을까, 영감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컴퓨터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벼룩처럼 작아진 모습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짜라투스트라는 이어서 말한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최후에는 어린아이가 된다고. 낙타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수명과 같은 중압이며 그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라고 했다. 어쩌면 그곳은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의 의미와 상통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다음 단계의 사자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로 참으로 맹수라야 할 수 있는 무서운 취득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순진과 망각이고 발단이며 유희로써 성스러운 긍정의 단계를 말한다. 철학자도 과학자도 예술가도 진정한 자기완성을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를 되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는 뜻이리라.
해인이와 왕인이가
내 등 위에 올라타 있다.
엄마는 낙타
목이 말라도 몸이 아파도
뜨거운 모래 위를
무거운 짐으 f지고도 걸어가야만 한다.
<중 략>
나는 힘센 쌍봉낙타가 되어
뜨거운 사막 속을 가고 있다.
다락처럼 무거워도 / 야근처럼 피곤해도
엄마는 낙타
쌍봉낙타는 더 힘이 세다.
- 詩, ‘쌍봉낙타’
짜라투스트라는 철저한 아나키스트이다. 모두가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를 상실하는 곳이 국가라고 정의한다. 전제와 독재국가, 우리의 과거사와 아직도 존재하는 몇몇 나라들에서 우리는 그 예를 생생히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끝나는 곳에서 무지개와 초인에의 교량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는 가르친다. 이웃에의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연애는 많고도 짧은 어리석음이며 결혼은 창조하는 자보다 더욱 높은 한 사람을 창조하는 두사람의 의지라고. 또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는 떠나야 할 때를 알아 그 명성
읽기의 즐거움/3
과 이별해야 하며 음식도 가장 맛있을 때먹기를 그만 하라는 힘든 훈계를 우리네 범인들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러나 떠날 때에 떠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되는 추한 모습을,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 탓에 건강을 헤치고 빨리 죽음에 이르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2부에서 자라투스트라는 더욱 강한 톤으로 신을 부정한다.
성직자들의 그릇된 가치와 망상의 말, 이것을 죽어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괴물로 보고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두뇌 이 양자가 서로 합하는 곳에 열풍이 일고 <구세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천민의 등급을 권력의 천민, 학문하는 천민, 쾌락의 천민으로 나누고 그들을 초월하여 독수리의 이웃사람, 눈의 이웃사람, 태양의 이웃사람 되기를 권한다. 또한 그 스스로도 을 대신하여 저지로 향하는 열풍이 되고자 하였다.
자기의 정의에 대하여 말이 많은 모든 자를 믿지 말라.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권력 뿐이다. 그는 바로 독거미 타란텔라에 다름 아니다. 정의라는 말의 배후에는 복수와 살의가 번뜩인다. 초인의 말은 놀랍다. 우리는 이미 정의의 미명아래 피흘리던 80년대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거리를 내려간다.
거리의 모퉁이에 / 수족관 가게가 있다.
동포여 ...... 라고 부르면 / 무조건 눈물이 앞을 가리는
1980년대 한국인처럼
동포여 ...... 부르면서 / 수족관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나는 조금 울었다.
물고기들에 대한 동포애 때문에.
- 詩, ‘거위.2’
짜라투스트라는 우리의 살아있음 자체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나’는 투쟁이며 생성이며, 목적이며 목적과 목적의 모순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다며 극기(克己)를 가르친다. 생명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복종의 언어가 있으며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자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런데 명령은 시험과 모험을 안고 있으므로 복족보다 훨씬 어렵다는 주장도 한다.
짜라투스트라의 눈에는 학자도 시인도 가식 투성이의 인간에 불과하다 학자는 다른 사람이 사색한 사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존재로, 다만 손재주가 있고 단순한 진리를 복잡하게 얽고 짜는데 노련한 인간군으로 정의한다. 또 태엽만 감아주면 정확히 시간을 알리고 얌전학세 종을 치는 시계나 넣어준 곡식을 잘게 부수는 맷돌이나 제분기에 학자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읽기의 즐거움/4
한편 그는 시인들의 없음을 통박하며 시인의 명상을 얼마쯤의 쾌락과 권태로 격하시켜 말한다. 그는 시인들을 자신들의 물을 깊게 보이려고 스스로의 물을 흐리게 만든 중개자이며 혼합자이며 불결한 중간자로 본다. 시인의 영혼이야말로 꾸밈의 표상인 공작 중의 공작이며 허영에 들뜬 바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짜리투스트라는 현재의 시인에서 다시금 성장한 자들인 정신의 참회자가 출현하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진정 참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허영과 가식의 자신을 파멸시키는 길만이 새로이 태어나는 첩경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아, 희랍의 어느 군도처럼
햇빛이 많은 곳에서 죽고 싶다!
만다라의 원처럼 / 생명의 강물이 흐르는......
열려 있는 원 속에서
참담하리만큼 낯선, 따스한, / 잠이 되고 싶다.
-詩, ‘드라이 아이스’
2부 말미의 ‘구제’편에서 불구자들에게 남김 짜라투스트라의 말은 그가 남긴 말 중 백미로서 오래도록 기억할 가치가 있다.
“꼽추에게서 그 군살을 떼어냄은 그의 정신을 빼앗는 것과 같다.”
“장님에게 눈을 주면 그는 이 지상에서 너무도 많은 악ㅇ르 보게 될 것이다.”
“발병신을 걷게 하면 그의 배덕(背德)도 함께 걸으므로 그에게 최대의 해독을 주는 것이다.”
일찍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의 순수한 영혼에 외경심을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참으로 배신을 잘하고 거짓을 일삼는 정신의 장애자는 다름아닌 육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는 데에 우리를 숙연히 자성케 한다. 초인 자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인간사회에서 견문하였다고 말한다. 너무 적게 가진 도치된 불구자가 위인이고 천재이며 또한 우리들 자신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도 볼 수 없었으며 자신 역시 미래에의 교량 옆에 서 있는 하나의 불구자이라고 외친다.
진정 짜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곳은 바로 빛이요 자유이며 생
읽기의 즐거움/5
명과 진실과 창조적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과 악을 모두 포용할 줄 아는 지극히 인간편의 존재이다. 소속된 인간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지만 ‘조용한 시간’에는 자신을 낮추며 겸손할 줄 아는 정상 지향형 존재이다. 그는 이상의 높은 산을 목표로 부단히 정신을 연마하지만 아직은 산자락에 머물고 있는 미력한 존재라고 스스로 믿는다. 그리고 자각이 있을 때면 지혜의 태양열로 자신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하여 미련없이 인간을 떠나 명상의 적막속으로 들어간다.
짜라투스트라 1,2부를 만나는 동안 어느덧 길고 지리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이제 이쯤에서 나는 짜라투스트라와 헤어져야겠다. 초인이 남긴 숱한 가르침의 명언들, 그러나 나는 그가 남긴 황금의 말들을 말 이상으로 믿지 않으련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에. 그리고 나는 그가 떠난 ‘명상의 적막’ 속의 반대 방향인 일상속으로 들어가 평범한 인간들 소리를 들으려 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가을이 깊어갈 때쯤에 나는 또다시 초인을 그리며 다음의 싯구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 한밤에, 일어나, / 촛불 아래서 / 짜라투스트라를 읽네 / 이 보통사람들의 시대 / ~ 아마 / 내일도 / 난 / 짜라투스트라를 읽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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